<416화>
416. 저장 불가 메모리
“태화야, 미안해…….”
상호는 손을 싹싹 비볐다.
“미안하다니까……. 응? 나중에 더 좋은 거 사 줄게…….”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보트에서 내린 지 20분째. 강물에 빠뜨린 캠코더는 결국 찾지 못했다. 태화는 팔짱을 낀 채로 몸을 돌린 채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을 볼에 묻힌 채.
애가 탄 상호는 태화의 곁에 달라붙어 허리를 끌어안고 촉촉한 눈망울로 올려다보았다.
“돈까스 사줄까……?”
“…….”
“에이, 화 풀어……. 오늘 재밌게 놀러 왔잖아…….”
“…….”
그래도 태화는 입을 꾹 닫고 상호를 밀어냈다.
이만큼 화가 난 건 처음 본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서로 잘못을 하더라도 금방 풀고 넘어갔는데.
‘캠코더에 뭐 중요한 거라도 있었나……?’
조바심이 난 상호는 결국 평소의 자신이라면 절대로 쓰지 않았을 무기를 꺼냈다.
“태화야, 태화야, 이쪽 봐봐, 이쪽.”
태화가 그를 바라보았다.
상호는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 입을 열었다.
“펭…….”
“…….”
“펭펭…….”
펭귄 날개를 파닥이는 상호에게 태화의 싸늘한 눈빛이 꽂혔다.
애교까지 했는데 효과가 없나. 상호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멈출 순 없었다.
“페에엥…….”
“달라고 했잖아.”
“……펭?”
흠칫한 상호를 태화가 원망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목소리에는 울먹이는 기색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달라고 했잖아. 왜 안 줬어? 달랄 때 줬으면 빠뜨릴 일도 없었잖아.”
“그게…….”
“그 안에 뭐가 들어있었는지는 알아?”
그야 당연히 강상호와 도은호의 브이로그 아니냐, 하지만 지금 그런 말을 했다가는 태화가 더 화낼 것 같았다.
상호는 그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태화의 손을 잡기만 했다.
“미안해…….”
“됐어.”
태화가 그의 손을 떼어냈다.
“나 그냥 차에서 잘래. 쌤은 하나빛이랑 놀아.”
“아니…….”
상호는 황급히 태화의 손을 다시 잡았다.
“태화야, 선생님이 부탁할게. 같이 있어줘. 응?”
“…….”
태화는 코를 훌쩍이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낙심한 듯 터덜터덜.
그런 태화의 뒤를 상호가 쫓고, 나빛과 해련도 시무룩하고 뚱한 표정으로 따랐다.
상호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냥 빠뜨리지 말걸…….’
후회해도 늦은 일이었다.
* * *
“어쩌다 그러셨어요…….”
나빛이 한숨을 폭 쉬었다.
“거기에 미공개 영상 엄청 있었을 텐데…….”
“…….”
상호는 나빛의 손을 잡은 채로 가만히 걸었다.
토라진 태화는 당연히 제대로 놀지 못했다. 놀이기구를 타도 소리 한 번 지르지 않고, 맛있는 것을 먹어도 웃음 한 번 보여주지 않고. 붙어 다니는 나빛과 해련도 덩달아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하나…….’
그는 그보다 조금 앞서서 걷는 태화와 해련을 바라보았다.
해련은 태화를 향해 몸을 살짝 숙여서 뭐라고 조곤조곤 타이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태화의 표정은 그대로. 화가 풀릴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화가 났다기보다는 상심했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았다.
‘어떻게 달래지…….’
상호의 입에서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눈치 없이 방광이 신호를 보내왔다.
“……나빛아.”
“네?”
“나 화장실…….”
나빛의 눈이 순간 번득였다.
“같이 가 드릴게요.”
“그냥 갔다 오겠다고…….”
“악마가 있을지도 몰라요.”
“아니,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태화야, 교장선생님.”
나빛이 둘에게 손을 흔들었다.
“선생님 화장실 가고 싶으시대요.”
“그래? 내가 같이 갈까?”
“……혼자 갈 수 있어요.”
“그치만 강 선생, 지금 이 상태라면 보통 사람한테도 납치당할 것 같은걸.”
“에이, 에버월드인데…….”
상호는 손사래를 쳤다.
“그냥 저 혼자 갔다 올게요.”
“같이 가. 마침 나도 들르고 싶었어. 너희는?”
“저도 들렀다 갈래요.”
“…….”
태화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와 아이들과 해련은 화장실을 향해 걸었다. 에버월드 곳곳에 놓여 있기에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갔다 올게, 앞에서 만나.”
상호는 그렇게 말하고 남자화장실로 들어가려다가 멈칫했다.
‘……없겠지?’
그가 여기 왔다는 걸 악마들이 알 리는 없다. 그건 확실한데.
정말 재수 없게, 이 화장실 안에 평범하게 범죄를 저지르려던 악마가 숨어 있다면.
‘그러려면 얼마나 재수가 없어야 하는지…….’
그치만 확률이 0은 아니다. 0이 아닌 일은 주술로 이끌어 낼 수 있고.
그런 고민을 하는데, 태화가 짤막하게 한마디 했다.
“주변에 없어.”
“응?”
“주변에 악마 없으니까 안심하고 갔다오라고.”
“……응.”
그 말에 안심한 상호는 씩 웃어보이고 남자화장실로 들어갔다.
매표소에서부터 느껴졌던 사람의 물결은 화장실까지 밀려들어와 있었다. 소변기에도 줄, 좌변기에도 줄. 좌변기 문으로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을 보니 좌변기도 소변기 대용으로 사용 중인 모양이었다.
‘오래 걸리겠네…….’
그는 입맛을 다시고 줄에 섰다.
그래도 줄은 금방금방 줄어들어서, 머지않아 볼일을 보고 손을 씻고 화장실을 나설 수 있었다.
밖으로 나와 보니 그의 일행이 보이지 않았다.
‘저쪽도 줄이 많나.’
남자보다 더 오래 걸릴 것이다. 상호는 입맛을 다시고 벤치를 찾아 앉았다. 화장실에서 누가 나오는지 볼 수 있는 위치였다.
꽤 오래 기다렸는데도 그의 일행은 나오지 않았다.
‘변기를 만들어서 싸나…….’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상호의 고개가 자동으로 뒤를 향해 돌아갔다.
‘……음?’
선글라스를 낀 여인.
얼추 40대. 혹은 50대 초반. 스카프를 두르고 벙거지 모자를 쓴 꼴이 주변 사람들의 행색과는 달라 묘한 이질감을 들게 했다.
상호는 그 여인을 바라보며 눈을 끔뻑였다.
‘뭐지?’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그때 여인의 주머니에서 무언가 삐져나온 게 보였다.
식칼의 손잡이.
‘……!’
상호의 얼굴이 굳었다.
* * *
‘……뭐지?’
상호는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을 내려다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대체 뭐지……?’
영락없이 악마한테 죽는 줄 알았는데.
여인은 칼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상호의 손을 잡아끌기만 했다. 그 시점에서 악마가 아니라는 것까지는 쉽게 알아챌 수 있었고, 그냥 평범한 유괴범이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고, 핸드폰을 뺏거나 하지도 않고. 심지어 아이스크림까지 사주다니.
‘머리가 아픈 사람인가?’
상호는 아이스크림을 할짝거리며 고개를 기웃했다.
그나저나 아이들이 그를 찾고 있을 텐데.
‘놓아주려는 생각은 없어 보이네.’
여인의 손이 그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죽이려고 하는 것만 아니라면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는데다가 언제 돌변해서 그를 해코지하려 들지 몰랐다. 그 때문에 도와달라고 소리치지 못하는 중이고.
여인은 주머니에 칼을 넣고 다니는 인간이고.
상호는 힘없는 어린아이였다.
‘싸워서 이길 수도 있겠다만…….’
열 살배기 아이의 몸으로는 지나치게 위험한 모험이다. 그는 조용히 도움을 청할 방법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커플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너무 티나게 하면 저 사람들까지 다칠 수도 있으니까…….’
상호는 필사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눈썹이 휘날리도록.
그러자 그와 눈이 마주친 여자 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먹혔나?’
그러나 다음 순간, 커플은 상호를 너무도 쉽게 지나치고 말았다.
“오빠. 방금 애 봤어?”
“으응.”
“되게 귀엽지 않아? 아, 저런 애기 볼 때마다 빨리 애 갖고 싶어.”
“그래? 오늘 침대 한 번 뿌숴볼까?”
“꺄아악~!”
상호는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커플을 째려보았다.
‘X랄하네…….’
어쨌든 이 작전은 실패.
다음 작전을 세우려는데,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안내방송이 공원에 울렸다.
[아아, 아이를 찾습니다. 실종된 어린이를 찾습니다. 펭귄 옷을 입은 어린이 도은호 군을 데리고 있는 분께서는 가까운 직원을 찾아…….]
상호는 여인을 흘끗했다.
한번 말을 붙여 볼까. 그러나 칼을 들고 다니는 인간에게서 정상적인 반응을 기대하긴 힘들 것 같았다. 얼굴이 귀여워서 유괴했는데 목소리는 안 귀엽다고 칼을 꺼낼 수도 있는 것이고.
그래서 포기하려는데, 여인의 선글라스 너머로 서글픈 눈빛이 보였다.
“……아주머니.”
무언가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저 왜 데려오신 거예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상호는 말을 이었다.
“저 누나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가봐야 하는데…….”
여인은 그저 상호의 손을 더욱 힘있게 잡을 뿐이었다.
역시 말이 통할 사람은 아니다. 칼을 안 휘두른 것만으로 감사해야 할까. 상호는 자신보다는 아이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나빛이가 분명 엄청 울고 있을 텐데…….’
태화는 어떨까.
아직 그에게 화가 나 있을까. 그래도 쌤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다.
‘……그렇겠지?’
확신은 하지 못했지만.
그때 하늘에서 누군가가 절박하게 소리쳤다.
“쌤! 쌤 어딨어! 쌤!”
하늘을 빠르게 날아다니는 소녀. 주변을 빠르게 훑던 소녀의 고개가 상호가 있는 쪽에 고정되었다.
곧 여인과 상호의 앞에서 펑 소리가 났다.
“……쌤.”
검은 연기와 함께 태화가 나타났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손에 검은 불꽃을 두른 채.
“그거 누구야?”
눈빛에 살기가 깃들어 있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악마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나쁜 것 같진 않은 유괴범이라고 해야 할까.
상호는 살짝 웃었다.
“잘 모르겠어.”
그것만은 확실했다. 뭘 하려는지 도통 모르겠는 사람.
상호가 대답하자 태화는 성큼성큼 다가와 여인의 손에서 상호를 빼앗았다. 여인은 당황한 듯 상호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허공을 휘저을 뿐이었다.
태화가 표독한 눈으로 여인을 노려보았다.
“내 애예요. 이 유괴범아.”
무슨 일인가 싶어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상호는 자신과 태화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진땀을 흘렸다.
‘큰 오해를 산 것 같은데…….’
그때 하늘에서 금빛과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뚝 떨어졌다.
금빛은 나빛, 흰 그림자는 해련. 나빛이 금색 깃털을 흩뿌리며 달려와 상호를 덥석 끌어안았다.
연회색 눈에서 눈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선생님! 선생님……!”
“으응, 그래그래. 나빛이 울지 말고…….”
“그새를 못 참고 여자를 따라가시면 어떡해요! 으헝헝…….”
“쓰읍…….”
소태를 씹은 듯 입맛이 쓰다.
상호가 나빛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자 해련이 물었다.
“강 선생. 괜찮아?”
“네. 딱히 당한 건 없었어요.”
“다행이네.”
해련도 태화와 별반 다르지 않은 눈빛으로 여인을 노려보았다.
“그래도 신고는 해야겠지.”
또 다른 아이가 당할지도 모르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들과 경찰이 와서 여인을 데려갔다. 상호는 끌려가면서도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과 눈을 마주치다가, 어깨를 툭툭 치는 손길을 느끼고 옆을 돌아보았다.
태화가 그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으음.’
아직도 화가 난 것 같다. 그는 손을 뻗어 태화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
“……흥.”
태화는 상호를 나빛의 품에서 빼앗아 덥석 끌어안았다.
“멍청하게 유괴나 당하고 말이야. 그냥 여자라고 헤벌레 따라간 거지?”
“그건 아니야…….”
“흥. 연하는 관심 없다더니 진짜 아줌마 취향인가 보네.”
“아니라고…….”
“됐어. 바이킹이나 타러 가.”
“……응.”
둘은 뺨을 붙인 채로 놀이기구를 향해 걸어갔다.
* * *
그렇게 저녁까지 놀았다.
마지막은 불빛이 반짝이는 대관람차. 오래전에 한 번 폐쇄되었었지만 마법과 정령의 힘으로 부활한 놀이기구였다.
상호는 창밖의 땅이 서서히 낮아지는 것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마 자기 아이를 잃어버렸던 사람인 것 같아.”
맞은편에 앉은 태화가 그를 흘끗했다.
“그 아줌마?”
“응. 나한테 아이스크림을 사준 것도 그렇고…… 내 핸드폰을 뺏으려고 하지도 않았거든. 보통은 핸드폰부터 빼앗고, 그 자리를 빨리 뜨고, 나중에 부모 번호 알아내서 돈을 뜯어내잖아. 근데 그 사람은 그러지 않더라고. 그냥…… 마음이 아픈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냥 어린애랑 같이 있고 싶었다는 거야? 그게 더 변태 같은걸.”
“아니, 그거랑은 다르지…….”
상호는 당황해하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어. 어쩌면…… 이츠키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흥, 여자라서 따라간 거면서.”
“얌마…….”
“퉤.”
태화는 침 뱉는 시늉을 하고는 다리를 꼬았다.
관람차 속에는 둘뿐. 이미 다 어두워진 하늘에는 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달빛에 비친 태화의 눈빛은 아직도 차가웠다.
그래도 말을 오래 하는 것을 보니 화가 어느 정도 누그러진 모양이었다.
“태화야.”
상호는 창문 아래를 가리켰다.
5월, 꽃이 핀 정원 쪽에 형형색색의 전등이 켜져 있었다.
“예쁘지 않냐, 이야, 좀 있으면 폭죽도 터지고…….”
“그걸 캠코더로 찍었으면 좋았겠지.”
“……핸드폰 있잖아.”
“캠코더랑 비교가 돼?”
“훨씬 좋은 거 사 줄게…….”
“쌤.”
태화가 상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 안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들어 있었어.”
빨간 눈이 상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걸 제일 멋지게 찍었던 거라고. 아무리 좋은 물건을 사도 그 안에 있는 건 다시 돌아오지 않잖아.”
“돌아오지.”
상호는 웃었다.
“우리가 기억하면 꿈에서 돌아오지. 훨씬 생생하게…….”
“난 영상으로 남기고 싶다고.”
“기억으로 충분하지 않아?”
상호의 펭귄 옷 날개가 태화의 하얀 무릎에 얹혔다.
“이렇게 생각해 봐. 그 캠코더 안에 좋은 모습만 담으면, 현실에서 좀 덜떨어진 모습을 볼 때마다 실망하게 되지 않겠어?”
“난 안 그래.”
“기억이란 건 어차피 영상에 못 담아.”
캠코더의 메모리가 기억하는 것은 빛과 소리뿐. 나머지 촉각과 미각, 후각까지 남겨주진 못한다.
“그리고 제일 좋은 기억은 영상으로 남기고 싶지 않은 법이야.”
“그런 게 어딨어.”
태화가 그를 째려보았다.
“난 다 남기고 싶은데?”
“글쎄. 막상 그 순간이 오면 너도 알게 될걸.”
“아닌데? 그런 게 어딨어.”
“가르쳐줘?”
“해봐.”
상호는 태화의 무릎을 짚었다.
어른일 때였다면 앉아서도 충분했겠으나, 지금은 몸이 짧았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 태화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태화는 그의 뜻을 알아차린 듯 움찔하더니.
“……흐음.”
허리를 굽혀 고개의 높이를 낮추고, 턱을 괸 채로 상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곧 입술이 소리 없이 포개어졌다.
“그러네.”
입술이 살짝 떨어지자 태화가 중얼거렸다.
“쌤 말이 맞네.”
그리고 다시 입을 맞췄다.
상호는 입술을 떼고 태화를 바라보았다. 게슴츠레하게 뜬 붉은 눈 속에 묘한 열기가 깃들어 있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불꽃이 되어 그의 온몸을 사를 것처럼.
그는 다시 입을 맞췄다.
캠코더로는 담을 수 없는 감각이 둘의 뇌리에 켜켜이 쌓여갔다. 온기, 숨결. 입술의 촉감. 서로에 대한 감정이, 기억이. 그들의 입술에서부터 심장으로 흘러들었다.
상호는 거기까지만 하려고 했다.
‘슬슬 그만해야…….’
그래서 입술을 떼려는데, 태화가 그의 입술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뒤로 물러나면 그만큼 따라오고, 더 도망치지 못하게 손을 잡아당기고.
상호의 머리가 핑글핑글 돌았다.
‘숨막혀……!’
그는 고개를 돌려서 입술을 떼어나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태, 태화야, 그만…….”
하지만 태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나 아직 잘 모르겠어. 더 가르쳐 줘.”
“아니, 이쯤 하면 충분…….”
“아 몰라. 이리 와. 어쭈, 싫어? 해봐 그럼. 힘으로 해보자고.”
“야이……, 이거 안 놔?! 내가 너한테 힘으로 이런 적이 있어?! 이렇게 강제로 한 적이 있어?!”
“나는 땡큐인데? 누가 하지 말래? 아잇, 그만 좀 반항해. 어차피 도망칠 곳도 없다구.”
“아니……!”
“잘먹겠슴다~.”
“……우붑!”
때마침 바깥에서 폭죽이 펑펑 터졌지만, 태화는 사진을 찍기는커녕 입맞춤 삼매경이 되어 상호를 쪽쪽 빨아먹었다.
상호는 입술을 빨리며 필사적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태, 태화야. 저기 바깥에 폭죽…….”
“폭죽은 무슨 폭죽이야. 입술이나 벌려 봐.”
“……쮸아아악!”
후루룩 후루루룹 무슨 국수 먹는 소리가 관람차를 가득 채웠다.
* * *
같은 시각 바깥.
나빛은 흔들리는 관람차를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저거 왜 저렇게 흔들려요……?”
해련은 대관람차가 돌아가는 모양을 바라보았다.
“방아라도 찧는 모양이지.”
“태화 내리고 나면 저도 선생님이랑 탈래요…….”
“그럼 나도 그다음에 타야겠다.”
밤하늘에 수놓인 폭죽을 배경으로 돌아가는 대관람차.
그중 단 하나의 관람차가 눈치 없이 경박하게 덜컹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