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화>
413. TV와 커튼
눈을 뜨니 꺼진 TV가 보였다.
건흠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새벽의 희끄무레한 빛이 거실을 밝히고 있었다.
딱딱한 소파에서 자서 그런지 어깨 관절이 쑤셨다.
‘출근해야…….’
순간 건흠의 몸이 굳었다.
주방에서 야채 써는 소리가 났다. 또각, 또각. 도마에 식칼 부딪히는 소리가 일정하게 집을 울렸다.
그리고 찌개 냄새. 아마도 된장으로 추정되는.
‘뭐지?’
건흠의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이 시간에 왜 밥을 하고 있을까. 집밥도 잘 안 해주던 사람이. 심지어 어제 싸우기까지 했는데.
‘……내 밥이 아니겠지.’
그게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건흠은 다시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했다. 최대한 조용히. 발소리를 죽이고. 혹여나 아내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까봐.
그리고 식탁에 놓인 바나나를 하나 집었다.
“나 출근할게.”
“벌써?”
앞치마를 두른 아내가 그를 돌아보았다.
“아직 시간 있잖아. 아침 먹고 가지?”
“……어?”
충격을 받은 건흠은 집었던 바나나를 식탁에 다시 떨구고 말았다.
어째 목소리가 어둡지 않다. 말의 길이도 평소보다 훨씬 길었다. 마치 어제, 아니 그동안 싸웠던 적이 있느냐는 것처럼.
“……아침?”
“응. 시간 충분하잖아. 오늘 일찍 가야 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결국 건흠은 자리에 엉거주춤 앉았다.
이 시간에 집에서 밥을 먹어 본 게 얼마 만인가. 사이가 가까웠을 때도 아침은 간단히 때웠었는데.
곧 식탁에 넉넉하게 한 상이 차려졌다.
“많이 먹어.”
“…….”
오늘이 무슨 날인가.
생일은 한참 남았고, 결혼기념일은 이미 지났는데. 혼란스러워하던 건흠은 문득 딸 생각이 났다.
“유빈이는 같이 안 먹어?”
“유빈이 기숙사 갔잖아.”
“……그래?”
금시초문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그래도 손은 이미 숟가락을 들고 있었다.
한 입 먹어 보니 맛이 좋았다. 그런데도 밥이 쉽게 넘어가질 않았다. 자꾸 목이 메어서.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여보.”
“응.”
“미안해.”
“응? 뭐가?”
“당신 속이고 큰돈 쓴 거…….”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응?”
고개를 들고 눈을 끔뻑이는 건흠에게 아내가 핀잔을 날렸다.
“한참 전 일이잖아. 갑자기 그 이야기를 왜 해? 이상하네……. 당신 오늘 어디 아파?”
“아, 아니.”
건흠은 대충 얼버무리고 웃었다.
혼란스럽긴 하지만, 아내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면 되는 것이다.
“밥이…… 맛있네.”
그릇은 쉬이 비워졌다.
밥을 다 먹고 그릇을 치우려는데, 그의 아내가 무언가를 가져와 식탁에 놓았다.
석류.
“싸게 팔더라. 먹어.”
“으음.”
딱히 좋아하는 과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음식을 가리는 편도 아니었다. 이 행복을 망치고 싶지도 않았고.
건흠은 석류를 반으로 갈랐다.
“……맛있네.”
“그렇지?”
아내가 씩 웃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기시감이 들었다. 하지만 건흠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석류를 먹었다.
‘이상하게…… 맛이 좋네.’
간만에 여유로운 아침이었다.
* * *
하루가 휙 하고 지나갔다.
그냥 휙. 지나갔다는 느낌만 남기고 휙. 차창 밖으로 폭주족이 지나가는 것처럼, 잠깐 흐릿하게 스칠 뿐.
낮은 총알처럼 지나가고, 어느새 저녁이 되어 현관문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그런 나날의 연속.
건흠은 이제 웃으며 문을 열었다.
“나 왔어.”
“어서 와.”
아내도 웃으며 그를 반겼다.
시간이 약이라 했던가. 이제 둘의 사이는 신혼 때보다도 가까웠다. 남들이 보면 이 부부의 사이가 한때 얼마나 냉랭했는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건흠은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속보입니다.]
언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
[옛 동해고속도로 삼청시 부근에서 화물을 불법으로 운송하던 상인들이 몬스터의 습격을 받아…….]
익숙한 내용.
무언가 이상했다. 저 뉴스는 분명…….
[이것은 모자이크입니다.]
건흠의 몸이 움찔했다.
화면에 나오는 앵커가 건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생중계가 아닙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모자이크입니다. 생중계가 아닙니다. 생중계가 아닙니다. 생중계가 아닙…….]
“여보. 잠깐 이리 와봐.”
“어, 어어.”
건흠은 정신을 차리고 주방으로 달려갔다.
“왜?”
“이거, 간 좀 봐.”
아내가 그에게 국자를 내밀었다.
찌개를 조금 떠서 먹어보니 맛이 좋았다.
“괜찮네.”
“괜찮아? 더 끓이지 마?”
“응. 그만 끓여도 될 거 같아.”
건흠은 국자를 내려놓고 소파로 돌아왔다.
화면은 어느새 뉴스가 아니라 다른 코미디 프로그램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는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아까의 뉴스를 찾으려고 했지만, 아무리 채널을 돌려도 같은 뉴스는 나오지 않았다.
‘잘못 봤나.’
건흠은 입맛을 다시고 TV를 보았다.
그러나 건흠의 마음속 한켠에는 아직도 묘한 기시감이 남아 있었다. 마치 영화의 장면을 짜깁기하듯, 그의 인생에서 편린 하나하나를 떼어내 이어붙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뭐 어떠랴.
아내와 안 싸울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그럼 된 거지.’
그때 아내가 그를 다시 불렀다.
“여보.”
“응?”
“밥 먹고 밖에서 산책하는 거 어때?”
“좋지.”
“밥 다 됐으니까 먹자.”
“응.”
건흠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했다.
* * *
거리의 흐릿한 그림자들이 건흠을 지나쳐 갔다.
아내를 따라 산책을 나온 참이었다. 건흠은 도통 또렷해지질 않는 눈을 비비며 자신의 눈이 나쁜 것을 탓했다.
“어디로 가는 거야?”
그의 물음에 아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걷는 거야. 산책은 그런 거잖아?”
“그냥 이렇게 걷기만 하는 거야?”
“응. ……영원히.”
덧붙인 말은 너무 작아서 건흠은 듣지 못했다.
그래도 이렇게 걷기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항상 싸웠던 옛날에 비한다면.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이게 꿈이라면.
차라리 안 깨어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응?’
그때 건흠의 앞쪽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검을 찬 소녀.
‘아……?’
다혜였다.
건흠은 자신의 앞에 다가선 다혜를 내려다보며 눈을 끔뻑였다.
“다혜야? 네가 왜 여기…….”
“선생님.”
다혜가 슬픈 눈빛을 지었다.
“일어나셔야 해요.”
“…….”
“이렇게 도망쳐 봤자…… 언젠가는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어요.”
“듣지 마.”
아내가 건흠의 팔을 잡고 속삭였다.
“나와 함께라면 영원히 도망칠 수 있어.”
“불가능해요.”
다혜는 검을 뽑았다.
“후회와 망상은 다른 거예요. 망상에서 깨어나셔야 해요. 선생님이 저를 원망하신다면, 후회하신다면, 다시 실수하지 않도록 나아가야 해요. 이런 망상 속에서는 나아갈 수 없어요.”
“…….”
건흠은 이 모든 것이 꿈이었음을 깨달았다.
한낱 달콤한 꿈. 혀에 올린 설탕처럼 덧없이 사라져 버리는.
‘아…….’
그러나 인간은 달콤한 것을 원하게 만들어졌고, 그 또한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그 시절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이 완벽한 이곳에 남고 싶었다.
그때 건흠의 눈에 다혜의 검이 들어왔다.
정확히는, 검의 손잡이. 가죽이 감겨 있는 칼자루.
‘……아.’
그 매듭은 그가 엮었다.
“……아니.”
건흠은 아내의 팔을 움켜쥐었다.
“널 원망한 적 없어.”
그 손에서 푸른 강기가 피어올랐다.
이변을 느낀 건흠의 아내는 흠칫하며 팔을 빼려 했으나, 건흠의 손아귀를 벗어날 순 없었다.
“……으!”
아내의 얼굴이 일렁이며 검은 그림자가 언뜻 비쳤다.
“후회는 했지. 그래. 정말 많이 했어. 하지만 그건 내가 안고 가야할 문제지. 이런 식으로 답을 찾지도 않고 뛰어넘을 수는 없어.”
인생은 나아감이고, 선생은 먼저 나아감이다. 선생이라면 무릇 답을 찾아 나아가야 하는 법.
건흠의 시야가 또렷해졌다.
“학생을 원망하는 선생은 없다. 학생이 실수하면 가르치는 게 선생이야. 나는 널 원망한 적 없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것이 그가 평생 품고 갈.
“이게 내 해답이다.”
건흠은 힘껏 내공을 불어넣었다.
아내의 껍데기가 벗겨지고 악마의 모습이 드러났다. 악마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치고는 이내 몸을 덜덜 떨더니.
키이익……
짧은 신음을 남기고 잿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건흠은 손에 남은 재를 바라보다가, 그것마저도 털어내고 다혜를 바라보았다.
“이젠 네가 날 가르치는구나.”
그 말에 다혜가 살짝 웃었다.
“……선생님.”
“응.”
지금이 아니면 평생 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말을 할 수 있을 때 전해야 했다.
“감사해요.”
다혜는 눈을 감으며 말을 맺었다.
“전부 다.”
건흠은 환하게 웃었다.
다혜가 실종됐던 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렇게 환히 웃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웃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더 환하게 웃고,
“나도.”
후련하게, 시원스레, 큰 웃음을 지었다.
* * *
“몸은 괜찮으세요?”
“으음…….”
건흠은 미음을 삼키고 팔을 이리저리 돌렸다.
“다친 혈도는 잘 안 낫는구나.”
“교장선생님이 푹 쉬다 오라고 하셨어요.”
다혜의 곁에 선 세희가 말했다.
“가족분들께도 말했으니까, 곧 오실 거래요.”
건흠은 쓰게 웃었다.
“그럴 것 같진 않네.”
“아웅.”
“올 거래요.”
“므앙.”
“제자들도.”
그 말에 건흠의 쓴웃음이 흐려졌다.
“글쎄, 어떨지 모르겠구나.”
“아으!”
“자신감을 가지시래요.”
세희는 그렇게 말하고 다혜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언니. 다른 사람들 깨워야지.”
“아웅.”
“뭐? 어떻게 배고프다고 선생님 미음까지 뺏어 먹을 생각을 해?”
“느아아악!”
“따라오기나 해.”
세희와 다혜는 커튼 밖으로 나갔다.
건흠은 미음을 먹으며 생각했다. 과연 병문안을 오는 사람이 있을까.
‘없다고 해도 놀랍지는 않지…….’
제자들은 올 수도 있겠지만, 가족은 아마 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딱히 기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 맛도 안 나는 미음을 씹을 것도 없이 목구멍으로 흘려보내고 있는데.
커튼 밖에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여긴가요?”
“네, 맞습니다.”
건흠은 그 목소리를 듣고 움찔했다.
커튼이 열리고 그의 아내가 나타났다. 꿈에서 보았던 흐릿한 모습이 아닌, 현실의 또렷한 모습으로.
“…….”
“…….”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내를 여기까지 데려온 협회 병동 간호사는 둘의 눈치를 보다가 커튼을 치고 자리를 피했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아내가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데?”
따지는 말투였지만 건흠은 따지지 않았다.
“악마랑 싸우다가.”
“악마? 뉴스에 나오는 그거?”
“응.”
“학교도 안 안전해?”
“내가 바보짓한 거지.”
아내는 평소의 모습 그대로였다. 딱히 별고는 없었던 듯했다.
“유빈이는 잘 지내?”
“응.”
둘의 대화는 잘 이어지지 않았다. 시작될 듯하다가도 뚝뚝 끊어질 뿐.
그러다 건흠은 아내의 시선이 자신의 미음 그릇에 향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궁상맞게 보일 것이다. 그래서 다 먹지도 않은 그릇을 은근슬쩍 옆으로 치우려는데.
“집에 오면 맛있는 거 해 줄게.”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건흠은 놀라서 눈을 끔뻑였다. 이게 현실이 맞나. 아직도 악마의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게 아닐까.
하지만 눈앞이 너무도 선명했다.
“……맛있는 거?”
“귀가 잘 안 들리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
“퇴원하면 집으로 와.”
아내가 그를 흘겨보았다.
“휴직하는 거 교장선생님한테 들었으니까. 딴 곳으로 새지 말고.”
“아니 뭐…….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는…….”
건흠은 얼떨떨해서 말을 떠듬거리다가, 아내가 신고 있는 게 구두가 아니라 현관에 늘 놓여 있던 낡은 슬리퍼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지금이 아니면 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여보.”
“응?”
건흠은 아내의 손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망상 속으로 도망쳐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답은 언제나 현실에 있는 법이니까.
그는 자신이 찾아낸 답을 손에 꼭 잡았다.
“퇴원하면 어디 놀러 갈까?”
“그래도 되고.”
“오늘이 며칠이지? 아직 4월인가?”
“5월.”
아내가 나직이 말했다.
“5월 1일이야.”
벌써 달이 바뀌었나. 건흠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아내와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옛날 같았으면 부끄럽다며, 쑥스럽다며, 끝내 말하지 못했겠지만.
“여보.”
“응.”
“고마워.”
그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다.
그의 흔들림 없는 눈빛을 본 아내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나도.”
둘의 대화는 이제 이어질 필요가 없었다. 충분히 전하고도 남았으니까. 그렇지만 둘은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대화를 잇지 않을 이유 또한 사라졌기에.
그동안은 필요할 때만 서로를 찾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이유가 없었다.
“어디로 놀러 갈까?”
“글쎄. 5월이니 들판에 꽃 보러 가는 게 좋을지도.”
“둘이 낫겠지? 유빈이도 하루쯤은 혼자 지낼 수 있겠지?”
“그치. 둘이 좋아. 정 불안하면 어머니께 맡겨도 되고.”
“그래, 그러자.”
둘은 그렇게 병동의 커튼 속에서, 올해의 그 어느 날보다도 긴 시간을 함께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