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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여고의 남선생-412화 (412/501)

<412화>

412. 내가 있을 자리는 없다

상호는 미음을 먹는 이츠키를 내려다보았다.

“먹을 만해?”

“쌀 맛밖에 안 납니다.”

“그야 쌀이니까.”

“그러고 보면 한국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구두쇠가 먹고 싶은 반찬을 매달아 놓고 맛을 상상하면서 맨밥만 먹었다고…….”

이츠키는 그렇게 말하고는 상호를 빤히 바라보면서 미음을 입에 넣었다. 상호가 맛있는 반찬이라도 된다는 듯이.

상호의 이마에 진땀이 흘렀다.

“……사카시타?”

“하얗고 걸쭉한 게 정말 선생님 맛이 나는 것 같기도…….”

“…….”

그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옆에서는 세희가 핸드폰으로 문자를 하고 있었다. 이츠키가 깨어났다고 반 아이들에게 알리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핸드폰 생각이 났다.

‘부모님한테 빨리 알려줘야지…….’

지금 이츠키의 핸드폰은 학교에 두고 왔다. 상호는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이츠키에게 건넸다.

“부모님한테 전화드려.”

“아, 감사합니다.”

“요금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해.”

“요즘 국제전화는 인터넷으로 싸게 해서 괜찮습니다.”

이츠키는 핸드폰을 받아 만지작거리다가 귀로 가져갔다.

연결음이 두어 번 들리더니 중후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시모시.]

“마마. 와타시데스.”

[이츠키?]

다음 순간, 상호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어가 핸드폰에서 와락 쏟아져 나왔다.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하고, 울먹이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로.

반면에 이츠키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타오레테……. 이이에, 아쿠마가……. 마마, 키이테……. 하아.”

뭐라는진 모르겠지만 어머니가 말을 끊고 있다는 건 알겠다. 상호는 멀뚱히 눈만 끔뻑이며 이츠키를 바라보았다.

이츠키가 혀로 입술을 살짝 핥았다.

많이 빡친 표정이었다.

“마마. 와타시 겟콘스루.”

순간 핸드폰 너머의 여자 목소리가 뚝 끊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츠키는 무어라 말을 이었다. 한참 동안 혼자서. 핸드폰 너머에서는 아무런 대꾸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쿵──]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핸드폰 너머가 소란스러워질수록 상호의 등도 축축해졌다. 상호는 얼굴에도 터지는 진땀의 홍수를 닦으며 이츠키를 불렀다.

“저기, 사카시타……?”

“네.”

“뭐라고 한 건지…… 물어봐도 돼?”

“별거 아닙니다.”

이츠키는 태연하게 답했다.

“나 이미 임신해서 여기서 결혼할 거니까 그리 알라고 했습니다. 이미 3학년이라 학비로 협박해도 소용없다고도.”

“…….”

“내년에 아기 들고 찾아갈 테니까 준비 단단히 해 놓으라고도 했습니다.”

“…….”

이게 국제결혼사기인가. 상호의 머리가 아뜩해졌다.

“……사카시타?”

“네.”

“혹시 너…… 집이 싫어서 유학을……?”

“한 20퍼센트 정도는?”

이츠키가 혀를 쏙 빼물었다.

그때 핸드폰에서 이번엔 굵은 남자 목소리가 들리더니, 이츠키가 반색을 했다.

[소코니 이루노와 다레데스까.]

“아, 파파~.”

[이츠키? 도시테 마마가…….]

“젠젠 와카라나이케도. 파파. 센세가 이치도 고아이사츠니 우카가이마스토 잇테…….”

상호는 본능적으로 이츠키가 또 이상한 말을 하고 있단 것을 알아차렸다.

“잠깐만, 잠깐만 사카시타…….”

“네?”

“방금은 뭐라고 했어? 선생님이 어쩌고 한 것 같은데…….”

“선생님이 저랑 인사 한번 드리러 갈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냥 평범한 인사지?”

“일단은 그렇습니다만…….”

이츠키가 혀로 입술을 할짝였다. 아까 미음을 먹으며 상호를 바라보던 눈빛 그대로.

“아니게 될지도 모릅니다.”

“…….”

위험한 상견례가 될지도 모른다. 상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핸드폰 줘.”

“요즘 국제전화는 공짜나 다름없…….”

“제발 돌려줘…….”

딸과 부모의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 * *

“아으아.”

소파에 앉은 다혜가 눈을 반짝였다.

“으아으!”

“……끄응.”

상호는 다혜의 옹알이를 알아듣지 못해 진땀을 흘렸다.

방금 막 학교에 돌아와 다혜에게 세희가 이츠키를 깨웠다는 말을 해준 참이었다.

“다혜야, 이제 협회로 출발…….”

“아으아!”

“해야 돼…….”

학교에서는 그와 태화가 악마를 대비하고, 협회에서는 세희와 다혜와 이츠키가 악마를 대비하고.

그러기 위해 다혜가 협회로 가야 하는데, 아까부터 아으아 으아으거리기만 하고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니…….’

일단 하나씩 짚어보기로 했다.

“배고파?”

“느악!”

이건 아닌 것 같다. 상호는 다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가 퍼뜩 확신이 들었다.

“아리가 없어서 그렇구나? 학교에 남고 싶다고?”

“느아악!”

“이것도 아니야……?”

이번엔 확실한 줄 알았는데. 상호의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답답한 것은 다혜도 마찬가지였는지, 다혜는 곧 상호의 가슴팍을 콩콩 두드리며 손짓발짓을 했다.

“므아!”

“어어……, 마음속?”

“아으므우아, 꾸아웅.”

“나? 나 말고, 선생님?”

“아으!”

건흠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상호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다혜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네가 건흠 선생님 깨워도 되냐고?”

“아으!”

다혜가 눈썹이 휘날리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안 될 이유는 없어 보였다. 빙의자를 깨울 수 있는 세 사람 중에서 건흠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당연히 다혜일 테니까.

본인이 꿈이라는 것만 인식하면 쉽게 깨어날 수 있으니, 다혜의 첫 연습 상대로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 다혜 네가 깨워드려.”

“아웅.”

“설명해줄 테니까 잘 듣고. 가서 세희한테도 들어보고.”

“므앙.”

“봐봐. 일단 그 사람 심상에 들어가게 되면…….”

상호는 지금까지 그가 봐왔던 경우를 다혜에게 알려 주었다. 성연, 빙의자들, 그리고 그 자신.

다혜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그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이따금씩 아으, 으아 하는 추임새를 넣으며.

그러다 상호의 이야기가 끝나자.

“아으!”

걱정 말라는 듯 엄지를 척 세우고 창가로 걸어갔다.

상호는 창턱을 밟고 올라서는 다혜에게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잘 깨워드리고. 나중에 보자.”

“아으~.”

다혜가 밝은 웃음을 흘리고 창밖으로 뛰쳐나갔다.

* * *

세희는 건흠의 손을 잡은 다혜를 못 미더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알아들은 거 맞지?”

“므아!”

“내가 한 말 기억해?”

“우이우앙, 아웅, 므아웅.”

“그래. 악마는 사실 약하니까 속임수란 걸 깨닫는 게 중요하다고. 꿈이란 걸 똑바로 알게 해주고.”

“므앙.”

다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는 이미 다 들었다. 악마가 아무리 사람을 흉내 내도 주의 깊게 살피면 결국 들통나기 마련이고, 설령 구별하지 못하더라도 마음의 주인의 의지가 강하면 충분히 쫓아낼 수 있다고.

세희는 그래도 불안한지, 병상에 쳐진 커튼 밖으로 나가면서도 다혜를 힐끔거렸다.

“실수하지 말고. 잘 해.”

“므웅~.”

다혜는 씩 웃고 병상에 엎드렸다.

미리 가벼운 운동으로 몸을 피곤하게 해 둔 덕분에 금방 잠이 찾아왔다. 심상에서의 일도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후웅.”

자신만만한 콧소리를 끝으로, 눈이 스르르 감겼다.

* * *

건흠의 가족은 세 명이었다. 아내. 딸. 그리고 건흠 본인.

아내와는 개벽 10년 전에 만나 개벽 8년 전에 결혼했다. 그 후로 생긴 아이가 이제는 중학교 3학년.

건흠은 개벽 전에도 선생 일을 하고 있었다. 체육 선생. 목숨을 걸어본 적 없다는 것만 빼면 지금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삶이었다. 소득은 더 늘었고.

아내는 일반인 중학교 교사.

같은 교사라 서로를 잘 이해할 줄 알았지만, 서로의 직업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부부간에 으레 하는 하얀 거짓말도 할 수 없었고.

팍팍해진 삶 속에 여유는 점점 없어지는데 딸은 아버지를 투명인간 취급. 벌이는 썩 괜찮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친척들에게는 0금융권 취급. 우리가 남이냐며 이자를 마이너스로 계산하는 기적의 수학을 들이미는 이들 때문에 흰머리만 늘어나고, 아내의 잔소리도 늘어나고.

남교사 숙소에서 자는 날도 덩달아 늘어났다.

‘이게 삶이 맞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실종된 제자가 돌아왔다. 찾았을 땐 기뻤다. 그러나 이후의 일을 처리할 때에는 그리 기쁘지 않았다.

애초에 실종된 것을 내 잘못이라 치자, 그렇게 마음먹고 학비를 대 주었다. 그러나 적은 돈이 아니었기에 당연히 아내에게 들켰고, 그날부터 건흠은 학교에서 살다시피 하게 되었다.

그런데.

‘……뭐지?’

건흠은 제집의 현관문을 바라보며 눈을 끔뻑였다.

자신이 대체 왜 여기 와 있는지.

‘기억이…….’

그렇지만 손은 이미 문을 열고 있었다.

무의식인지, 습관인지, 건흠은 이미 신발을 벗고 집 안쪽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인생에 한 번, 이미 겪어본 날 같았다.

“당신.”

건흠은 움찔하며 주방 쪽을 돌아보았다.

피곤해서 그런지 눈이 침침했지만, 그래도 저 흐릿한 형체가 아내라는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저번에 통장에서 빠져나간 거.”

“…….”

“당신 반 애한테 준 거였다며?”

“…….”

건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신이 있어?”

“…….”

“유빈이랑 내 생각은 안 해? 혼자 쓰는 돈이야? 그래서 혼자 사는 거야?”

“…….”

“집에 안 오는 것도 그 애 때문이지?”

“…….”

이목구비를 분간할 수 없는 흐릿한 모습에서도 경멸과 혐오의 눈빛을 읽어낼 수 있었다.

건흠의 아내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돌아섰지만, 아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건흠도 이미 알고 있었다.

‘……내 잘못이지.’

건흠은 고개를 푹 숙이고 돌아섰다.

‘내 잘못…….’

딸의 방문은 굳게 닫힌 채로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공부하고 있겠지, 두드리면 화내겠지, 이미 몇 번 겪어본 경험 때문에 건흠은 딸의 방문을 지나쳐 욕실로 향했다.

아무리 세수를 해도 시야가 밝아지지가 않았다.

‘……현실이 맞나?’

그럼 꿈이겠냐. 그는 거울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자조했다.

욕실을 나와 보니 안방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열고 들어가면 또 깨겠지…….’

술이라도 한잔 걸치고 싶었다. 그렇지만 잔소리가 무섭고. 내일도 출근해야 하고.

‘쉴 곳도 없고…….’

있을 곳도 없다.

그는 최대한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빠져나와 아파트 계단에 걸터앉았다.

한밤중이라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차라리…….’

예현여고에 다니지 않았다면.

공립학교였다면 비싼 학비를 내주는 일도 없었을 텐데. 헌터 학교가 아니었다면 학생이 1년씩 사라졌다가 돌아오는 일도 없었을 텐데. 하다못해 남고였다면 이런 의심을 받는 일도 없었을 텐데.

차라리 선생이 아니었다면.

차라리…….

‘……후회해봤자지.’

알고는 있는데 자꾸 목이 메었다.

건흠은 무릎에 고개를 처박고 이를 악물었다. 울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아서. 오밤중에 우는 소리를 내었다간 이웃들이 뭐라 할 것이다.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는 세상.

‘하하…….’

건흠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때 그의 등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옷이나 신발 따위가 벽에 스치는 소리.

그는 고개를 돌려 계단 위를 올려다보았다.

‘……잘못 들었나.’

아무도 없었다.

더 울어도 달라지는 건 없으리라. 건흠은 한숨을 쉬고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잔소리를 덜 듣기 위해서.

‘자야겠다.’

집으로 향하는 그의 걸음이 어지럽게 비틀거렸다. 술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취한 듯.

그런 그의 뒷모습을 계단 위에 선 소녀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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