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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여고의 남선생-411화 (411/501)

<411화>

411. 네가 있을 자리는 없다

“응?”

상호는 숟가락을 입에 문 채로 눈을 끔뻑였다.

“성공했다고?”

“네.”

세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젓가락으로 옆을 가리켰다.

“얘 꿈속에 들어가서 버릇 좀 고쳐주고 왔어요.”

“쌔애애앰!”

태화가 상호를 향해 빽 소리쳤다. 눈에서는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입에서는 밥알을 펑펑 튀기면서.

“얘가 이제 내 꿈까지 쫓아와서 괴롭혀! 막 때리구! 막 꼬집구! 내가 꿈에서 놀려고 그러면 다 부수고 꼬장부려!”

“잘했네.”

“퉤!”

“……이젠 아예 일부러 뱉는구나.”

상호는 이마에 명중한 밥알을 닦아내고 세희를 돌아보았다.

태화의 꿈에 들어갔다는 건, 상호처럼 빙의자들을 깨울 준비가 되었다는 뜻.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건.

“악마는 없앴어?”

“네.”

세희는 별것 아니었다는 듯 태연하게 대답했다.

“선생님 흉내를 내려고 하길래, 그냥 베었어요.”

“어떻게 내가 아닌 줄 알았어?”

“제가 벗으려고 하는데도 끝까지 심상에서 안 나가더라구요.”

“…….”

“선생님 아닌 게 뻔해서 바로 베었죠.”

그런 편한 방법이. 상호는 진땀을 닦고 세희와 태화와 나빛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세희는 이제 선생님이랑 일 같이 하고…… 내일부터 다시 개학이지?”

“네.”

“태화랑 나빛이는 학교 돌아가. 세희랑 나는 빙의자들 깨울 테니까. 악마 잡을 일 생기면 다혜 데려가고…….”

그 말에 나빛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럼 선생님은 여기에만 계속 있는 거예요?”

“응. 사람들 깨워야지.”

“그거 다혜 언니도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태화도 거들었다.

“얘랑 언니를 여기 남기고 쌤이 학교 와도 되는 거 아냐?”

“……글쎄. 가능은 하겠지만.”

“쌤 또 여기 남는다 그러면 오지윤이랑 애들이 와서 잡아갈걸? 쌤 은호 돼도 감당할 수 있겠어?”

“…….”

가르쳐준다 해놓고 또 튀었다간 정말로 잡으러 올 것이다. 상호는 한참 동안 고민에 빠졌다.

애들한테만 맡기는 게 영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 그러면 오늘 세희가 나한테 배우고. 내일은 나도 학교 가는 걸로 하자.”

그러자 이번엔 세희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하지만 상호가 필사적으로 눈을 찡긋거리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납득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 얼른 밥 먹고 병동 가보자.”

그들은 다시 바쁘게 수저를 놀렸다.

* * *

“처음은 역시…….”

상호는 병상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세희 네가 잘 아는 사람으로 하는 게 낫겠지.”

세희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앞에는 이츠키가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세희 너도…… 네가 깨우고 싶었지?”

“네.”

그럴 줄 알았다. 상호는 세희의 등을 토닥였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어.”

세희가 타인의 심상에 들어갈 수 있게 되기를.

더 뜸 들일 것 없다. 그는 이츠키의 병상 옆에 의자를 놓았다.

“시작하자.”

“네.”

세희가 의자에 앉아 이츠키의 손을 잡았다.

그런 후 고개를 이츠키의 배에 눕히고, 잠을 자기 편한 자세를 찾아 몸을 조금씩 움직였다.

“갔다올게요.”

“응.”

상호는 세희의 머리에서부터 등까지를 쓸어내렸다.

“너무 오래 걸리면 나도 들어갈게.”

“……네.”

세희는 상호의 손에 집중하며 중얼거렸다.

그 손길이 얼마나 따스한지. 얼마나 부드러운지. 그렇게 가만히 그 느낌을 즐기다가.

어느 순간 스르르 잠이 들었다.

* * *

‘들어왔나.’

세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내는 것. 꿈의 주인을 만나서 물어보든, 혼자 관찰해서 알아내든 해야 했다.

‘……뭐야.’

세희의 눈이 끔뻑였다.

한옥을 닮은, 그러나 확연히 다른 목조 건물. 세희가 선 나무 복도의 오른쪽에는 마당이, 왼쪽에는 정사각형으로 살을 댄 나무문이. 마당에는 바위와 연못과 나무가, 살짝 열린 나무문 사이로는 풀을 엮어 만든 바닥이 보였다.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렸다.

똑……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도.

고즈넉한 느낌이 드는 게 절인가, 사찰인가 싶기도 했지만 방을 슬쩍 들여다보니 하얀 침대가 놓여 있었다.

‘……여관이구나.’

어딘지는 알겠는데, 어떤 곳인지는 모르겠다. 이곳이 대체 이츠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곳인지.

세희는 일단 마당 옆에 난 복도를 걸었다.

똑……

또 소리가 났다.

잘 보니 마당에 놓인 대나무 통에서 나는 소리였다. 물이 담겨 기울어졌다가 물이 빠질 때 제자리로 돌아가며 바닥을 치는 대나무 통.

세희는 잠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똑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츠키는 어디 있지?’

여관은 텅 비어 있었다.

걷다 보니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2층이 있는 모양이었다. 세희는 그 계단을 오르다가 계단 끝에 선 검은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어째 무심한 표정이 이츠키와 닮은 고양이였다.

‘……얜 또 뭐지?’

의문만 늘어간다. 세희는 발을 멈추고 가만히 고양이를 노려보았다. 혹시 악마가 아닐까 해서.

그러자 고양이는 주변을 한번 쓱 둘러보더니, 뒤돌아서 도도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따라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세희는 검을 뽑고 고양이의 뒤를 따랐다.

똑……

걷다 보니 복도의 모습이 조금씩 달라졌다. 창호지와 창살은 사라지고, 좀 더 문다운 문이 나타났다.

아마 누가 살고 있는 집 같았다.

높은 확률로 이츠키네 집.

“이츠키?”

문은 열려 있었다.

안쪽은 비교적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세희가 아는 집과는 구조가 다르긴 했지만. 앞서 걷는 고양이의 뒤를 따르다 보니 어느 문이 나타났다.

세희는 그 문을 똑똑 두드렸다.

“이츠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안쪽에 있던 건 예상대로 이츠키였다. 하지만 이게 진짜 이츠키인지는 확신할 수 없는 상황. 이츠키 또한 검을 든 채로 의심의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나 세희의 발치에 있는 검은 고양이를 보자 이츠키의 눈에서 의심이 사라졌다.

“세희가 맞나 봅니다.”

그렇지만 세희는 의심을 풀지 않았다. 악마는 이츠키의 기억을 읽었을 테니까.

세희는 검을 겨눈 채로 이츠키와 고양이에게서 멀어졌다.

“내가 진짜인지 어떻게 알았어?”

“악마는 모습은 따라해도 능력까지 따라하진 못합니다.”

이츠키는 태평하게 고양이를 안아 들어 쓰다듬었다.

“제가 있는 곳을 찾아냈다는 것은 이 쿠로코가 진짜라는 뜻입니다.”

“그럼 난 악마일 수도 있잖아.”

“쿠로코는 낯선 사람은 안 데려옵니다. 세희에게 묻은 내 냄새를 맡은 겁니다.”

세희의 검이 살짝 내려갔다.

“악마가…… 나한테 묻은 네 냄새까지 따라하진 못했을 거란 말이야?”

“제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츠키가 무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제 냄새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게다가 고양이 코도 아닌데.”

“……그치.”

악마는 이츠키의 기억을 읽으니까.

그제서야 세희는 검을 완전히 늘어뜨렸다.

“그런데…… 이 쿠로코란 애는 누구야?”

“제가 키웠던 고양입니다.”

이츠키가 쿠로코를 꼭 끌어안았다.

“중학교 때 떠나보냈었는데…… 저도 지금까지 모르다가 이번에야 제 안에 영혼으로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늙은 고양이였어?”

“아닙니다.”

이츠키의 눈가에 물기가 비쳤다.

“보다시피 료칸이라, 쥐를 쫓으려고 고양이들을 풀어놓고 키웠는데…… 제가 자는 사이에 밖으로 나가서 들짐승에게 당해 버렸습니다……. 어른들은 아마 매일 거라고 했습니다.”

“……아이고.”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까…….”

“그러게.”

세희는 쿠로코에게 얼굴을 비비는 이츠키를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 이츠키.”

“네.”

“너 지금 이게 네 마음속이란 걸 알고 있는 거지?”

“그렇습니다.”

“그럼…… 왜 이러고 있어?”

악마랑 싸우든가, 찾든가, 하다못해 쫓고 쫓기든가. 깨어나려는 노력을 해야지 뭐 하러 이렇게 가만히 있는가.

걱정을 얼마나 했는데.

“고양이 때문에 그래? 깨어나기 싫은 거야?”

“그런 건 아닙니다.”

이츠키가 살짝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절 뭘로 보는 겁니까. 그렇게 생각 없는 사람 아닙니다.”

“그러면?”

“악마를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없어서……. 그런데 아마 악마도 같은 생각인가 봅니다. 한 번도 제 앞에 나타나지 않고 그냥 숨어 지내는 걸 보니.”

“아마…….”

세희는 턱을 괸 채로 생각에 잠겼다.

“……여기가 네 마음속이란 걸 네가 알아버려서인 것 같네.”

“알기만 하면 쫓아낼 수 있는 겁니까?”

“선생님이 그러셨어. 딱히 특별한 힘이 없어도 마음만 똑바로 먹으면 쫓아낼 수 있대.”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빨리 깨어나려고 노력했을 겁니다.”

“네가 거기까지 알 순 없었겠지.”

이제 남은 것은 이 여관 어딘가에 있는 악마를 찾아서 죽이는 것뿐. 세희는 이츠키의 품에 안긴 쿠로코를 쓰다듬고 자신이 걸어왔던 방향을 엄지로 가리켰다.

“찾으러 가자.”

“잠시만…….”

이츠키가 쿠로코를 내려놓았다.

“쿠로코한테 말하면 찾아 줄지도 모릅니다.”

“……말도 알아들어?”

“혁구도 사람 말 알아듣잖습니까.”

“걔는 애초에…….”

생물이 맞긴 한지도 의문인 녀석인데. 하지만 따지기 싫어서 뒷말은 그냥 삼켰다.

“그래. 한번 찾게 시켜 봐.”

그러자 이츠키가 일본어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정말로 말을 알아들은 걸까. 쿠로코가 코를 실룩거리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세희는 그 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똑똑하네.”

“생전엔 밥 먹고 잠만 잤는데.”

그때 갑자기 쿠로코가 우다다 달리기 시작했다.

“앗, 한국말도 알아듣나 봅니다.”

“…….”

주인이 미워서 도망치는 건 아니리라.

세희와 이츠키는 쿠로코를 따라 복도를 달리고, 계단을 내려가고, 또 복도를 달렸다. 그러다가 어느 여관 방 앞에 다다랐을 때.

살짝 열린 문 사이로 쿠로코가 먼저 뛰어들어가 버렸다.

“앗!”

세희와 이츠키, 둘 다 당황해서 황급히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어라.”

쿠로코는 멀쩡했다.

악마에게 당하진 않을까 걱정해서 달려들어간 것인데. 멀쩡해도 지나치게 멀쩡했다.

1마리가 0마리가 될 줄 알았는데.

1마리가 2마리가 되어 있었다.

“이상합니다.”

이츠키가 눈을 깜작였다.

“분명 중성화 수술을 시켰는데……. 아, 그래서 무성이 되어 이분법을 마스터한…….”

“정신 차려.”

세희는 검을 치켜들었다. 둘 중 하나는 악마.

이기기는 쉽다.

그러나 문제는, 상대가 말도 못 하는 고양이.

‘……어떡하지?’

답이 안 보이는데.

그렇다고 둘 다 죽일 수는 없고. 세희는 당황해서 이츠키를 돌아보았다.

“이츠키.”

“네.”

“그 실 같은 거 볼 수 있지 않아?”

“여기서는 안 보입니다. 저도 영혼은 남들이랑 똑같은지라.”

이츠키도 초조한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완벽하게 똑같이 생긴 고양이가 가만히 앉아서 바라보기만 하고 있으니. 아무리 주인이라 해도 알아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애초에 이츠키의 기억을 토대로 따라한 것이라, 이츠키가 알아보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했고.

‘그러면 내가……?’

세희는 생각했다. 자신이 이곳을 벗어나 따로 떨어지면. 또 고양이들로 하여금 자신을 찾게 한다면.

찾아내는 녀석은 진짜고, 못 찾아내는 녀석은 가짜로 판별할 수 있지 않을까.

‘……안 찾고 도망쳐 버릴 수도 있지.’

그러면 또 찾아야 하고.

그 찾는 과정에서 악마가 쿠로코를 해코지할지도 모른다. 이제 쿠로코가 없으면 자신을 찾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

‘그치만 다른 방법이…….’

그때 이츠키가 중얼거렸다.

“……맞지 않습니다.”

“응?”

세희는 고개를 퍼뜩 들어 이츠키를 바라보았다.

“이츠키?”

“아무리 생각해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습니다.”

“뭐가?”

“가장 강한 악마를 봉인하는 것과, 어디서 굴러먹던 놈인지도 모를 잡스런 악마의 영혼 쪼가리를 품는 것의 증상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그 잡스런 악마들은 바깥에서 멀쩡히 돌아다니기까지 합니다.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계산입니다.”

“무슨 뜻이야?”

“같잖은 속임수란 뜻입니다.”

이츠키가 검지로 고양이들을 가리켰다.

“사실 이놈들은 엄청나게 약한 겁니다. 제가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 사실 이놈들은, 나가라는 말만 하면 바로 나가야 하는 무전취식범이나 다름없는 겁니다.”

그러고는 낮고 강한 목소리로, 그녀의 나라 말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마치 주문을 외는 듯이.

그러자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몸을 덜덜 떨더니.

“키익…….”

목이 졸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쓰러져 발버둥치다가.

“키히익……!”

이내 검은 연기로 화해 사라졌다.

세희는 검을 집어넣으면서도 어안이 벙벙했다.

‘뭐야…….’

그냥 말 몇 마디로 이렇게 간단히 쫓아낼 수 있다니.

“이츠키? 뭐라고 한 거야?”

“여긴 내 공간이니, 더 머물려면 값을 내라고 했습니다.”

이츠키는 쿠로코를 안아 들어 쓰다듬었다.

“하지만 이곳에 악마의 소유가 있을 리 없기 때문에, 당연히 값을 치를 수 없었던 겁니다.”

“……그냥 그렇게만 말해도 쫓아낼 수 있어?”

“전 주술사고 여기는 제 세상이니까.”

멍하니 눈을 끔뻑이는 세희에게 이츠키가 살짝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세희는 공짜입니다.”

“……으응, 뭐……. 고마워.”

“현실에서도 공짜입니다. 언제 한번 우리 집으로 놀러 오는 겁니다. 선생님도 공짜로 해드릴 테니까. 아, 그래도 이양한텐 받아야 할지도.”

“……하하.”

세희는 허탈하게 웃으며 쿠로코를 쓰다듬었다.

두 소녀 사이에 낀 검은 고양이는 꼬리를 이리저리 휘저었다. 손길이 귀찮다는 듯. 그래도 끝까지 몸을 빼거나 하진 않았다.

“냐아앙.”

주인을 닮아 태평한 목소리가 고즈넉한 여관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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