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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여고의 남선생-409화 (409/501)

<409화>

409. 치유

“성공했다고?”

“네.”

세희가 다혜를 샐쭉한 눈빛으로 흘겨보았다.

“언니는 성공했대요.”

“므앙.”

다혜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남의 심상에 들어가는 일. 천색창염을 배운 세희는 실패, 영혼 수업을 얼마 받지도 않은 다혜는 성공. 상호의 예상과는 진행이 조금 달랐다.

그래도, 천색창염을 배우지 않은 사람 또한 상호와 같은 일이 가능하다는 건 확인을 했으니.

‘이제 세희가 왜 못하는지를 알아내야…….’

상호가 그런 고민을 하는데, 세희가 다혜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다혜가 눈을 깜작였다.

“아으?”

“그거 진짜 내 꿈 맞아? 내가 언니 꿈에 들어간 거 아냐?”

“므아앙?”

“사실은 내가 언니 꿈에 들어간 건데 언니가 우리 교실처럼 바꿔놓은 거 아니야? 나 몰래?”

“느아악!”

“아님 말구.”

세희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혜에게서 새침하게 돌아섰다.

어째 뾰로통한 데가 있다. 다혜가 먼저 성공했다는 것에 대해 자격지심이 들었는지.

상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세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선생님 협회 갔다 올게. 둘이 잘 지내고 있어.”

“네.”

그래도 심통이 풀리지 않았는지, 세희는 검을 챙기고 다혜를 창가로 잡아끌었다.

“오랜만에 나뭇잎 시합하자, 언니.”

“므아웅…….”

“뭘 하나마나야. 이제 내가 이겨. 빨리 따라와.”

“꾸웅.”

어쩔 수 없이 따라 나가는 다혜를 바라보며, 상호는 쓴웃음을 짓고 외출 준비를 했다.

* * *

“시작하려고?”

“응.”

상호와 도현은 병동 안으로 들어섰다.

협회 내부의 병동에는 악마들에게 당한 이들이 누워 있었다. 상호는 커튼이 쳐진 병상 사이를 걸어갔다.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만들어 뒀으니까. 더 이상 미룰 수 없지.”

“많이 위험하냐?”

“그걸 모른다는 게 제일 위험하지.”

그가 찾는 이는 제일 안쪽에 누워 있었다.

상호는 커튼에 붙은 종이를, 종이에 쓰인 이름을 확인했다. 그런 후 커튼을 걷고 안으로 들어서다가 도현을 돌아보았다.

“나도 못 깨어나면 애들 좀 챙겨 줘.”

“뭐? 말은 하고 왔냐? 못 올지도 모른다고?”

“아니.”

“개새끼…….”

도현이 질책하는 눈으로 상호를 째려보았다. 그런 말을 애들에게 어떻게 하냐는 듯.

상호는 그저 피식 웃어버리고 커튼 속으로 사라졌다.

“……개새끼.”

도현은 툴툴거리며 문가로 향했다.

* * *

“헉, 헉, 헉…….”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옷 안에 땀이 가득한 것 같았다. 눅눅하고, 무거웠다. 달리는 걸음마다 질퍽한 진창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흐릿한 회색 공간을, 성연은 달리고 또 달렸다.

“헉…….”

희미한 인식으로 판단하기로는, 이곳은 어딘가의 복도.

뒤에서 무언가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돌아보지도 않았고,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쫓기고 있다는 감각만은 분명히 살아있었다.

성연은 아무 문이나 열고 들어가 문을 잠갔다.

“……허억.”

그제서야 숨을 조금 돌릴 수 있었다.

서서히 기억이 났다. 이곳은 어느 건물. 자신은 갇혀 있다. 이 장소에, 이 시간에.

이 몇 번째인지 모를 기억이 계속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끝은 항상, 어딘가에서의 추락.

‘도망쳐야 해.’

머릿속에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이곳도 결국 안전하지 않다. 이 건물 밖으로 탈출해야 했다. 성연은 문에 귀를 바싹 붙였다.

바깥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간 건가……?’

쫓길 때도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만, 이만큼 기다렸는데도 문을 열어보거나 하지 않는 것을 보면 다른 곳으로 간 것 같았다.

그는 문을 열고 복도를 걸었다.

‘여긴 어디지……?’

신학교 같기도 하고, 협회 같기도 하다. 혹은 병동 같기도. 그러나 어느 하나로 특정할 만한 징표는 보이지 않았다.

걷다 보니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으음.’

소리가 나거나 빛이 보이진 않을까. 그러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버튼을 누르자 기다릴 필요 없이 문이 바로 열렸다.

성연은 엘리베이터 안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쿠르르……

등 뒤에서 진동이 울렸다.

뒤를 돌아보니 복도를 가득 채운 어둠이 성연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고름과 피딱지가 가득 붙은 손을 뻗으며.

성연은 기겁하며 엘리베이터의 문을 닫으려 했다.

“으……!”

하지만 아무리 버튼을 여러 번 눌러도, 문이 닫히는 속도가 빨라지진 않았다. 그는 버튼을 포기하고 엘리베이터의 제일 깊은 구석으로 뒷걸음질쳤다.

문의 틈새로 어둠이 손을 뻗는 순간.

터엉──

문이 닫혔다.

“……헉.”

성연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벽에 몸을 기대었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데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층수를 눌렀던가?’

엘리베이터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아래를 향해서.

지금 빨간 기판이 그리는 숫자는 0.

그리고 S02.

S07.

'……아.'

성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기판의 숫자는 난잡하게 바뀌었다. S12. T05. X00. T04. T02. I61. R95. Y00. X70. T01. R96. S18.

I46.

‘……!’

성연은 떨리는 손으로 마구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무서운 속도로 아래를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 몸이 조금씩 바닥에서 떠오르는 게 느껴졌다.

머릿속에 단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다.

죽음.

‘으……!’

그때 갑자기 추락이 멈췄다.

콰앙, 바닥에 세차게 부딪힌 성연은 욱신거리는 허리를 부여잡고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들었다.

기판에 나타난 숫자는 66.

‘……!’

불길한 숫자였다.

성연은 바닥을 기어 최대한 뒤로 물러났다. 이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의미가 없단 걸 알면서도.

엘리베이터 문이 덜컹거리며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윽…….”

성연은 일어나서 주먹을 쥐었다.

무기로 쓸 만한 것은 없다. 무술도 모른다. 그렇지만 앉아서 당하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권투 자세를 어설프게라도 잡았다.

곧 문틈으로 거친 손이 비집고 들어와 문을 강제로 열기 시작했다.

끼기기……긱……

문을 여느라 손을 쓰고 있을 때 선빵을 쳐야 한다. 성연은 두려움을 무시하고 주먹을 뒤로 당겼다.

“흐읍!”

그리고 힘차게 앞으로 뻗는 순간.

‘……어?’

문이 완전히 열리고 거친 손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칼을 차고 안대를 쓴 사내.

“뭐야.”

상호는 성연의 주먹을 여유롭게 잡아내고 눈을 끔뻑였다.

“여기서 뭐 하냐?”

어이없기는 성연이 더했다.

“……강 헌터님이야말로 여기 왜 있습니까?”

“너 구하러 왔지, 임마. 뭐 정확히는 구하려는 방법을 찾으려고 실험하는 중이지만…….”

“실험이요?”

“어. 내 제자도 악마한테 당해가지고. 걜 구하기 전에 널 상대로 실험하러 왔다. 어떻게 악마를 없애는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게 진실이 아님을 성연은 알고 있었다.

“제가 제일 먼저 쓰러진 사람이라 걱정돼서 온 게 아니고요?”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상호는 혀를 차고 무어라 툴툴거리다가 성연에게 나오라고 손짓했다.

“나와. 악마 잡으러 가게.”

“잡을 수 있어요?”

“내가 아니라 네가 잡는 거야.”

갑자기 악마를 잡으라니. 성연은 당황해서 엘리베이터 안쪽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게 돼요?”

“해봐야지. 아니 방금은 누군지도 모르면서 아구창을 날리려고 하더만, 그 패기는 다 어디 간 거야. 나와, 빨리.”

“……예에.”

그는 목소리를 떨면서도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왔다.

“근데 그럼…… 여기는 제 머릿속인 겁니까?”

“그런 셈이지.”

“어떻게 여기 계신 겁니까?”

“골통을 쪼개고 들어왔지.”

“예?!”

“믿으면 곤란해. 그래서. 이번엔 내가 좀 묻자.”

상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희미한 회색 복도를.

“여긴 대체 어디야?”

“모르겠습니다.”

“니가 모르면 누가 알아. 잘 생각해봐. 여기가 어딘지.”

그 말에 성연도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창문 하나 없는 냉랭한 회색 복도.

그리고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보았던 알파벳과 숫자들.

“……처음 일했던 응급실인가 봅니다.”

“응급실?”

“치료사니까요.”

“여기서 사람들 치료한 거야?”

“예.”

성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리 반가운 곳은 아닙니다.”

그 정도는 상호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뭘 했는데?”

“치료했지요.”

성연이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는 성력이 강한 편이라…… 제가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죽기 직전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좋은 일 했네.”

“죽은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살린 사람이 있으면 된 거 아냐?”

상호는 혀를 찼다.

“한 명이라도 살렸으면 된 거 아냐? 개벽 전이었으면 죽었을 사람들…… 네 능력 아니었으면 죽었을 사람들 아닌가?”

“응급실은 환자가 급한 순서대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제가 급한 순서대로 찾아가야 하지요. 그리고 그 순서는 순전히…… 저와 의사의 판단만으로 이루어집니다.”

성연의 목소리는 가늘게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제일 급한 환자에게 찾아가도…… 살릴 수 있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죽는 사람이 더 많지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했던 노력은 허사가 되고…… 그 헛된 시간 동안 두 번째로 급한 환자까지 죽는 겁니다.”

“신앙인이 너 혼자야?”

“저만큼 성력이 강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쉽게 말하느라 많은 것을 생략했지만, 제가 환자를 찾아갈 때는 헬기를 타는 것이 예사였습니다.”

“너 고소공포증 있는 거 아니었어? 저번에…….”

“그 상황에서 겁 안 먹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헬기도 조금 무섭긴 했지만…… 참았죠, 그 정도는. 주님께서 부르면 그냥 가는 겁니다.”

성연이 한숨을 쉬었다.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많은데…… 제 몸은 하나고, 제 능력 밖에 있는 일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제가 나라에서 두 번째로 잘 치료하는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세 번째 신앙인이 치료할 수 없는 환자는 전부 제게 넘어왔던 겁니다. 제가 치료할 수 있든 없든…….”

“두 번째? 첫 번째는 누구…….”

상호는 말하다 말고 정답을 깨달았다.

“걘 너처럼 바빠 보이지 않았는데.”

“나효은 수녀님은 다른 할 일이 있으셨던 거지요. 계시를 듣는 것이 사람을 구하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니…….”

“아니, 그냥 걔가 귀찮아했던 것 같은데…….”

“그럴 분이 아닙니다.”

“……너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는 거지?”

끽해야 며칠 봤을 녀석이 뭘 안다고 몇 년째 알고 지내는 사람한테 따질까. 듣자 하니 참 어이가 없었다.

“……하여튼. 여기는 네가 제일 고생했던 곳이라 이거지?”

“예.”

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악마가 여기로 데려온 것 같습니다.”

“그건 아닐 것 같은데.”

“네?”

상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성연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네가 그랬잖아. 정의롭지 않더라도 정의롭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너도 그랬던 거 아냐? 살릴 수 없는 사람이라도 살리기 위해 노력한 거 아냐?”

“…….”

성연은 한참 동안 대꾸하지 못했다.

그 말이 맞다.

맞긴 한데.

“……더 살릴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조금 더 과감하게, 안 될 사람은 포기하고. 제 분수에 맞는 사람들만 치료를 했더라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많이 살렸겠죠.”

“그건 네 상상이지.”

성연의 머리로 꿀밤이 날아왔다.

빠악

“악!”

“이미 능력 밖의 일을 후회하고 있구만 그래. 너는 네가 구하지 못한 게 단 한 명이었더라도 이러고 있었을 놈이야. 정신 차려. 누구도 모든 사람을 구할 순 없어.”

“……더 노력할 수 있었다는 이야깁니다.”

“그러니까 망상이라고. 너는 할 만큼 했어. 그 이상은 그냥 쓸데없는 아집이고 자학일 뿐이야. 넌 지 혼자 채찍질하는 걸 즐기는 변태냐?”

“…….”

그 말에 성연은 얻어맞은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에 빠졌다.

그때 그들의 앞, 복도의 꺾인 부분에서부터 무언가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끈적거리는 어둠, 그리고 고름과 피딱지로 뒤덮인 손.

“누구 손인지 알아보겠어?”

“예.”

떠올리기 싫은 기억. 성연의 눈이 질끈 감겼다.

“처음으로 죽인 환자입니다.”

“니가 죽인 게 아니라니까.”

상호는 성연의 뒤통수를 잡고 어둠에서 뻗어 나온 손을 가리켰다.

“원래 운명이란 건 혼자 지고 가는 거야. 네가 네 환자들을 살렸든, 살리지 못했든, 최선을 다하기만 했다면 부끄러워 할 것 없어. 네 환자들이 너한테 감사해야 할 일이지. 자, 잘 봐. 지금 저게 누구 손으로 보이냐?”

성연은 다시 눈을 떴다.

고름과 피딱지로 뒤덮인 창백한 손.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어둠과 팔이 흐릿하게 연결되어 있을 뿐.

성연은 손을 들어 올렸다.

“……내 망상과 아집입니다.”

손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 빛은 서서히 광채를 더하더니 이윽고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나, 상처난 손을 불태우고 어둠을 몰아냈다.

회색 복도가 온통 하얀색으로 물드는 순간.

‘……아.’

성연은 자신에게 눈꺼풀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오랫동안 뜨지 못한 눈꺼풀의 틈새로, 눈부신 현실의 조명이 스며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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