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여고의 남선생-408화 (408/501)

<408화>

408. 하고 싶은 대로

온통 검은 공간 속.

“네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해.”

눈을 감은 세희의 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닿았다.

“네가 어떤 사람인지. 또 그렇게 된 이유가 뭔지. 잘 생각해 봐.”

“……으음.”

세희는 이마를 찌푸렸다.

“선생님이 가르쳐주시면 안 돼요?”

“……그건 나도 모르지.”

“저는 어떤 사람이에요?”

“나라고 널 다 아는 건 아니야.”

상호는 피식 웃고는 마주 앉은 세희의 볼을 집었다.

“세희 너 나 없을 땐 태화 팬다매.”

“……그건 걔가 맞을 짓을 하니까.”

“어쨌든 내가 모르는 모습도 많다는 이야기지. 자, 계속 집중해 보자.”

“……네.”

그러나 아무리 집중을 해도 세희는 심상을 바꿔내지 못했다.

‘이쯤 해 둘까…….’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깨달음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사람은 현실의 사건을 통해 나아가는 법이니까.

상호는 세희의 어깨를 토닥였다.

“오늘은 그만하자. 다혜 심심하겠다.”

“저는 더 하고 있어 볼게요.”

“밥도 먹어야지. 밖에는 저녁일 거야. 가자, 이제.”

“네.”

둘은 함께 심상을 벗어났다.

* * *

그날 밤.

“아으!”

잠옷을 입은 다혜가 욕실 문 앞에 당당하게 섰다. 다리를 어깨너비만큼 벌리고, 팔은 45도 각도만큼 벌려서.

상호는 칫솔을 입에 문 채로 굳어 버렸다.

“……다혜야? 왜?”

“아으!”

“아, 같이 자자고……. 응, 양치하고 갈게. 먼저 누워 있어…….”

“므히히히~.”

다혜는 헤픈 웃음을 흘리며 침대로 쪼르르 달려갔다.

단둘이서 잔다니까 온종일 신이 났다. 대체 뭐가 그리 좋은지. 상호는 양치를 마치고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

“므아!”

침대에 누운 다혜가 옆을 팡팡 두드렸다.

정말로 신이 났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하는 걸까.

“다혜야, 손만 잡고 자는 거야…….”

“느악?!”

“당연하잖아…….”

“꾸웅.”

그래도 빨리 누우라는 듯 침대를 두드린다.

상호는 불을 끄고 다혜의 곁에 누웠다.

‘……끄응.’

숨소리가 가까웠다.

이불에 갇힌 온기가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계속 몸 주변을 감돌았다. 그리고 그 너머의 무언가도.

알 수 없는 모양의 무언가가 온통 곁에 머물고 있었다.

“므히히.”

꾸물거리며 다가든 다혜가 그의 품에 머리를 박았다.

“아으아~.”

“얼른 자자. 얼른…….”

“므앙.”

“응?”

다혜가 품속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 들이밀었다.

“므앙!”

“…….”

그래, 네가 성인인 건 잘 알고 있다.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주민등록증을 빼앗아 침대 옆 탁자에 놓았다.

“자자, 얼른 자자. 수업해야 하니까…….”

“느후훙.”

다혜가 키득거리며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 * *

‘꿈에는 늘 공간이 있네.’

세희도 꿈에서 수업하면 쉬울까. 상호는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익숙한 복도.

상호의 반과는 조금 다른 위치였다.

‘그냥 꿈인가, 심상인가…….’

상호는 문을 열었다.

질서정연하게 놓인 책상. 그의 반보다 두 배는 많았다. 그리고 그 위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교복들.

그 가장자리에서, 창밖을 바라보던 소녀가 상호를 돌아보았다.

“……아.”

소녀의 입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저씨.”

그 말에 상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까마득히 먼 옛날처럼 느껴지는 그날의 기억. 스승과 제자가 아닌, 그저 길가다 만난 사이.

모르는 소녀. 모르는 아저씨. 둘의 시작은 그랬다.

“뭐 보고 있었어?”

그가 다가가자 다혜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에서는 건흠과 학생들이 수업을 하고 있었다. 눈에 익지만 요즘은 못 본, 이미 졸업생이 된 다혜의 동급생들.

“가끔 꿈을 꿔요.”

다혜가 중얼거렸다.

“평범하게 학교를 다녔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호는 잠자코 들었다.

“친구들이랑 수업을 듣고. 친구들이랑 밥 먹고. 친구들이랑 하교해서 친구들이랑 분식집 가고, 몰래 배달 시키고……. 또 막 입학해서 어리버리한 세희랑 매점도 가고, 세희 첫 시험도 구경하고……. 그렇게 지내다가, 같이 입학한 친구들이랑 같이 졸업하고.”

다혜가 쓰게 웃었다.

“그럴 때마다 생각해요. 그때 안 갔더라면 어땠을까. 물론 돈이 없으면 퇴학당했겠지만. 내가 돈이 많았다면 어땠을까. 어떻게든 다른 일을 알아봤어야 했을까. 아니면 차라리…….”

창밖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자조가 깃들어 있었다.

“아저씨가 날 말려 줬다면 어땠을까.”

“나도 그 생각 많이 했어.”

상호는 다혜의 곁에 다가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아무리 후회해도 지난날이 돌아오진 않으니까.”

“아저씨도 학교 못 다녔죠?”

“응.”

“원망한 적 없어요? 아무것도?”

“자주 했지.”

몬스터가 없는 세상이었다면.

평범하게 학교를 다녔다면. 검을 들지 않고, 그저 평범하게 공을 차며 또래 아이들과 놀았다면. 부모가 죽지 않았다면.

또 어느 날 뜻이 생겨서, 갑자기 사범대를 가겠다고 공부해서, 대가리도 나쁜 놈이 벼락치기로 공부한다고 잘 될 리가 없으니 한 번쯤은 재수한다 치고, 실의에 빠져 길을 걷다가.

우연히 그녀를 만나고.

다른 세상에서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그런 상상.

“그래도 후회랑 망상은 다른 거야.”

상호는 뒤로 돌아서 창틀에 기대어 다혜를 바라보았다.

“후회는 다시 실수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지. 망상은 도망치는 거고. 그렇지만 그렇게 도망쳐 봤자…… 언젠가는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어.”

아프지 않으려면 강해지는 수밖에.

그래도 다혜는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루지 못한 미련이 남아서. 그런데 갑자기 창문에 커튼이 쳐졌다.

“이쪽 봐봐.”

다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꿈에서까지 이렇게 궁상떨 필요 없잖아. 나가서 애들이랑 같이 놀든가. 아니면 다른 하고 싶었던 걸 하든가.”

“……하고 싶은 거요?”

“그게 꿈이잖아.”

상호는 슬쩍 다혜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난 너랑 하고 싶었던 게 있는데.”

그 말에 다혜의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다혜는 곧 상호의 멱살을 잡고 조금씩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눈을 똑바로 뜨고. 흔들리는 눈빛을 숨기지 않은 채.

상호는 잠시 눈을 끔뻑이다가.

‘귓속말을 하고 싶은 건가?’

다혜를 향해 몸을 숙였다.

‘?’

눈앞을 가득 채웠다가 조금씩 떨어지는 다혜의 얼굴.

반달처럼 구부러진 눈 속에 별이 담겨 있었다.

“헤헤.”

“…….”

깜짝 놀란 상호는 말을 똑바로 하지 못하고 계속 삼켰다.

“……아니, 나는 그냥…… 너랑 이야기하고 싶다는 뜻이었는데.”

다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네가…… 밖에서는 말을 잘 못하니까. 꿈에서라도…… 하고 싶은 말 마음껏 하고…… 그냥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

발갛던 뺨의 혈색이 들불처럼 번지고. 반달 같던 눈이 도끼눈이 되고.

상호의 입에 닿았던 입술이 삐죽삐죽 튀어나오더니.

“어차피 내 꿈이잖아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래요.”

“……그것도 맞지.”

그래도 입맞춤은 좀 그렇다. 엄연히 애인이 있는 몸이라서. 상호는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다혜의 입술을 검지로 막았다.

“다혜야. 일단 수업하자, 수업. 여기서 악마가 있는지 없는지 찾아보고……. 아니면 오늘은 그냥 수다나 떨까?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들 있잖아. 아니면 세희…….”

“말로는 다 못 전한다구요.”

다혜는 기어코 상호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말로는 다 못 전하지만, 입으로는 전할 수 있다는 듯이.

‘남의 꿈에서는 힘을 못 쓰겠네…….’

상호는 어쩔 수 없이 눈감아주었다.

포개어진 입술 사이로 말보다 많은 감정이 오고갔다. 상호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많이.

‘……촉촉하다.’

그게 첫 감상.

그렇게 입을 맞춘 채로, 둘은 말없이 사랑을 나눴다.

* * *

품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곤히 자고 있던 상호는 슬며시 눈을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보이는 건 당연히 다혜의 정수리.

고개를 빼꼼 든 다혜가 상호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므앙.”

다시 옹알이를 하게 되었다. 상호는 꿈속에서 들었던 다혜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분명 현실보다 어른스럽고 또랑또랑했다.

‘언제쯤 말을 할까…….’

입맛을 다시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뜨악!’

하의가 싹 사라져 있었다.

분명 팬티도 잠옷 바지도 챙겨 입고 잤는데. 상호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혜와 눈이 마주쳤다.

다혜가 주민등록증으로 입을 가리며 음흉하게 웃었다.

“므후훙~.”

“…….”

잘잘못을 따져봤자 대답도 못 할 것이다. 그래서 내공을 뻗어 다른 속옷을 가져오려는데.

창문이 벌컥 열리더니 태화가 뛰어 들어왔다.

“쌤! 쌤!”

“뭐, 뭐야.”

상호는 황급히 이불을 눌렀다.

“무슨 일인데? 아침부터…….”

“X됐어!”

태화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태화가 이렇게 긴장할 만한 일은 흔치 않은데. 설마 악마라도 나타난 걸까. 상호의 심장도 덩달아 빠르게 뛰었다.

“뭔데. 말을 해 봐.”

“개X됐어! 큰일났어!”

“뭐냐고!”

“내일부터 악마 검사 의무화래!”

태화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상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거 하면 악마 융합체들은 사람 많은 곳 못 간대! 악마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가 없다면서! 에버월드도 못 가구 라떼랜드도 못 가! 이게 말이 돼? 말이 되냐구우!”

“그게 뭐 별일이라고, 안 가면 되지……. 좀 떨어져, 임마.”

“남의 일이라구 그래도 돼?! 어, 잠깐만, 쌤. 다리 사이에 이거 뭐야?”

“야야야……, 누르지 마! 야!”

“다리가 세 갠가?”

이러다 들키겠다. 상호는 황급히 태화를 떼어내고 내공을 뻗어 속옷을 가져오려 했다. 태화 모르게 뒤쪽으로 슬쩍.

그런데 태화가 이불 끝을 잡더니 확 들춰버렸다.

“오팬무! 오늘팬티무슨색이냐는뜻……꺄아아악!”

“……야!”

“이거 뭐야! 왜 빤쓰가 없어! 언니랑 콩콩콩 떡떡떡 울컥울컥 한 거야? 그런 거야?!”

“므앙!”

“야, 천세희! 하나빛! 오지유우운!”

태화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창밖으로 날아갔다. 동네방네 다 알려버릴 기세로.

상호는 다혜가 건넨 팬티를 입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다혜야, 다음에는 이러지 마…….”

“므히히히.”

키득키득 웃는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 * *

한바탕 소동이 지나간 후, 점심.

상호는 오랜만에 지윤과 은율을 데리고 수업을 하다가, 밥을 먹으러 학교 밖으로 나왔다. 그가 고른 오늘의 메뉴는 국밥.

상호는 숟가락으로 국밥을 뜨고 마주 앉은 아이들에게 말했다.

“이 초혼강기라는 거는 쉽게는 얻어지질 않아.”

“예.”

“그러니까 조바심 내지 말고 천천히 해. 나중에 너희한테도 영혼 다루는 수업 해줄 테니까……. 일단 세희랑 다혜부터 하고 나면.”

“네.”

“근데 쌤예.”

“응?”

지윤이 눈살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빤쓰를 벗고 허는 수업이 있다고 들었는디예.”

“……잘못 들은 거야.”

“이태화가 그랬는디…….”

“걔 말을 믿니?”

“가가 1은 2로 부풀려도 0에서 1을 지어내지는 못합니더. 대가리가 나쁜 가스나라…….”

“…….”

입을 다문 상호에게 지윤이 가까이 다가붙어 속삭였다.

“쌤예.”

“……응.”

“내일은 지랑 자는 겁니더.”

“그니까 그건 다혜랑 세희 먼저…….”

조용히 국밥을 먹던 은율도 한 소리 거들었다.

“저도 내일이요.”

“마, 내가 먼저 예약했다 아이가.”

“같이 하면 되지.”

“같이 하자꼬? 고건 쪼까 그런디…….”

“아니 얘들아. 무슨 핸드폰 알람 맞추는 것처럼 맘대로 예약을…….”

예약을 상대방의 동의 없이 물건 다루듯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의 항의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라믄 이래 하자. 내가 아래를 쓸 텡게 니가 위를 쓰는 기라.”

“너 쓰고 싶은 만큼 쓰고 넘겨.”

“잠깐만, 뭘 쓰고 넘겨……?”

“몰라도 돼요.”

“다 알믄서 이러십니꺼.”

“얘들아……?”

아이들은 대꾸를 않고 다시 국밥을 먹기 시작했다.

식사를 하고 있는데도 쩝쩝 입맛을 다신다. 먹음직스러운 게 눈앞에 있다는 것처럼. 상호는 아이들의 뜨거운 눈빛이 국밥을 향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애들이 국밥을 좋아하네…….’

그렇게 아이들의 시선을 피해 뚝배기에 얼굴을 처박고, 국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식사를 했다. 맛이 잘 느껴지지가 않았다. 평소에는 그토록 좋아했던 국밥인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내 팔자야…….’

어째 국밥이 점점 짜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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