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6화>
406. 모두 무사히
“크르…….”
높이 솟은 검은 뿔. 갑옷을 두른 듯 단단하고 길쭉한 꼬리.
일대의 모든 이들이 그 소녀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쓸모가 있겠구나.”
건흠은 빙긋 웃고 돌아섰다.
그러나 다음 순간, 등 뒤에서 엄습하는 세찬 기운에 황급히 돌아서서 검을 휘둘렀다.
카앙
강기를 두른 손이 검에 막혔다.
“……눈에 뵈는 게 없나 보군.”
“크륵.”
다혜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며 다른 손을 휘둘렀다. 뿔과 꼬리처럼 검게 솟은 손톱에는 검붉은 기운이 타오르고 있었다.
“스승도 못 알아보고, 동족도 못 알아보면…….”
건흠은 손으로 다혜의 손톱을 쳐낸 뒤.
“눈은 왜 달고 다니는 거냐?”
다혜의 눈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절묘한 공격이었으나 다혜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피해내고 꼬리를 휘둘렀다. 똑같이 건흠의 눈을 향해서.
‘건방지군.’
꼭 놀리는 듯하다. 건흠 속의 악마는 기분이 묘하게 더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다혜의 꼬리를 잡고 크게 휘둘렀다.
콰아앙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다혜는 별 고통도 느끼지 못한 듯 펄쩍 뛰어 물러났다.
건흠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짜증나는군.’
폭주시켜서 서로 싸우게 만들고 유유자적하게 임무를 마치려 했는데. 그에게 먼저 달려들 줄이야.
뭣보다 20년도 안 된 핏덩어리 잡종과 호각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악마의 속을 들끓게 했다.
그때 건흠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한계인가.’
누가 더 지키고 있을지 모르는데.
곧 협회 놈들도 도착할 것이다. 그 전에 그 사내를 죽여야 했다. 최대한 빨리 이 상황을 타개해야 할 터인데.
이 다혜라는 잡종이 자꾸 그에게 달려들었다.
‘귀찮게 하는군…….’
악마는 혀를 차고 검을 휘둘렀다.
* * *
“마.”
바위 뒤에 숨어서 다혜와 건흠의 전투를 지켜보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태화와 나빛은 뒤를 돌아보았다.
지윤과 은율이 조심스럽게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어케 된 기고?”
“보면 모르냐? 언니 또 뿔나가지고 저러고 있잖아.”
“뿔이 와 났냐꼬.”
“저 악마가 하는 말 듣지 말랬는데도 들어가지고 저래. 진짜 저 언니 때문에 환장…… 악!”
툴툴거리는 태화의 머리에 나빛의 손날이 날아들었다. 태화는 얻어맞은 머리를 싸쥐고 이를 갈았다.
“야이씨, 뒤질래? 왜 때리는데!”
“다혜 언니 욕하지 마! 언니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데!”
“아니 웃기는 년이네. 야, 나는 편히 산 줄 알아?! 내가 저 언니보다 훠어어얼씬 힘들게 살았어! 지는 세상 편하게 자라놓고는 무슨……!”
“싸우지 마.”
은율이 손으로 둘의 입을 막았다.
“상황을 해결하는 게 먼저야. 일단…… 건흠 선생님이 악마인 거지?”
“응.”
“너희 평소에 악마 잡을 땐 어떻게 했어?”
“이걸로.”
나빛은 주머니에서 버튼형 주사기를 꺼냈다.
“마취약이야.”
은율은 그 주사기를 받아들며 건흠과 다혜를 흘끗했다. 둘의 몸에서는 짙은 호신강기가 항상, 온몸에 타오르고 있었다.
은율과 아이들의 능력으로는 뚫을 수 없었다.
“이걸로는 힘들겠는데. 세희는 어딨어?”
“선생님 지키고 있어…….”
“거기도 악마가 있는 거야?”
“아니, 또 다른 악마가 노릴지도 모르니까……. 이츠키도 그런 식으로 당했었거든…….”
“……음.”
해련도 학생들에게 전투의 여파가 미치지 않게 본관 앞을 지키고 있었다. 은율은 그 모습을 확인하고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언니가 정신을 차리게 만들어야 해.”
“응……?”
나빛이 당황했다.
“어떻게?”
“방법을 찾아야지.”
“어떻게……?”
이야기를 듣던 지윤이 아이들 앞에 검지를 들어 올렸다.
“마. 야덜아.”
“응?”
“개쎄게 한 대 때리뿔믄 되지 않겄나?”
“…….”
너무 단순무식한 방법 아니냐. 은율과 나빛의 표정에서는 그런 속내가 드러나고 있었다.
태화는 표정으로 그치지 않았다.
“야. 야, 빠가사리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와 안 되노? 니가 함 맞아바라. 정신이 드나 안 드나.”
“아니 이거 미친년아니야! 꺼져! 그렇게 했다가 실패하면 어쩔 건데!”
“안 하믄 다 뒤진다아이가.”
지윤이 주먹을 꽉 쥐어 눈앞에 들어 올렸다.
“내가 참말로 오지게 때리멕일 자신이 있디.”
“죽이면 안 돼…….”
“무신 소리고. 안 죽는디. 턱뼈 날라간 정도는 고칠 수 있제?”
“……으응.”
나빛이 고개를 끄덕이자 은율이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그럼 우리가 저 두 사람 주의를 끌고.”
“나가 한 대 멕이는 기제.”
“어떻게 주의를 끌지?”
“야, 멍청이들아.”
태화가 혀를 찼다.
“그러니까 언니한테 한 방 먹이는 그 순간만 끌면 되는 거잖아.”
“그니께 그걸 우째 허냐는 거제, 띨빡아.”
“저 둘은 이미 서로한테 정신이 팔려 있다고. 띨빡아.”
태화가 박 터지게 싸우고 있는 건흠과 다혜를 가리켰다.
“어차피 언니를 때릴 거잖아? 그럼 언니의 주의를 돌릴 필요는 없지. 언니는 어차피 저놈한테 집중하고 있으니까. 띨빡아.”
“저 악마 주의만 끌믄 된다 이 말이가?”
“그치. 띨빡아.”
“우째 할 긴데? 글고 니 한 번만 더 띨빡이라 카믄 뿔 분질러뿐디.”
“다 방법이 있지.”
태화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모여 봐. 들리면 X되니까. 붙어, 붙어.”
아이들은 눈을 끔뻑이다가 한데 모여 태화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 *
‘제기랄.’
악마는 속으로 욕을 뱉었다.
시간으로는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다. 불과 몇십 초. 하지만 합으로는 이미 수백 합이 오고간 후였다.
전투를 이어갈수록 몸이 부서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차피 내 몸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남겨 놔야 그자를 죽일 수 있다는 게 문제.
과연 얼마나 남겨야 이후를 대비할 수 있을 것인가. 악마는 신속한 계산 후에 내공을 단전 바닥까지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코피가 줄줄 흘렀다.
‘정말 약해빠진 몸이군…….’
그자를 죽일 때는 진원진기를 끌어다 쓰면 충분하리라.
검에는 어느새 강대한 내공이 모였다. 별 볼 일 없는 인간의 신체 내부에서 나온 마나의 양치고는 꽤나 양이 많았다. 악마는 이 보잘것없는 인간의 육신이 이토록 많은 마나를 품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러나 그 놀라움은, 인간이 현실에서 어떤 거대한 건축물을 볼 때처럼, 신기해하다가도 결국 ‘어떻게든 만들었겠지.’하고 넘겨 버리는 잠깐의 호기심으로 머물 뿐, 결코 인간에 대한 경외심으로는 발전하지 않았다.
그때.
“쌤!”
“선생님!”
밝은 목소리가 교정을 울렸다.
악마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벌써?’
그새 깨어난 것인가. 악마는 식겁해서 남교사 숙소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
악마가 얼이 빠진 순간.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다혜가 비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크륵…….”
‘……젠장.’
악마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손톱을 바라보며, 임무의 실패를 직감하는 그때.
갈색 주먹이 다혜의 얼굴을 후려쳤다.
콰아아앙
“……!”
다혜의 몸이 땅에 데굴데굴 굴렀다.
지윤도 주먹을 휘두른 관성을 제어하지 못하고 다혜와 함께 데굴데굴 굴렀다. 꽉 쥔 주먹에서는 하얀 반탄강기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뭐지?’
악마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해 잠시 몸이 굳었다.
지윤은 그 틈을 타서 벌떡 일어나 다혜를 돌아보았다. 얼굴이 땅에 처박혀 있어서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까.
지윤은 다시 주먹을 단단히 말아쥐었다.
“언니야.”
“…….”
“또 맞기 싫으믄 대답해야 된데이.”
그러자 다혜의 손가락이 꿈틀하더니.
“……느아아악!”
고개를 들고는 강아지처럼 머리를 흔들어 흙을 털어내었다.
“므아아앙! 아으, 아으아으…….”
“으이으이, 마이 아팠나. 근디 와 뿔하고 꼬리가 그대로고. 한대만 더 맞아보자잉.”
“으아으앙!”
다혜는 벌떡 일어나 눈물이 핑 돈 눈으로 지윤을 째려보았다.
안 그래도 근력이 강한 지윤인데 내공으로 강화시킨데다가 반탄강기까지 있으니. 초혼강기를 뚫지는 못하지만 충격의 총량은 폭탄보다 더했다.
역시 매가 약이라고, 사람은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법.
지윤은 주먹을 내렸다.
“얘기 들었디.”
“므아?”
“머 그런 구라에 속고 있노. 제자가 죽었으믄 좋겄다고 생각허는 선생이 으뎄는데.”
지윤의 손이 다혜의 어깨를 잡아 건흠을 향해 돌려세웠다.
“잘 보래이. 쩌그는 쌤이 아이고 악마디. 언니야가 알던 쌤이 칼로 사람 죽일라 카드나?”
“……느아.”
“아이제?”
다혜는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움켜쥐려다가 손에 검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했다.
“므아!”
“찾을 시간 읎다.”
건흠은, 악마는 이미 정신을 차리고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더 이상 방해하지 못하도록 아예 박살을 내 놓으려는 듯했다.
검에 서린 기운이 지윤과 다혜의 심장을 짓눌렀다.
“막을 수 있제?”
“……므아.”
“방금 전까지 잘만 싸웠다 아이가.”
지윤은 버튼형 주사기의 안전캡을 뽑고 다혜에게 넘겼다.
“언니야네 담쌤, 우리가 구해뿔자꼬.”
“늦었다.”
악마는 다시 평정을 되찾아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서로 시간 낭비는 그만하도록 하지.”
그리고 검을 내리쳤다.
거대한 중압감이 둘을 내리눌렀다. 꿈쩍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덩굴이 발목을 휘감은 듯이 피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둘은 침착하게 검을 되받아치려 손을 뻗었다. 지윤은 주먹을, 다혜는 손톱을 세워서.
그 순간.
‘윽……?!’
건흠의 팔이 잠시 멈췄다.
악마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의 안에 들어있는 영혼이 검을 휘두르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1초도 안 되는 시간. 찰나와 다름없는 시간.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아주 짧은 동안.
그 잠깐으로 충분했다.
“언니!”
“므아!”
다혜는 건흠의 가슴팍에 버튼을 휘둘렀다. 손에 검붉은 초혼강기를 두르고서.
악마는 그 버튼의 한가운데에 뾰족하게 튀어나온 바늘을 보았다.
‘……제기랄.’
이런 잡종 따위에게 지다니.
‘오늘은 정말로…….’
재수 옴 붙은 날이다.
악마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 * *
풀썩……
가슴에 버튼이 박힌 건흠이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다혜는 건흠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자신의 손에 갑옷처럼 둘러진 검은 비늘과 발톱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아으……아?”
“까리하네.”
지윤은 다혜의 꼬리가 난 엉덩이를 툭 쳤다.
“느악!”
“꼬리도 꺼칠~허이 누구 꺼보다 훨 낫구마. 걍 그래 살아도 나쁘지 않을 기라.”
“므앙!”
“내한테 그래도 못알아듣는디.”
“꾸웅…….”
다혜는 어쩔 줄 몰라하며 뿔과 꼬리를 만지작거리다가, 곧 쓰러진 건흠에게 생각이 미쳐 그 옆에 무릎을 꿇었다.
감은 눈. 얕은 숨.
마치 잠을 자는 것 같았다.
“……아으.”
“걱정허지 마라.”
지윤이 다혜의 등을 두드렸다.
“쌤이 그랬다 아이가. 언젠가 다 깨울기라고……. 언니야네 쌤도, 이츠키도, 무사히 돌아올 기다.”
“아으…….”
“여기 있을 기가?”
“므웅.”
“알았다, 그럼 보고 있으래이.”
지윤은 다혜를 놔두고 돌아섰다.
뒤쪽에는 싸움의 여파를 막느라 만신창이가 된 해련, 그런 해련을 치료하는 나빛, 그리고 멀뚱히 선 태화와 은율이 있었다.
해련이 소매를 내리며 말했다.
“됐다, 나빛아. 이제 주 선생 치료해 줘.”
“네.”
지윤은 건흠을 향해 달려오는 나빛의 곁을 스쳐 지나며,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태화를 의기양양한 얼굴로 삐딱하게 내려다보았다.
“부대네 뭐네 해도 할 줄 아는 기 없구마이.”
“뭐? 야, 작전 내가 짰거든?”
“작전은 내가 먼저 짰지 무신 니가 먼저 짰노. 언니야헌티 죽빵을 날리불자는 기를 니가 말했다꼬?”
“나 아니었으면 닌 가까이 가기도 전에 죽었어! 어이가 없네. 목숨을 살려줬더니 이걸 이렇게 갚는다고?”
“내랑 은율이가 와서 도와준 기지. 우리 안 왔으믄 느덜이 죽었제.”
“띨빡새끼…….”
“태화 욕하지 마!”
“넌 치료나 해, 등신아!”
싸움이 부족했는지 또 티격태격하는 아이들. 그리고 멀리에서 창틀에 기대어 그들을 지켜보는 한 소녀.
세희는 박살이 난 학교와 멀쩡한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보들.’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