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화>
405.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더라도
“상호야, 왜 못 알아봐? 내가 진짜라니까?”
“아니야, 상호야. 내가 진짜야…….”
“너 누나랑 겨우 이 정도였니? 응? 누나 실망이야!”
“상호 미워…….”
“……그만!”
상호는 견디다 못해 버럭 소리쳤다.
분명 둘 중 하나는 새끼고 하나는 자기인데, 쌍으로 바가지를 긁으니 열불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었다. 대체 어느 쪽이 처죽여야 할 악마 새끼란 말인가.
‘개같은 새끼, 악마 주제에 애교를 부리고 눈물을 흘리고…… 지랄 염병을 해요 아주.’
이가 부득부득 갈렸다.
그런데 그가 화를 내자 예경들의 반응이 나뉘었다. 한 명은 눈치를 보면서 쪼그라들고, 한 명은 눈물을 글썽이며 따졌다.
“미안해…….”
“상호 나한테 화내는 거야? 어떻게 누나한테 그래? 누나 울 거야, 흐헝엉헝…….”
‘…….’
기억이 같아도 나뉘는 반응.
과거는 같아도 미래는 다를 수 있다. 상호는 이 일을 해결할 실마리를 잡았다.
‘이 방법뿐이다.’
곧 그의 입이 열렸다.
* * *
“……으음.”
해련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본관의 벽돌벽에 처박혀 있었다. 본관으로 향하는 건흠의 공격을 막으려다가 크게 낭패를 본 참이었다.
아이들을 지켜야 하는 그녀의 입장으로는, 학교에서 대등한 전투를 벌이기가 힘들었다.
“격투에는 능통해도 전투에는 미숙하군.”
건흠의 조롱에 해련의 눈 밑이 꿈틀했다.
하지만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이어질 후속타를 대비하는 것도 힘겨워서.
“그대로 처박혀 있어라.”
돌아서는 건흠의 앞에 황금색 창이 박혔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잠깐이라도 반응했겠지만, 건흠은 단 0.1초도 주춤하지 않고 남교사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방해물은 해련뿐이었고, 그 외에는 길가에 밟혀 죽은 지렁이만큼도 못 된다는 것처럼.
무시당한 나빛이 발끈하며 성창을 집어던졌다.
“으……!”
퍼억
성창이 건흠의 다리를 쳤다.
건흠은 발로 차서 간단하게 성창을 부숴 버렸다. 별 힘도 들이지 않고.
그런 뒤 지렁이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빛을, 그리고 그 옆의 태화를 바라보았다.
“죽고 싶다면야 못 죽여줄 것도 없지.”
건흠의 손가락에서 지탄이 쏘아졌다.
슈욱
눈 깜빡할 사이.
지탄은 보호막을 뚫고 나빛의 코앞까지 다다라 있었다.
“……으.”
나빛이 멍한 신음을 흘리는 순간.
쐐액
무언가가 쏜살같이 날아와 나빛과 태화를 보호막째로 쳐냈다. 나빛은 빙빙 도는 시야 속에서 검을 찬 소녀를, 그 소녀의 얼굴을 보았다.
휘둥그렇게 뜬 눈.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아으.”
다혜는 건흠을 바라보며 멍한 목소리를 흘렸다.
“다혜 왔니?”
건흠이 사람 좋게 웃으며 검을 들었다.
“선생님이 좀 바쁘단다. 방해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으아?”
잠시 얼이 빠진 듯 서 있던 다혜는 정신을 차리고 검을 겨눴다.
“아으.”
“이런…….”
건흠은 그런 다혜를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혀를 쯧 찼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선생님에게 민폐만 끼치는구나.”
“……느아?”
“늘 귀찮았단다.”
건흠의 입에서 엷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고아라서 챙겨야 할 게 어찌나 많은지. 다른 아이들은 부모님이 다 해주는 걸 내가 대리인을 서 줘야 하고, 또 우리 반 아이들은 너 때문에 부모님 이야기를 맘놓고 하지 못했어. 그래서 네가 사라졌을 때는…… 솔직히 다행이다 싶었다.”
“…….”
다혜의 눈이 흔들렸다. 검을 쥔 채로 꼼짝도 않은 채.
그 모습을 본 태화가 어이없어하면 소리쳤다.
“아니 이 바보야! 저건 악마라고! 악마 말을 믿어서 뭐하자는 거야!”
“……므으.”
하지만 다혜는 좀처럼 마음을 가다듬지 못했다.
눈은 텅 빈 허공을 응시하고, 입은 넋이 빠져나간 듯 벌어져 있고.
검을 쥔 손은 당장에라도 검을 떨어뜨릴 것 같았다.
그래도.
“아으!”
다혜는 검을 힘껏 움켜쥐고 건흠을 향해 달려들었다.
“정말 쓸모없는 제자로군.”
건흠은 혀를 차고 거무튀튀한 보라색 강기를 다혜에게 날렸다.
처음 보는 색. 분명 스승의 강기가 아니었다. 다혜는 붉은 초강기를 검에 둘러 강기를 받아치려 했으나, 악마의 강기는 다혜의 초강기를 뚫고 검을 베어버렸다.
“……느흑!”
다행히 빠르게 몸을 비틀어 강기를 피할 수 있었다.
그때 틈을 노리던 해련이 다시금 건흠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건흠은 가볍게 본관을 향해 강기를 뿌렸다.
방어할 수밖에 없다.
“흐읍……!”
해련은 강기의 앞으로 가서 끌어모은 내공을 폭발시켰다.
콰아앙
보라색 강기의 궤도가 바뀌어 하늘로 날아갔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학교를 지키는 것이 고작. 해련은 본관에서 뛰쳐나온 선생들에게 소리쳤다.
“학생들 다 대피시켜! 학교 밖으로! 선생들도 같이 모여 있어!”
“네, 넵……!”
선생들은 다시 우르르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건흠과 대치한 아이들, 다혜, 태화, 나빛. 세 아이들은 교대로, 또는 협동해서 건흠에게 공격을 퍼부었지만 건흠의 호신강기를 뚫을 순 없었다.
다만 건흠도 아이들에게 유효타를 먹이진 못했다. 한 명을 노리면 다른 한 명이 공격하는데다가 해련까지 꾸준히 견제를 해 줘야 했기에.
결국 건흠은 잠시 검을 멈췄다.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할까.”
“……므아.”
다혜는 듣기 싫다는 듯 검을 치켜들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건흠은 말을 이었다.
“어디까지 말했더라. 그래, 네가 사라졌을 때. 정말 편했어. 네 뒤치다꺼리를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너 하나 더 신경쓰겠다고 다른 아이들에게 소홀해지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내 업을, 내 일을, 방해하는 아이가 사라져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 그것도 내 잘못이 아니라 네 잘못으로. 덕분에 양심의 가책도 없었어.”
“…….”
“그런데 살아서 돌아오더구나.”
건흠이 킥 웃었다.
“놀랐다. 정말로. 그 지긋지긋한 나날을 다시 겪어야 한다니. 그것도 벙어리에, 유급까지 추가로. 고아이기만 해도 일이 많은데 장애에 유급? 하하……. 지뢰를 밟은 게지. 심지어는 가끔 정신줄을 놓더니 실제로 터지기도 하더라.”
“…….”
“차라리 죽었다면.”
다혜의 몸이 움찔했다.
“꾸역꾸역 돌아오지 말고 차라리 거기서 죽었다면……. 그래도 뭐, 살아 돌아온 걸 내 손으로 죽일 수는 없지 않겠니. 맘 같아서는 그냥 학비를 핑계로 자퇴시키고 싶었다만…… 우리 학교 선생들이 너무 정이 많아서 말이야. 나도 거기에 맞추지 않으면 내 앞길에 문제가 되거든. 여러 가지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내 사비를 털어서 네 학비를 냈다. 그것 때문에 아내와도 참 많이 싸웠지. 제자 학비를 왜 당신이 내냐고. 붙어먹은 거 아니냐고…….”
“…….”
“나도 죽고 싶었다.”
건흠은 돌처럼 굳어버린 다혜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결국 다 지난 일이지만…… 지금까지 한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다. 네가 알고 있는 이 주건흠이란 사람의 기억이야.”
믿을 거면 믿고 말 거면 말라는 듯.
“방금 이야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네가 제일 잘 알고 있겠지.”
다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그 이야기들에 진실이 상당히 많이 섞여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기에.
어쩌면 그녀의 생각보다도 많을지 몰랐다.
혹은 전부가.
검을 쥔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
해련은 악마가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하는지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다혜야, 아니야! 주 선생은 절대 그런 인간이…….”
“진실은 너만이 알고 있다.”
건흠이 낮게 속삭였다.
“네가 아는 게 진실이야.”
“…….”
다혜는 천천히, 더 낮게 고개를 숙이더니 갑자기 우뚝 멈췄다.
얼굴의 옆에 머리카락이 드리워져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해련은 마음을 졸이며 다혜를 불렀다.
“다혜야.”
그 드리운 머리카락 안에서.
“……크륵.”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 * *
창밖이 요란스럽다.
쾅, 쾅. 무언가 터지고 부서지고 무너지는 소리. 누가 들으면 전쟁이라도 난 줄 알 것이다.
하지만 세희는 검을 어깨에 기댄 채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게 내 임무야.’
상호가 무사히 깨어날 수 있도록 지키는 것.
그 외의 모든 것은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난 여기만 지키면 돼…….’
실은 나가서 돕고 싶었지만.
악마가 또 있을지도 모르고, 눈먼 공격이 날아와 상호를 다치게 할지도 몰라서.
기를 사방에 엷게 펼친 채로, 이렇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설령 다른 모든 이들이 저 밖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선생님.’
눈을 감은 채로 미동도 않는다. 세희는 상호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말을 걸었다.
‘얼른 일어나셔야 해요…….’
세희는 검을 움켜쥐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제발.’
야속하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 *
“뭐?”
왼쪽 예경이 어안이 벙벙해했다.
“죽으……라구?”
“응.”
상호는 태연한 표정으로 강검을 만들었다.
“둘 다 죽어줘.”
“무슨 소리야……?!”
“아니 뭐, 애초에 죽은 사람이고. 자꾸 내 인생에 간섭하는 것도 영 좋지 않은 일이니까. 이렇게 된 이상 어쩌겠어. 그냥 악마랑 같이 죽일게.”
“너…….”
“딱히 사랑하지도 않았어.”
“네가 어떻게……!”
왼쪽 예경은 화를 냈지만, 오른쪽 예경은 멍하니 상호를 바라보았다.
상호는 그 둘의 반응을, 눈동자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관찰하며 강검을 들어 올렸다.
“달리 방법이 없잖아. 날 위해 죽어줘.”
그 말에 왼쪽 예경이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이윽고 환하게 웃었다.
“그래.”
상호가 잘 아는 미소였다.
“어쩔 수 없네. 널 위해서라면야. 나는…….”
“사랑 안 했어?”
“……응?”
오른쪽 예경이 상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붉은 눈시울로. 코를 훌쩍이면서.
“상호 이제…… 누나 안 좋아해?”
“응.”
“그렇구나…….”
오른쪽 예경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죽을게.”
그 모습에 확신이 들었다.
상호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검을 휘둘렀다.
촤아악
왼쪽 예경의 얼굴에 세로로 선이 생겼다.
“……어?”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나?”
반응이 갈릴 수밖에 없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상호는 자신이 그 말을 했을 때 예경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고 있었다.
기억을 훔쳐도 결국 악마일 뿐.
“꺼져.”
상호는 긴말 않고 강검으로 한 번 더 베었다.
“킥…….”
왼쪽 예경의 모습이 일그러지더니 흐릿하게 검은 그림자가 비쳤다.
“너는…….”
어디선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너희가……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지…….”
“관심 없어.”
헛된 발악이다.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마음을 흔들어 보려는 것뿐.
상호는 악마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었다.
“그냥 빨리 꺼져주기나 하라고.”
“킥킥킥…….”
악마는 몸을 들썩이며 웃다가 광소를 터트렸다.
상호가 처음 날린 참격으로 악마의 몸이 반으로 갈라지려는 순간, 악마가 갑자기 손을 들어 검지로 예경을 가리켰다.
그 끝에 검은 기운이 맺혔다.
‘……!’
상호는 황급히 검을 뻗었지만, 검은 기운은 이미 예경의 복부를 꿰뚫고 있었다.
예경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윽.”
“누나!”
상호는 쓰러지려는 예경의 몸을 끌어안고 악마를 노려보았다.
깔깔 웃던 악마는 흐릿한 그림자로 화하더니, 곧 검은 불꽃에 휩싸여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젠장.’
언젠가는 현실에서 죽여주겠다. 그는 그렇게 다짐하며 이를 갈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품에 안긴 예경이 식은땀을 흘리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상호야…….”
“네.”
“진짜로 안 사랑했어……?”
그걸 믿었나. 상호는 당황해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
“아니 그럼…… 그게 진짜겠어요?”
“그렇지……?”
예경이 배시시 웃었다.
“그치…… 그럴 리가 없지…….”
“힘들면 말하지 마요. 잠깐 쉬어요.”
“괜찮아. 이 정도론 안 죽어…….”
상호를 바라보던 눈이 스르륵 감겼다.
“조금만…… 쉴게. 쉬면 나을 거야…….”
“……누나.”
상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눕힐 만한 곳이 없을까. 그는 교실을 둘러보다가 찾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손을 뻗어 침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침대에 예경을 눕히고, 약과 붕대도 만들어 상처를 치료했다. 이게 영혼에게도 효과가 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는 있을 거라 믿었다.
“쉬고 있어요.”
“으응…….”
예경은 희미하게 웃고 상호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
“뭐가요.”
“또 이런 모습 보여서…….”
상호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괜찮아요. 누나는 나아주기만 해요.”
“응…….”
예경이 눈을 감자 가쁘던 숨이 점점 고르게 되었다.
그렇게 잠에 빠져도 상호의 손만은 놓지 않았다.
‘누나.’
상호는 잠든 예경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누나가 없으면…… 내가 너무 외로워져요.’
이 길의 끝에는 예경과 함께여야 했다.
그는 그렇게 손을 잡은 채로 하염없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계속, 계속. 영원할 것처럼.
죽음도 두 사람을 갈라놓지 못한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