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화>
404. 막을 수 없는
“므앙.”
다혜가 코를 훌쩍이며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낙서를 했다.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이 미진의 감독 하에 대련을 하고 있었다.
“……느우웅.”
다혜의 입에서 한숨이 폭 쏟아졌다.
요즘은 상호가 수업에 나오지 않아서 대련을 하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게다가 그런 날이면 세희까지 없어서 같이 놀 사람도, 말을 알아듣는 사람도 없었다. 심심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렇다보니 만만한 게 아리였다.
“므우아아앙.”
“언니? 잠깐만…….”
“후루루룹.”
“흐익……!”
아리는 뒷목을 빠는 다혜의 혀를 느끼며 몸서리를 쳤다.
그래도 다음 대련 순서는 아리와 미래. 곧 있으면 미진이 아리의 이름을 불러줄 것이다.
그런데 미진이 아리와 다혜를 흘끗하고는.
“미래, 하솔이. 준비해.”
“네.”
“선생님……?”
왜 하솔이 한 번 더 나가는 걸까. 아리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미진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으니. 상호의 수업을 대신하는 동안에는 다혜를 최대한 자극하지 말라는 해련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지윤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쟈들 머하노?”
하늘에 떠 있는 황금색 구체. 안에는 태화와 나빛이 앉아 있었다. 무언가를 찾는 듯이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아이들도 나빛과 태화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 찾는 건가? 선생님 찾나?”
“마, 미래야. 니 핸드폰 있제?”
“응.”
핸드폰을 꺼낸 미래의 주변으로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대련을 끝낸 이서와 가은도. 미진까지도.
곧 핸드폰에서 나빛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미래야.]
“언니들 뭐해?”
[악마 찾고 있어.]
“뭐?”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악마가 학교에 있어?”
[응, 태화가 느끼기로는 그렇다는데…… 태화야, 진짜 맞아? 잠이 덜 깬 거 아냐?]
[돌겠네 진짜. 확실하다니까! 니가 악마 해 보든가!]
악마가 학교에 있다니.
당황해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미진이 물었다.
“강 선생님은 어딨어?”
[방에서 운기조식하고 계세요. 중요한 일인가 보던데…….]
“그럼 악마 잡는 걸 너희한테 맡긴 거야?”
[상호 선생님은 아직 모르세요. 악마 오기 전에 시작하셨어요.]
“안 깨웠어?”
[아마…… 운기조식을 시작하면 악마가 올 거라고 알고 계셨던 것 같아요.]
운기조식이 악마 잡는 것보다 중요한가. 미진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따지는 것보단 해결하는 게 중요했다.
“그럼 세희는?”
[상호 선생님 지키고 있어요.]
“협회에는 신고했어?”
[세희가 부협회장 아저씨랑 교장선생님께 전해드리겠다고 했어요.]
“……일단 알겠어.”
미진은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우리는 해결될 때까지 여기 가만히 있을 거야. 누가 가까이 오려고 하면 무조건 거리 둬.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말고. 너희가 아는 사람이라도. 알겠지?”
“네.”
“화장실 갈 사람은 나한테 말하고 같이 가.”
“네.”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미진의 손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나빛은 세희가 해련에게 알렸다 했지만, 확실히 확인해 둘 필요가 있었다.
‘설마 당하지는 않으셨겠지…….’
핸드폰 화면에 해련의 번호가 띄워졌다.
* * *
복도를 한가로이 걷는데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뭐지?’
해련은 그들에게 다가가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학생들과 선생들 사이에 한 여인이 쓰러진 게 보였다.
학교 사람은 아니었다.
“뭐야, 무슨 일이예요?”
“아, 교장선생님…….”
마법사 반을 맡은 선생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여기 이분이, 갑자기 쓰러져서…….”
“갑자기 쓰러졌다고? 치료사는 불렀어요?”
“네. 쓰러진 지 얼마 안 됐어요. 교장선생님 오시기 직전에 바로…….”
“어쩌다가? 그냥 픽 쓰러진 거예요?”
“아니요, 건흠 선생님이랑 이야기하다가…….”
“주 선생이랑?”
“네.”
해련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럼 주 선생은 어디 갔어?”
사람이 쓰러졌는데 조치도 않고 어디로 갔는가. 그 물음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모르겠어요. 그냥 쓰러지자마자 어디로 달려가던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못 들었고?”
“네.”
들으면 들을수록 오리무중이었다.
해련은 여인의 상태를 살피다가 주변에 피 몇 방울이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
‘설마…….’
해련은 내공을 뻗어 여인의 양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했다.
한쪽 손에 작은 상처.
그리고 피가 묻은 압정을 들고 있었다.
‘……!’
해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때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해련은 발신인이 상호인 것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강 선생?”
[교장선생님.]
소녀의 목소리였다.
[저 세희예요. 지금 선생님 핸드폰으로 걸고 있어요.]
“세희야. 빨리 말해야겠다. 지금 바빠서…….”
[학교에 악마가 있는 것 같아요. 태화가 감지해서 지금 찾고 있는데, 저는 선생님 지키느라 못 가고 있어요.]
“선생님은 지금 뭐 하고 있니?”
[심상 속 악마 없애려는 중이세요. 제가 지켜야 돼요.]
그 말에 해련은 창문을 드르륵 열어젖혔다.
“강 선생을 노리고 있는 거야?”
[그런 것 같아요. 죄송한데…… 교장선생님이 태화랑 같이 찾아 주세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네?]
그녀의 몸이 창밖으로 쏘아져 나갔다.
“이미 찾은 것 같거든. 그래서, 악마는 어떻게 잡는 거야?”
[마취약이 있어요. 나빛이가 챙겼을 거예요. 걔들 지금 날아다니고 있으니까 하늘에 신호하면 바로 올 거예요.]
“그래.”
저 멀리에 남교사 숙소를 향해 다가가는 건흠이 보였다.
해련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검을 뽑았다. 아직 허공에서 몸을 날리는 도중이었다.
휘두른 검에서 금빛 강기가 쏘아졌다.
쐐액
주의를 끌기 위해 대충 던진 공격이었다.
강기는 건흠의 발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건흠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퍼억……
가볍게 터져 오른 흙의 비 사이로, 건흠이 해련을 돌아보았다.
“교장선생님?”
“주 선생.”
건흠과 남교사 숙소 사이에 해련이 착지했다.
그녀가 건흠을 노려보는 눈빛에서는 평소의 인자함이나 존중 따위는 한 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예의를 차릴 필요도 없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속일 생각은 마라.”
해련은 검지를 들어 하늘을 향해 지탄을 쏘았다.
지탄은 하늘 높이 올라가 폭죽처럼 터지며 금색 파편을 사방에 흩뿌렸다.
“다 알고 왔으니.”
“그렇습니까.”
건흠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예의를 차리는 것이 꼭 평소의 건흠과 같았지만, 해련의 확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건흠 속의 악마는 대놓고 검을 뽑더니.
“애초에 속일 생각도 없었습니다.”
검에 강기를 두르고 해련을 향해 달려들었다.
푸르던 강기에 붉은빛이 감돌더니, 거무튀튀하고 불그죽죽한 보랏빛이 되어 화르륵 타올랐다. 불꽃처럼 맹렬하게.
‘주 선생이 초강기를……?’
해련은 당황하면서도 침착하게 검을 내밀어 잠시 강기를 맞대 보기로 했다.
금빛 강기와 보랏빛 강기가 닿았다.
지지직……
보랏빛 강기가 금빛 강기를 뚫고 칼날을 파고들었다.
‘……!’
해련은 곧바로 땅을 박차고 뒤로 빠졌다.
다혜의 때와 같다. 평범한 초강기가 아니다. 강기 대 강기의 맞상대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내공을 뽑아 건흠을 잡아두려 했지만, 건흠은 온몸에 초강기를 두르고 해련의 내공을 몰아내고는.
번개처럼 빠르게 달려들었다.
‘……빠르다.’
거의 그녀만큼 빨랐다. 어쩌면 그녀보다도 더.
해련은 진땀을 흘리며 건흠의 검을 피했다. 그때 그녀의 눈에 건흠의 몸에 불거진 핏줄이 들어왔다.
‘무리하고 있나.’
근육도, 핏줄도, 혈맥도.
악마는 속전속결로 해련을 쓰러트릴 심산인 모양이었다. 아마 최대한 빨리 상호를 죽여야 할 이유가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해련의 역할은 악마를 최대한 잡아두는 것.
‘강 선생이 언제 깨어난다는 보장은 없지만…….’
해련은 슬쩍 발을 걸어 건흠을 넘어뜨렸다.
비록 강기는 악마가 더 강하지만, 검술과 체술은 해련이 몇 수 위. 건흠의 지식과 악마의 지식을 합쳐도 해련에겐 상대가 되지 않았다.
거기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나는 실전 경험도 있고.
‘게다가 내가 더 어리지.’
해련의 육체는 지금이 전성기였다.
다혜 때는 학생을 죽일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밀리기만 했지만, 지금 그녀가 상대하는 이는 프로 헌터.
싸우다 죽는 것을 업으로 삼는 이들이니만큼, 필요하다면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러고 싶지는 않지만.’
건흠도 이해할 것이다.
그렇게 믿으며, 해련은 넘어진 건흠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꽈아앙
일대가 뒤흔들리며 땅이 깊게 패였다.
반구형의 크레이터 한가운데에 처박힌 건흠이 로봇처럼 바로 일어나려 했지만, 해련은 틈을 주지 않고 주먹을 휘둘렀다.
쾅 쾅 콰앙
건흠의 몸이 흔들릴 때마다 땅도 함께 울렸다.
다혜 때와 다른 또 한 가지 사실은, 내공의 양. 다혜의 경우에는 용혈이 인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막대한 내공을 지원해 주지만, 건흠은 해련보다 내공의 총량이 훨씬 적었다.
소모전으로 끌고 가면 마취제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제압할 수 있다. 그래서 해련은 주먹을 멈추지 않았다.
“후우…….”
잠시 숨을 고르는 그때.
건흠이 그녀를 바라보며 킥 웃었다.
“그 몸이 더 좋아 보이는군.”
건흠의 검지가 뒤틀리며 저 혼자 떨어져 나갔다.
그 떨어져 나간 자리에서 보랏빛 강기가 솟더니, 건흠이 해련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새빨간 피를 궤적에 흩뿌리며.
해련은 반사적으로 건흠을 걷어차고 뒤로 뛰었다.
지이익
양복 어깨 부분이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쳇.”
공격을 이어가기 좋은 구도였는데.
아까처럼 쉽게 당해주진 않을 것이다. 해련이 몸의 긴장을 끌어 올리며 검을 추켜세우는 그때.
해련의 머리 위로 황금빛이 내려앉았다.
“교장선생님!”
위를 올려다보니 나빛과 태화가 보호막 속에 앉아 있었다.
“괜찮으세요?”
“으응.”
“세희한테 이야기 들으셨어요?”
“응.”
“그럼…….”
나빛이 착잡한 눈빛으로 건흠을 돌아보았다.
“건흠 선생님이…….”
“나빛아. 마취제 있지?”
“네.”
감상에 젖을 시간은 없다. 해련은 나빛에게서 동그란 버튼을 받아 들었다.
“어떻게 쓰는 거니?”
“안전캡 따고 몸에 찌르시면 돼요.”
확인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었다.
“태화야. 악마가 학교에 더 있는지도 알 수 있니?”
“어, 그게……. 느낌이 쪼금 애매해서…….”
“못한다는 이야기구나.”
“네에.”
그 말에 해련은 검을 집어넣고 버튼을 꼭 쥐었다. 주변에는 강검이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었다.
“그럼 여기서 교장선생님 좀 도와주렴.”
“넵.”
해련의 몸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 * *
“멍…….”
단비가 힘없이 꼬리를 이리저리 내려놓았다. 왼쪽에 툭. 오른쪽에 툭.
주변에는 아이들이 축 늘어진 채 스탠드에 앉아 있었다. 서 있는 것은 미진 혼자뿐.
본관 너머에서는 계속 쾅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싸우고 있나 봐, 멍…….”
“언니들이겠지?”
“그렇겠지…….”
지윤이 미진을 돌아보았다.
“지들도 가서 도우면 안 되입니꺼?”
“안 돼. 여기 가만히 있어.”
미진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해련은 연락을 받지 않았다. 폭발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이미 상황을 인지하고 바빠서 못 받은 것일 터였다. 확신은 할 수 없었지만.
그때 다혜가 갑자기 고개를 퍼뜩 들었다.
“……므아?”
“머고. 와 그라는데.”
지윤이 물어도 다혜는 반응을 하지 않았다. 멍한 눈으로 본관 너머 하늘을 바라볼 뿐.
그러다가 갑자기 몸을 움찔 떨고는.
“……아으!”
벌떡 일어나서 땅을 박차더니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본관을 훌쩍 뛰어넘었다.
A급 헌터 따위가 제지할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다혜야?! 다혜야……!”
미진이 다급히 소리쳤지만, 다혜는 무시하고 본관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이번엔 지윤과 은율이 펄쩍 뛰어올랐다.
“제가 잡아올게요.”
“위험하이까 지가 대신 따라갈게예. 쌤은 아덜이랑 있으이소.”
“얘들아……!”
아이들은 미진의 애타는 부름을 무시하고 다혜를 따라갔다.
남아있는 3학년은 한 명. 나디아는 미진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본관 중앙현관 쪽으로 뛰어가려 했다.
미진은 그래도 나디아를 붙잡을 정도는 되었다.
“안 돼, 나디아. 너는 여기 남아.”
“나 족발 아니다! 맨날 놀리는 태화! 너 족발! 너 족발! 너 족발이잖아!”
“그건 아마 족발이 아니라…….”
“미진 선생님 족발? 족발? 헌터는 두려움을 위험하지 않는!”
“나는 너희들 지키는 게 일이야……. 악마가 하나가 아닐지도 모르잖아. 나도 너도, 여기서 동생들이랑 있는 게 강 선생님이랑 친구들 도와주는…….”
“족발!”
“……끄응.”
미진은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