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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여고의 남선생-402화 (402/501)

<402화>

402. 눈을 뜨다

“바로 간다고?”

밥상머리에 앉은 노파가 문가를 돌아보았다.

“뭐가 그리 바빠서 한 술도 못 뜨고 가냐?”

“1초도 낭비할 수 없는 일이 있어서요.”

상호는 마루에 앉아 신발을 신으며 대답했다.

“한가해지면 또 올게요. 조금 나중이 되겠지만…….”

“일만 하다 죽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노파는 혀를 차고 손을 내저었다.

“그래. 가라. 다음에 올 땐 뭐라도 좀 사오고. 어떻게 어린애를 맡겨놓고 빈손으로 올 수가 있냐?”

“네에…….”

“잠깐만요.”

밥을 먹던 혜소가 벌떡 일어나 안방으로 달려갔다.

종종걸음으로 돌아온 혜소의 손에는 염주가 가득 들려 있었다.

“가져가세요.”

문양이 그려진 나무 염주알과 복잡한 매듭. 상호는 염주들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물었다.

“혜소 네가 만들었어?”

“네.”

“가져가서 팔라고? 얼마에?”

혜소의 조그마한 손이 상호의 종아리를 찰싹 쳤다.

“왜 팔아요? 팔지 마요.”

“아니, 그럼 왜 이렇게 많이…….”

“언니들 나눠주라구요.”

혜소는 염주를 쥔 상호의 손을 말아쥐게 했다.

“팔면 저주 걸려요. 절대 팔지 마요.”

“……으응. 근데 무슨 염주야?”

“나쁜 사람들을 쫓아내는 염주요. 고모랑 할머니께도 드렸어요. 넉넉히 만들었으니까 언니들하고 중요한 사람한테 나눠주세요. 특히…… 이츠키 언니한테.”

“응.”

상호는 살짝 웃었다.

“꼭 깨울게.”

그리고 돌아서서 담벼락을 훌쩍 뛰어넘었다.

공중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마당에 선 혜소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혜소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북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를 잠시 쉬게 해주었던 짠 바다 냄새가 점점 옅어져 갔다.

* * *

“잘 갔다 왔냐?”

“어.”

상호는 도현이 던진 이츠키의 핸드폰을 낚아챘다.

“잘 있더라고. 내 생각을 읽은 건 아니었나 봐.”

“그럼 너 어려진 건 어떻게 알고 애들을 공격한 거야?”

“글쎄, 아마 내 어려지는 주기를 알고 있거나, 이츠키처럼 사람의 실이 보여서 누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다든가…… 이쪽이 좀 더 가능성이 높을지도.”

“그럼 그 애가 가진 게 악마의 눈일 수도 있겠네?”

“……그럴지도 모르지. 근데 태화는 그런 걸 못 보는 걸 보면…… 그냥 다른 어떤 몬스터의 눈일지도.”

특별한 눈이라는 건 분명하다.

지금 제일 필요한 게 바로 그 눈. 상호는 이츠키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어젠 어땠어? 어제도 빙의자 있었어?”

“아니. 다행히 어제는 없었…….”

삐이이이──

“……이젠 있네.”

도현이 경보기를 끄고 상호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할 거야. 너도 출동할 거야?”

“그래야지.”

태화라도 데리고 찾아야겠다. 상호는 이츠키의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돌아섰다.

“애들 데려와서 출동할게.”

* * *

“죄송함다~.”

태화는 앞을 지나가는 여인에게 허리를 꼬박 숙였다.

그 옆에서는 상호가 수십 명의 사람들을 세워놓고 일일이 악마 인자를 검사하고 있었다. 채혈기로 피를 뽑아 검사기에 떨어뜨리며.

한 여인이 유모차를 잡아당기며 불안해했다.

“아기도 해야 해요?”

“네.”

상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기가 누굴 해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또 악마가 굳이 아기한테 들어갈 것 같지도 않았지만.

일을 두 번 하게 만들 필요는 없으니.

“안 아프게 하겠습니다.”

그는 그 말대로 했다.

바늘에 찔려 우는 아기를 허공섭물로 둥실둥실 띄워 달래주고, 여인 또한 검사를 마친 뒤 결과를 확인하고 보내주었다. 그렇게 사람이 반으로 줄어들 때까지 악마는 나오지 않았다. 도망치는 이도 없었다.

상호는 태화에게 속삭였다.

“야, 태화야.”

“웅.”

“여기 있는 거 맞아?”

그 말에 태화는 영 자신이 없는지 사람들을 쓱 훑고, 또 주변을 쓱 훑고.

볼을 긁적이다가 까치발을 들어 상호의 귀에 속삭였다.

“몰라.”

“얌마…….”

“아까부터 계속 느껴지긴 하거든? 근데 여기 이 사람들 중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 주변에 숨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역시 이츠키가 없으면 안 되나.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지. 얘도 이게 최선이고…….’

“자, 다음 분.”

한참을 기다리다 검사를 받게 된 이들이 상호와 태화를 째려보았지만, 대놓고 뭐라 하지는 않았다. 태화는 검사를 받고 성난 걸음으로 떠나는 이들에게 허리를 꼬박 숙였다.

“죄송함다~.”

* * *

그러기를 며칠.

빙의자를 잡은 날도, 잡지 못한 날도 있었다. 이츠키가 없어도 생각보다 많은 것이 달라지진 않았다. 그저 잡지 못한 날은 시체가 한두 구씩 더 발견되었을 뿐.

“서울에선 하루에도 몇백 명이 죽는다.”

도현은 창밖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사람 열 몇 명 더 죽는다고 사회가 물리적으로 무너지진 않아. 그렇지만…… 늘 그렇듯이 문제는 마음속에서 오는 거지.”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악마에게 가족을 잃은 이들이 시위를 하고 있었다. 규모는 대략 200명 정도.

까마득한 아래쪽이었지만 도현과 상호에게는 아주 잘 보였다. 피켓에 무어라 쓰여 있는지까지도.

-보상안 제시하라

“당연히 해야지.”

도현은 뒷짐을 지었다.

“가장이 죽어서 길바닥에 나앉게 생긴 일가도 있을 거고, 하나뿐인 아이를 잃어서 어딘가에라도 울분을 토해내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문제는 이걸 기회로 여기는 놈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도현의 검지가 그들을 가리켰다.

“저 안에 악마가 몇 명이나 있을까?”

피를 뽑아도 구별할 수 없는, 사람과 같은 피가 흐르는 악마들.

상호는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그럴 거잖아.”

“맞지. 우리가 할 일은 변하지 않으니까…….”

도현은 어깨를 들썩이고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책상에는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턱을 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서류가 놓여 있었다.

“그래서, 그 심상 수련이란 건 잘 되어 가냐?”

“매일 하고는 있는데.”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소파에 앉았다.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데, 난 내가 나에 대해서 뭘 모르는지도 모르겠어.”

“뭔 말이야? 알아듣게 좀 말해봐.”

“그러니까 그, 개인의 영혼이란 게 만들어지는 순간이 있대. 그 사람이 그 사람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사건……. 그런데 매일 그 사건들을 떠올리면서 내 마음을 다잡아보려 해도…… 안 돼.”

예경을 처음 보았던 길가. 그 악마 놈에게 눈을 찔려 죽을 뻔했던 그를 예경이 치료해줬던 어느 집. 예경이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던 집. 그리고 예경의 영혼을 만나 초혼강기를 깨우쳤던 폐허.

그 어느 곳도 그의 마음속에 나타나지 않았다.

“잘 모르겠어. 내가 어떤 놈인지…….”

그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도현이 고개를 조금 기웃했다.

“야, 상호야.”

“응?”

“너 내가 했던 말 기억나냐?”

“어떤 거?”

“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고.”

도현의 눈빛이 상호를 꿰뚫었다.

“생각해 봐라. 옛날 같았으면 니가 귀에 꽃을 꽂고 여장을 하고…….”

“잠깐만, 잠깐만. 진지한 표정으로 그런 말 하지 마. 뛰어내릴 것 같으니까…….”

“하여튼 그런 일들을 했겠냐? 저승부대의 미친개가? 어림도 없지. 예경이가 시켰어도 절대 했을 놈이 아니지.”

“그야 뭐…….”

그땐 한창 사춘기였으니까. 부모 말도 안 들을 시기인데 아무리 예경이 시켰더라도 안 했을 것이다. 물론 그때는 예경이 죽을 줄 몰랐을 때였지만.

만약 알고 있었다면 예경이 시키는 건 무조건 다 했을 테다. 어쨌든 이건 이미 지나간 나날.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널 쭉 알아왔던 사람들은 다 안다는 거야. 네가 언제부터 바뀌었는지. 지금의 네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도현이 검지로 상호를 가리켰다.

“그 순간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내가 알 리 없다만…… 그건 너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겠지.”

“…….”

상호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서서히 눈빛이 명료해지더니, 소파에서 스르르 일어나 미끄러지듯이 문가로 향했다.

그리곤 도현을 돌아보았다.

“최대한 빨리 올게.”

“그래.”

도현은 고개를 밑으로 끄덕였다.

곧 문이 열렸다. 그리고 닫혔다. 그 너머로 서서히 멀어지는 당당한 발소리와 함께 도현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 자리에 그가 알던 소년은 더 이상 없었다.

* * *

방에 돌아오니 세희와 나빛이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이츠키가 잠든 후로 세희는 말이 없어졌다. 그저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상호에게 허리를 꾸벅 굽힐 뿐. 나빛도 더는 활짝 웃지 못하고 어색하게 입꼬리만 올렸다.

“오셨어요…….”

“응.”

침대에선 태화가 자고 있었다.

최근에는 태화와 단둘이서만 출동했으니 잠이 부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깨워야 했다.

상호는 태화의 다리를 흔들었다.

“태화야. 태화야.”

“우웅……. 왜애…….”

“일어나 봐.”

“시러…… 잘꺼야…….”

“나빛아, 도와줘.”

“네.”

나빛이 성력으로 넓적한 판떼기를 만들었다.

상호가 태화를 그 위에 눕히자 태화는 딱딱하다느니 잠 다 깼다느니 꿍얼거렸지만, 금세 다시 잠에 들어 고른 숨을 쉬었다.

“나빛이. 태화 데리고 나가 있어.”

“오늘도 운기조식 하세요?”

“응. 근데 오늘은 좀 다를 것 같아.”

확신이 담긴 목소리. 상호는 세희와 나빛을 돌아보았다.

“오래 걸릴지도 몰라. 그동안 너희가 날 좀 지켜줘야겠다. 특히 세희는…… 만약 내가 너무 오랫동안 안 일어난다 싶으면…… 알지?”

“네.”

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하러 갈게요.”

“응?”

나빛이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눈을 깜작였다.

“어디로 가……?”

“선생님한테.”

“그니까 어디…….”

“넌 몰라도 돼.”

세희의 말에 나빛이 화난 듯 볼을 부풀리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도 빨리 심상에 들어가야 한다. 상호는 나빛의 등을 토닥이고 문가로 살살 밀었다.

“시작할게. 이따가 보자.”

“저도 구하러 올게요.”

“나빛이 너는 무슨 말인지 모르잖아…….”

“그래도 구하러 올게요.”

“……그래.”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꼭 구하러 와.”

도움은 안 되겠지만 마음은 든든했다.

그가 바닥에 앉자 나빛이 태화를 데리고 창밖으로 나갔고, 세희는 침대에 기대어 앉아서 상호를 바라보았다.

상호는 눈을 감았다.

‘오늘은…….’

오늘은 다르다.

그는 숨을 고르며 심상에 빠져들었다. 또 자기 자신에게 집중했다. 마음 속의 마음, 심상에서 눈을 감은 채, 그의 기원, 지금의 그가 어디서 만들어졌는지를 떠올리며.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석양이 지던 나무 아래.

‘……아니야.’

그는 그곳을 지나쳤다.

그는 그곳에서 달라진 게 없었다. 항상 잃기만 하던 인생에서 또 한 번 인연을 잃었을 뿐. 그 때문에 생각이 조금 달라졌던 것뿐. 그라는 사람은 그곳에선 변한 게 없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여기도 아니야…….’

그는 울타리와 문을 지나쳤다.

한 걸음. 한 걸음. 건물로 다가가 입구 안으로. 유난히 힘겹게 올랐던 계단을 지나, 복도를 걷고 걸어서.

한 미닫이문 앞에 섰다.

‘……여기밖에 없어.’

그는 마음 속의 마음을 벗어나 눈을 떴다.

허허벌판이던 심상이 그가 상상했던 미닫이문으로 바뀌어 있었다.

‘역시.’

항상 잃기만 하던 그가, 처음으로 지켜야 할 무언가를 얻었던 곳. 또 늘 제자이기만 했던 그가 처음으로 스승이 된 곳.

지금의 그라는 인간은, 바로 이곳. 교실에서 만들어졌다.

‘여기밖에 없어.’

그는 문을 열었다.

구태여 기억을 더듬지 않아도 절로 그려지는 풍경. 맑은 하늘과 쨍쨍한 햇살. 바람에 나풀거리는 커튼.

광택이 나는 물칠판, 허리까지 오는 교탁. 다른 교실과는 달리 듬성듬성 놓인 책상과 뒤쪽에 놓인 사물함.

그 사이로 보이는 것은.

‘……으음.’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눈 두 여인.

상호는 자신을 돌아보는 두 명의 예경을 바라보며 침음했다.

‘쉽지 않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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