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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여고의 남선생-401화 (401/501)

<401화>

401. 큰 손

슬슬 잠에 들어야 할 시간.

자기 전에 양치하고 발 씻기 위해서 집 밖에 있는 욕실 겸 세탁실로 향하려는데, 효은이 슬쩍 일어나서 마루까지 따라왔다.

상호는 허리를 쿡쿡 찌르는 효은을 돌아보았다.

“응?”

“할 거지?”

툭 물어보는 게 꼭 너 주머니에 동전 좀 있냐, 라고 묻는 투였다.

‘삥이라도 뜯는 줄 알았네…….’

그나저나 한다는 건 역시 그건가. 상호는 헛기침을 하고 시선을 피했다.

오늘은 하면 안 되는 날이었다. 혜소의 심상에 들어갈 예정이므로.

다만 그걸 효은에게 설명했다가는 또 미친놈 취급받을 터였다.

“아니, 오늘은 좀 그런데…….”

“왜?”

“집에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고…….”

“할머니랑 혜소 앞집 보내면 되지 왜.”

“……너 이 집 샀냐?”

미안한 이야기를 잘도 뻔뻔하게 한다. 상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나중에 해. 오늘은 컨디션이 영 아니야…….”

“설미가 잘 빼줬나봐?”

“아니야! 그냥 오늘 컨디션이 안 좋다니까! 넌 몸이 365일 멀쩡해?”

“난 컨디션 안 좋아도 니가 대달랄 때 대줬는데?”

효은이 삐딱하게 도끼눈을 뜨며 그를 꼬나보았다.

어떻게든 잡아먹을 심산인가 보다.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슬쩍 자리를 피했다.

“몰라, 오늘은 안 돼. 쓰러진 애도 있고 해서 기분도 별로…….”

“쓰러진 애?”

“이츠키가 악마한테 당해서…….”

“그럼 애가 쓰러졌는데 넌 왜 여기 와 있는 거야?”

“확인하러 왔다니까. 악마들이 내 머릿속을 읽는지 아닌지…….”

“……흠.”

효은은 그제서야 맹수의 눈빛을 거두고 툴툴거리며 돌아섰다.

“그럼 나 먼저 잔다.”

“응.”

상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슬리퍼를 찾아 신었다.

* * *

그렇게 효은의 마수를 피해서, 다행히 혜소를 사이에 두고 무사히 잠자리에 들긴 했는데.

어째 심상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끄응.’

상호는 언젠가 보았던 것만 같은 문을 마주하고 침음을 흘렸다.

‘손이 닿았나…….’

혜소를 더 가까이 안고 있었을 텐데, 손만 잡았다고 심상에 바로 끌려들어 오다니.

어쨌든 여기서는 얻을 것이 없다. 그는 손을 들어 스스로의 뺨을 때리려 했다. 그렇게 하면 잠에서 깨어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데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언제 다시 와볼지 모르는데.’

그래서 문을 슬쩍 열었다.

‘역시나.’

반원형의 성당 내부. 맨 앞줄 기다란 의자에 한 쌍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한쪽은 양복을 입은 사내. 한쪽은 수녀복을 입은 여인.

상호가 둘을 향해 몰래 다가가는데, 사내가 여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잉, 자기야아~.”

‘?’

상호는 귀를 의심했다.

“화 풀어~. 내가 우리 자기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자나~.”

“훙, 자기눈 맨날 말로만 그러구 행동으론 안 보여주자나.”

“에이, 자기 먹으라고 케이크도 사 왔자나~. 화 풀어~.”

“그럼 뽀뽀해조.”

“쪽쪽쪽~.”

상호의 손에 진땀이 쫙 배어났다.

‘오우 X발…….’

이게 설마 효은이 바라던 꿈인가.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더는 들어줄 수가 없다. 그는 둘을 향해 돌진해서 또 다른 자신의 뒤통수를 발로 뻥 까버렸다.

옆에 앉아 있던 효은이 화들짝 놀랐다.

“꺄악!”

“야, 내가 이렇게 징그러울 리가 없잖아!”

“……어? 어?”

효은은 바닥에 꼴사납게 엎어진 상호와, 발차기를 날리고 당당히 서 있는 상호를 혼란스러운 눈으로 번갈아 쳐다보았다.

“뭐, 뭐야? 너 뭐야?”

“나?”

내가 나지 뭐냐. 상호는 자신이 현실의 자신이라는 것을 밝히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말해 봤자 이 인간은 안 믿을 테니.

“난 네 마음속 진심이지.”

“……진심?”

“어. 네가 외면하는 네 진심이라고. 그러니까 무조건 내 말 들어.”

“어어…….”

효은이 눈을 끔뻑였다.

영락없이 믿는 눈치. 순진한 게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상호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말을 이었다.

“넌 이런 버터 바르고 설탕 친 것 같은 놈이 좋냐? 이게 진짜 네가 바라는 강상호야?”

“응…….”

“틀렸어. 넌 이런 거 전혀 안 좋아해. 니가 좋아하는 건 묵직하고. 무뚝뚝하고. 가끔 좀 틱틱거려도 남자다운 강상호를 좋아하는 거라고.”

“어어…….”

효은의 눈이 팽글팽글 돌았다.

“그치만, 그건 안 사귈 때 그런 모습들을 좋아했던 거고……. 이만큼 사귀었으면 부드러워질 때도 됐잖아! 버터랑 설탕 좀 처먹으면 안 돼?”

“케이크가 몸에 좋냐? 안 좋잖아. 저런 놈은 쉽게 물린다고. 호밀빵처럼 거칠고 딱딱한 걸 먹어야 진득하게, 어? 길게 가는 거야.”

상호가 열변을 토하자 효은의 시선이 상호의 가랑이를 향했다.

“니가 딱딱하긴 하지…….”

“아니 X바, 이거 말고.”

“거칠기도 하고……. 응. 그래서 좋긴 해…….”

“……듣고 있냐?”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너는 이…… 진국 같은 남자. 어? 강상호의 무뚝뚝함에 반한 거라고. 그니까 맨날 패지만 말고 아~ 내가 이래서 반했지~ 해보란 말이야. 연락이 뜸해도 그런갑다 하고. 가끔은 네가 먼저 아까처럼 애교도 부리고. 너도 사실 그러고 싶잖아?”

“야.”

“응.”

“꿈 주제에 왜 나한테 명령질이야?”

“……응?”

효은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왜 니 말을 들어야 하는데?”

상호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효은의 시선을 피했다. 말라가던 진땀이 다시금 배어나기 시작했다.

“아니, 그러니까 나는 네 진심…….”

“X까. 어쨌든 내 꿈이라는 거잖아. 야. 둘다 벗어.”

“……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얼이 빠진 상호가 멍하니 서 있는데 효은이 성력으로 황금빛 채찍을 만들었다.

“꿈이 아니면 언제 원쁠원 행사를 해보겠냐. 벗으라고 X새꺄.”

“아니……. 악! 야, 아프잖아!”

“말대꾸 하지 마.”

복제 상호가 옷을 훌러덩 벗기 시작했다.

아무리 자기 자신이라지만 이런 버터 바른 새끼랑 뒹구는 건 못 보겠다. 상호는 복제 상호를 집어서 성당 창문 밖으로 집어던졌다.

와장창

그리고 그 깨진 창문으로 뛰쳐나갔다.

“미안, 나 할 일이 많아서…….”

“야! 개새꺄!”

“원쁠원은 나중에 해줄게, 도구 써서…….”

“나쁜 새끼야! 왜 꿈에서도 내 말을 안듣는데, 으헝헝헝…….”

“미안!”

그는 효은의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창문 밖 어둠으로 떨어져 내렸다.

* * *

“……휴우.”

상호는 한숨을 내쉬고 눈을 떴다.

잠에서 깨어 보니 역시나 손이 효은의 가슴에 얹혀 있었다. 딴에는 유혹해보겠답시고 끌어다 놓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 손을 떼고 살짝 거리를 두어 혜소에게 팔베개를 해준 채로 잠이 들었고, 다시 꿈에 들어온 게 지금.

그런데 어째 바닥이 이상했다.

‘이게 뭐지?’

푹신하고, 분홍빛과 주황빛이 울긋불긋하고. 약간 오돌토돌한 문양 같은 게 그려져 있었다.

상호는 바닥을 골똘히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

거대한 기둥 다섯 개가 주변에 세워져 있었다. 그게 손가락이란 것을 깨닫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어린아이의 손처럼 짧고 통통한 손가락.

‘저게 손가락이라는 건…….’

그 반대편에는.

상호는 뒤를 돌아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켁!”

거대한 혜소의 얼굴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황금빛이 은은하게 서린 얼굴. 몸에서 흘러나오는 오색의 기운. 꼭 성화에 그려진 성인을 연상케 했다.

“오셨네요.”

아스라하게 먼 곳에서 들리는 듯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 상호는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헛기침을 했다.

“으응, 확실히…… 혜소는 뭔가 다르네.”

“아저씨가 작은 거예요.”

“네가 큰 거야…….”

혜소가 손을 살짝 들어 상호를 더욱 가까이에서 바라보았다.

“이게 그 영혼의 힘이라는 거의 차이예요?”

“아마 그렇지 싶은데.”

“아저씨는 없는 수준이네요.”

“네가 특별한 거라니까…….”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요?”

“글쎄…….”

상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무로 살을 놓은 문. 창호지를 뚫고 흘러드는 햇살. 벽 쪽에 놓인 단과 그 위에 놓인 촛불들.

그리고 물이 담긴 그릇.

“신기하네.”

“뭐가요?”

“나는 심상이 허허벌판이거든.”

그는 입맛을 다셨다.

“태화도 고모도 다 자기 장소가 있는데…… 나는 없어.”

“태화 언니는 어딘데요?”

“몰라. 어느 길거리인데…… 옛날 모습인 걸 보면 아마 걔가 어릴 때 갔던 곳이지 싶다. 그리고 고모는…… 나랑 다시 만났던 성당.”

“아저씨는 꿈을 꿀 때도 허허벌판이에요?”

“요즘은 그래.”

“아저씨 상상력이 빈약해서 그래요.”

“아니 뭐 그렇기야 하겠지만…….”

갑자기 사람을 패는구나. 상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괜히 혜소의 손바닥 위를 돌아다녔다.

혜소가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그를 불렀다.

“아저씨.”

“응?”

“아저씨는 어디서 만들어졌어요?”

“그야 뭐…… 우리 어머니 뱃속이겠지?”

“아니에요.”

“……응?”

방금 자연스럽게 패드립을 먹은 것 같은데. 상호는 당황해서 눈을 빠르게 끔뻑였다.

그럼 다른 여자 뱃속에서 나왔다는 말인가.

‘아버지가 바람을 피울 사람은 아닌데…….’

설마 입양아였던 걸까.

고민에 빠진 그를 혜소가 한심하다는 듯이 타박했다.

“몸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영혼 말이에요.”

“영혼……?”

“영혼은 태어난 후에 만들어지는 거예요.”

혜소의 다른 손이 방을 빙 둘러 가리켰다.

“이곳은 제 첫 기억이에요. 저는 이곳에서 태어난 거나 다름없어요. 저라는 사람이 이곳에서 만들어진 거죠. 이해했어요?”

“으응.”

“자기가 누구인지 인식하기 전에는 영혼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 계기는 보통 첫 기억이고, 잊을 수 없는 사건으로 사람이 바뀌면 또 그게 그 사람이 만들어진 곳이 되는 거죠.”

혜소가 그와 눈을 마주쳤다.

“세상에는 영혼 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많아요. 그냥 사는 대로 사는 사람들……. 그런 사람이 정말 많아요. 아저씨는 이제야 간신히 자신을 깨달아가는 중인 거죠. 그래서 이렇게 작은 거고.”

“네가 큰 거라니까…….”

“아저씨라는 사람은 어디서 만들어졌어요?”

그 말에 상호의 말문이 막혔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 지금 그라는 사람은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글쎄…….”

상호는 말을 더듬었다.

“생각나는 곳이 너무, 너무 많아서…… 잘 모르겠어.”

예경을 만난 곳. 예경이 죽은 곳. 예경을 묻은 곳. 예경을 다시 만난 곳. 어느 하나가 그를 만들었다고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생각에 빠진 그에게 혜소가 말했다.

“오늘부터 잘 관찰해 보세요. 아저씨의 생각과 행동이 무엇에 기인하는지. 조급해하지는 마세요. 생각이 닫히니까.”

“응.”

“도움이 됐어요?”

혜소의 물음에 상호는 살짝 웃었다.

“덕분에.”

그때 문밖에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은 혜소는 상호가 서 있는 손 가까이에 다른 손을 들어 올렸다. 박수를 칠 것처럼.

“이제 가세요. 저 꿈 꿀 거예요.”

“……응.”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꿈 꿔.”

그 말을 끝으로, 혜소의 손바닥이 마주쳤다.

* * *

짜아아악

“……끄응.”

상호는 뺨에 얼얼한 감각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곤히 잠들은 혜소의 손이 그의 뺨을 누르고 있었다.

그의 앞에 누운 효은이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을 지었다.

“애가 얼마나 미웠으면 자면서도 싸대기를 날리냐?”

“…….”

상호는 볼을 문지르며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혜소의 꿈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그가 입술에 검지를 붙인 뒤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자 효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용히 마루까지 걸어 나온 둘은 문을 닫고 눈을 마주쳤다.

효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야.”

“뭐.”

“뭐 할 말 없어?”

간밤에 꾼 꿈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너 나 잘때 귀에 뭐 속삭였냐? 진국이네 뭐네……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던데.”

“아니. 그냥 잤는데.”

“웃기지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너 뭔가 했지?”

“아니래도…….”

이젠 꿈 내용이 이상하다고 빡치는 건가. 실제로 그가 한 짓이긴 했지만.

‘어떻게 해야 화를 풀어주나……. 아하.’

좋은 생각이 났다.

상호는 괜히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누가 보고 있을까봐. 그러고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목소리에 버터를 발랐다.

“아잉, 자기야…….”

“징그러, 병신아!”

뻐억

“켁!”

통렬한 파열음과 처연한 비명이 마당을 울리고.

감나무에서 한가로이 봄볕을 쬐던 새들이 푸드덕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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