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화>
398. 불길한 예감
“야, 천세희.”
뒤쪽에서 태화가 세희에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호는 무시하고 계속 앞을 향해 날아갔다.
“나 밤에 자는데 쌤이 이상한 거 했다?”
“뭔데.”
“막 있잖아, 나 자고 있는데 쌤이 갑자기 내 안에 쑥 들어오는 거야.”
“뭐? 뻥치지 마.”
“진짠데? 레알 팩트밖에 안 말함. 암튼 쌤이 내 소중한 곳까지 들어와서 깜짝 놀라가지구 나가라 그랬는데, 쌤이 내 말은 들은 척도 않구 들어오면 안 되는 곳까지 쑤우욱…….”
“야!”
결국 참다못해 큰소리가 나왔다.
“그냥 꿈이잖아, 임마! 뭘 소중한 곳이고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야!”
“소중한 곳 맞잖아! 꿈이 안 소중해? 왜 나한테 화내는데! 쌤이 억지로 들어와 놓고!”
“니가 자꾸 이상하게 말을 하잖아! 됐어, 너 이거 끝나면 얘기해.”
상호는 속도를 높여 협회를 향해 날아갔다.
쟤를 정말 어쩌면 좋을까, 한숨을 푹푹 내쉬는데 나빛이 고도를 높였다가 빠르게 활강하며 그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선생님~.”
“응?”
“태화랑 뭐 하셨어요?”
“그냥, 꿈에서 만났어…….”
“저도 그거 해주세요~.”
순간 상호의 뇌리에 밤동안의 기억이 스쳤다. 태화의 꿈속에서 곤란을 겪었던 일이.
그는 진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안 돼.”
“왜요……?”
“그냥 안 돼…….”
“제 꿈도 들어와 주세요…….”
“으으응…….”
상호는 된다는 건지 안 된다는 건지 애매하게 일부러 대답을 흘리고는, 나빛을 외면하고 앞으로 쭉 앞서나갔다.
* * *
악마 빙의자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잡아낼 수 있었다.
이제는 태화도 제법 요령이 생겨서, 꽤 넓은 범위까지 악마를 탐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악마가 돌아다니는 반경이 워낙 넓어서 잡는 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지는 않았지만.
상호는 잡은 빙의자를 협회의 차량에 태우고 돌아섰다.
“가자, 얘들아.”
“업어죵.”
“내가 먼저야!”
태화와 나빛이 폴짝 뛰어 상호의 등에 업혔다.
상호가 손을 뒤로 뻗어 둘을 받치자 양 어깨에 둘의 고개가 놓였고, 얼마 가지 않아 두 귀에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닿았다.
그는 둘이 깨지 않게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세희, 사카시타.”
“네.”
“둘이 잘 들어.”
세희와 이츠키가 그의 옆에 바싹 붙었다.
“세희는 들으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그치만 사카시타는…… 듣다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물어봐줘.”
“네.”
“내 안에 악마가 있어.”
상호는 둘에게 모든 것을 설명했다. 체내에 있는 악마와 그걸 쫓는 예경, 지난밤에 태화의 마음속에 들어갔던 일.
이야기를 다 들은 세희와 이츠키는 멍하니 눈만 끔벅였고, 그는 그런 둘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너무 허무맹랑한가?”
“아니요, 진짜인 건 아는데…….”
세희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면…… 지금 자고 있는 악마 빙의자들한테 들어가서, 그 안의 악마를 죽이는 것도 가능하다…… 라는 건가요?”
“아마도. 근데 그러려면 심상에서의 힘을 길러야 해.”
이미 예경이 하고 있는 일. 상호는 자신의 예상이 사실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힘을 어떻게 기르는 건지를 알아야 하는데…… 사카시타.”
“네.”
“주술사는 어떻게 강해져?”
이츠키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내리깔았다.
“주술사는 강해지지 않습니다.”
“그럼?”
“똑똑해지는 겁니다. 자기가 바칠 수 있는 것들을 정리하고, 효율적으로 분배하고, 정확히 계산해서 필요한 만큼만 바치는 겁니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엔 많이 바라고 적게 바치는 것으로 보이는 겁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으음.”
상호는 예상 밖의 대답에 당황했다.
“그럼…… 강해지는 방법은 없는 거야?”
“그렇습니다. 밥알을 움직이는 데 필요한 힘은 똑같으니까. 가장 멍청한 주술사도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다만…… 멍청하면 세상보다 더 큰 것을 바치게 될 뿐.”
이츠키가 그와 눈을 마주쳤다.
“주술을 강하게 만드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더 많은 것을 바치는 것. 그렇지만…… 마음속에서는 대체 무엇을 바쳐야 할지, 저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도움이 못 되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안 된다는 걸 알게 된 것도 성과가 있는 거지.”
그리 많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츠키가 모든 것을 알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상호는 입맛을 다시고 걸음을 옮겼다.
“얼른 가서 잠이나 자자.”
* * *
따르르릉
“……이런.”
숙소에 도착해서 씻고 나왔는데 또 핸드폰이 울렸다. 상호는 당황하며 침대 쪽을 돌아보았다.
머리도 제대로 못 말린 아이들이 한데 엉켜 자고 있었다.
‘방금 막 재웠는데…….’
제발 도현의 전화가 아니기를. 상호는 간절히 기도하며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염병.’
도현이었다.
상호는 한숨을 쉬며 전화를 받았다.
“뭐야. 또 나왔어?”
[아니.]
도현의 목소리는 낮았다. 요즘은 항상 그렇긴 했지만.
[아직 안 잤냐?]
“안 잤으니까 받고 있지.”
[늦은 시간에 미안한데…… 이건 지금 말해둬야 될 것 같아서.]
“뭔데 그래.”
무슨 이야긴데 이렇게 뜸을 들이나. 상호는 아이들이 깨지 않도록 조금 거리를 두었다.
도현이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었다.]
“누가.”
[빙의자.]
상호는 그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해서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죽었다고? 재워놓은 사람들이?”
[한 명이야. 얼마 전부터 기미가 보이더니 결국 죽었다. 영주가 만들었던 그 봉인체들처럼…….]
생기를 잃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는 뜻이다.
“……잠깐만.”
제일 먼저 잠에 든 건 성연.
“누가 죽었는데?”
[엿새 전에 잡아온 사람이야. 수염 긴 사람. 기억나냐?]
“……아하.”
상호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서대로는…… 아닌 모양이네.”
[봉인했을 때도 정신력 강한 사람이 오래 버텼잖아. 비슷한 게 아닐까 싶은데.]
“……맞아. 그게 맞을 거야.”
상호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점점 흐려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이들의 숨소리만 들릴 뿐.
[상호야.]
기색을 알아차린 도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책하지 마라.]
“……구할 방법을 더 빨리 찾아야 했어.”
[몬스터한테 죽는 사람은 매달 몇십 명이 나온다. 이 사람도 그런 불운한 사람들 중 한 명일 뿐이야.]
“더 빨리…….”
[네가 죽인 게 아니야.]
도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네가 봉인체 이야기 때문에 예경이 생각이 났나 보다. 네 잘못 아니야. 바보 같은 생각 말고 얼른 잠이나 자라.]
“……그래야겠네.”
상호의 입에서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알았어. 잠이나 잘게. 자고 일어나면 뭔가 방법이 떠오를지도 모르지…….”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헌터가 구할 수 없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생기기 마련이야.]
“응.”
[자라.]
상호는 귀에서 핸드폰을 떼었다.
빙의자가 죽었다. 그 사실이 상호를 재촉하고 조바심을 부추겼다. 당장 방법을 찾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을 거라고.
하지만 한편으로 위안이 되는 것은.
‘……얘는 침을 질질 흘리면서 자네.’
아이들과 함께 자는 것이야말로, 그들을 구할 실마리를 잡는 방법이라는 사실.
상호는 태화의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고 그 옆에 누웠다.
‘오늘은 누구 꿈에 들어가려나.’
무거운 눈꺼풀이 스르르 감겼다.
* * *
‘X벌…….’
이제는 팔다리가 짧아진 게 느껴지자마자 욕부터 튀어나왔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면, 면도를 안 해도 되는 날. 하지만 요즘 같은 시기에는 은호로 변하는 게 누군가의 생명과 직결된 일이었다.
상호는 이를 갈며 몸을 일으켰다. 대체 이런 저주는 뭘 바치면 걸 수 있는 건지.
‘엄마라도 팔았나?’
저주보단 마법 같고 마법보단 저주 같다.
짧은 팔다리를 꼬물거리며 침대를 벗어나려는데, 갑자기 가느다란, 그러나 지금 은호의 기준으로는 거스를 수 없는 우악스러운 팔이 그의 허리를 휘감았다.
“헤헤헤…….”
다른 손이 상호의 뒤통수를 잡아서 나빛의 품에 처박았다.
“헤헤헤…… 선생님…….”
“숨……막혀…….”
“꿈에서 좋았어요…….”
“아니, 나빛이 네 꿈엔 들어간 적 없는데…….”
“저희 혁구 같은 아기새 백 마리 천 마리 낳고 살아요…….”
“으응, 이름도 못 외우고 죽겠네…….”
“으헤헤…….”
나빛은 헤실헤실 웃으며 상호를 품에 대고 비볐다.
“요즘 선생님이랑 놀 시간이 없었어요…….”
“그렇지…….”
“오늘은 이렇게 꼬옥 껴안고 지내요…….”
“일어나야 하지 않겠어……?”
“아니에요……. 시간 아까워요, 언제 빙의자가 나올지 모르니까……. 이렇게 그냥 꼬옥 붙어 있을래요…….”
“……으응.”
그때 상호의 핸드폰이 울렸다.
따르르릉
순간 황금빛이 핸드폰을 향해 날아드는 것을, 상호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하지만 눈 깜빡할 사이에 황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나빛아? 방금…… 핸드폰 부수려고 하지 않았어?”
“착각이에요…….”
“아니, 분명히…… 내가 봤는데…….”
“아니에요, 짜증낸 적 없어요. 저는 헌터고 헌터는 사람을 구해야 하니까…….”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나빛의 손은 태화를 찰싹찰싹 후려치고 있었다. 태화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바락바락 소리쳤다.
“아오, 뭔데! 왜 아침부터 X랄이야, 개년아!”
“출동이야!”
“곱게 깨우면 되지 왜 X랄이냐고! X바, 가뜩이나 짜증나 죽겠는데…….”
“우리는 헌터야! 헌터가 사람 구하는 일을 귀찮아하면 어떡해!”
“알았다고! 제발 꺼져, 제바아아알!”
아침부터 또 출동이라는 게 짜증이 났는지, 태화는 발을 마구 구르면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비명을 질렀다.
그 소란을 듣고 깬 세희와 이츠키도 낯빛이 좋지 않았다.
“어, 형. 어, 또 어려졌다. 응. 금방 갈게…….”
상호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화장실만 빨리 갔다 와. 10분 안에 교문으로 모여.”
“네에…….”
아이들은 비칠거리며 일어나 창문으로 달려갔다.
* * *
“그 저주는 대체 어떻게 푸는 거냐?”
자리에 앉은 도현이 상호를 내려다보았다.
상호는 도현의 것보다 작은 의자에 앉아, 도현의 것보다 한참 낮은 책상에 놓인 컴퓨터로 아이들의 바디캠을 확인하다가, 도현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서 한참 위에 있는 도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난들 아나. 나도 해결하고는 싶은데 방법도 없고, 이것보다 훨씬 급하고 중요한 일들이 있으니까 참고 사는 거지…….”
“네가 할 일이 많은 녀석만 아니었어도 재밌었을 것 같은데.”
도현이 피식 웃었다.
“효은이랑 민정이는 그거 보고 뭐라 하드냐?”
“……글쎄. 그냥 그러려니 하더라고.”
“제자들은? 처음에 보고 뭐랬어?”
“그냥 걔들도 그러려니 하더라고…….”
환장하면서 좋아했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상호는 도현의 시선을 피해 바디캠을 바라보며 녹차를 홀짝였다.
평소보다 더 쓰게 느껴졌지만, 티를 내고 싶지 않아서 그냥 마시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면 효은이랑 혜소는 어떻게 지내나…… 잠깐.’
종이컵을 기울이던 상호의 손이 우뚝 멈췄다.
지난번, 그가 은호가 됐을 때 나타났던 악마 빙의자 헌터. 그때 상호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악마가 그의 상태와 아이들의 위치를 읽어 빙의자 속 악마에게 전해줬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효은과 혜소의 위치도 이미.
‘……아니야.’
손에 진땀이 배어났다.
‘아니어야 해…….’
그는 우연이기를 바랐다. 그날 악마 빙의자가 대놓고 아이들을 찾아온 것이 그저 우연이기를.
우연일 수 없는 일이 우연이기를.
‘제발…….’
오늘은 그러지 않기를. 설령 같은 일이 일어난다 해도 다른 이유이기를. 그의 예상이 틀렸기를 빌었다.
하지만, 그 순간.
[어?]
[뭐야, 왜?]
[이쪽.]
바디캠에 태화의 손이 나타나 어딘가를 가리켰고.
[가까이 오고 있어.]
상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제발.’
예상이, 들어맞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