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화>
397. 영혼의 힘
“그러니까…….”
태화가 다리를 꼰 채로 건들거렸다.
“여기가 내 꿈인데.”
“응.”
“쌤은 내 꿈이 아니라고?”
“응.”
상호는 태화가 깔고 앉은 나빛을 흘끗하며 대답했다.
“어떻게 한 건지는 나도 몰라. 그나저나…… 아무리 꿈이라지만 친구를 그렇게 깔고 앉냐?”
“쌤은 모르잖아! 얘가 쌤 없을 때 나한테 뭐 하는지!”
“내가 없을 때야 당연히 모르겠지만 나빛이가 그럴 애가 아니란 건 알아.”
그의 말에 태화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팍을 두드렸다.
“아오, 왜 꿈에서도 그러는데!”
“나는 네 꿈이 아니라니까.”
“그니까 왜 꿈까지 쳐들어와서 그러냐고! 잠깐만, 쌤이 내 꿈이 아니라는 보장이 있어? 증명해봐.”
“그거야 잠에서 깨면 알게 되겠지.”
지금 당장 여기서야 무슨 일을 하던 꿈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잠에서 깨고 나면 꿈의 내용을 말해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태화는 고개를 저었다.
“난 몰라. 쌤이 알아서 증명해. 아니면 난 그냥 꿈으로 간주할 거야.”
“야, 이게 그냥 꿈이면 이렇게 생생하게 대화를 하고 있겠어?”
“알빠야? 쌤이 멋대로 들어온 거잖아. 내 소중한 곳에 쌤이 억지로 들어와서 마구마구 헤집은 거잖아!”
“내가 들어오고 싶어서 들어온 건 아니야.”
“나 못 믿겠어. 쌤 꿈이지? 그냥 꿈이지? 쌤이 내 꿈이 아니면 왜 이런 게 되는데?”
태화가 상호를 가리키자 상호의 펑 소리와 함께 변했다. 전에 상호가 입고 있었던 효은의 교복으로.
차라리 팬티만 입는 게 낫겠다. 상호는 교복을 벗어던지며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나도 그게 제일 궁금해…….’
그는 그의 심상에서 자유자재로 뭔가를 해본 적이 없는데, 태화는 어떻게 이렇게 제멋대로 뿅뿅 바꿔내는지.
꿈과 심상의 차이일까.
어쩌면 그에게도 무언가 변화가 있었을지 모른다. 상호는 시험 삼아 내공을 끌어올려 보았다.
‘……안 되네?’
내공이 올라오지 않았다.
‘아니 X바…….’
상호는 당황해서 체내의 내공을 느껴보려 했지만, 티끌 하나만큼도 남아있지 않았다.
타인의 마음속이라서 그런 걸까.
‘내공 없이 영혼만 온 건가? 하지만 세희는…….’
세희와 예경은 그의 마음속에서도 잘만 쓰던데. 그렇지만 그 해답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같은 심법이니까.
‘같은 심법끼리는 내공을 나눌 수 있다…….’
턱을 괴고 고민에 빠진 상호의 귀에 태화의 핀잔이 박혔다.
“쌤. 빤쓰 차림으로 그러니까 되게 이상한 거 알아?”
“잠시만 조용히 해 봐.”
그의 영혼이 태화의 마음속에 들어왔다는 것은, 내공과는 관계없는 영혼의 힘이 따로 존재한다는 뜻.
그렇다면 이론적으로는 그 또한 이곳에서 영혼의 힘을 다룰 수 있어야 할 텐데.
‘내 힘이 약한가?’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연기 한 자락이 희미하게 스친 듯했으나, 너무 엷어서 그게 자신이 만든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제약이 있다…….’
그렇다면 그가 그의 안에 있는 악마를 죽이는 데 성공하더라도, 타인의 마음속에 있는 악마를 죽이려면 더 큰 힘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리고 궁금한 것이 또 하나.
“태화야.”
“웅?”
상호는 검지를 들어서 한 바퀴 빙 돌렸다.
“이 세상 있잖아. 세상 전체. 혹시 바꿀 수 있어?”
“몰라. 안 해 봤는데.”
“해봐.”
“뭘로?”
“뭐든 좋아. 교실, 그래. 교실로 바꿔 보자.”
“으음…….”
태화가 눈을 감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한참 동안. 넉넉하게 열다섯쯤 셀 때까지. 주변에는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역시 무리인가…….’
상호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순간.
휘리릭……
세상이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주변의 모든 것이 그 안으로 뒤섞여 들어갔다. 마치 태풍이 일어난 것처럼.
그 태풍이 멈추자 교실의 모습이 드러났고.
눈을 뜬 태화가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됐어!”
“…….”
이리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나. 상호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멍하니 태화만 바라보았다.
꿈과 심상은 다른 걸까.
‘아니면…….’
혹시, 태화의 영혼의 힘이 강한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 이유는.
‘……악마니까.’
태화의 등 뒤에서 꼬리가 살랑였다.
악마 융합체들은 주술에도 재능이 있다. 어쩌면 그것과 관계가 있을지도. 그런 고민을 하며 가만히 바라보는 상호에게 태화가 눈살을 찌푸리며 볼멘소리를 했다.
“뭐야, 시켜서 했더니. 칭찬 한마디 안 해주고.”
상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손사래를 쳤다.
“아, 잘했어. 잘했어. 그냥…… 생각보다 너무 잘해서.”
“근데 왜 교실이야? 쌤 혹시 교실에…… 막 그런…… 야시꾸리한 판타지 같은 거 있어?”
“……없어, 임마.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쎔 옛날에 교실에서 미진 쌤이랑 이상한 거 했다가 사진 찍히지 않았어? 막 책상에 엎드리게 하고.”
“……오해야.”
“오예겠지.”
태화가 혀로 입술을 할짝였다.
얘가 또 뭔가 하려는구나. 상호는 직감적으로 눈치채고 뒷걸음질을 치려고 했으나, 보이지 않는 힘이 몸을 꽉 붙잡고 있었다.
‘……!’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야.”
“쌤.”
태화가 그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기울여서, 그의 귓가에 바싹 다가붙어 묘하게 비웃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내 꿈이니까 내 맘대로 해도 되지?”
“아니…….”
“쌤 꿈을 내 꿈에서 이뤄주는 거네?”
“아니라고!”
상호는 눈을 감고 필사적으로 집중했다. 영혼의 힘으로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이 꿈에서 깨어나는 것.
‘영혼의 힘…… 주술…….’
“쌤, 쌤. 눈 떠봐.”
태화가 그의 뺨을 툭툭 쳤다. 그래도 그는 집중을 풀지 않았다.
‘유속 유량 유향, 유속 유량, 유향…….’
“눈 안 뜰 거야? 나 다 벗었는데?”
‘유속유량유향, 유속유량유향…….’
“그럼 그냥 올라탄다?”
‘유속유량유향유속유……!’
상호가 온 마음을 다해 집중하는 그때.
찰나의 순간, 무언가 말캉한 것이 온몸에 닿았다.
* * *
“허억……!”
상호는 스프링처럼 상체를 튕겨 올렸다.
온몸에는 끈끈한 진땀이 흐르고, 심장은 벌렁거리고. 긴장한 근육이 놀라서 쥐가 날 것 같은 게 꼭 전력질주라도 한 듯했다.
옆을 돌아보니 태화가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크아…….”
“……후우.”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내공을 뻗어 컵에 물을 받았다.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나니 정신이 말짱해져서, 그제야 태화의 꿈에서 겪었던 일을 되짚을 수 있었다.
‘심법이 달라도…… 들어갈 수 있다.’
상호는 멍하니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악마 융합체는 영혼의 힘이 강하다…….’
또한 영혼의 힘을 기르지 않으면, 타인의 마음속에 들어가도 의미가 없다.
그러면 영혼의 힘은 어떻게 기르는가.
‘주술을…… 배워야 하나.’
그러고 보면 토요일이다. 아직 새벽이라 전화를 할 수는 없지만.
상호는 아침이 되면 연락해보기로 마음먹고 다시 몸을 누이다가.
‘아니…… 잠깐만.’
또 태화의 꿈에 들어가게 될까봐 허둥지둥 일어나서 소파로 향했다.
* * *
“주술?”
설미가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둘이 앉은 곳은 기숙사 주변 벤치. 상호는 인사하며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살짝 손을 흔들어주고 대답했다.
“네. 주술이요.”
“내가 정령 전문인 건…… 알지?”
“당연히 알죠. 그래도 나보단 더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지만…….”
설미는 영 자신이 없는 듯했다.
“중요한 일이면…… 나보단 다른 선생님한테 물어보는 게 좋을 거야.”
“……중요하진 않아요.”
사실 중요한 일이지만, 순전히 그것 때문에 불러냈다는 인상을 주기는 싫었다.
그래서 대화를 계속 이어나가는 쪽을 택했다.
“그럼 그냥 정령이나 가르쳐줘요.”
“정령……?”
“전문이잖아요.”
“그치…….”
그런데 어째 그쪽도 자신이 없다는 투였다. 상호는 헛웃음을 치며 설미의 등을 토닥였다.
“아니 왜 그래요. 학생은 가르치는데 저는 못 가르치겠어요?”
“그치만, 상호 넌 엄청 강한 정령사들이랑 알고 지낼 거 아냐…….”
“우리 부대엔 정령사 없었어요. 내가 알고 지내는 헌터도 별로 없고. 정령사는 한 명도 몰라요. 그니까 걱정 말고 들려줘요.”
“그럼…….”
설미가 손을 들어 올리자 그 위에 큼지막한 물방울이 통통 튀었다.
“정령이 뭔지 알아?”
“몰라요.”
“정령은 무생물에 깃든 영혼이야.”
상호는 그 물방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영혼…….’
설미가 말을 이었다.
“이 무생물에 깃든 영혼들에게 말을 걸어서…… 친구가 되고, 약속을 맺고, 힘을 빌리는 거지.”
“말은 어떻게 걸어요?”
“귀를 기울이면 돼.”
설미는 물방울을 허공에 띄우고 손을 귀에 가져갔다.
“귀를 기울이다 보면 들려. 작은 속삭임이…… 그러면 그 대화에 슬쩍 끼어드는 거야. 인사부터 하면 안 돼. 정령들은 인간이 자기들 말을 듣고 있단 걸 상상도 못 하고 있어서, 안녕하세요 하면 그냥 무시해 버리거든…….”
“……으음.”
상호는 당황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속삭임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그거 재능이 있어야 하는 거예요?”
“으응, 뭐 그렇겠지? 평생 못 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무예도 비슷하지 않아?”
“무예는 그래도 마나를 때려 박으면 못 느낄 수가 없으니까……. 그럼 그 정령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거, 영혼의 힘 같은 게 강해야 하는 거예요?”
그의 물음에 설미가 눈을 끔뻑였다.
“영혼의 힘? 그게 뭐야?”
“……아니에요. 그냥 넘어가 줘요.”
주술사들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상호는 설미의 앞에 뜬 물방울의 속삭임을 들어 보려고 귀를 기울이다가, 모기가 입맛 다시는 소리만큼도 들리질 않아서 포기했다.
“정령이랑 주술이랑 많이 달라요?”
“어딘가에선 겹쳐 있을 거야. 주술사는 다른 사람들보다 정령의 목소리를 잘 듣고, 정령사가 주술을 쓰기도 하고……. 하지만 분야가 다르달까. 주먹을 쓰는 무예가랑 검을 쓰는 무예가가 다르듯이…… 그런 거지.”
“아하.”
그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그럼 정령의 목소리를 듣는 훈련 같은 건 없어요?”
“그게…….”
설미는 입을 우물거리며 대답을 시원스럽게 하지 못했다.
“있긴 한데…… 좀 무식한 방법이라…… 상호 너한텐 좀 안 맞을 거야.”
“네?”
뭐길래 그러나. 상호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뭔데요? 제가 못 하는 게 있어요?”
“죽기 직전까지 몰리면 돼.”
“……으음.”
그에겐 좀 어려운 일이긴 했다. 아주 많이.
설미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물에 빠지거나, 불에 갇히거나, 높은 곳에서 떨어지거나…… 독에 찔리거나. 그렇게 해서 죽기 직전까지 가면 목소리가 들린다고들 해.”
“……아.”
상호의 머릿속에 작년의 기억이 떠올랐다. 마신과 싸우다가 예경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설미의 말을 들었다.
“그치만 난 그런 방법은 별로 안 좋아해. 효과가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런 방법을 알려줬다가 그 사람이 죽어버리면 알려준 사람만 상처받잖아. 상호 너도 절대 다른 사람한테 알려주지 마. 난 너는 그런 바보가 아닐 거라고 생각해서 알려준 거야. ……듣고 있어?”
“아, 네.”
잠시 정신이 딴 데 가 있었다. 상호는 헛기침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죠. 그럴게요.”
그러나 정신이 온전히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분명 죽을 고비를 몇 번을 넘겼을 텐데. 왜 정령의 목소리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고 영혼의 힘도 그리 강하지 못한가. 마음속에 남은 원념도 전부 떨쳐냈는데.
남은 의문은 주술사에게 물어봐야겠다. 상호는 입맛을 다시고 엄지로 주차장 쪽을 가리켰다.
“누나 아침 아직 안 먹었죠? 밥이나 같이…….”
따르르릉
“……못 먹겠네요.”
“으응.”
설미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먹자.”
“갔다올게요.”
상호는 서둘러 이화관을 향해 달려갔다. 걸려온 도현의 전화를 받아 알았다고 소리치면서.
그런 그의 뒷모습을 설미는 아쉬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체념한 듯 고개를 내젓고 벤치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