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6화>
396. 남의 마음속
“쌤.”
하얀 맨발이 상호의 볼을 쿡쿡 찔렀다.
어른 얼굴에 발을 들이대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냐, 상호는 눈을 부라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침대에 누운 태화가 배를 긁적이고 있었다.
“야, 너 어디 선생님 얼굴에 발을…….”
“오늘은 운기조식 안 하네?”
“날마다 할 수는 없으니까. 그건 그거고 임마, 발 안 치워?”
“나 치킨사죠.”
저녁을 깨지락거릴 때부터 알아봤다. 상호는 한숨을 쉬고 몸을 돌려 태화를 등졌다.
“뭐가 이뻐서.”
“내가 악마 계속 찾아주자나~.”
“그래서 협회에서 돈 받잖아. 그거로 시켜 먹어.”
“쌤 폰으로 시키면 공짜래.”
“너한테나 공짜겠지…….”
“제자한테 치킨 하나 못 사줘?! 천세희랑 하나빛이 시켜달라고 했으면 헤벌레~하면서 시켜줬을 거잖아!”
“……시켜.”
“잇힝~.”
태화는 상호가 건넨 핸드폰을 받아 침대를 뒹굴거렸다.
“뭐로 시킬까? 양념? 간장? 마늘? ……우와, 쌤. 치킨값이랑 내 공통점이 뭔지 알아?”
뭔지 알 것 같았지만, 상호는 일부러 물었다.
“뭔데.”
“엄마가 없어!”
“……시키기나 해.”
“순살로 시킬까? 뼈로 시킬까?”
“순살로 하든가.”
“오케이, 주문 완료! 교문에 걸어놓고 전화주세용~.”
따르르릉
“……우왓, X나 빨라!”
“내놔.”
그는 태화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도현. 요즘 같은 시기에는 도현이 전화를 걸어서 하는 말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전화를 받자마자 물었다.
“악마야?”
[응.]
“금방 갈게.”
짧은 통화가 끝나자 상호는 뒤를 돌아보았다. 뾰로통한 표정을 지은 태화가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기어들고 있었다.
“얌마, 뭐해. 빨리 나갈 준비해.”
“파─업이다─!”
“야, 사람 죽일 거야? 헌터 안 할 거야? 당장 준비 안 해!”
“애들 부르고 있어, 씨이…….”
태화는 핸드폰으로 세희에게 전화를 걸며 코를 훌쩍였다.
“치킨권 보장하라…….”
“갔다 와서 사주면 되잖아. 빨리 기숙사 가서 애들 불러. 전화만 걸고 있지 말고.”
상호도 나빛에게 전화를 걸며 창문을 열었다.
“후딱 가서 후딱 해치우고 오자. 얼른 나와.”
“웅…….”
둘은 창문을 나와 이화관으로 달려갔다.
* * *
“악마 탐지 더듬이!”
태화가 후드에 달린 뿔 주머니 토끼귀를 위로 잡아당겼다.
“가동!”
“벌레야?”
“뭐? 벌레? 쌤! 천세희가 나보고 벌레래!”
“니가 더듬이라며.”
세희는 태화의 등짝을 후리고 거리를 걸었다.
“잘 좀 찾아봐. 빨리 들어가서 자게.”
둘의 주변에서는 상호와 나빛, 이츠키가 걷고 있었다.
밤의 거리에는 사람이 적었다. 흉흉한 소문이 현실이 되어 사람들 사이를 걷고 있으니. 비록 악마가 밤에만 돌아다니진 않았지만, 사람들의 외출 시간 자체가 줄어드니 결국 밤은 한산해졌다.
상호는 도현이 말해준 예상 경로를 머릿속으로 되짚었다.
“오늘은 찾기 쉬울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에 나빛이 고개를 기웃했다.
“뭔가 달라졌어요?”
“CCTV를 일부러 없애 봤대. 악마놈들이 CCTV를 의식하면서 움직이는 것 같아서.”
어차피 피하면서 움직이는 놈들이라면, CCTV가 뜸한 구역을 의도적으로 만들어서 함정에 끌어들이는 작전이 먹힐지도 몰랐다.
상호는 주변을 쓱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가 걷는 여기가 마지막 발견 현장에서 제일 가까운 구역이야.”
“CCTV가 없는 구역이요?”
“응. 태화야, 뭐 느껴지는 거 없어?”
태화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으음, 뭔가 느껴지는 것도 같고…….”
“따라가 봐.”
“치킨이 날 부르는 것도 같고…….”
“……집중해, 임마.”
상호의 입에서 한숨이 쏟아졌다.
그때 그들이 걷던 길의 옆, 건물 사이의 골목에서 무언가가 휙 지나갔다. 상호는 놓치지 않고 즉시 내공을 뻗었다.
지이익……
발이 땅에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당황성이라도 흘렸겠지만, 지금 상호의 내공에 붙들린 이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덕분에 상호는 월척이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찾았네.”
상호와 아이들은 옴짝달싹도 못 하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사카시타, 어때?”
“악마입니다.”
이츠키의 판정에 세희가 주먹을 들었다.
퍼억
뿔 달린 주먹이 여인의 뒷목을 강타했다.
뿔 속에 든 약이 투여되자 여인의 몸이 축 늘어졌다. 상호는 여인의 눈을 까뒤집어 신경이 고장난 것을 확인하고 어깨에 둘러메었다.
오늘은 다행히 일찍 잡혔다.
“수고했다, 얘들아.”
“수고하셨습니다~.”
“인계하고 가서 자자. 내일은 오전엔 푹 자고 오후에 수업하러 와.”
“치킨 먹고 자도 돼?”
“그래.”
“치공! 그대 몸이 식기 전에 돌아가겠소!”
“다 식었을걸.”
그는 협회에 전화를 걸며 아이들과 함께 도로변으로 걸어갔다.
* * *
교문 앞.
태화는 치킨 박스 속 싸늘하게 식어버린 닭목을 바라보며 눈물을 펑펑 흘렸다.
“치공! 어찌하여 목만 오셨소!”
“고양이들이 다 털어갔네.”
“쌤! 치킨이 죽었어!”
“살아있는 치킨도 있냐?”
“내 치키이이힝힝힝…….”
“내일 점심에 시켜 먹어. 오늘은 그냥 자.”
상호는 울먹이는 태화를 달래고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얼른 가서 자. 내일 보자.”
“네……, 흐아암…….”
나빛이 하품을 하며 비틀비틀 걸어갔다.
세희도 이츠키와 함께 나빛의 뒤를 따르며 상호에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응, 세희도.”
“치킨!”
“……넌 나랑 얘기 좀 하자.”
상호는 태화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내일 먹자고 말을 했는데도 왜 이럴까.
“야, 자고 일어나서 먹으면 되는 걸 못 참아? 그렇게 참을성이 없으면 나중에 커서 뭐 될래?”
“치킨집 사장.”
“야이…….”
상호가 을러도 태화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바락바락 대들었다.
“원래 있다 없을 때 제일 못 참는 거란 말이야! 쌤도 그렇잖아! 봐봐, 생각해 봐. 쌤 눈앞에 쭉빵한 여자가 있…….”
“얌마!”
“오케이, 줜나 비싼 스뽀츠카가 있다고 해봐! 드림카야! 쌤 봉급을 밥도 안 먹고 10년 모아야 살까 말까야! 그게 눈앞에 있었는데 뿅! 하고 사라졌네? 그럼 허탈해 안 허탈해?”
“허탈하겠지. 근데 그게 내 돈으로 산 게 아니면 그냥 잠깐 허탈하고 마는 거지. 너도 임마 네 돈으로 산 것도 아니면서 고작 치킨 하나에…….”
“치킨이 어떻게 고작 하나야! 생명을 경시하지 마!”
“니가 할 말이냐!”
상호는 소리를 치다가 어지러워져서 뒷목을 잡고 비틀거렸다.
“……됐다, 됐어. 사줄게. 사줄게. 대신 너 이거 먹고 나면 내 말 잘 듣기야.”
“웅~.”
태화가 배시시 웃으며 상호에게 팔짱을 끼었다. 치마 아래서는 검고 매끈한 꼬리가 촐싹이고 있었다.
“가자! 닭 죽이러!”
“생명을 경시하지 마.”
한 명은 폴짝폴짝, 한 명은 터덜터덜. 둘은 나란히 걸어 남교사 숙소로 향했다.
* * *
“아~.”
옆에 누운 태화가 입맛을 다셨다.
“먹고 나니까 후회되네.”
잘 먹어 놓고 왜 또 이럴까. 침대에 누운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태화를 돌아보았다.
“뭐가 또 임마.”
“아니, 나 요즘…….”
태화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그를 향해 돌아누웠다.
“쌤. 쌤쌤.”
“응.”
“나 살쪘어?”
“응.”
“아이씨! 보고 말해.”
태화의 손이 그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겼다. 상호는 태화를 대충 아래위로 쓱 훑어보는 척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헤어져.”
“자퇴해, 임마.”
“우씨, 여기선 미안해가 나와야지!”
“뭐가 미안한데?”
“아니이! 내 대사라고!”
태화는 손으로 상호의 명치를 두들기다가, 박치기를 날리려는 척을 하더니 은근슬쩍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상호는 굳이 떼어내려 하지 않았다.
“쌤.”
“응.”
“만약에 있잖아.”
태화가 고개를 살짝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내가 악마라면 어떡할 거야?”
상호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일은 상상하기도 싫어서.
“……악마잖아, 이미.”
“그니까, 나는 원래 사람인데, 반은 악마고 반은 사람인 사람인데……. 만약 이미 오래전에 악마한테 빙의당해서, 내가 내가 아니었고, 돌이킬 수도 없다면…….”
“이츠키는 알아볼 수 있잖아.”
“만약에 그렇다면.”
붉은 눈동자에 그의 얼굴이 비쳤다.
“그럼 어떡할 거야?”
상호는 이번에도 오랫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한참 후에야.
“……아주 많이 울겠지.”
태화를 끌어안고, 그렇게 나직하게 대답했다.
“정말 많이 울 거야.”
“하루 종일?”
“하루로 안 끝나지.”
태화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평생 울 수도 있어.”
“우와…….”
태화가 빙긋 웃었다.
“그건 좀 싫네.”
“너무 오버야?”
“아니, 쌤이 평생 울기만 하는 게.”
태화는 키득거리며 상호의 품에 더욱 깊이 안겨들었다.
“걱정 마. 나 악마 아니야.”
“당연하지.”
상호는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넌 착한 애니까…….”
그의 손이 태화의 등을 토닥였다. 워낙 좁아서 손바닥 하나로 다 덮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제 자야 할 시간. 악마는 언제든 찾아올 수 있으니까. 당장 내일 아침에 또 잡으러 나가야 할지도 모르니. 그는 태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자자.”
“응.”
둘은 동시에 잠에 빠져들었다.
* * *
“어라?”
상호는 주변을 둘러보며 눈을 끔뻑였다.
생전 처음 보는 거리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디야? 여긴…….’
분명 그의 방 그의 침대에서 태화와 함께 잠들었는데.
풍경은 어딘가 희미하고 몽롱했다. 건물은 무채색이지만 하늘은 파스텔톤. 마치 어린이가 그리다 만 듯한 모습들이었다.
어디선가 솜사탕 냄새가 났다.
‘일단 내 심상은 아닌 것 같네.’
살면서 이런 곳은 와본 적이 없으니. 그의 뇌가 완전히 새로 만들어낸 꿈일 것이다.
하지만.
‘……꿈에 완전히 새로운 게 나올 수 있나?’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상호는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일단 거리를 걸어보기로 했다.
어느 도시의 상가. 요즘의 것보다는 조금 낮은 건물들. 세련되지 못한 간판들. 처음 보는 풍경이었지만 하나 확실히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개벽 전이구나.’
대체 뭐 하는 곳일까.
뒷짐을 지고 정처 없이 걷는데, 갑자기 골목마다 한 무리의 소녀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연회색 머리, 연회색 눈썹.
‘……응?’
상호는 얼이 빠져 버렸다.
골목에서 쏟아져 나온 나빛들은 상호를 무시하고 어딘가를 향해 달려갔다. 삐약거리는 혁구들을 저마다의 품에 한 아름씩 안은 채.
그 길의 끝에는 한 소녀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
빨갛고 기다란 머플러를 목에 두른 소녀.
머리에는 빨간 뿔이 달려 있었다.
“후우…….”
태화가 막대사탕을 입에서 꺼내며 짙은 연기를 뿜어냈다.
“악마는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군…….”
“뺙.”
나빛들이 혁구를 태화에게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던져진 혁구들이 태화의 몸을 때렸다. 하지만 태화는 코웃음을 치고는 손을 휘저어 혁구들을 태워버렸다.
화르륵……
“삐이이이……!”
처절하게 스러지는 혁구들 사이로 태화가 주먹을 치켜들었다. 아주 한껏 거만한 표정으로.
자기가 쓰러뜨린 게 한낱 아기새란 자각은 없는 듯했다.
“어어디 하찮은 미물 따위가!”
“…….”
상호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어딘지 모를 공간은 뭐고, 저 수많은 나빛들과 혁구들은 뭐고, 그에 맞서는 태화는 또 뭐고.
일단 그의 심상은 아닌데.
그렇다면 설마.
‘……태화 꿈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이젠 하다하다 남의 꿈속까지 들어오는…… 잠깐만.’
순간 상호의 몸이 흠칫했다. 만약 이곳이 태화의 심상이라면.
타인의 심상에 자유자재로 들어갈 수 있다면. 나아가 타인의 심상에서 그의 심상처럼 힘을 쓸 수 있다면.
‘악마가 깃든 사람들을…….’
상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직 내 안에 있는 놈도 못 죽였는데.’
지금은 시기상조다.
어쨌든 타인의 심상에 들어가는 방법을 깨우친다면 언젠가는 도움이 될 테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나빛들을 헤치며 태화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 상황을 확실히 파악하기 위해서.
“태화야, 태화야.”
“응?”
태화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뭐야, 쌤이 있네. 벗어!”
“……나 니 꿈 아니야. 진짜 나야.”
“응?”
그의 말에 태화는 눈을 끔뻑이다가, 고개를 기우뚱거리더니, 다시 눈을 깜빡이다가.
상호를 검지로 가리켰다.
“뭔 소리야, 꿈 맞잖아. 벗어라! 얍!”
“그니까 나는 꿈이 아니고 진짜…….”
후두둑
“……응?”
아래를 내려다보니 윗옷 단추가 다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야! 멈춰!”
“꿈이든 뭐든 상관없어! 여기선 내가 왕이야!”
“멈추라고! 나 진짜라니까…… 켁!”
상호는 자꾸 벗겨지는 바지를 필사적으로 추켜올렸지만, 태화는 아예 그에게 달려들어 옷을 뜯어내 버렸다.
꿈이라서 그런지 옷이 신문지처럼 좍좍 찢어졌다.
“얌마! 너 어디 선생님 옷을……!”
“뭐 어때, 볼거 다 본 사이잖아! 내 머릿속엔 이미 정보가 다 있다고. 얍! 얍!”
“야……!”
일단 남의 심상에서 나가는 방법을 제일 먼저 깨우쳐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