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여고의 남선생-391화 (391/501)

<391화>

391. 부정선거

푸른 하늘이 깜깜한 하늘로 바뀌어 있었다.

“……아이고.”

상호는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른 대지는 사라지고, 본관의 옥상. 심상 속을 걸어 다니던 다리는 오랫동안 가부좌를 튼 탓에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예경은 찾지 못했다.

악마도 찾지 못했다.

‘그래도 만드는 방법은 알았으니…….’

손에 아직 감각이 남아 있었다. 심상 속에서 만든 잔이나 벽돌 따위의 것들.

아직 심상 전체를 바꾸는 방법은 몰랐지만, 하다 보면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은 이쯤 해 둘까.’

그는 훌쩍 뛰어 옥상을 벗어났다.

* * *

다음 날.

학교로 출근해서 교무실에 앉아있는데, 은율이 다가와서 그의 어깨를 살짝 주물렀다.

“선생님.”

“어, 은율아. ……어깨 만지면 안 돼. 미진 선생님이 보면 화낸다.”

상호가 난색을 지으며 속삭여도 은율은 그의 어깨를 조몰락거렸다.

“동생들이 보법 좀 배우고 싶대요.”

“보법? 알았어. 오늘 가르쳐 줄게……. 그거 알려주려고 온 거야?”

“네.”

은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바뀌었는데도 은율은 반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반 아이들이 잘 지내는지 살피고, 또 때로는 상호가 잘 지내는지 살피고. 상호도 저도 모르게 은율에게 이런저런 잡일을 시키곤 했다. 작년부터 은율이 도와준 게 익숙해져서.

‘내가 아직도 은율이한테 일을 시키고 있었구나…….’

그는 은율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살짝 웃었다.

“고맙다. 잠시만 기다려. 같이 교실 가자.”

“네.”

은율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상호의 곁에 꼭 붙어 기다렸다. 상호가 할 일을 다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 * *

“반장 뽑자.”

상호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은율이 너무 오래 했어. 이제 2학년 사이에서 뽑아야 돼. 그러니까…… 누구 하고 싶은 사람 있어?”

“…….”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단비도, 미래도, 아리도, 초란도. 하솔만 약간 눈치를 살필 뿐, 누구 하나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 이서와 가은은 평소처럼 들은 체도 하지 않았고.

‘뭘 걸어야 하나…….’

스페셜 소원권이라도 발행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단비가 손을 번쩍 들었다.

상호는 반색하며 물었다.

“단비 반장 할 거야?”

“멍, 그게…… 반장 되면 언니들 막 부려먹을 수 있어요?”

그걸 바라는 거구나. 상호의 고개는 대답하기도 전에 끄덕여지고 있었다.

“응. 반장이니까. 말 그대로 반의 장이잖아. 언니들도 반장 말은 들어야지. 그래도 정말 막 부려먹진 말고…….”

“그럼 저 할래요!”

“저도!”

단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미래도 번쩍 손을 들었다.

뒤이어 하솔이 눈치를 보며 손을 들었고, 결국은 초란과 아리까지. 상호는 삽시간에 바뀐 태도들을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얘들아? 너희 대체 언니들한테 그동안 뭘 당했길래…….”

“저 반장 할래요.”

“저도…….”

“그래, 그래. 알았어…….”

칠판에 아이들의 이름이 적혔다.

총 다섯 개. 가은과 이서를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

“한 명씩 나와서 말해 봐. 왜 내가 반장이 되어야 하는지. 미래부터.”

“넵!”

미래가 걸어 나와 교탁 앞에 섰다.

미래는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는 상호를 돌아보았다.

“시작해요?”

“응.”

“에, 제가 반장이 된다면…….”

칠판에 빔 프로젝터가 쏘아졌다.

오늘 반장을 뽑는지도 몰랐을 텐데 대체 뭘 준비한 걸까. 상호는 어안이 벙벙해서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더 어안이 벙벙해졌다.

‘……응?’

화면에는 3학년 아이들의 이름과 짧은 글귀들이 수두룩이 나열되어 있었다.

-◆세희 언니

-선생님을 독점해서 3학년 내에 공격적인 분위기를 조성함

-◆태화 언니

-매점 따라가면 다음에 자기가 쏜다며 우리한테 사라고 함, 하지만 하루만 지나도 다 까먹고 또 우리한테 사라고 함

-틴트 바르고 손가락에 남은 거 거울 옆에 대충 닦음

-야외수업에 핸드폰 들고 나감, 자기 대련할 차례면 동생들한테 맡김

-맨날 보조 배터리를 빌림

-겨울엔 에어컨 틀고 이불 두 개 덮는 게 국룰이라며 창문 활짝 열고 동생들 담요 뺏어 씀

-자기 꼬리가 제일 예쁘다며 꼬리 있는 동생들 놀림

-세희 언니한테 깝치다가 한 대 맞으면 동생들한테 화풀이

-치킨 사준다면서 불러놓고 맛있는 건 자기가 다 먹음, 남기기 귀찮아서 부르는 게 분명함

-◆나빛이 언니

-다람이 먹으라고 사온 씨앗을 혁구 준다며 삥 뜯음, 웃는 얼굴로 달라고 해서 대처가 불가능

-◆지윤이 언니

-동생들이 싫다는데도 억지로 체력단련실에 끌고 감

-◆은율이 언니

-선생님한테 할 말 있으면 자기한테 먼저 하라고 함, 사실상 2학년과 선생님의 교류를 끊은 주범

-◆이츠키 언니

-나디아 언니보다 훨씬 한국말 잘하면서 불리해지면 못 알아듣는 척함

-◆나디아 언니

-그냥 못 알아들음

-◆다혜 언니

-자꾸 동생들 머리를 땋으려고 함

-툭하면 아리를 침범벅으로 만듦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동생들 반찬을 훔쳐감

‘…….’

상호는 할 말을 잃은 채로 스크린만 바라보았다.

미래가 칠판을 손을 탕탕 두드렸다.

“이처럼 동생들을 핍박하는 언니들을 견제하고! 동생들이 살기 좋은 교실을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와아아! 멍! 멍!”

단비가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빙빙 돌리며 박수를 쳤다. 다른 2학년들도 공감하는 눈치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다만 상호의 눈에는 다른 게 들어오고 있었다.

“야, 이태화.”

“……웅.”

“저거 다 진짜야?”

태화는 양손을 모아 꼼지락거리며 상호의 시선을 피했다.

“기억 안 낭…….”

“너 요튜브 지워.”

“아이씨, 그게 갑자기 왜 나와! 좋은 핑계 잡았구만?! 앙?!”

“……지워 임마! 핑계는 무슨 핑계야. 벌주는 거지!”

상호는 태화와 옥신각신하다가 반장 선거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미래를 돌아보았다.

미래가 교탁을 탕 내리치고 주먹을 허공에 붕붕 휘둘렀다.

“2학년의 권익을 위해! 이 한미래, 이 한 몸을 불사르도록 하겠습니다! 동생의! 동생에 의한! 동생을 위한 교실을 만들겠습니다!”

“멍!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교실의 주인이 될 것이다!”

“……끄응.”

동생들의 반란에 3학년들이 진땀을 흘렸다. 특히 화면에 나열된 자신들의 과오 때문에.

나빛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다혜 언니가 꾸꾸 씨앗 다 먹어서 조금 가져간 건데…….”

“므앙.”

다혜는 그딴 거 모르겠다는 듯 아리를 할짝거리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도 저마다 볼멘소리를 냈다.

“내는 느덜 좋으라고 운동시킨 거제, 은제 내 좋으라고 시킸나. 운동하믄 살도 빠지고 궁디도 커지고 좋은 거제…….”

“못알아듣는 척하는 건 외국인의 권리입니다. 힘들게 타향살이 하고 있는데 좀 봐주는 겁니다.”

“안 돼!”

어느새 미래와 교대한 단비가 교탁을 내리쳤다.

“시대의 흐름은 거역할 수 없어! 이제 우리 시대야! 만약 제가 반장이 된다면! 어어…….”

아직 머릿속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듯 주춤했지만, 단비는 곧 손가락으로 하늘을 찌르며 소리쳤다.

“2학년의 날을 만들어서! 그날 하루는 선생님이 2학년하고만 대화하게 하겠습니다!”

“……그기 머고?”

“또 발언권 점수제를 만들어서! 2학년에겐 가산점을 주는 등등등! 다방면에서 3학년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도록 하겠습니다!”

단비의 말에 아리가 눈을 끔뻑였다.

“그럼 내년엔 어떡해? 내년엔 우리가 3학년이잖아…….”

“……취소!”

단비가 꼬리와 귀를 축 늘어뜨리고 교탁에 머리를 박았다.

이래서 법은 잘 만들어야 한다. 영원한 집권은 없는 법이니. 상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단비가 아리와 바통 터치를 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아리가 뿔에 묻은 다혜의 침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으음, 제가 반장이 된다면…… 선생님의 곁에 항상 붙어서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럼 은율이 언니랑 다른 게 없지 않아?”

“그런가……?”

아리는 비늘이 난 뺨을 붉히며 자리로 돌아왔다.

다음은 하솔.

교탁 앞에 선 하솔이 아이들을 쓱 둘러보았다.

“저는 언니들이 동생들을 존중하고, 동생들도 언니들을 존중하는 교실을 만들겠습니다.”

노선을 달리 잡은 모양이었다.

친구들이 다 2학년들의 권익만 챙기니, 이런 상황에서 3학년에게 손을 내밀면 손쉽게 표를 긁어모을 수 있다는 계산.

역시나 3학년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속삭이고 있었다.

“하솔이 정도면 뭐…….”

“뭘 하려고 하는 애가 아니니까…….”

표는 이미 모인 듯했다.

그때 상호의 귀에 아이들이 속닥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초란아, 초란아.”

“응?”

“네가 나가서 3학년 표를 갈라쳐야 돼.”

미래가 초란의 귀에 속삭이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하솔이가 언니들 표 다 빨아먹어. 네가 갈라치고 우리가 단일화해야 돼.”

단비와 아리도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단일화? 멍…….”

“누구로?”

“당연히 나지. 너희는 언니들이 여태 어떻게 했는지 기록하지도 않았잖아.”

“멍…….”

단비가 귀를 축 늘어뜨렸다가 다시 쫑긋 세웠다.

“그래도 미래 넌 안 돼!”

“뭐? 왜?”

“넌 마법사잖아! 우리 반은 무예가 반이야. 반장은 무예가여야 해!”

“뭔 말도 안 되는……. 강아지라고 개억지를 부리네.”

“낑…….”

미래는 단비를 내버려두고 초란을 돌아보았다.

“그치만…… 우리들이 단일화해도 언니들 표가 더 많아서 불안하긴 해. 모을 거면 확실하게 모아야겠지. 초란이, 너 반장 하고 싶어?”

초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면 우리가 너한테 몰아줄게. 앞에 나가서는 언니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해. 그러면 네가 언니들 표도 갈라먹고 우리들 표도 먹을 거 아냐. 무조건 이길 수밖에 없어.”

미래는 초란과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언니들 타도할 거지?”

“응.”

“믿을게.”

2학년 아이들은 3학년 몰래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상호는 미래의 전략과 결단력에 감탄하며, 또 장기말 신세가 되어버린 하솔을 측은히 여기며. 교탁을 향해 걸어가는 초란을 쳐다보았다.

초란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는 동생들이 언니들에게 복종하는 교실을 만들겠습니다.”

“……응?”

3학년 아이들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복종……이라꼬?”

“헌터 사회는 약육강식. 강자가 약자보다 존중받는 게 당연한 겁니다. 약자가 존중받고 싶으면 강해져야지요. 그냥 존중하라고 외치기만 해서는 날강도와 다를 게 없습니다.”

“맞지.”

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디 어린것들이 날로 먹을라고…….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해서 3학년이 된 줄 알아?!”

“멍, 그건 그냥 일찍 태어난…….”

“넌 왜 일찍 태어날 노력을 안 했어? 태어나기 전에 할머니 꿈에 나타나서 며느리한테 야한 속옷 좀 사주라고 말할 수도 있잖아! 니가 노력을 안해놓고 왜 큰소리야!”

“머엉…….”

단비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직 초란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 초란은 헛기침을 하고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어쨌든, 경험도 있고 실력도 있는 언니들이 더욱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저를 뽑아 주신다면…… 언니들이 실망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장담드리겠습니다.”

“흐으음…….”

3학년 아이들은 대체로 흡족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상호에겐 이 선거의 결말이 보였다. 그는 입맛을 다시고 초란이 자리에 돌아가기를 기다렸다가 칠판 앞으로 다가갔다.

“자, 투표하자.”

* * *

결과는 전체 15표 중에 하솔이 5표, 초란이 7표. 글자를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는 표가 1개. 어디 갔는지 모를 행방불명된 표가 1개.

그리고 단비가 1표.

“단일화하자고 했잖아, 바보야!”

“한 명도 안 뽑아주면 쪽팔리잖아, 멍…….”

“자기 표 하나만 있는 게 훨씬 부끄러운 거야!”

“나도 지금 느끼고 있어…….”

약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어쨌든 결과는 나왔다.

상호는 칠판에서 초란을 제외한 아이들의 이름을 지웠다.

“오늘부터 반장은 초란이다. 은율이는 초란이 좀 도와주고. 다음 주부터는 반장 일 완전히 넘겨주는 거야.”

“싫어요.”

“……응?”

그가 당황하며 뒤를 돌아보자 은율이 어두운 기운을 풀풀 풍기며 작은 종이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도은율’이라고 적힌 투표 용지.

“저 연임할 거예요…….”

“…….”

자기 표 하나만 있는 아이. 상호는 진땀을 흘렸다.

분명 작년엔 곱게 그만두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래도 투표 결과가 나왔잖아. 이제 초란이가 반장이야. 초란아, 나와서 소감이나 각오 한 마디 해줘.”

“네.”

초란이 다시 교탁 앞에 서자 3학년 아이들의 신뢰가 담긴 눈빛이 쏟아졌다.

하지만 초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3학년 아이들의 기대와는 딴판이었다.

“2학년의 날을 만들겠습니다.”

“……머시라?”

“응?”

“므앙?”

3학년 아이들의 눈이 툭 불거졌다. 그래도 초란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해당 행사는 수업이 있는 날을 피해서 여름방학 중에 개설…….”

“잠깐만, 니 머라는 기고. 3학년이 먼저라 카지 않았나?”

“모든 학생은 공평해야 합니다.”

초란이 당연한 말을 했다.

“3학년이라고 더 존중받고 그런 거 없습니다.”

“아이씨, 사기야! 사기당했어! 쌤! 이래도 돼?!”

“요거이 부정선거가 아니믄 뭐고. 쌤예, 말을 좀 해 보이소!”

“반장 다시 뽑아요……!”

“얘들아, 너희가 선택한 반장이다.”

상호는 양 손바닥을 펼쳐 내보였다. 들고일어난 3학년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모든 학생은 그 수준에 맞는 반장을 가지는 법…… 커헉!”

“수준은 무슨 수준이야, 명치나 맞아! 누가 봐도 부정선거잖아! 쌤이 부추긴 거지?! 그치?! 명치! 명치!”

“나도 명치!”

“나빛아? 너는 왜…… 켁! 그만, 그만! 아프다, 나빛아……. 아니, 왜 날 때리는 거야! 선거는 너희가…….”

“덤으로 3학년의 참여를 일절 배제한 2학년 집중 교육 주간을 신설…….”

“아이씨, 짜증나! 쌤이 대신 맞아!”

“명치!”

“그리고 2학년 한정으로 선생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증대…… 정기적인 외식과 영화 관람을 보장…….”

“명치!”

“제발…….”

그 후로도 초란이 한마디 한마디 말할 때마다 3학년 아이들이 상호의 명치를 주먹으로 토닥였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멍이 들었을 정도로.

“명치!”

“그만…….”

마음속엔 이미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