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화>
389. 사칭
[뭐어?]
핸드폰에서 효은의 어이없어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안 했다고?]
“으응…….”
설미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별로 생각이 없었는지…… 꽃구경만 하고 학교에 돌아왔어.”
[뭐? 아니, 이 새끼는 하라고 할 땐 안 하고, 하지 말라면 하고…… 지가 뭔 청개구리 새끼야? 그래서, 그 새끼 학교 와서는 뭐 했는데?]
“세희랑 운기조식 하는 것 같더라. 요즘 많이 바쁜가봐. 매일같이 둘이서 운기조식만 하던데.”
[운기조식……?]
그것뿐이라면 별일이 아니겠지만, 효은은 아무래도 상호가 믿음직스럽지 못한 모양이었다.
효은이 의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확실해? 운기조식 말고 다른 거 한 거 아냐?]
“으응, 내가 가끔 정령으로 보는데…… 물론 밖에서! 창밖에서, 보는데…… 그냥 가만히 몇 시간씩 앉아 있더라.”
[그래? 뭐 수련이라도 시키나. 그래도 너랑 술도 못 먹을 정도로 급한 일은 아닐 거 아냐?]
“모르지, 나는……. 상호한텐 중요한 일일 수도 있지. 상호는 애들한테 진심이니까…….”
[그 진심이 그 진심이 아닐 텐데.]
“하하…….”
그냥 웃기만 하는 설미에게 효은이 혀를 찼다.
[너도 당하지만 말고 좀 공격해봐.]
“……글쎄. 상호가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으니까…….”
빌려 쓰는 입장인데 어떻게 강도질을 하랴. 설미는 쓰게 웃었다.
하지만 효은은 설미와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눈치 보지 말고 일단 뺨싸대기를 갈겨. 그러면 애가 벙 찔거 아냐. 그때 거시기를 딱 잡고…….]
“그건 네가 상호랑 오래 봐서…….”
[아니 내 말대로 하면 된다니까. 일단 딱 잡고! 이렇게 말을 해. 야 X발놈아. 내가 니랑 함 치면 안 되냐?]
“효, 효은아, 나 지금 교무실 앞이야…….”
[내가 니랑 칠 수도 있는 거잖아아아! 하라고! 그러면 그 새끼가 쫄아서…….]
그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뭐해요?”
설미는 소스라치게 놀라 황급히 핸드폰을 내렸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상호가 그녀를 멀뚱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효은이 목소리 들린 것 같은데…….”
“으, 으응. 수다 떠는 중이었어.”
“잘 지낸대요?”
“으응……. 상호 많이 보고 싶대.”
“뻥인 거 같은데…….”
당연히 뻥이 맞다. 물론 설미는 그렇게는 말하지 않고 말없이 씩 웃었지만.
상호가 머리를 긁적이다가 돌아섰다.
“전 수업 갈게요. 효은이한테 잘 지내라고 전해 줘요.”
“으, 으응~. 그럴게~.”
설미는 복도를 걸어가는 상호에게 손을 흔들고 다시 핸드폰을 귀에 붙였다.
방금 대화를 들었을까.
효은이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넌 진짜 호구야, 임설미.]
“하하…….”
설미는 그저 웃었다.
* * *
세희와의 심상 수련은 별 진전이 보이지 않았다.
몇 날 며칠을 심상에서 매진해도 아주 작은 잔 하나뿐, 그 이상은 만들지 못했다. 그래도 상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매달렸다. 이전보다 더욱 절박하게.
그 이유가 마음속 악마를 잡기 위해서인지, 예경을 도와주기 위해서인지.
혹은 세희를 통해 예경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인지는,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래도 수업에 소홀하진 않았다.
“오늘은 실내수업이다.”
상호는 칠판에 물백묵을 끼적이며 말했다.
“한번 생각해 보자. 실내수업을 왜 하겠어?”
“조만간 쌤이 또 우릴 납치해서 산에 버릴 거란 뜻이지.”
“정확하네.”
“납치 멈춰!”
태화가 손바닥을 쫙 펼쳐 내밀었지만, 상호는 가볍게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린 봄이지? 봄에는 땅이 어떻고 나무가 어떻냐. 새싹이 나고 새잎이 돋지? 동물들은 겨울잠을 끝내고.”
“응.”
“몬스터도 겨울나기를 마치고 활동을 시작하는 시기야. 무리생활을 하는 놈들은 비축했던 식량을 풀어서 기운이 넘치고 활발해진다. 반대로 혼자 사는 놈들은 어떻겠어. 걔들은 대부분 보관이란 개념이 없단 말이야. 그냥 먹으면 되는 걸 괜히 보관했다가는 도난당할 위험만 껴안는 거니까.”
칠판에 이런저런 말들이 적혀 내려갔다.
“그래서 걔네들은 겨우내 쫄쫄 굶고 비실비실해지지. 그렇지만 공격성은 무리짓는 놈들보다 더해. 우리도 배고프면 짜증이 나는 것처럼…….”
그렇게 한창 수업을 시작하려 하는데,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이번엔 또 뭐냐.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꺼냈다.
“……으음.”
도현에게서 온 문자.
내용을 확인한 상호는 핸드폰을 집어넣고 물백묵을 내려놓았다.
“사카시타만 따라와. 얘들아, 선생님 사카시타랑 어디 좀 갔다 올게.”
“둘이 어디 가? 체육창고? 양호실?”
“협회 간다, 임마. 은율이, 미진 선생님 불러서 야외 수업하고 있어. 선생님 늦게 올 수도 있으니까 찾지 말고.”
“와씨, 수업하다 말고 여제자를 끌고 나가서 한밤중까지 같이 있다 오겠다고? 쌤 너무 막나가는 거 아냐?”
태화의 선동에 다른 아이들의 눈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선생님…….”
“쌤예…….”
“……빨리 가자, 사카시타. 혹시 모르니까 칼은 챙겨.”
상호는 아이들의 시선을 피해 문가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츠키는 그런 눈빛들을 오히려 즐기는 듯이, 사뿐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상호의 뒤에 따라붙어서 아이들을 돌아보며 혀를 쏙 내밀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순간 모두의 눈에 환각이 보였다. 이츠키의 엉덩이에서 살랑이는 여우 꼬리.
“야! 저거 잡아!”
“선생님! 도망치지 마세요!”
“후딱 잡으라 마. 저거 저러다 몰디브까지 튄데이!”
“……갔다올게, 얘들아~.”
상호는 이츠키를 끌어안고 복도 창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그래서 무슨 일입니까?”
상호의 등에 업힌 이츠키가 멀뚱히 눈을 끔뻑거렸다.
“악마 때문이면 하양이랑 이양도 왔을 텐데…… 사실 협회는 핑계고 놀러가고 싶으신 게 아닙니까?”
“아니야…….”
“저는 유럽이 좋습니다.”
“아니라고…….”
“이대로 유럽까지 날아가는 겁니다.”
이츠키가 상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상호는 이츠키의 오금을 더욱 단단히 붙잡고 속도를 올렸다.
발밑으로 건물들이 휙휙 지나가고 있었다.
“이번엔 추적이 아니라 추격이야.”
“누군지 이미 안다는 겁니까?”
“응, 근데 악마인지는 아직 모르고…….”
“인자 검사를 못 한 겁니까? 잡지 못했다는 뜻입니까?”
“응.”
상호의 눈이 차갑게 번득였다.
“용의자가 프로 헌터야.”
B급의 무예 헌터. 헌터로서는 고만고만한 실력이지만, 일반인을 상대로는 전신이 흉기인 인간병기나 다름없다.
악마든 아니든 빨리 잡아야 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습니까?”
“저번에 우리가 악마 찾았을 때 있잖아. 그때 이후로 협회가 초소형 CCTV를 여기저기 막 달아놨거든.”
악마에게 사회가 박살나는 것보다는 돈과 사람을 갈아넣어서라도 대비하는 게 싸게 먹히는 길이니까.
상호는 도현에게서 온 문자의 내용을 떠올렸다.
“근데 오늘 아침에 포착을 했대. 골목에서 피투성이로 빠져나오는 사람을……. 그래서 CCTV를 분석해보니까 현직 헌터였고, 지금 이렇게 잡으러 가는 거야.”
“정확히 어디 있는지는 모르는 겁니까?”
“응. 그 일대를 봉쇄하고 수색 중이래.”
“조금 이상합니다.”
이츠키가 그의 귀에 꼭 붙어 속삭였다.
“악마는 사람에서 사람으로 옮겨가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렇지.”
“그럼 시체로 남겨진 사람이 원래의 숙주일 텐데, 그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이었습니까?”
“일반인이었대.”
“그럼 일반인의 몸으로 헌터를 습격한 겁니까?”
“모르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둬야 했다.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공격했을지도. 아니면 살인은 그냥 혼란을 조장하려는 거고, 원래부터 그 헌터 몸에 들어있었을지도 모르지. 자기도 모르게 악마에게 당했던 적이 있다던가…….”
상호는 어깨를 들썩였다.
“확실한 건…… 직접 봐야 알겠지.”
그의 몸이 화살처럼 하늘을 갈랐다.
* * *
“오지마!”
사내의 몸에서 시퍼런 기운이 흘러나왔다.
“오지말라고! X발, 오지마!”
“안 가고 있잖아.”
상호는 이츠키를 끌어당겨 등 뒤에 숨겼다.
도현이 보내준 바로 그 사진 속의 사내. 좁은 골목에서 대치한 둘은 거리를 좁히지도, 벌리지도 않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사내는 심호흡을 하더니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상호를 가리켰다.
“뒤, 뒤에 그 앤 뭐야. 동생, 동생……인가? 가던 길 가. 괜한 데 신경 쓰지 말고.”
“아니, 협회에서 왔는데.”
상호는 입맛을 다시고 검을 빙글빙글 돌렸다.
“꼴을 보니 악마가 아니구만. 차라리 자수를 하지 그래.”
“흐, 흐흐…….”
사내가 음침하게 웃었다.
“내가 악마가 아니라고 어떻게 단정하지?”
“굳이 너한테 설명할 필욘 없지.”
악마라면 상호를 보자마자 아는 척을 했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사내의 언행들은 악마라고 단정 짓기엔 어설픈 면이 많았다.
상호가 걸음을 떼자 사내가 뒷걸음질치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내가 악마인지 아닌지 네가 어떻게 아냐고……!”
“내가 그걸 알든 모르든 널 조져야 하는 건 변함없지?”
상호는 뒷짐을 진 채로 느긋하게 걸어 사내에게 다가갔다.
“아마 악마에 대해 어쭙잖게 주워들은 모양인데…… 일단 잡아만 놓으면 악마인지 아닌지는 구별할 수 있단 말이지. 악마 인자 검사라는 게 있거든……. 물론 너한테는 이 정보를 활용할 기회가 다시는 오지 않겠지만.”
감옥에 갈 테니 말이다.
해일처럼 거대한 기운이 사내를 향해 쏟아졌다. 사내는 눈앞의 청년이 자신의 실력으로는 상대도 할 수 없는 괴물이란 걸 깨닫고 황급히 목에 손톱을 겨눴다.
손톱에는 조그맣지만 날카로운 강기가 세워져 있었다.
“오지마!”
사내가 절박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오면 이놈은 죽는다!”
상호는 잠시 내공을 멈추고 눈을 끔뻑였다.
아무래도 생쇼를 하는 것 같은데. 그래도 악마 중에 모지리인 놈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는 태연하게 고개를 돌려 이츠키를 바라보았다.
이츠키가 작게 중얼거렸다.
“사람입니다.”
“오케이.”
기의 해일이 사내를 덮쳤다.
* * *
“결국 악마가 있긴 했던 거지.”
상호는 가죽 소파에 앉아 짚은 검의 끝을 만지작거렸다.
“사람 마음속에…….”
“그러게 말이다.”
도현이 한숨을 쉬었다.
“어이가 없다. 맨정신으로 살인을 저질러놓고 악마에게 떠넘기려 한 게……. 그럼 감옥 안 가려고 다른 빙의자들처럼 재워지려고 한 거야? 우리가 언제 깨워줄지도 모르면서?”
“그랬을 리는 없을 것 같고…… 아마 뿅 하고 악마가 사라졌어요~ 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되게 어설프게 알고 있는 것 같더라고.”
“더 어이가 없네.”
사람이나 악마나 다를 게 없다. 도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상호와 이츠키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덕분에 금방 해결했네. 앞으로 자주 부르게 될지도 모르겠는데…….”
“상관없어. 필요하면 불러.”
“그래, 고맙다. 이제 들어가서 쉬……일 수는 있냐, 너?”
“글쎄……. 수업이 있긴 한데.”
상호는 이츠키와 눈을 마주쳤다.
“농땡이 좀 피우다가 들어갈까?”
“제자와의 외박 패키지 특별 할인 이벤트중입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둘은 함께 부협회장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