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여고의 남선생-388화 (388/501)

<388화>

388. 꽃구경

4월의 첫 번째 금요일.

파릇파릇 올라오던 벚꽃 봉오리들이 활짝 피어날 무렵. 예현여고 교정에 선 벚나무 밑에서는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고 있었다.

상호의 반도 그랬다.

“선생님~.”

“사진 찍어주세요~.”

벚나무 아래 선 나빛과 나디아가 손으로 브이 자를 그려 뺨에 붙였다.

금색과 연회색 머리카락에 내리는 분홍색 꽃잎. 상호는 씩 웃으며 나빛의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찍는다, 하나, 둘, 셋…… 됐다.”

“선생님도 찍어요~. 나디아, 나 찍어 줘.”

“네!”

나디아가 쪼르르 달려와 상호에게서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나빛의 곁에 다가간 상호는 손으로 브이를 만들어 어색하게 들어 올렸다.

‘보나마나 또 100장 200장 찍겠구만…….’

그리고 그 말대로 되었다.

“쌤, 쌤. 나도.”

“므앙.”

“저 혼자 있는 거 찍고 같이 찍어 주세요.”

“에헤이~, 흔들려뿟네. 다시 찍읍시데이~.”

“앗, 저 포즈 좋다. 선생님, 저 한 번만 더요~.”

몸이 쉴 새가 없었다. 셔터 누르랴 포즈 잡으랴.

그래도 이렇게 신나게 찍었으니 주말에 벚꽃 보러 가자는 말은 안 나올 테다. 상호는 그 사실에 안도하며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선생님~. 주말에 벚꽃 보러 가요~.”

‘…….’

왜 안 나오나 했다.

“굳이? 지금 보고 있잖아…….”

그 말에 아이들이 벚나무를 구타하기 시작했다. 발길질 한 번마다 벚꽃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헐벗은 벚나무를 보고 할 말을 잃은 상호에게, 아이들이 당당하게 말했다.

“없는데?”

“벚꽃이 어딨습니꺼.”

“…….”

말을 잘못했다간 교내의 모든 벚나무가 고자가 될 것이다. 상호는 벚나무들의 생식기를 지켜주기 위해 애써 웃어 보였다.

“그래, 갈 수 있는 사람은 가자…….”

* * *

‘…….’

상호는 소형버스 운전대를 잡은 채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뒷자리에서는 15명의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무언가를 와작와작 먹고 있었다.

“선생님~. 과자 드실래요?”

“아니, 괜찮아.”

“쌤! 얼마나 남았어?”

“20분 정도.”

상호는 그렇게 대답하고 옆을 돌아보았다. 조수석에는 설미가 앉아서 창밖을 돌아보는 중이었다.

시선을 알아차렸을까. 아니면 원래부터 그렇게 훔쳐보고 있었을까. 슬며시 고개를 돌려 상호를 흘끗한 설미는 입가에 빙긋 미소를 띠어 보였다.

“약속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네.”

그는 일부러 설미가 좋아할 만한 말을 했다.

“누나 때문에 취소했어요.”

“그래……?”

푸후훗, 하고 웃는 것을 보니 잘 먹혀든 모양이었다. 사실 주말에 약속 따윈 잡혀있지 않았지만.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며칠 전, 세희와 몸이 바뀌었을 때. 상호를 향해 직진하는 설미에게 세희가 철벽을 쳐 버려서, 상호는 본의 아니게 설미에게 치명상을 입힌 셈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데려가는 중이었다.

“상호랑 꽃구경은 처음이네…….”

“봄에 제일 바쁘니까요.”

“그치, 갈 틈이 없지…….”

배시시 웃는 설미의 뺨이 발그레 물들었다.

“저녁에 한잔할래?”

“……그게.”

상호의 보이지 않는 더듬이가 위험을 감지하러 이리저리 까딱였다. 대답 잘 해야 하는데.

그는 한참 후에야 최적의 대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안주인이 허락하면요.”

“효은이한테 허락받으면 되는 거야?”

“아마도…….”

상호의 눈이 핑핑 돌았다. 여러 명과 사귀어 봤을 리가 있나.

그래도 그게 대답이 되었는지, 설미는 씩 웃으며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시작했다.

‘어디 몬스터 안 쳐들어오나…….’

맨정신으로 하기는 너무 부끄러운데. 술이나 진탕 퍼마셔야겠다. 상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좀스럽게 핸들을 만지작거렸다.

어깨가 조금 쪼그라들어 있었다.

* * *

“쌤! 쌤! 나 어디 있게!”

벚나무 가지 위에서 태화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검고 매끈한 꼬리를 마구 촐랑이면서.

“오빠~ 나잡아봐라~ 바보꼰대3분카레오빠~. 어딨게어딨게~.”

상호는 태화의 이마에 지탄을 날렸다.

“여기 임마.”

빠악

“악! 우씨, 어떻게 찾았어! 꽃 사이에 꽃이 있는데!”

“니가 사람이지 무슨 꽃이야.”

“나 꽃이야! 꽃 화짜잖아!”

“너 그거 될 화야. 꽃 화가 아니라. 기쁠 태에 될 화라고.”

“뭐시라?!”

태화가 이마를 짚고 비틀거렸다. 출생의 비밀을 깨달은 드라마 주인공처럼.

“말도 안 돼! 10년 동안 그렇게 알았는데!”

“그니까 한자 공부를 좀 해. 연애소설이라도 좋으니까 책 좀 읽어.”

“나 될 화짜 싫어! 꽃 화로 개명할래! 아빠!”

“아빠야 오빠야? 하나만 해, 임마.”

핀잔을 날리는데 누군가가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상호는 그 방향을 돌아보았다.

나빛이 벚꽃 가지 두 개를 양 뺨에 붙인 채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선생님~.”

“……으응.”

“저 어디 있게요~.”

“으음……. 나빛이 목소리가 들리는데……. 어딨지……?”

“헤헤헤…….”

하얗디하얀 뺨이 벚꽃처럼 엷붉다. 상호는 눈 뜬 봉사가 되어 허공을 더듬거렸다.

“나빛이가…… 어디 있을까…….”

“염병하네…… 악!”

황금색 뿅망치가 태화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태화는 빠져! 자기 이름도 한자로 모르는 바보니까!”

“야, 그러는 니는……. 아 X바, 니는 한글이잖아!”

“응!”

“꺼져! 지도 한자였으면 몰랐을 거면서…….”

“아닌데에에~.”

“꺼지라고!”

뿅망치를 휘두르는 나빛과 불꽃을 내뿜는 태화. 상호는 둘을 내버려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벚꽃축제 속 수다를 떨거나, 사진을 찍는 아이들. 그 뒤를 따라가는 설미.

그리고 조금 외따로 떨어진 곳에서 이츠키가 느릿하게 걷고 있었다.

“사카시타.”

“아, 선생님.”

이츠키는 가까이 다가온 상호를 흘끗하고 벚나무들을 올려다보았다.

“고향 느낌이 나서 좋습니다.”

“일본엔 벚나무가 많지?”

“벚꽃이 한번 피면 눈에 안 보이는 순간이 없습니다. 어떤 곳은 지평선까지 벚꽃이 쭉 늘어서 있기도 하고…….”

“그렇게 많아?”

“산도 벚꽃으로 뒤덮입니다. 다만 산은…… 벚꽃이 진하고 많으면 예쁜데, 벚꽃이 하얗고 드문드문 있으면…… 꼭 쑥떡에 곰팡이가 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하…….”

상호는 쓴웃음을 흘리다가 이츠키의 걸음이 점점 느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꼭 상호를 아이들에게서 떼어놓으려는 듯했다.

“사카시타.”

“네.”

“뭔가 할 말이 있어?”

이츠키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를 돌아보았다.

“선생님. 그저께 상태 안 좋았을 때 있잖습니까.”

“으응.”

“그때 선생님이랑 세희랑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무언가 다른 것을 본 모양이었다.

상호는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 이츠키의 곁에 바싹 붙어 속삭였다.

“평소랑 달랐어?”

“그건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니, 그거야 그랬었지만……. 그래도 뭔가, 평소랑 다르게 보인 거야?”

“실이 달랐습니다. 실은 인연의 깊이에 따라 굵어지고 얇아지는데…… 얇은 실은 수십, 수백 가닥이라 셀 수도 없지만, 굵은 실은 사람마다 개수가 달라서 어느 정도는 구별이 가능합니다.”

“나랑 세희랑 그 굵은 실 개수가 바뀌어 있었다는 거야?”

“개수라기보다는, 뭐랄까…….”

이츠키가 세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세희는 굵은 실이 우리 반 사람들밖에 없어서.”

상호는 그 말을 듣고 잠시 할 말을 잃어, 앞서서 걸어가는 세희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살아오면서 누구와도 정을 나누지 않았던 아이가, 그의 반에 들어와 연을 얻어 비로소 세상을 살게 되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으니 혼자 사는 사람은 세상에 없는 것이다.

“나는 굵은 실이 밖으로도 있다는 거지?”

“꽤 많습니다.”

이츠키가 그를 흘끗했다.

“그러면 둘이 바뀌었던 게 맞는 겁니까?”

“……응.”

더 숨길 수도 없다. 이츠키에게는 알려주는 것이 좋을 듯했다.

상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츠키가 입맛을 다셨다.

“어쩐지 평소보다 귀엽다 했습니다.”

“……으음.”

상호는 헛기침을 하고 말을 돌렸다.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 나랑 사카시타 중에 누가 더 굵은 실이 많아?”

“그건…….”

이츠키가 자신의 배를 툭툭 두드렸다.

“저와 선생님의 실이 하나 더 연결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하나 더……?”

상호는 잠시 후 그 말의 뜻을 깨닫고 움찔했다. 당황한 얼굴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아기도…… 실이 보여?”

“그렇습니다. 특히 아기의 실은 무조건 딱 하나, 친부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츠키가 그를 곁눈질로 흘겨보았다.

“제 앞에서는 바람피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아니, 애초에 바람은 안 피워…….”

애인이 여러 명인 게 문제일 뿐. 상호는 머리를 벅벅 긁다가 멈칫했다.

‘잠깐만, 방금 나 말실수한 것 같은데…….’

다시 고개를 돌려 보니 이츠키는 입가에 띠었던 음흉한 웃음을 재빠르게 지우고 있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

상호는 이츠키의 시선을 피해 앞을 보았다. 앞서가는 아이들은 그와 이츠키가 뒤처진 것도 모르는 듯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의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사카시타.”

“네.”

“애들이랑 사진 찍고 있어.”

“어디 가십니까?”

“아니, 누워서 경치 구경이나 하려고. 너희랑 다니면 해 질 때까지 사진만 찍을 것 같아서.”

“알겠습니다.”

이츠키가 고개를 끄덕이고 앞서 걸어갔다.

“비밀로 해 드리겠습니다.”

“고마워.”

“이 빚은 꼭 갚는 겁니다.”

“……으응.”

상호는 슬쩍 뒤로 빠져서 인파에 몸을 숨겼다.

학교에서도 백 장 가까이 찍었는데 여기서까지 사진의 노예가 될 순 없다. 그냥 잔디밭에 누워서 이따금씩 떨어지는 꽃잎이나 구경하고 싶었다.

‘사진은 마지막에 찍어주면 되겠지…….’

그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약간 솟은 둔덕으로 향했다. 잔디밭 한가운데에 굵은 벚나무 한 그루가 선 곳.

다른 사람들은 누울 때 돗자리부터 찾았겠지만, 상호에겐 필요하지 않았다.

‘흙바닥에 눕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옷이야 빨면 되겠지.’

4월 초지만 정오가 가까워서 공기가 따뜻했다. 나무 밑 그늘에 누워 손으로 머리를 받치니 낮잠을 자기에 딱 좋았다.

‘날도 좋네…….’

상호는 눈을 감고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 * *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자고 있었구나.”

“……으음.”

꿈을 꾼 것 같았다.

상호는 몽롱한 정신으로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사진은 잘 찍고 왔어요?”

“으응, 뭐 애들이 알아서 찍었겠지. 그나저나 선생이 되어가지구 애들은 내팽개치고 잠이나 자고 있다니…….”

그녀가 웃었다.

“일이 많이 힘든가봐?”

“누나만큼은 아니겠죠…….”

“후훗.”

상호는 구별할 수가 없었다. 몸에 내리쬐는 햇살이 포근한 건지,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포근한 건지, 혹은 그녀의 목소리가 포근한 건지. 그만큼 비몽사몽이었다.

곧 그녀가 말을 이었다.

“같이 꽃구경 온 건 처음이네. 그렇게 오랫동안 지냈는데.”

“바빴으니까요.”

“그치……. 바빴지. 너무 바빴어.”

키득거리는 웃음.

“그래도 다행이야. 결국은 이렇게 와서. 그치만…… 또 가봐야 해.”

“……네?”

간다니 어디를 말인가. 어리둥절해진 상호는 눈을 뜨려 했지만, 그의 얼굴을 쓰다듬는 가느다란 손이 때마침 눈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다음에 또 올게. 조금 한가해지면…….”

그 손이 지나가고 나타난 것은, 그에게 무릎을 내어주고 잠든 세희의 얼굴.

뒤로는 흐드러진 벚꽃이 하늘에 펼쳐져 있었다.

“……아.”

상호는 세희를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방금의 대화가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손을 들어 세희의 뺨을 어루만졌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연분홍 벚꽃잎 하나가 그들의 사이를 가르며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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