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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여고의 남선생-387화 (387/501)

<387화>

387. 후폭풍

상희는 내공을 갈무리하며 엷은 한숨을 쉬었다.

“고생했다, 세희야.”

“네.”

그의 앞에 앉은 세호가 가부좌를 풀고 일어났다.

시간은 열한 시. 조금 이르게 퇴근한 후에 밥도 먹지 않고 바로 운기조식에 들어가 꼬박 6시간 동안 심상에서 단련을 했다.

‘진짜 배가 별로 안 고프네…….’

세희가 빼빼 마른 이유가 있다. 저녁을 안 먹었는데도 이렇게 배가 안 고프다니.

그래도 이 마른 몸을 더 굶길 수는 없고. 상희는 침대에서 일어나 주방을 향해 걸어갔다.

“뭐라도 좀 먹고 자자. 세희 너도 배고프지?”

“저는 살짝…….”

“반반 나눠 먹자.”

냄비에 물이 올라갔다.

그나저나 운기조식을 하고 나면 영혼이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을까 기대를 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상희는 침대에 걸터앉아 세호를 돌아보았다.

“세희야.”

“네.”

“이대로…… 고정되어버리진 않겠지?”

세호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흉터가 진 한쪽 눈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그럼 제가 선생님 일 대신할게요.”

“……그건 안 돼.”

상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내가 해야지.”

“어떤 일들인데요?”

“언젠간 알게 될 거야.”

하나 남은 눈이 상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짐을 혼자 지진 말아 주세요.”

“……으응.”

상희는 살짝 웃고 물이 끓는 냄비를 향해 다가갔다.

곧 파와 계란을 넣은 라면이 식탁에 놓였다. 상희가 앞접시에 라면을 아주 조금 덜어내고 냄비 째로 밀어붙이자 세호가 난색을 지었다.

“저 이렇게 많이 안 먹어요.”

“내 몸이니까 내가 더 잘 알지. 이만큼은 먹어.”

“저도 그것보단 많이 먹어요. 자요.”

결국 상희의 앞접시에는 라면이 수북이 쌓였다.

서로가 서로의 몸에 들어가니 알게 되는 게 많아진다. 상희는 그런 생각을 하며 라면을 먹다가, 다 먹고 난 이후의 일에 생각이 미쳤다.

“……세희야.”

“네.”

“어떻게 씻지……?”

세호도 살짝 당황한 듯했다.

“저도…… 선생님이 좀 도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서로 씻겨 줄까? 나는 눈 감고 있을게…….”

“선생님 오늘 옷 갈아입으셨었잖아요.”

“최대한 안 보려고 노력했어…….”

“저는 자주 봤으니까 그냥 눈 뜨고 있을게요.”

“응…….”

서로의 몸에 들어가니, 알게 되는 게 지나치게 많아진다. 딱히 궁금하지 않았던 것들까지도.

접시와 냄비를 비운 둘은 얼굴을 붉히며 함께 욕실로 향했다.

* * *

다음 날 아침.

“으음…… 아.”

상호는 눈을 뜨자마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굳이 이불을 들춰 확인하지 않아도 몸의 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 발달된 근육과 보이지 않는 한쪽 눈, 그리고 무엇보다 가랑이 사이의 존재감.

‘돌아……왔네?’

상호는 어리벙벙한 눈으로 손바닥을 보다가 옆을 돌아보았다. 머리를 푼 세희가 그의 옆에 꼭 붙어서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다행이다.’

그의 일은 그가 해야 하니까.

그런 짐을 세희에게 맡길 순 없다. 그는 세희의 머리를 쓰다듬고 아침밥을 만들기 위해 일어났다.

어제의 소동으로 피곤했을 세희를, 좀 더 자도록 놔둔 채.

“쿠울…….”

* * *

“……뭐야.”

교실로 들어선 상호는 어안이 벙벙해서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언니들은?”

인원이 아작이 나 있었다. 15명에서 6명으로.

다람에게 호두를 까 주던 단비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퇴한대요…….”

“뭐?”

“다들 학교 때려친다고 자퇴한대요……. 아, 그리고 태화 언니가 그랬어요. 그저께 교장실 지나가는데 교장선생님 비명소리랑 선생님 목소리가 났다고…….”

“…….”

“그거 듣더니 하솔이가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갔어요…….”

“…….”

어제 일의 후폭풍인 모양이었다.

뻣뻣하게 굳은 상호의 옆으로 세희가 태연하게 걸어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2학년 아이들은 그런 세희를 흘끔거리며 쭈뼛쭈뼛했다.

“세희 언니…….”

“응?”

“오늘은 괜찮아?”

“응.”

세희는 짧게 대답하고 태화의 책상 밑을 뒤적거렸다.

“뭐야, 진짜 없네. 선생님. 얘들 진짜로 갔나 봐요.”

“…….”

“수업해요, 그냥. 하기 싫다는 애들은 버리고.”

“……잠시만 갔다 올게.”

상호는 황급히 돌아서서 교실을 나갔다.

* * *

“얘들아, 얘들아, 한 번만 봐줘, 한 번만…….”

“됐심더. 늦었심더.”

지윤이 고개를 팩 돌렸다.

“어제 그래 자랑을 해쌌으믄서, 인자 와가 뭔 변명을 할라 그러십니꺼. 가서 세희랑 쿵덕쿵덕이나 하이소.”

“그거 내가 아니었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지예.”

“아니…….”

상호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가 무릎을 꿇은 곳은 그의 방 침대 앞. 침대에는 세희를 제외한 3학년 아이들이 일렬로 쭉 걸터앉아 있었다.

지윤의 옆에서 나빛이 중얼거렸다.

“저희가 선생님을 용서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예요…….”

“뭔데, 뭔데? 다 해줄게, 선생님이 다 해줄게…….”

“지금 당장 여기서 저흴 다 임신시키고 세희랑 합동 결혼식을 올리는 거예요…….”

“…….”

“그것 외의 방법은 없어요…….”

“안 했다니까……. 어제 한 말 다 거짓말이야…….”

그가 손사래를 치자 나빛이 뒤로 벌렁 드러누웠다.

“시작하세요…….”

“뭘 시작해! 일어나, 일어나…….”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상호에게 지윤이 묘한 눈빛을 보냈다. 헛기침을 하고 볼을 붉히며.

화를 내던 기색은 온데간데없었다.

“그거라믄 지도 용서해 드릴 수 있습니더.”

“용서고 나발이고 이게 말이 되냐! 나빛아, 일어나……. 야, 너는 왜 누워. 너도 안 일어나!”

“왜 세희만 해주냐고! 개꼰대3분카레허접씨뿌리개야!”

“이 쉐끼가 어른한테……!”

상호는 드러누운 아이들을 내공으로 일으키고 눈을 부릅떴다.

“진짜 내가 안 했어. 세희랑 한 것도 아니고, 어제 너희한테 말한 것도 나 아니야. 난 분명히 거짓말 안 했어. 이제 너희가 믿고 안 믿고는 너희 자유야. 그것까지 내가 어떻게 해주진 못해. 너희가 알아서 해.”

“선생님…….”

나빛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저희 윽박지르시는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고…… 나빛아, 사실이 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니야…….”

“저는 저희 잘못보단 선생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해요…….”

“아니, 물론 너희는 잘못 없어! 그치만 선생님 말 좀 들어 봐, 선생님도 잘못이 없다고……. 나빛이, 선생님 믿어? 못 믿어?”

“못 믿어요…….”

“못 믿지예.”

“므아.”

“지랄!”

“…….”

사제간의 신뢰는 옛적에 다 부서진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다. 무슨 말을 해도 믿지를 못하겠다니. 상호는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양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얘들아. 잘 들어.”

“네…….”

“어차피 어제 너희가 들은 게 다 뻥이란 건 시간이 지나면 증명될 거야. 그런데 너희가 지금 이렇게 선생님을 못 믿는 건…… 선생님 입장에서는 가슴이 너무 아프다.”

“어제는 뻥을 쳐 놓고 오늘은 믿으라니요…….”

“저희 가슴에 대못을 박으셨습니다.”

나빛과 이츠키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지만, 상호는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선생과 제자가 서로를 믿어야지. 너희가 날 선택한 거고, 나도 너흴 선택했어. 그러면 믿기 힘든 말이라도 서로 믿어야지.”

“그래서 대체 어제 우리한테 말한 쌤은 누군데?”

태화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걸 말하면 절대로 안 믿을 테니.

상호는 고개를 저었다.

“다 사정이 있어.”

“다 사정해, 그럼. 사정사정해 보라고.”

“……나빛아, 지윤아. 진짜로 선생님 못 믿어?”

상호는 제일 오랫동안 봐온 아이들을 공략하기로 했다. 태화는 계속 저럴 게 뻔해서 무시하고.

“나빛아, 지윤아. 선생님 그런 사람 아닌 거 알잖아. 내가 진심으로 말할 때 어떤 목소리를 내는지 알잖아. 얘들아. 우리 사이가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돼?”

“……음.”

지윤과 나빛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던 둘은, 곧 고개를 들어 상호와 눈을 마주쳤다.

“아니요.”

“아니지예.”

“그래. 우리 사이가 진심인지 아닌지도 구별 못 할 정도는 아니잖아. 너희도 알고 있…….”

“더 가까워져야 해요.”

“……응?”

나빛과 지윤이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저희한테 얼마나 진심인지 보여주세요.”

“우리 사이가 일케 멀어서야 되겠심꺼. 올라오이소. 아, 우리 사이에는 옷 한 장도 너무 먼 것 같은디…….”

“…….”

도저히 말이 안 통한다.

이제는 아예 다른 아이들까지 배째라면서 드러눕고 있었다.

“드루와, 드루와~.”

“므앙, 므앙~.”

“순서는 어케 하노?”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는 겁니다.”

“야이씨, 그럼 니가 1빠잖아. 출석번호대로 해! 잠깐만, 쌤 도망친닷!”

“잡아! 잡아!”

“선생님~!”

상호는 아이들의 부름을 무시하고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아이들을 교실로 데려오는 것은 그냥 포기해버린 채.

‘지금 안 튀면 인생 조진다……!’

등 뒤로 성창이나 불덩이 따위가 날아들었지만, 그는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고 교실로 달렸다.

* * *

다음 날.

상호는 교실 문을 아주 살짝 열어서 안을 빼꼼 들여다보았다가, 3학년 아이들이 자리에 착실하게 앉아 있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화가 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업만 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그는 씩 웃으며 문을 활짝 열었다.

“좋은 아침이다, 얘들아…… 응?”

교탁에 뭐가 많이 놓여 있었다.

두툼하게 쌓인 혼인신고서. 그리고 두 줄이 뜬 임신테스트기 10개.

상호의 머릿속에 천둥이 쳤다.

“……이게 뭐야?”

“뭐긴 뭐겠심꺼. 쌤이 자초한 기지예.”

팔짱을 낀 지윤이 다리를 건들거렸다.

“틀림없는 쌤 아입니더.”

“아, 아니, 아니 이거…….”

혹시 사인펜이 아닐까, 열심히 문질러 봤지만 임신테스트기의 줄은 지워지지 않았다.

상호는 떨리는 눈빛으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이, 이거, 이거…… 진짜야?”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인디 아직도 진짜고 가짜고를 구별 못하십니꺼.”

“진짜예요. 헤헤…….”

“아니, 나는, 나는, 한 적이 없는데…….”

태화가 벌떡 일어나서 당당하게 엄지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그건 이 몸이 설명해 주지.”

“아니, 아니, 아니…… 설명? 진짜……라고?”

“국소 공간이동으로 쌤의 씨를 꺼낸 거야!”

“……뭐?!”

상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이게 실화인가, 그는 떨리는 손으로 죽을힘을 다해 임신테스트기의 줄 부분을 문질렀다. 제발 지워져라, 지워져라 주문을 외우면서.

하지만 전혀 지워지질 않았다.

“장난…… 장난이지? 뻥이지? 응?”

“죄송해요, 선생님.”

은율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히 키울게요.”

“은율이 너까지 무슨 소리야……! 아니 그럼, 그럼 누구누군데. 왜 열 명이야……?”

3학년 아이들이 전부 손을 들었다.

“저요.”

“나.”

“아으!”

뒤이어 아리와 이서까지. 상호는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니…… 너희는 왜? 아리……는 그렇다 치고, 이서는 왜……?”

“우와, 아리는 넘어가는 거야?”

깐죽거리는 태화의 뒤를 이어 이서가 중얼거렸다. 짜증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그냥요.”

“그냥……?”

“네, 그냥. 심심해서 만들어 봤어요.”

심심해서 만들었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혼란해하는 상호에게 나빛과 지윤이 방긋, 피식 웃어 보였다.

“전부 돌림자로 지어야겠죠? 혁으로 할까요? 구로 할까요?”

“집에 유모차 주차장이 따로 있어야겠네예.”

“우리 반 교복은 이제 임부복이네~.”

‘……!’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고.

상호는 정말로 혼절해서 고꾸라지고 말았다.

“꼬로록…….”

“앗, 쌤. 오늘 만우절인데.”

“아이고, 쓰러져뿟네. 이제 우리가 을마나 놀랬었는지 알으시겠제?”

“멍, 근데 저거 다 어디서 난 거야?”

“가지마켓에서 팔던데?”

“언니, 다음부터 이런 장난엔 끌어들이지 말아줘…….”

“헤헤헤…….”

멀어져가는 의식 너머로, 만족스러워하는 웃음꽃들이 활짝 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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