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화>
386. 양의 탈을 쓴 늑대
“야.”
급식소 앞에 줄을 서 있는데, 누군가가 허리를 쿡쿡 찔렀다.
“응?”
상희는 태화를 돌아보며 눈을 끔뻑였다.
“왜?”
“오늘 메뉴 뭐야?”
“몰라.”
“왜 몰라? 내가 항상 외우라고 했잖아!”
“아으!”
다혜도 태화의 곁에 서서 항의했다.
그걸 왜 세희가 외워야 하냐. 상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둘의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궁금하면 니가 외워. 언니도.”
“므앙!”
“아얏!”
태화가 이마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뭐야, 원래대로 돌아왔네.”
“……난 계속 멀쩡했어.”
제법 비슷하게 흉내 냈나 보다. 상희는 한숨 돌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교사 줄에 선 세호가 설미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상호 씨.”
“네.”
“좀 있으면 벚꽃 피겠지?”
“그렇겠죠.”
“혹시 주말에…… 시간 있어?”
가슴께에서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설미의 눈.
세호는 눈을 끔뻑이다가 살짝 웃었다.
“아니요, 선약이 있어서.”
“아, 그래……?”
설미는 풀이 죽어 고개를 푹 숙였다.
“알았어……. 상호 씨는 바쁘니까…….”
이번 주 주말에 약속 따윈 없다. 상희는 진땀을 흘리며 세호와 설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세호가 몇 마디를 더 했다.
“꽃 좀 안 본다고 큰일나진 않잖아요.”
“그렇긴 하지…….”
“정 보고 싶으면 다른 사람이랑 가세요.”
“……응?”
설미가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으아아아악!’
상희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이 몸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곁에서 바라보기만 할 뿐.
설미의 젖은 눈동자가 여리게 흔들렸다.
“다른 사람……이랑?”
“네. 미진 씨나, 새로 온 선생님들이나.”
“아아, 여자끼리…….”
설미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상호 씨는 옛날부터 여자 맘 잘 몰랐지.”
지금 여자와 대화하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지켜보는 상희는 세호가 폭탄을 터트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가슴이 바짝 졸아들고 있었다.
‘세희야……. 인간관계를 박살내진 말아줘…….’
다행히 설미는 웃으며 세호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상희는 먼저 급식실로 들어가는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 그를 향해 아이들의 의아해하는 시선이 몰려들었다.
“세희야? 왜 한숨 쉬어?”
“으응? 그, 그냥.”
“와 그래 늙은이처럼 한숨을 푹푹 쉬고 있노. 땅 끄지긌다, 마. 쌤이랑 살림 차리드만 안좋은 걸 닮아와뿟네.”
지윤이 상희의 등을 팍 쳤다.
“기운 내라 임마. 밥도 맛읎는디 기운도 읎으면 쓰겄나.”
태화가 눈을 끔뻑였다.
“맛없다고?”
“오늘 괴기 읎다. 봄나물 새싹 파티데이.”
“뭐?! 고기가 없어?!”
태화는 그 말을 듣자마자 상희의 손을 잡고 줄에서 튀어나왔다.
“야, 가자! 매점 가자! 누굴 젖소로 아나!”
“급식 먹어야지 무슨 매점이야! 이거 안 놔!”
“X까! 나도 이제 3학년이라고. 이제 내 X대로 살 거야! 내가 곧 법이고 왕이야!”
“야……!”
상희는 태화에게 잡혀 질질 끌려갔다.
남겨진 아이들은 멀어지는 둘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이내 태연하게 고개를 돌려 수다를 떨었다.
“도양도 들었습니까? 선생님이 세희랑 손잡고 다녔다는 소문.”
“난 벽에 밀어붙이고 껴안았다고 들었는데.”
“어, 나는 고개 숙여서 키스도 했다고 들었어…….”
“키스를 했다꼬? 으데서 말이가?”
“복도에서. 이서 친구가 봤다던데.”
“하이고, 쌤예……. 이거 안되겄구마. 이따 함 조지뿌야겄다.”
“므앙으앙.”
작당한 아이들 사이에서 음모가 꽃피고 있었다.
* * *
“으음…….”
태화가 빵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역시 사람은 고기를 먹어줘야 돼.”
“빵이 고기냐?”
“밭에서 나는 고기지.”
“그건 콩이고…….”
“시꺼. 뭘 그리 아는 게 많다고 맨날 훈수질이야.”
“…….”
상희는 대화를 포기하고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학생이면 점심시간에 급식을 먹어야 하는데. 이런 데 와가지고 군것질이나 하고 있다니.
세희의 작은 배는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
“너 먹어.”
“어떻게 하나를 다 못 먹냐?”
“배불러.”
“그럼 나 우유 사줘.”
“……왜 그게 그럼이야?”
“배가 부르면 우유가 나오는 게 당연하잖아.”
“…….”
“빨리 내놔. 짜버리기 전에.”
결국 상희는 세희의 지갑을 꺼내들었다.
‘근데 이 짜식, 왜 자꾸 세희한테 사달라고 하는 거야…….’
분명 요튜브로 벌고 있을 텐데. 돈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그래도 상희는 우유를 사서 태화에게 내밀었다.
“마셔. 마시고 설사나 해.”
“애가 왜 이렇게 유치해졌지……?”
“…….”
미묘한 선을 드나들기가 아주 힘들었다.
태화는 창가에 기대어 우유에 빨대를 꽂아 마셨다. 상희가 남긴 빵을 와구와구 먹으며. 상희는 그런 태화를 벽에 기대어 멀뚱히 바라보았다.
문득 태화의 빨간 눈동자가 상희를 향했다.
“야.”
“왜.”
“너 요즘 쌤이랑 뭐해?”
상희는 잠시 고민하다가 떳떳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대답했다.
“운기조식 한다니까.”
“무슨 운기조식을 그렇게 맨날 해?”
“원래 맨날 하는 거야. 자주 못 했던 거고.”
“쌤한테 내공 받을 수 있다며. 부족하진 않을 거 아냐.”
“내공 때문에 하는 거 아냐.”
“그러면?”
“몰라도 돼.”
“야.”
태화가 상희에게 바싹 다가서서 눈살을 찌푸렸다.
“솔직히 말해 봐. 무슨 일 있었는데.”
“없었다니까.”
“아무리 봐도 이상하잖아. 쌤도 오늘 맛이 갔드만. 걷다가 갑자기 벽에 어깨 부딪히고 그러던데?”
큰 몸에 적응이 덜 됐나 보다. 상희는 헛기침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나서, 차분하고 진지한 척 말문을 뗐다.
“나는 딱히 별일 없었는데, 선생님은…… 좀 힘든 일이 있으신 것 같더라.”
“힘든 일?”
“너도 애들한테 들었지? 선생님 교장실에서…….”
“아아, 쌤이 교장쌤이랑 붕가할라다가 애들한테 들킨 거? 알지. 전교생이 다 알걸?”
제발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말아줬으면. 상희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그게 실은 오해인데…… 선생님이 그거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셔.”
“아니 뭐, 잠깐 눈이 돌아갈 수도 있지. 교장쌤 꽤 새끈하잖아? 쌤도 한창 그럴 나이대고…….”
어린 짜식이 뭘 안다고. 하지만 지금은 태화와 동갑인 척을 해야 했다.
상희는 혀를 쯧 차고 말을 이었다.
“덮친 거 아니래. 그냥 다람이 잡느라 그러셨던 거래.”
“그거야 당연히 쌤 핑계지. 너도 알잖아? 쌤 잘때 은근슬쩍 우리 껴안고 그러는 거.”
“내가 언…….”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바로 튀어나왔다. 제 말에 제가 놀란 상희는 목구멍에 뭔가 턱 틀어막힌 듯이 말을 끊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선생님이 그랬다고?”
“왜 몰라? 쌤 잠버릇 있잖아. 민정쌤이 말해준 건데 넌 왜 모르냐?”
태화가 고개를 기웃했다.
그 말에 상희는 예전에 민정이 말했던 게 떠올랐다. 설산에서 함께 잤을 때 민정을 예경으로 착각해서 이런저런 짓을 했다던.
‘……아니 내가 그걸 지금까지 그랬다고?’
상희의 몸이 덜덜 떨렸다.
“……그, 그랬나? 그거 쌤 자주…… 그러던가?”
“아니, 맨날은 아닌데, 그냥 옆에 좀 많이 가깝다 싶으면 슬그머니 껴안고 그러던데? 그거 때문에 우리끼리 쌤이 여자 없이 못 사네 어쩌네 그랬던 거잖아. 아니 너 왜 모르냐?”
태화가 답답하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모르는 이유야 당연히 잠에 드는 당사자니까. 상희는 만으로 24년만에 알게 된 자신의 버릇을 저주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몰랐어…….”
“하긴 내가 니보단 쌤을 잘 알지.”
태화는 의기양양하게 한입 남은 빵을 입으로 던져 넣고 우물거렸다.
“어쨌든 그래서, 쌤이 요즘 힘들단 거지?”
“응. 그리고…… 너랑 내 요튜브 때문에도 힘들다고 하셨어.”
“X까라 그래. 절대 안 지워. 돈이 복사가 되는데……. 나중에 쌤한테 차 한대 뽑아줄 테니까 참으라 해.”
“……응.”
마침 차가 한 대 필요하긴 하다. 지난번에 부숴먹어 가지고. 상희는 시선을 옆으로 돌리고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쌤한테 좀 잘해 봐.”
“내가 못하고 있냐? 내가 맨날 죽부인 해주려고 하는데 니가 붙어있어서 못 하는 거잖아!”
“……그런 거 말고. 동생들 좀 잘 챙겨주라고.”
“니가 쌤이냐? 쌤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증말…….”
‘그래 나 쌤이다 짜식아.’
마지막 말은 속으로 삼켰다.
곧 태화가 다 마신 우유팩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알았어. 쌤이 좀 힘들다니 도와줘야겠네. 교장쌤 덮친 건 나도 애들한테 잘 말해 볼게.”
“응.”
상희는 살짝 웃었다. 세희와 몸이 바뀐 게 나쁘지만은 않다 싶어서.
‘뭐, 상황은 이용하기 나름이니까…….’
하루쯤이라면 이런 날도 괜찮은 것 같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태화와 나란히 걸어서 교실로 향했다.
* * *
“수고했다.”
세호가 교탁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내일도 늦지 말고, 선생님 오늘도 바쁘니까 웬만하면 방에 오지 말고.”
“네에…….”
“다혜도 수호부대 언니 말 잘 듣고.”
“므앙.”
“태화는 내 말 좀 잘 들어라.”
“왜 또 나야!”
다 평소에 상호가 하는 말이었다.
이런저런 시련이 많았지만, 다 이겨내고 이제는 종례 시간. 결국은 무탈하게 서로의 역할을 끝낸 것이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상희의 귀에 세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중대 발표가 있어.”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데없이 중대발표라니.
세호는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리는 아이들을 둘러보다가 재차 입을 열었다.
“세희. 나와봐.”
“……네?”
상희는 당황해서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일인 걸까.
‘설마 영혼이 바뀐 걸 고백하려고…….’
그랬다가 소문이 흘러서 효은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얄짤없이 정신병원에 끌려갈 텐데.
쭈뼛쭈뼛 다가간 상희가 다가가자 세호가 상희의 어깨를 끌어당겨 품에 꼭 붙였다.
그리고는 짧게 한마디 했다.
“선생님 세희랑 결혼한다.”
“……응?”
상희의 몸이 굳었다.
폭탄. 폭탄이다. 머리보다 약간 높은 곳에서 튀어나온 폭탄. 상희는 그 폭탄을 어찌해야 해체할 수 있을지 필사적으로 고민했지만.
폭탄은 이미 터져서, 책상과 의자가 코앞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콰아앙
상희는 다급히 손을 뻗어 의자와 책상을 막았다.
“얘, 얘들아, 잠깐만…….”
“닌 닥치고 있으라. 쌤예, 짐 머라 카셨습니꺼.”
지윤이 의자를 든 채로 눈을 번득였다.
“대답 잘 하셔야 할 깁니더. 우리 아부지랑 면담을 할 수도 있어예.”
“느아아아악!”
맹한 표정으로 아리를 빨고 있던 다혜도 머리에서 검은 뿔이 조금씩 삐져나오려 하고 있었다. 상희는 그 모습을 보고 기겁해서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야, 얘들아! 이건 세희, 아니 선생님이 미쳐서…….”
“진짜야.”
세호가 상희를 자신의 앞에 세우고 배를 쓰다듬었다.
“사고를 쳐가지고…… 어쩔 수 없게 됐다. 식은 5월이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그 말에 아이들의 안색이 먹구름처럼 확 어두워지고, 상호의 마음속에서 천둥이 쳤다.
나빛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괜찮아요…….”
상희의 손에 진땀이 쫙 배어났다.
“……나빛아?”
“세희는 조용히 해…….”
나빛에게서 흘러나오는 어두운 기운에 모두가 굳었다. 창가에서 쳇바퀴를 돌리던 다람과 그 앞에서 씨앗을 들고 놀리던 혁구마저도.
나빛이 방긋 웃었다.
“괜찮아요, 선생님…….”
“나빛아…….”
“세희는 조용히 하라구. 선생님, 아직 결혼 안 했으니까 괜찮아요……. 무르면 돼요…….”
세호가 눈을 끔뻑였다.
“아니, 사고쳐서 결혼을 해야겠는데. 애는 낳아야 될 거 아냐.”
“그럼 제가 세희랑 결혼해서 아빠 할 테니까 선생님은 저랑 결혼해 주세요…….”
“아니…….”
당황해하는 상희에게 태화가 가방에 든 물건을 마구잡이로 집어던졌다. 필통, 교과서, 화장품, 물티슈.
그리고는 눈물을 글썽이며 빽 소리쳤다.
“개새꺄! 널 믿었는데! 니가 그러고도 친구야?!”
“안 했다고! 선생님이 개소리하는 거야!”
“죽어! 둘 다 죽어! 쌤 애는 내가 키워줄 테니까 안심하고 죽어버려! 개새끼들아아아!”
“느아아아악!”
“마, 임산부는 비키라.”
아이들은 상희를 치우고 세호를 패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호는 호신강기를 두르고 뻔뻔한 표정으로 아이들의 주먹과 발길질을 받아내었다. 아이들의 가슴에 더욱 염장을 지르며.
“얘들아, 니들이 아무리 그래도 결혼식은 안 바뀐다.”
“이거 치우이소. 확 교실째로 날리뿔기 전에!”
“응~. 세희랑 결혼할거야~. 난 세희밖에 모르는 바보야~.”
“쌤이 병신이 됐잖아, 천세희! 너 열 달 후에 봐!”
“응~. 세희랑 뽀뽀하고 할 거 다했어~. 내 제자 쩔더라~.”
“아아아아아아아악!”
복장이 터져버린 태화의 절규.
상희의 마음속에서도 같은 절규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X발…….’
제발 이 개같은 날이 오늘로 끝이기를, 하늘에 빌고 또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