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여고의 남선생-385화 (385/501)

<385화>

385. 서로의 삶

“푸~른 하늘 으은하수…….”

“므아앙.”

“하얀 쪽배에…….”

상희와 다혜의 손이 초고속으로 짝짜꿍을 했다.

8분의 6박을 16배속으로.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부를 만큼의 율동을 ‘쪽배에’ 부분에서 마치고 있었다. 그 총알보다 빠른 속도에 다혜마저도 진땀을 뻘뻘 흘리며 간신히 박자를 맞춰 짝짜꿍을 했다.

“누우웃…….”

하지만 결국 상희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박자를 놓쳐 손바닥을 헛치고 말았다.

다혜가 심통이 난 듯 입술을 삐죽 내밀고 팔을 붕붕 휘둘렀다.

“느앙!”

“왜 이렇게 빨리 하냐고?”

“느아아앙!”

“아, 언제 이렇게 잘해졌냐고……? 몰라…….”

“꾸우웅.”

상희에게 진 다혜는 허공에 손을 휘두르며 연습을 시작했다.

아직 옹알이를 해석하는 게 세희처럼 능숙하지 않다. 상희는 맹연습에 들어간 다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재밌어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지금 그는 할 일이 없는 다혜와 놀아주는 중이었다.

초강기를 쓰는데다가 폭주의 위험이 있는 다혜는 아이들과 함께 대련을 할 수 없었고, 그나마 가능한 상호와 세희는 서로의 몸에 완전히 적응을 하지 못한 상태.

덕분에 다혜는 온종일 상희와 놀기만 했다.

‘세희는 잘 하고 있나.’

운동장에서는 검을 짚고 선 세호가 아이들의 대련을 봐주고 있었다. 대련하는 아이들은 나빛과 은율.

황금색 성창이 은율을 향해 날아들었다.

치익

은율의 발이 땅을 밀었다.

뒤이어 자세를 잡은 은율이 검을 휘둘러 성창을 쳐냈다.

아니, 쳐내려고 했다.

후웅

하지만 성창은 검이 닿기도 전에 스르르 녹아내렸고, 은율의 검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갈랐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빛이 손을 뻗었다.

키잉……

아주 작은 금색 칼날들이 은율의 몸을 빈틈없이 둘러쌌다. 맑고 청명한 금속음을 울리며.

은율은 그 칼날들을 노려보며 빈틈을 찾다가, 어느새 다가온 칼날 하나가 목을 누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검을 축 늘어뜨렸다.

“졌네.”

“헤헤…….”

나빛이 빙긋 웃고는 세호를 향해 달려갔다.

“선생님~.”

“응.”

세호가 뒷짐을 지었다.

세희는 어떤 조언을 할까. 상희는 방금 자신이 보았던 대련을 복기해 보았다. 나빛은 제 능력을 십분 발휘했고, 실수한 것은 은율.

과연 세희도 그와 생각이 같을까.

곧 세호의 입이 열렸다.

“나빛이, 속임수를 너무 많이 쓰네.”

“네?”

나빛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안 되지.”

세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속임수는 약한 사람이 쓰는 거야.”

“엥…….”

“정말로 강하고 빠르면 속임수를 쓸 필요가 없지. 속임수에 의지하는 건 약자들뿐이야.”

“…….”

“내 말이 틀려?”

“……아뇨!”

나빛이 빠릿빠릿하게 차렷 자세로 대답했다. 하지만 얼굴은 뚱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호는 그런 나빛을 내버려두고 은율을 돌아보았다.

“다음, 은율이.”

“네.”

“잘했어.”

은율의 얼굴에 물음표가 가득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감사합니다.”

“속임수에 당한다고 꼭 약한 건 아니지. 충분히 잘했어. 넌 강하니까 강기 수련만 열심히 하면 돼.”

“네.”

은율도 어리둥절한 눈빛이었다.

나빛은 세호의 말을 곱씹다가 심통이 났는지, 입술을 삐죽거리며 세호의 곁에 서서 손을 잡고 만지작거렸다. 조물조물, 꼼지락꼼지락.

하지만 세호는 별 반응 없이 무심하게 쓱 돌아서 버렸다.

“자, 다음 사람. 사카시타, 지윤이.”

“선생님…….”

“나빛아, 수업 중이잖아. 다음에 얘기하자.”

“…….”

나빛의 눈에서 빛이 사라지고 완전히 무표정한 얼굴이 되었다. 상희는 그 모습을 보고 몸을 덜덜 떨었다.

‘X됐다…….’

아주아주 무서운 표정.

후일 어떤 보복이 돌아올까 걱정하며, 상희는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상희의 곁에서 다혜가 세호를 보며 무어라 옹알거렸다.

“므우아아.”

“응?”

“으앙아으. 아으.”

“미안, 못 알아듣겠는데…….”

상희의 말에 다혜가 눈을 부릅뜨고 세희의 양 볼을 움켜잡았다.

“므아?!”

“왜, 왜…….”

“느아으아으!”

다혜의 손이 상희의 머리 여기저기를 두드렸다. 자꾸 고장나는 고물 테레비를 다루는 것처럼.

“므아으으응.”

“다혜…… 언니. 난 번역기가 아니야…….”

“느앙!”

“모르겠다고…….”

그때 어딘가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들렸다.

대련을 해야 할 수업시간에 핸드폰을 들고 올 사람은 담임인 상호뿐. 가끔은 태화가 들고 오긴 했지만, 지금 들리는 벨소리는 상호의 벨소리가 맞았다.

상희는 핸드폰을 꺼내는 세호를 돌아보았다.

“어…….”

세호는 발신인을 확인하고는 당황하며 상희를 돌아보았다. 아마 중요한 사람에게서 온 전화 같았다.

예측컨대 저승부대. 혹은 교직원들.

‘문자로 하라 그래.’

상희는 그런 뜻을 담아 핸드폰 자판을 두드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세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수신거절 후 무어라 문자를 보냈다.

“미안해. 자, 대련 시작…….”

띠로롱~

“……잠시만.”

또 전화.

대체 누구인가. 상희가 당황한 눈빛으로 세호를 바라보자 세호가 아이들 몰래 작게 성호를 그었다.

수녀님이라는 모양이었다.

‘수업시간인 거 뻔히 알 텐데…….’

일단은 받아봐라. 상희는 그런 뜻을 담아 손을 파닥였다. 효은이라면 당장 출동해야 할 상황은 아닐 테니.

세호가 전화를 받았다.

“응, 자기야.”

‘?’

상희의 몸이 굳었다. 살면서 저런 화법은 한 번도 쓴 적이 없는데.

“수업 중인데 무슨 일이야?”

[……너.]

전화 너머에서 효은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강상호 아니지.]

‘……!’

단번에 정답을 맞추다니. 역시 애인은 애인인 모양이었다.

진땀을 흘리는 상희의 귀에 효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설미한테 들었어. 너 오늘 설미한테 고개 숙여서 인사했다며.]

“그건…….”

[미진이도 그러드만. 오늘은 이상하게 자기 어깨를 안 만졌다고. 솔직히 말해 이새끼야. 너 강상호 아니지?]

“무, 무슨 소리야. 나야, 강상호.”

[이 악마 새끼…….]

효은이 울먹거리며 한 글자 한 글자 씹어 내뱉었다.

[내가……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

“아니, 아니 진짜 나야, 강상호라니까…….”

[악마 새끼들, 전부 죽여버릴 거야……!]

“저기, 저기요…….”

세호가 안절부절못해하며 상희를 돌아보았다. 이 일은 대체 어찌해야 하냐는 듯.

상희는 결국 스탠드에서 일어나 세호의 손을 붙들고 달렸다.

“앗!”

“야, 천세희! 어디 가!”

“나 잠깐만 선생님이랑 이야기하고 올게! 선생님, 뛰어요!”

“도둑이야아아!”

아이들이 상희를 쫓았지만, 상희와 세호는 힘껏 경공을 펼쳐 본관 위로 날아갔다.

아이들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쟤 오늘 왜 저러냐?”

“몰라, 멍…….”

* * *

[야.]

핸드폰 화면 속에서 효은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응.”

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라니까. 어제 술을 너무 마셔서…… 숙취 때문에 정신이 없었어.”

둘이 도망친 곳은 본관 옥상.

세호의 핸드폰 너머에서는 상희가 열심히 필담을 써내려가고 있었다. 세호의 눈동자가 상희의 수첩을 흘끗했다.

“요즘 2학년 애들이랑 오해가 생겨서…… 그것 때문에 힘들어가지고. 저번에 말했던 다람쥐 있지? 걔가 교장선생님 옷에 들어갔거든. 그거 빼내느라 옷을 좀 벗기려고 했는데…… 그걸 애들한테 딱 들켜서. 힘들어서 술 좀 마셨어.”

[죽어, 벌레 새꺄.]

벌레라고 하는 것을 보니 이젠 의심을 푼 것 같았다. 상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애인한테까지 사실을 숨기는 게 조금 찔리긴 했지만, 효은은 영혼과 관련된 이야기를 한 번도 믿지 않았다. 항상 미친놈 취급할 뿐.

그런데 여기서 상호가 세희고 세희가 상호라는 말을 해버렸다가는.

‘정신병원으로 끌고 갈 거야…….’

상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또 한편으로는 믿는다 해도 문제였다. 보나마나 갑자기 영혼이 왜 섞이냐, 몸을 섞은 거 아니냐, 하면서 역시나 어린애들 노리고 여고에 갔다고 할 터.

효은에겐 특히 더 숨겨야 했다.

[그래도 못 믿겠는데…….]

효은이 중얼거렸다.

의심하는 게 아주 그냥 손바닥 뒤집듯 한다. 상희는 한숨을 쉬며 수첩에 할 말을 적었다.

세호가 그걸 그대로 읽었다.

“뭐. 어떻게 하면 믿을 건데?”

[니가 강상호라는 증명을 해봐. 강상호만 알고 있을 만한 게 있을 거 아냐.]

악마는 기억을 읽으니까 소용이 없는데.

하지만 효은의 의심을 풀 수만 있다면야. 상희는 일부러 그 사실은 알려주지 않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둘만의 비밀이 뭐가 있을까.

‘아, 이건 세희한테 알려주긴 좀 그런데…….’

그래도 의심만 풀린다면.

그는 결국 얼굴을 붉히며 수첩에 글을 끼적였다.

“야, 효은.”

[뭐.]

“너 니 몸에 점 있는 거 알고 있어?”

[점? 내가 점이 어디 있어? 천사화 때문에 다 사라졌는데…….]

“있어. 너 검은 머리 다시 날 즈음부터 생겼더라.”

[있다고? 진짜?]

화면 속 효은이 눈을 끔뻑이며 옷을 이리저리 들췄다.

[안 보이는데? 뭐 어디 등에 있냐?]

“아니.”

상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엉덩이 쪽에.”

[엉덩이……?]

효은이 손거울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들고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

곧이어 찢어지는 비명이 스피커에서 튀어나왔다.

[야이 미친새끼야아아아!]

“뭐. 있긴 있잖아.”

[너 X발 나랑 할 때 이것만 보고 있었냐? 아니 이렇게 안에 있는 걸 또 어떻게 찾은 거야! 미친놈아!]

“보이니까 본 거지.”

세호가 내는 상호의 목소리는 아주 어색했다.

평소의 상호라면 효은의 앞에선 말끝을 흐리면서 쩔쩔맸겠지만, 지금 세호는 뚝뚝 끊어지는 말투로 필담을 읽으며 상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상희의 등에 진땀이 줄줄 흘렀다.

‘세희야, 연기에 집중해, 연기에…….’

그런 뜻을 담아 힘겹게 웃었지만, 세희의 눈빛은 더욱 맹렬해질 뿐이고.

그는 그 눈빛을 피해 고개를 푹 숙였다.

“어쨌든 증명했지? 끊는다. 다음에 봐.”

[야!]

“수업해야 돼. 끊을게. 사랑해.”

세호는 전화를 끊고 상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선생님.”

“……으응.”

“오늘 씻으면서 제 점도 외워 주세요.”

“저기, 내 얼굴로 그런 말 하지 말아줘…….”

둘은 함께 옥상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갔다.

* * *

손을 잡고 복도를 걸으니 아이들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평소라면 상호가 쩔쩔매고 세희가 당당하게 걸어갔겠지만, 오늘은 세호가 당당하게 걸어가고 상희가 쏟아지는 아이들의 시선을 부담하고 있었다.

상희는 진땀을 흘리며 세호에게 속삭였다.

“손…… 꼭 잡아야 해?”

“네.”

“왜?”

그 말에 갑자기 세호가 상희를 벽으로 몰아붙이고는 손바닥으로 벽을 쾅 쳤다.

주변을 지나가던 모든 학생들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어…….”

상희의 눈동자가 팽팽 돌았다.

“세희야……?”

“잠깐만 이대로 있어 주세요.”

세호가 그에게 바싹 붙어 속삭였다.

무섭게 압박하는 자신의 얼굴을 지켜보는 것은 꽤나 부담스러웠다. 상희는 당황하며 그의 가슴팍을 살짝 밀어냈다.

“남들 다 보고 있잖아…….”

“그러라고 하는 거예요.”

“누가 보면 내가 널 겁주는 줄 알 거 아냐…….”

“겁탈하는 줄 알겠죠.”

“그러니까…….”

“그러라고 하는 거예요.”

세호가 빙긋 웃으며 상희의 뺨을 어루만졌다.

“이런 기회 흔치 않으니까.”

주변을 지나가는 아이들의 눈에는 시기와 동경, 또는 선망의 빛이 담겨 있었다. 상희는 대체 왜 학생들이 저런 표정을 짓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암만 봐도 선생이 제자를 삥 뜯는 구도인데.

그는 세호의 눈길을 피하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교실…… 가자, 세희야. 애들 기다리겠다…….”

“아, 네.”

세호는 그제서야 그의 앞에서 물러났다.

다시 손을 잡고 걷기 시작한 둘의 주변에서는, 명백한 질투와 부러움을 담은 눈빛이 우르르 몰려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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