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화>
382. 힘이 필요하냐
“끄응…….”
단비는 스탠드에 엎드린 채로 눈살을 찌푸렸다. 머리는 낮게, 엉덩이는 높게. 꼬리는 살랑살랑 흔들며.
눈앞에는 다람이 멀뚱멀뚱 앉아 있었다.
“멍.”
한 번 짖어 보았지만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멍!”
눈을 부라리고 무섭게 을러 보아도, 묵묵부답.
“언니! 얘 나 무시해!”
“그러게.”
은율이 해바라기 씨앗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선배라는 인식이 없나봐.”
“아니, 그거야 그렇겠지만……. 멍.”
“신입생이 아주 건방지네. 3학년으로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겠는데.”
“멍…….”
“체벌이 좀 필요하겠어.”
“멍, 체벌은…….”
“나빛아.”
“응.”
나빛이 성력으로 무언가를 만들었다.
황금색 창살을 엮어 만든 원통.
“다람이! 쳇바퀴 돌리면서 반성해!”
“안 들어가는데?”
“씨앗, 씨앗 안에 넣어줘.”
“안 들어가는데?”
“더 필요한가? 다람아, 이거. 이거 먹어봐~.”
더 이상 체벌이 아니었다. 단순한 애정표현일 뿐.
단비는 해바라기 씨앗을 허겁지겁 입에 집어넣는 다람을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얘가 무공을 배울 수 있을까?”
“글쎄.”
은율이 고개를 기웃했다.
“동물한테도 단전이 있나?”
“없지 않아……?”
“내공을 살짝 넣어 볼까?”
은율은 그렇게만 말하고 물끄러미 단비를 바라보았다.
은율이 무언가 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단비는 곧 그 말의 뜻을 깨닫고 당황했다.
“멍, 내가…… 넣어?”
“응. 네가 돌볼 날이 더 많으니까. 나보다는 네 내공에 익숙해지는 게 좋겠지.”
“멍, 그건 그렇지…….”
은율은 3학년이니까 내년이면 졸업이다. 단비는 아직 1년이 남았고.
그래도 단비는 우물쭈물해했다. 동물한테 내공을 넣었다가 잘못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몰라서.
“근데 나 이런 거 해본 적 없어……. 멍.”
“살짝만 넣는 거야. 아주 살짝만.”
“살짝……?”
단비가 주저하자 옆에서 지켜보던 나빛이 등을 토닥였다.
“잠깐만 기다려. 선생님 대련 끝나면 여쭤보자.”
아이들은 나빛의 말을 듣고 고개를 스탠드 앞쪽으로 돌렸다. 그곳에서는 상호와 세희, 태화가 대련하며 운동장을 싸그리 박살내고 있었다.
콰아아앙
이윽고 온 교정을 뒤흔드는 폭발이 울리고.
상호가 검을 집어넣었다.
“너무 약하다, 태화야. 위력을 좀 집중시켜 봐. 다음, 지윤이.”
“선생님~.”
“응?”
눈을 동그랗게 뜬 상호에게 나빛이 손을 흔들었다.
“저희 이것 좀 잠깐만 봐주세요~.”
“뭔데?”
“다람이 있잖아요, 내공 넣어줘도 돼요?”
“다람이……?”
아이들에게 다가간 상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동물한테 내공이 있다는 소리는 듣도 보도 못해서.
그래도 이론적으로는.
“되지 않을까……? 사람도 결국 동물이고, 마나는 만물에 깃드는 거니까……. 근데 조심해. 몸이 작아서 혈맥도 좁을 거야.”
“……그럼.”
단비는 마른침을 삼키며 검지를 들어올렸다.
“한번…… 해 볼게요.”
검지 끝에 희미한 푸른빛이 감돌았다.
조금씩 다가오는 손가락을 다람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양 볼에 무언가를 빵빵하게 머금은 채로.
그러다 손가락이 닿는 순간.
“……찍.”
픽 쓰러졌다.
“……꺄아아악! 다람아!”
“선생님! 괜찮을 거랬잖아요! 으허엉헝…….”
“아, 아니, 나도 잘 모른다고…….”
“다람아! 다람아!”
“멍…….”
대자로 뻗어서 경련하는 다람에게 모여든 아이들. 그 뒤편에서 단비의 꼬리가 축 늘어지고 있었다.
* * *
다행히 다람은 종례 즈음이 되자 활기를 되찾았다.
나빛의 책상 위. 이전보다 더욱 빠르게 쳇바퀴를 돌리게 된 다람을 아이들이 신기해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더 강해진 것 같아…….”
“동물도 무공을 쓰는갑다.”
“아니, 그건 아닐걸.”
가까이 다가와서 보고 있던 상호가 입맛을 다셨다.
“이건 마나 때문에 잠깐 몸이 강화된 거야. 단비가 준 걸 다 쓰고 나면 원래대로 돌아올걸. 스스로 축기를 못하니까.”
그 말에 미래와 나빛이 눈을 반짝였다. 무공이 뭔지 모르는 아이들.
“그럼 축기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심법을 배워서 운기조식을 해야지.”
“그럼 운기조식은 어떻게 시켜요?”
“그건 나보다는 동물 서커스 하는 사람들이 더 잘 알 것 같은데……?”
말도 모르고 글도 모르는 녀석한테 어떻게 혈도를 가르치고 내공을 움직이라 한단 말인가. 상호는 난색을 지었다.
그때 단비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저…….”
“응?”
“멍, 동물도 혈맥이 있긴 한 거예요?”
“그럴걸?”
“그럼 가능은 하다는 거네요?”
“그렇겠지?”
“……알겠어요.”
단비의 눈에 결의의 빛이 비쳤다.
“제가 가르쳐 볼게요.”
아침과는 뭔가 다른 분위기였다. 상호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끔뻑였다.
대체 왜 다람쥐한테 무공을 가르치려 하는지.
“그래……. 뭐 하고 싶다면 해도 되겠지, 오늘 보니까 마나도 받아들이긴 한 모양이고……. 한번 잘 가르쳐 봐.”
“멍.”
쳇바퀴는 점점 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 * *
그날부터 단비는 다람을 조련했다. 말을 안 들으면 밥을 안 주고, 말을 들으면 밥을 주고. 언니들이 귀엽다며 자꾸 먹을 것을 주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단비는 언니들을 막았다.
“안돼! 먹을 거 주지 마!”
“에이~, 씨앗 하나 정도는 괘안타.”
“배고파야 원하는 법이야! 배부른 돼지보단 배고픈 무인이 되어야 해!”
“그기 머고……. 에이, 알았다. 그럼 꾸꾸나 묵어라.”
“뺙.”
혁구가 지윤의 손바닥에 앉아 해바라기 씨앗을 쪼아 먹자 쳇바퀴에 갇힌 다람이 혁구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단비는 그런 다람을 나뭇가지로 톡톡 치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달려! 튼튼한 몸에 강한 내공이 깃드는 법이야!”
옆에서 지켜보던 태화가 한마디 했다.
“야, 그런다고 내공을 쓸 수 있어?”
“당연하지, 멍! 몸이 튼튼하면 혈맥이 넓어지고! 혈맥이 넓어지면 받아들일 수 있는 기도 많아져! 그때 내가 내공을 많이 넣어주면 얘도 느끼기 쉬워지겠지! 달려!”
단비가 씨앗을 쳇바퀴 위에서 흔들자 다람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아이들은 고개를 기우뚱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러다 근육질 몸짱이 되는 건 아닌가 몰라…….”
“근육 있으면 안 귀엽습니다.”
“므아아~.”
“언니이! 꾸꾸랑 다람이 것까지 뺏어먹으면 어떡해!”
“꾸우웅…….”
상호가 교실에 와서 조례를 할 때까지, 다람은 쳇바퀴를 돌리고 또 돌렸다.
* * *
“이제 혈맥이 좀 튼튼해졌을 거예요.”
교실. 단비의 책상 주변.
단비와 아이들, 그리고 상호는 코를 킁킁거리는 다람을 내려다보았다.
“내공을 좀 더 많이 넣어 볼게요, 멍.”
“조심해. 조금만 넘쳐도 감당 못 할 거야.”
“네.”
단비의 검지 끝에 내공이 맺혔다.
풀잎 끝 이슬처럼 맺힌 그 내공은, 다람에게 닿자마자 물방울이 퍼지듯이 다람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다람이 몸을 한 차례 떨었다.
“……찍.”
그리고 또 쓰러졌다.
그래도 쥐의 빠른 심장 박동을 따라 몸이 들썩이는 게 보였다. 지난번과 정확히 같은 증상에 아이들은 조마조마한 눈빛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괜찮겠지……?”
“걱정 말어라. 이겨낼끼다.”
“앗, 일어났다.”
나자빠져 있던 다람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숨이 거칠었다. 꼭 몸속에 알 수 없는 힘이 용솟음치고 있다는 듯. 이 힘을 당장이라도 시험해 보고 싶다는 듯.
다람은 그 즉시 책상 아래로 뛰어내렸다.
“우왓! 빨라!”
“야, 잡아! 잡아!”
“므아앙?!”
아이들은 혼비백산하며 다람을 쫓았지만, 뭘 해볼 새도 없이 다람이 하솔의 다리를 타고 옷 속으로 숨어들었다.
하솔은 숨을 헉 하고 들이키더니.
“끄으…….”
경기를 일으키며 옆으로 맥없이 쓰러졌다.
“하솔아!”
“하이고, 한마디도 안하드니 쥐를 무서버했고마.”
“일단 다람이부터 빼내고 보건실 데려가야…….”
상호는 쓰러진 하솔의 몸을 뒤적거리다가 당황했다. 다람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주머니에도 없고, 윗옷 속에도 없고.
그는 곧 다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차리고 치마를 들추려 손을 뻗다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가은이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세, 세희야. 네가 좀 도와줘…….”
“쌤 방금 하솔이 팬티 확인하려고 하지 않았어?”
“아니야! 임마, 어디 가서 그런 소리 절대 하지 마!”
“왜? 말하면 안 되는 사람이라도 있어?”
“하지 말라고!”
그때 하솔의 치마 속에서 다람이 쪼르르 튀어나와 문가로 달려갔다.
“앗! 저기! 저기!”
“뛰지 마래이! 밟으믄 애 짜부된디.”
“야, 나빛! 니 방어막으로 잡으면 되잖아!”
“아하!”
“잠까아아안!”
단비가 빽 소리치자 아이들이 움찔했다.
다람은 그 틈을 타 살짝 열린 문틈을 비집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앗, 나갔어…….”
“마, 단비야. 와 소리를 지르노.”
“보내줘.”
단비는 슬픈 눈으로 교실 문을 돌아보았다.
“다람이가 원한 건 자유였던 거야.”
“아니 그건 그냥 니가 학대해서…….”
“힘보다 먹이보다 중요한 게 있었던 거야, 멍…….”
“그러니까 니가 학대해서…….”
“보내주자.”
“…….”
아이들은 입맛을 다셨다.
“그거야 그렇겠제. 나가려고 허는 놈을 잡아두는 게 잘못이제. 지가 오고 싶으믄 또 알아서 올 기고…….”
“그치만 밖은 위험한데…….”
“쟤는 멧돼지 있는 곳에서 살던 녀석인데 뭘 걱정하냐?”
“단비 말이 맞아.”
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쟤는 애완동물이 아니라 야생동물이잖아. 새끼 때부터 키웠던 것도 아니고……. 보내주는 게 맞는 것 같아.”
“그런가…….”
나빛은 혁구를 쓰다듬으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꾸꾸 친구 만들어 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네. 꾸꾸야, 친구는 다음번에 만들어 줄게…….”
“꾸꾸는 좋을 기다.”
지윤이 책상 밑에서 해바라기 씨를 꺼냈다.
“혼자 씨앗 다 묵게 돼서. 하이고, 이걸 꾸꾸 혼자 은제 다 묵노.”
“아으아으.”
“아, 언니야가 있제. 이제 언니도 마음껏 묵으라. 자, 자.”
“웅냠냠.”
“얘들아, 선생님은 보건실 갔다 올게…….”
상호는 쓰러진 하솔을 데리고 황급히 교실을 나섰다.
* * *
3월 중순, 땅과 나무에서 싹이 돋기 시작할 즈음.
다람을 보내준 지 며칠이 지난 날. 그동안 학교에는 괴상한 소문이 돌았다. 기숙사 뒤편에서 밤마다 고양이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는 소문.
그리고 오늘. 이른 아침. 상호는 그 괴소문의 실체를 마주하고 있었다.
‘…….’
주차장 구석, 사람의 눈이 닿지 않는 외진 곳.
한 무리의 고양이들이 작은 다람쥐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놈들이 얼마나 처맞았으면 다구리를…….’
상호는 뒷짐을 지고 잠시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이미 한바탕 싸움을 했던 모양인지 고양이들의 몸엔 핏자국이 보이고, 다람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다람의 작은 몸짓 하나하나에 고양이들은 각인된 공포를 떠올린 듯 움찔거렸다.
하지만 다람도 이젠 한계인 것 같았다.
슬슬 내공이 다 빠질 때이기도 했고.
‘네 자신의 내공이 아니면 결국 쓸모가 없는 셈이지.’
빌린 힘으로는 강하다는 말을 들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네공이 아니라 내공인 거다, 상호는 스스로 떠올린 기막힌 언어유희에 감탄하며, 또 들려줄 사람이 옆에 없는 것을 한탄하며 다람의 전투를 지켜보았다.
다람이 번개같이 날아들어 한 고양이의 코를 쳤다.
퍼억
이 소리가 다람쥐 앞발에서 났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상호는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서 찍기 시작했다.
‘태화한테 갖다주면 좋아하겠지…….’
아마 신나서 요튜브에 올릴 것이다.
그때 다른 고양이가 다람의 등을 물려 했다. 다람은 뒷발차기로 그 고양이의 얼굴을 후리고 빠져나왔지만, 연이어 날아든 고양이들의 앞발을 맞고 몸이 크게 비틀거리고 말았다.
균형을 잃은 다람이 바닥에 쓰러졌다.
‘이런.’
상호는 내공을 뻗어 고양이들을 잡아챘다.
“미야악!”
“이야오오옹…….”
당황한 고양이들이 앞발을 버둥거렸다.
그는 고양이들을 먼 곳으로 날려 보내고 다람에게 다가갔다. 다람은 전투의 흥분과 죽음의 공포로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다가 곧 굳어있던 몸과 뇌가 풀렸는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주변을 요리조리 둘러보다가 상호와 눈을 마주쳤다.
상호는 뒷짐을 지고 다람을 내려다보았다.
“힘이 필요하냐?”
다람은 꼭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럼 따라와.”
상호의 손이 까딱였다.
그 움직임을 본 다람은 쪼르르 달려와 상호의 다리를 타고 양복 앞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찍?”
“미안, 오늘은 잣 안 넣어 놨어.”
상호는 쓰게 웃으며 돌아서다가 굳어 버렸다. 한 여인이 멀뚱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어서.
“상호야?”
설미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
“다람쥐랑…… 이야기한 거야?”
“…….”
상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들었어요?”
“응…….”
“언제부터……?”
“처음부터 끝까지……. 힘이 필요하냐, 도 들었구…….”
“…….”
다 큰 사내놈이 꼴사납게 다람쥐를 상대로 이러고 있다니.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누나.”
“응.”
“비밀로 해 줘요…….”
“응…….”
둘은 함께 본관을 향해 걸어갔다. 어색한 침묵을 사이에 끼운 채로.
그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미진이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