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여고의 남선생-380화 (380/501)

<380화>

380. 신뢰받는

“흐아아암…….”

태화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가 다물어졌다.

산중의 깊은 밤. 빛이라고는 달과 별뿐. 은하수는 예뻤지만 하늘 구경도 한두 번이지, 계속 보다 보니까 질려서 이젠 별 감흥도 없었다.

땅은 온통 새카매서 아무것도 안 보이고.

불을 피워 벌레라도 구경하려 했지만, 겨울이라 아무것도 없었다.

“X바, 추워 죽겠네…….”

태화는 몸을 움츠리며 툴툴거렸다.

춥고, 졸리고, 배고프고. 이럴 때 따뜻한 코코아라도 한 잔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물도 잔도 마법으로 만들 수 있으니, 코코아 가루만 있으면 되는데.

그러나 상호가 갑자기 데려온 탓에 아무것도 챙기지 못했다.

‘우씨, 나한테만 살짜쿵 알려주면 얼마나 좋아.’

그럼 코코아로 친구들을 개같이 부려먹을 수 있었을 텐데. 이런 불침번도 쏙 빠지고.

그래도 다 망상일 뿐이었다.

‘졸려…….’

태화는 꾸벅꾸벅 졸다가 정신을 차리려고 양손으로 뺨을 쳤다.

여기는 야생이니까. 정말로 몬스터가 올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불침번은 제대로 서려고 했는데, 졸음이 쏟아져서 어쩔 수가 없었다.

“쿠울…….”

그래서, 눈을 감고 고개를 한 번 꾸벅였는데.

빠악

“……악!”

무언가 단단한 것이 이마를 강타했다.

‘……몬스터인가!’

태화는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뭐가 보일 턱이 없었다. 눈을 감으나 뜨나 그게 그거라서.

무언가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디게 아펐는데…….’

착각은 절대 아닌데.

태화는 손에 밝은 불을 피워서 주변을 훑어보았다. 몸을 이리저리 돌릴 때마다 나무의 그림자가 따라서 움직였다.

그래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람쥐가 도토리라도 던졌나?’

뚱한 표정으로 나무 사이를 둘러보았지만, 마른 가지 사이로도 돌아다니는 것은 없었다.

태화는 범인 찾기를 포기하고 다시 눈을 부릅뜬 채로 불침번을 섰다.

‘근데 또 졸리네…….’

그래서 또 꾸벅였는데.

빠악

“……우씨!”

태화는 그 즉시 순간이동을 써서 앞쪽으로 뛰쳐나갔다.

“누구야! 나와!”

나무 사이로 고함이 울려 퍼졌다. 골짜기를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옆 산에 있는 몬스터까지 싹 끌어 모을 기세였다.

하지만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고.

태화는 머리카락을 벅벅 헤집으며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아아악!”

* * *

‘짜식…….’

상호는 입맛을 다셨다.

‘지도 헌터라고 감은 있네.’

태화가 소리를 지른 바로 옆 나무 위에서.

태화가 순간이동으로 나타난 곳은 정확히 몇 초 전에 상호가 서 있었던 자리였다.

‘능력도 프로다우면 좋으련만…….’

깨어 있으려고 노력은 하는 것 같은데, 밤을 새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자꾸 꾸벅꾸벅 졸았다.

이번 실습으로 잠을 참는 법을 배워줬으면 좋겠다, 상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제자리로 돌아가는 태화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다음 날 아침.

꾸위이이이익

돼지 멱따는 소리가 산중을 울렸다.

“……진짜 잡혔네.”

아이들은 한데 모여 구덩이 속을 들여다보았다.

사람 허벅지 정도까지 올 키의 멧돼지가 다리를 버르적거리며 흙을 튀겨대고 있었다.

“와…… 이거 어떻게 먹냐?”

“잘 아끼면 일주일은 먹겠는데.”

나빛이 착잡한 표정으로 세희의 옷자락을 당겼다.

“빨리 보내주자…….”

“응.”

세희는 검을 뽑아 가볍게 강기를 날렸다.

푸욱

멱따듯 울던 멧돼지는 멱이 따이는 순간에는 조용히 즉사했다.

나빛이 성력으로 사슬을 만들어 멧돼지를 끌어 올리자 다혜가 소매를 걷어붙였다.

“아으아.”

“그래. 언니가 해체해줘.”

“으아으~.”

맡겨 달라는 듯이, 다혜는 검을 뽑아 멧돼지에게 다가갔다.

* * *

“언니.”

“……므아.”

다혜가 시선을 피했다.

세희는 고개를 느리게 기웃거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평평한 돌 위에 멧돼지가 보기 좋게 해체되어 있었다.

다만 문제는.

“언니?”

“므웅.”

“난 지금까지 돼지가 사족보행을 하는 줄 알았는데.”

“므앙.”

“이 돼지는 왜 뒷다리 두 짝이 없지?”

“……아웅.”

다혜는 입가를 문질렀다. 혹시나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핏자국을 지우기 위해서.

그렇지만 이 자리에 범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언니.”

“므아아.”

“오늘은 굶어.”

“느아아악!”

“뭘 잘했다고 소리를 질러! 혼자 몇 인분을 먹어놓고 저녁까지 먹겠다는 거야?!”

“……꾸우웅.”

“에휴…….”

세희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설마 고기 생으로 먹은 거야?”

“느웅.”

“입 벌려 봐.”

다혜가 입을 벌리자 피비린내가 확 풍겼다. 살짝 고개를 내밀어 냄새를 맡던 세희는 흙 씹은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오늘부터 내 옆에서 자지 마.”

“므아아앙……!”

“너무해는 뭘 너무해야? 언니는 반대로 누워서 자. 언니는 발보다 입이 냄새가 심하니까 입을 우리 발 있는 데로 놓고 자라고.”

“느아아악!”

“불공평해? 정말로? 다수결로 정해 볼까?”

“꾸우우…….”

다혜는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구석에 쪼그려 앉았다.

하나 정도만 먹었어도 해체하느라 고생한 값 쳤을 텐데, 두 개씩이나 먹어 버리다니. 세희는 한숨을 쉬며 아이들과 함께 고기 구울 준비를 했다.

“태화, 불 피워줘. 나빛아, 네가 그릴 만들어 줘야 할 것 같은데.”

“……잠깐만.”

은율이 고개를 들었다.

“어디서 이상한 소리 안 들려?”

“……므아.”

다혜도 고개를 들었다.

세희의 귀에도 살짝 들렸다. 들렸다기보다는 느껴졌다. 수많은 발이 대지를 때리는 진동.

“밥은 나중에 먹어야겠네.”

세희는 검을 뽑았다.

* * *

투콰아아앙……

하늘색 폭발이 하늘로 치솟았다.

그 폭발을 끝으로, 움직이는 적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세희는 검을 한 번 휘둘러 피를 털어내고 칼집에 집어넣었다.

산의 한 부분이 움푹 파여 있었다.

“세희 너무 강합니다.”

지켜보던 이츠키가 부적을 검에 붙이며 중얼거렸다.

“제가 나설 자리가 없습니다.”

“므앙.”

다혜가 검을 머리 위로 붕붕 흔들었다. 나도 나설 수 있었다는 듯이.

세희는 다혜를 흘겨보며 핀잔을 날렸다.

“언니도 할 수 있었으면 먼저 하지 그랬어?”

“으아으아~.”

“자랑하는 거야? 많이 해 봤다고?”

“아으아으.”

다혜는 검을 치켜들고 몬스터들의 시체를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우아으아으으.”

“알아서 해. 근데 제발 먹을 수 있는 걸로 가져다줘.”

“므앙~.”

다혜가 몬스터를 해체하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긴장을 풀었다. 나빛은 성창을 없애고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다친 사람 있어?”

“읎는 거 같은디.”

지윤이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대단헌 놈이 읎어가 다칠 건덕지도 읎었디.”

“그래도 마릿수는 되게 많네.”

은율이 중얼거렸다.

“실습 때는 일부러 찾아다녀야 할 정도였는데……. 여긴 몬스터가 무리를 지을 정도인가 봐.”

“그러게.”

세희는 산세의 형태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헌터들이 오는 곳이 아닌 거 같네.”

“그러면…….”

“아르게스인 거겠지.”

아르게스와 한반도의 접경지는 기다란 아르게스의 가지가 한반도에 걸쳐 있는 형태이니, 상호가 도시로 가는 길목을 지킨다고 했던 것은 정황상 그 가지의 끝부분이고, 자신들이 있는 곳은 조금 더 안쪽.

어쩐지 식물 중에 못 보던 것이 섞여 있더라. 세희는 그제서야 자신들이 어디에 왔는지 깨달았다.

‘그럼 몬스터들이 언제든지, 얼마든지 더 올 수 있다는…….’

그때 뒤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시각으로 느낀 것은 당연히 아니고, 청각으로 느낀 것도 아니고, 촉각으로 느낀 것도 아니었지만, 육감으로 느껴지는 분명한 누군가의 기척.

그 즉시 세희의 시선이 그 방향을 향했다.

“…….”

낙엽, 나무, 바위.

‘……기분 탓인가.’

세희는 고개를 기웃하며 돌아섰다.

“언니, 부탁인데 사람 닮은 놈들은 먹지 말자.”

“므아?!”

“오우거는 먹기 싫어.”

“꾸우웅냠냠…….”

“시무룩한 척하면서 은근슬쩍 먹지 말고! 버리라고!”

“꾸우웅…….”

* * *

상호는 나무 뒤에 숨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애들이 감이 좋아졌네…….’

세희가 바라본 바로 그 방향의 나무 뒤에서.

분명 들킬 만한 이유가 없었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털끝 하나 안 움직이고 숨소리도 내지 않았는데.

아마 몸에 흐르는 내공의 기운을 읽은 것 같았다.

‘같은 내공이라서 그런가…….’

앞으론 조금 더 멀리에 숨어야겠다. 상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들의 시선이 사각지대를 만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몸을 피했다.

* * *

그러기를 일주일.

아이들은 이제 제법 자연인이라고 부를 만한 몰골이 되어 있었다. 봉두난발이 된 머리에 헤지고 때가 탄 옷과 신발. 머리를 제대로 땋지 못한 세희와 교복을 입은 태화의 꼴이 특히 심했다.

“거지뇬.”

“자기소개야?”

세희는 혀를 쯧 차고 나무에 획을 하나 그었다. 正丁.

“오늘이 선생님 오시는 날이네.”

“므아!”

다혜가 눈을 치켜뜨고 나무집을 가리켰다. 검지로 찌르듯이, 강렬한 몸짓을 동반해서.

“므아아!”

“저걸 어떻게 가져가. 가져가서 어디다 둘 건데. 주차장에 놓고 언니가 들어가 살 거야?”

“꾸우웅…….”

다혜는 시무룩하게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때 태화가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튕겼다.

“나한테 방법이 있어.”

“므아?”

나무집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장례식을 해서 그 재를 가져가는 거지.”

“느아아아앙!”

“아이씨, 뭐 어쩌라고! 이 지긋지긋한 개집 가져가서 어따 쓸 건데!”

그렇게 집은 홀라당 타버렸고.

다혜는 손바닥에 소복이 쌓인 재를 내려다보며 눈물을 흘렸다.

“므우웅…….”

“버려. 잿가루 가져가서 어디다 쓸 건데.”

“므앙!”

“집은 살아있는 게 아니야, 언니.”

세희는 다혜의 손등을 탁 쳐서 손바닥의 재를 쏟아버렸다.

그나저나 스승은 언제 올까. 세희와 아이들은 바닥에 앉아 상호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문득 태화가 중얼거렸다.

“가면 목욕하고 낮잠 때리고 시내에서 햄버거 먹어야지.”

“내는 밥이 그립다.”

“저는 면이 그립습니다.”

“선생님은 뭐 하고 지내셨을까?”

나빛이 땅에 성력 막대기를 끼적였다.

“도시로 못 가게 막고 계셨다는 건…… 선생님도 밖에서 자고 먹고 하셨다는 걸까? 혼자서?”

“멍청아, 쌤은 순식간에 왔다갔다 할 수 있잖아. 보나마나 우리 몰래 맛있는 거 먹고 애들이랑 놀았겠지.”

“응……? 아니야, 우리 선생님 안 그래…….”

“우리 선생님 여자 없이 못 살잖습니까.”

이츠키의 말에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러게…….”

“네!”

“우리 대신 아덜이랑 질펀하게 놀고 있겄고마.”

“단비랑 아리 꼬리 만지면서…….”

“므아아아.”

아리 이야기를 하자 다혜의 입에서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본 아이들은 다혜가 학교에 가면 뭐부터 할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들도 상호가 오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

“선생님 언제 오지……?”

“어데 또 출장 간 거 아이가?”

“여자랑 놀고 계신 거 아냐?”

“오늘이 약속날인 걸 까먹으신 거 아냐……?”

그 말에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치…….”

“우리 선생님 약속 엄청 잘 까먹지…….”

“여자랑 노는 것도 좋아하고…….”

“그러네. 여기랑 민정쌤 있는 곳이랑 가까우니까…….”

“또 들락날락허고 계시겄고마…….”

상호가 들었다면 기겁할 만한 이야기들을 쏟아내며, 아이들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때 세희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아.”

“뭐야, 왜?”

“오신 것 같은데.”

하늘에서 그림자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크기가 사람 크기만 아니었다면 새와 착각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상호는 아이들을 향해 팔을 쫙 벌리고 씩 웃었다.

“잘 있었어?”

“선생님…….”

이츠키를 제외한 아이들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믿고 있었어요…….”

“선생님이 아무리 여자를 좋아해도 약속을 까먹진 않을 거라고…….”

“저희보다 어린 애들이 학교에 있지만 그래도 저흴 버리지는 않을 거라고…….”

“근데 민정쌤한테 들락날락하긴 했지? 그치? 솔직히 말해 봐. 이해할 수 있어.”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상호는 당황해하다가 엄지로 등 뒤를 가리켰다.

“빨리 돌아가서 쉬자. 고생했으니까. 혹시 어디 다친 사람 있어?”

“아니요.”

“근데 쌤.”

“응?”

태화가 갑자기 상호의 바지춤을 확 잡아당겼다.

“왜 빤쓰가 일주일 전이랑 똑같아?”

“……야, 임마!”

“옷은 그렇다 쳐도……. 혹시 쌤도 일주일동안 밖에서 잔 거야?”

“이 짜식이 어디 선생님 바지를……! 잠깐만, 일주일 전 팬티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쌤 잘때 한번 쓱 보는 거지.”

“야!”

상호는 시뻘개진 얼굴로 황급히 바지를 추스르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 임마. 너희 도시로 튀는지 감시하고 있는다고 했잖아.”

“우리가 걱정돼서 지키고 있었던 게 아니라?”

“…….”

그가 대답하지 못하자 태화가 피식 웃었다.

“맞나보네.”

“……니 맘대로 생각해. 어쨌든 도시로 가면 진짜로 잡을 거였어.”

“선생님…….”

팔을 쫙 벌린 아이들이 상호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우는 건지 웃는 건지 헷갈리는 표정으로 코를 훌쩍이면서.

“쌤예…….”

“선생님…….”

꼭 좀비처럼 다가온다.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아이들을 피해 뒷걸음질을 쳤다.

“으응, 얘들아……?”

“선생님……!”

“……말을 해!”

“선생니이임……!”

“……으아아악!”

그는 결국 몰려든 아이들을 피하지 못하고 포옹에 파묻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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