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9화>
379. 야생
“삐이이…….”
“그래, 그래, 이제 괜찮아……. 엄마 여깄어…….”
나빛이 코를 훌쩍이며 혁구를 품에 꼭 안았다.
다행히 나빛이 울며불며 달려간 덕분에 혁구는 화장지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애초에 정말로 혁구를 사용할 생각은 없었겠지만.
세희는 나빛의 등을 토닥이다가 이츠키와 은율을 돌아보았다.
“설마 진짜 썼겠어. 장난이겠지. 그치, 이츠키?”
“…….”
“은율아?”
“…….”
말없이 시선을 피하는 둘.
세희의 동공이 지진이 난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니, 됐어. 그냥 대답하지 마. 그래서 뭘로 해결했어?”
“이양이랑 마법으로 해결했습니다.”
쪼그려 앉은 태화가 땅에 나뭇가지를 끼적이며 중얼거렸다.
“인간 비데가 됐어…….”
“내도 좀 부탁한데이.”
“X불뇬들……. 니들 똥꼬 어떤 색인지 쌤한테 다 꼰지를 거야…….”
“미칫나?”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식사도 볼일도 마쳤다. 세희는 구덩이 함정 위장시키는 작업을 마무리하고 토끼 내장을 얹었다.
“가자. 일주일 안엔 잡히겠지.”
“응.”
아이들은 돌아서서 나무집으로 향했다.
* * *
다행히 밤이 될 때까지도 몬스터는 나타나지 않았다.
해가 산 너머로 떨어지자 골짜기는 더욱 추워졌고, 아이들은 나무집 속으로 기어들어가 가까이 붙어 앉았다.
그러기를 몇 시간.
“흐아암…….”
태화가 하품을 하고 입맛을 다셨다.
“진짜 드럽게 할 거 없네.”
“잠이나 자.”
세희는 다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핀잔을 날렸다.
“넌 일곱 번째 불침번으로 깨워 줄게.”
“꺼져.”
태화는 가운뎃손가락을 날리고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순서 정해야 할 거 아냐.”
“나!”
나빛이 결의에 가득 찬 눈빛으로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1번 해줄게!”
“1번이 제일 좋은 자리야, 멍청아.”
“엥, 왜?”
“한번 자면 그냥 푹 자잖아! 짧게 자다 깨는 2번이랑 7번이 제일 힘든 거라고.”
“그래? 난 너희 편하라구……. 그럼 내가 2번 할게…….”
시무룩하게 웅얼거리는 나빛을 은율이 막았다.
“안 돼. 가위바위보로 정해. 가위바위보로 한 명씩 뽑아서 고르는 거야.”
“그래.”
이견은 없는 듯싶었다. 아이들은 다 같이 주먹을 머리 뒤로 넘겼다.
“안 내면 진다~.”
“가위~ 바위~ 보!”
가위, 바위 보. 각양각색의 손들이 한곳에 모이는 순간.
다혜의 손이 아주 빠르게 모습을 바꿨다.
“……언니.”
다른 아이들은 못 봤겠지만, 세희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세희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다혜를 꿰뚫었다.
“왜 바꿔?”
“므, 므아앙…….”
“언니가 재작년에 고생한 거랑 지금 편하고 싶은 거랑 무슨 상관이야?”
“우앙……!”
“언니 때는 불침번도 없었어?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얍삽이 쓰지 마.”
“꾸우웅…….”
“그럼 사람이 10년이면 변해야지 안 변하겠어?”
곧 가위바위보가 다시 재개되었다.
그렇게 결정된 1등은 이츠키.
“1번 하겠습니다.”
이후로는 나디아가 8번, 은율이 3번, 세희가 4번, 지윤이 5번, 나빛이 6번.
제일 안 좋은 2번과 7번은 각각 태화와 다혜의 몫이 되었다.
“크아아아악!”
“므아아아앙!”
“시끄러. 빨리 씻고 잘 준비나 하자.”
아이들은 외투를 벗고 주섬주섬 밖으로 나왔다.
* * *
‘잘 지내고 있으려나…….’
상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말로는 일주일 되기 전엔 절대 안 볼 것처럼 굴었지만, 그래도 상태를 확인하고 싶어서 하루도 안 되어 이렇게 몰래 찾아온 것이었다. 다들 무사한지, 불침번은 똑바로 세워 놨는지.
그는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아이들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다가갔다. 다혜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심스럽게.
‘이츠키한텐 어쩔 수 없이 들키겠지만…….’
그래도 이츠키는 입이 무거운 편이고 감정도 겉으로 잘 안 드러내니까. 들켜도 조용히 넘어가줄 것이다.
굵은 나무 너머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자는 건 아닌가 보네.’
상호는 몸을 낮추고 나무 옆으로 고개를 천천히, 아주 조금씩 내밀었다.
‘……응?’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반투명하고 거대한 황금빛 대야. 그 대야에 물을 졸졸졸 흘려보내는 거대한 황금빛 주전자. 그 주전자 아래에서 타오르는 검은 불꽃.
그리고 황금빛 대야 속에 앉아 있는 가느다란 그림자 여덟 개.
김이 풀풀 올라와서 대야 위쪽은 잘 보이지 않았다.
“아이고~.”
증기 속에서 태화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원~하다~.”
“좋다아…….”
“하이고~. 노천탕이 이래 좋은 거였나. 뜨끈헌디 시원하고마.”
“겨울 산이라 공기도 좋습니다.”
나른한 목소리들이 뒤를 이었다. 상호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얘들아……. 그렇게 있으면 몬스터가 꼬이잖아…….’
수증기는 쉬이 흩어지고, 불꽃도 검은색이라 눈에 잘 띄지 않았지만, 찬란하게 빛나는 성력이 문제였다. 불빛 하나 없는 산에서 저러고 있으니 골짜기가 온통 환할 지경이었다.
덤으로 상호에게도 곤란한 점이 있었으니.
빛이 나는 반투명한 그릇이라, 물속이 훤히 비쳐 보였다.
‘……튀어야겠다.’
이츠키가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기 전에. 상호는 슬그머니 뒤로 빠지려 했다.
그런데 주변에서 무언가가 통통 튀어 다녔다.
“뺙.”
혁구가 낙엽을 바스락거리며 뛰어놀고 있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지금 움직였다가는 혁구가 그를 발견하고 뺙뺙 울어댈 것이다. 상호는 고개를 엉거주춤하게 내민 채로 굳어 버렸다.
‘혁구야, 제발 다른 곳으로 가라…….’
그러나 혁구가 그의 마음을 알아줄 리 없었다.
혁구는 아예 제자리에 눌러앉아 나뭇가지를 한곳에 쌓기 시작했다. 둥지를 짓는 놀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때 상호의 귀에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쌤도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뭐어?! 안돼! 부끄러워…….”
“니는 그렇겠지. 난 자주 같이 씻어봐서 상관없는데.”
“나, 나도 화장실은 같이 가 봤어……!”
“니들 무신 소릴 하는 기고?”
“아, 니 모르냐?”
상호의 눈동자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지만, 그걸 알 턱이 없는 태화는 신나서 말을 쏟아냈다.
“쌤이랑 나랑 악마 잡으러 돌아다니는데~. 쌤이 화장실도 위험하다면서~. 나는 그건 좀 아니지 않냐고 했는데 억지로 끌고 들어가서~.”
“X랄 빠네 이 가스나야. 쌤이 그럴 리가 있나.”
“진짠데? 나 쌤이랑 같은 칸 들어가서 쌤 보는 앞에서 오줌쌌는데? 쌤한테 물어볼까?”
상호의 가슴에서 분통이 터졌다.
‘내가 언제 보고 있었어! 같은 칸에만 있었지…….’
“근데근데~. 쌤도 오줌 마렵대서~ 나도 쌤 오줌싸는 거 봤는데~ 어머 X발 괴물이 튀어나오는 거야~.”
“응? 선생님이 괴물을 쌌다구?”
“닌 못알아들으면 걍 가만히 있어.”
“꾸꾸야~.”
“뺙?”
나빛의 부름에 혁구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상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가! 가라, 혁구야!’
하지만 태화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아, 알았어! 말하면 될 거 아냐…….”
“꾸꾸야, 괜찮아~. 안 와도 돼~.”
“뺙.”
‘X발…….’
속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쌤 그거 말하는 거야, 그거. 그거가 괴물같다고.”
“그거?”
“아이씨, 못알아듣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아기씨 쏘는 총 있잖아! 씨뿌리개!”
“씨뿌리개?”
“그래! 아기씨뿌리개.”
상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말을 해도 X발…….’
“어쨌든 난 봤다고. 쌤 씨뿌리개. 니들은 앞으로도 못 보겠지만.”
“난 봤는데.”
세희의 말에 물속 그림자 중 하나가 마구 요동을 쳤다. 아마 다혜인 것 같았다.
“느아앙?!”
“쌤 방 화장실에 숨어있다가 봤어.”
“므아아……?”
“응. 괴물같긴 했어.”
살다살다 제자들에게 품평당하는 신세라니. 상호는 당장이라도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그런데 그림자 중 하나가 갑자기 움찔했다.
“……윽.”
“응? 이츠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닙니다.”
찰박……
작은 물소리가 들리고.
황금색 대야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 사이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이츠키의 모습이 나타났다.
“…….”
상호와 이츠키의 눈이 마주쳤다.
이츠키는 상호를 빤히 바라보며 눈을 끔뻑였다. 몸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러다니 잘 보여주지 않는 웃음을 피식 흘리며.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아예 대야 밖으로 나와서 다가오려고 했다.
‘……!’
이젠 혁구고 뭐고 없다.
상호의 발이 땅을 힘껏 박찼다.
투우웅……
“응? 이게 무슨 소리지?”
“몬스터 아냐?”
“칼, 칼 어딨어?!”
뒤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었지만, 그는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 *
낙엽을 밟는 소리.
상호는 그 소리가 가까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나무 옆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사카시타.”
“아.”
이츠키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계신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겠지. 너는.”
아이들이 자는 나무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
상호는 다혜가 듣지 못하게, 이츠키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서 귓가에 속삭였다.
“아까 같은 장난은 치지 말아줘…….”
“저는 선생님이 목적을 이루게 도와드리려고 했던 것뿐입니다만.”
“내 목적은 상태를 확인하는 거지 다른 걸 확인하는 게 아니었어…….”
그가 한숨을 쉬자 이츠키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지만 구경하고 계셨던 건 사실 아닙니까?”
“아니야, 혁구한테 들킬까 봐 그랬어…….”
“아, 그랬습니까. 저는 진심으로 선생님이 씨뿌리개를 장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오해가 한번 시작되면 한도 끝도 없는 아이들. 상호는 눈을 감고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그래서…… 첫날 지내보니까 어때? 할만해?”
“그렇게 나쁘진 않았습니다. 다 예상했던 일들이라. 다만…….”
“다만?”
“뒤처리를 할 때 혁구를 휴지 대용으로 사용한 건……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뭐?”
“농담입니다.”
“깜짝이야…….”
아주 잠깐 상상했는데도 간담이 서늘했다. 상호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간신히 쓴웃음을 지었다.
“일상적인 것들이 제일 힘들지. 야생에서는…….”
“마법이 없었다면 그건 좀 끔찍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민정 선생님과 항상 함께 다니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든 했지. 내공으로 태우거나, 붕대를 쓰거나……. 씻는 건 냇가를 찾아서 씻었지. 못 찾으면 못 씻는 거고.”
“그걸 며칠씩 한 겁니까?”
“길면 몇 주가 될 때도 있었어.”
그 말에 이츠키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선생님 전우분들이 대단한 겁니다.”
“너희도 할 수 있어. 마음의 문제일 뿐이야. 너도 지금은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막상 전쟁이 일어나서 진짜 서로의 목숨이 달린 임무를 맡으면 알아서 잘 하게 될걸.”
몬스터와 싸운 건 사람들을 위해서지만, 벌레를 먹고 흙탕물을 마신 건 오로지 살아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상호는 검지로 나무를 긁적여서 벌레를 하나 꺼냈다.
“물론 대부분의 헌터들은 우리처럼 생활하진 않았지. 지금도 마찬가지고. 일반적인 헌터들에겐 필요가 없는 경험이지. 이걸 겪어본다고 해서 너희의 헌터 등급이 높아지는 건 아니고, 너희한테 제 2의 저승부대를 바라는 것도 아니야. 다만…….”
벌레가 상호의 이빨 사이에서 으스러졌다.
“내가 가르칠 수 있는 모든 걸 너희한테 가르치는 것뿐이야.”
“저도 그러려고 온 겁니다.”
이츠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유학을 온 건 아닐 테다. 상호는 더 이상 씹히지 않는 벌레 조각을 뱉어내고 이츠키의 어깨를 두드렸다.
“불침번 잘 서.”
“계속 지켜보고 계실 겁니까?”
“그래야지. 여기서 졸았다가 은호가 돼버리면 답도 없으니까……. 아, 근데 다음번 불침번은 누구야?”
“이양입니다.”
“감시하는 맛이 있겠네. 갈게, 사카시타. 잘 자.”
“네.”
이츠키는 돌아서는 상호에게 손을 흔들었다.
“좋은 밤 되시길.”
그리고 나무집을 향해 돌아서서, 다시 적막한 어둠을 지켜보러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