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3화>
373. 같이 가요
강원도 산골 속, 혈석 봉인소.
병상에 누운 환자들 사이를 한 사내와 두 소녀가 걷고 있었다.
“어때 보여?”
상호가 묻자 이츠키의 눈이 환자들을 훑었다.
“실이 얇습니다. 끊어질 것처럼.”
“실?”
“인연이 약해지는 겁니다. 영혼이 죽어가고 있나 봅니다.”
“그거 말고 다른 건 안 보여?”
“그렇습니다.”
악마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은 보이지 않는가 보다. 사람의 영혼에 관한 것만 보이고.
상호는 더 깊은 곳으로 걸어가 베르멜로가 있는 구역으로 들어섰다.
“저건 어떻게 보여?”
투명한 격벽 너머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베르멜로. 상호의 손가락이 그 악마를 가리켰다.
이츠키는 격벽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잘 안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안에 들어가서 한번 볼래?”
“그게 좋겠습니다.”
이츠키의 대답에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열었다.
상호와 이츠키와 태화가 들어서자 바깥의 감시관이 영화를 멈췄다. 한창 스크린에 집중해 있던 베르멜로는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깜작이다가, 바로 옆까지 다가온 상호를 알아차리고는 화들짝 놀랐다.
“꺄아악!”
“왜 놀라?”
상호는 칼집으로 베르멜로의 머리를 툭툭 쳤다.
“내가 뭐 했냐? 아직 뭐 하지도 않았는데. 뭐 해 줘?”
“아니요, 아니요, 그냥 놀라서…….”
베르멜로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려다가 자신에게 팔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울상을 지었다. 뭉툭하게 잘린 팔다리가 볼품없이 버둥거렸다.
“어쩐 일로…… 오셨어요?”
오늘 상호가 온 이유는 이츠키에게 악마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지만, 그것 외에도 베르멜로를 찾아올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
“말할 준비가 됐나?”
상호는 그렇게 물으면서도 베르멜로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태화와 이츠키에게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니.
“악마를 죽이는 방법.”
“…….”
베르멜로의 이마에 진땀이 흘렀다.
“……그게.”
“고민을 좀 덜어 줄까?”
상호의 차가운 눈빛이 베르멜로의 눈에 정통으로 꽂혔다.
“그저께에 지배의 악마라는 놈을 만났거든?”
“……!”
그 붉은 눈동자가 흔들리는 순간을 상호는 놓치지 않았다.
“약해빠져서는 별것 아니더라고. 죽이진 못했지만. 근데 내가 그놈한테 니가 지배의 악마냐고 물어보니까 혈마녀한테 들었냐고 물어보대?”
“…….”
“그래서 그렇다고 말하니까 그럴 것 같았다고 대답하드라. 니는 태생이 인간이라서 원래부터 배신할 줄 알았대.”
“…….”
“아마 지금쯤이면 악마들도 니가 배신했다는 걸 다 알고 있지 않을까?”
베르멜로가 몸을 덜덜 떨었다.
상호의 말은 전부 사실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르멜로에게 쏟아지는 상호의 압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정순한 살기를 품고 있었다.
“이제 넌 진짜로 우리 편이 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베르멜로는 몸을, 눈동자를 덜덜 떨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라요.”
너무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뭐?”
“잘 몰라요…….”
그 말에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몸을 숙여 귀를 기울이던 상호는 뒤에 태화와 이츠키가 보고 있단 사실도 잊어버리고 욕을 뱉었다.
“뭐 이 X새끼야?”
“그, 그게! 저는, 저는 태생이 인간이라…….”
베르멜로가 짧은 팔을 버둥거렸다.
“지금은 악마지만, 마나만 쓸 줄 알지 악마로서의 능력은 쓸 줄 몰라서……. 그, 그래서 제가 받은 능력도 제일 쓸모없는 거예요! 다른 놈들은 다 좋은 건데 저만 짐덩어리…….”
“근데 X발 왜 말 안했는데?”
상호의 눈에 핏발이 섰다.
“닌 안 되겠다. 니는 괘씸해서라도 칼을 써야겠어.”
“그, 근데! 근데 조금, 조금은 알아요! 이론은 알아요! 근데 별 도움이 안 될 거라서, 말을 못 한…….”
“이 새끼가 간을 볼라고 그러네. 야, 태화야. 사카시타 데리고 나가. 나가서 헌터한테 쇄육기 가져오라고 그래.”
“아니 진짜! 진짜라니까요! 제가 다 설명해 드릴게요! 진짜라니까! 으헝헝헝…….”
베르멜로가 애벌레처럼 꾸물꾸물 바닥을 기어 상호 앞에 머리를 박았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이츠키는 태화를 흘끗했다.
“우린 나갑시다.”
“응.”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가는 둘의 뒤로, 악귀와 같은 표정을 지은 상호가 칼을 뽑고 있었다.
* * *
“……그러니까.”
상호는 칼을 빙글빙글 돌리며 물었다.
“악마의 몸 어딘가에는 다른 공간과 연결된 통로가 있고…… 그 너머에 악마의 심장이 있다, 이거지?”
“네…….”
베르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혼의 심장이요…….”
“그 통로에 정확한 각도로 영혼의 마나를 쏘면 잡을 수 있다고?”
“네……. 그런데 악마마다 심장을 두는 곳이 달라서…… 그 통로와 심장을 정확히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사실상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요…….”
“너는 태생이 인간이라서 그 영혼의 통로를 보는 능력은 없다 이거지?”
“네…….”
“그럼 널 시켜서 저기 갈아버렸던 악마들을 죽이라고 해도 소용이 없겠네?”
“네…….”
“……흐음.”
상호는 턱을 괸 채로 베르멜로를 내려다보았다.
“수천 번쯤 찌르다 보면 얻어걸리지 않을까?”
“살려주세요……!”
“아니 너 말고. 궁금해서 묻는 거야. 이론상으로는 그런 방법도 가능하다 아니야?”
“운이 좋다면 그럴 수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운이 안 좋으면 수천, 수만 번을 찔러도 안 죽는다……고 할 수 있죠. 그리고 그렇게 해도 안 죽는 악마가 또 있어요…….”
“그게 불사의 악마냐?”
“네. 그리고…… 그 악마도요.”
악마들의 신을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상호는 가만히 베르멜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도움이 될 것 같네.”
“네…….”
“고맙다.”
“저, 저야말로…….”
듣기 드문 감사에 베르멜로가 당황하며 눈을 깔았다.
그런데 상호가 칼을 치켜들었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확인은 해봐야겠지?”
“네, 네?! 잠깐만, 싫어요, 싫어요……!”
“농담이야.”
상호는 검을 집어넣고 손을 털었다.
“너 먹는 건 좋아하냐?”
“먹는 거……요?”
“달콤한 거나 고기 같은 거. 영…… 아니 X발. 우리 역사 보면서 음식들도 봤을 거 아냐. 그런 거 먹을 수 있지? 좋아하지?”
“네…….”
“다음에 사다 줄게.”
“감사합니다…….”
베르멜로는 방을 나가는 상호의 뒷모습에 대고 머리를 꾸벅였다.
밖으로 나온 상호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태화와 이츠키를 발견하고 헛기침을 했다.
“미안, 많이 기다렸지?”
“아닙니다.”
“무슨 이야기 했어?”
“그냥, 이것저것.”
설명하기 귀찮다.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상호는 대충 얼버무리고 둘과 번갈아 눈을 마주쳤다.
“너희 둘 다 봤지? 뭐 느껴지거나 본 거 있어?”
“왔어!”
태화가 양손 검지를 뿔에 붙였다.
“딱 왔어! 찌르르뿌글뿌글한 이 감각!”
“……일단 잘 기억해 놔. 사카시타는?”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이츠키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실도 빛도…… 아무것도 안 보였습니다.”
“혹시 다른 건 안 보였어? 통로가 있다는데. 구멍 같은 거나…….”
“그런 건 없었습니다.”
“……으음.”
역시 악마에 관한 것은 보지 못하는 것일까.
아쉽지만 안 되는 걸 억지로 되게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노력한다고 바뀌는 것도 아니고.
악마를 죽이는 건 아직 힘들겠지만.
“그치만 평범한 사람은 실이 있잖아.”
“사람이라면 무조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말은…….”
“악마를 쫓는 건 힘들지만…….”
이츠키가 상호와 눈을 마주쳤다.
“코앞에 있으면……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몸에 들어간 악마는 또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쫓다 보면 언젠가는 잡을 것이다.
그게 개학 전에 끝나면 좋으련만. 상호는 엷은 한숨을 내쉬고 아이들과 함께 문으로 향했다.
* * *
“자.”
도현이 상호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신분증과 작은 금속 배지가 달린, 경찰지갑 같은 물건. 신분증에는 ‘한국괴렵협회 특무부’라고 적혀 있었다.
상호는 그 지갑을 받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이걸 경찰한테 딱 보여주면 된다 이거지?”
“어. 다 말해 놨…….”
그때 태화가 그 지갑을 낚아채어 쓱 보고는 눈에서 불꽃을 내뿜었다.
“악! 마를잡아서뚝배기를깰거야 부…….”
“시끄러 임마. 대체 왜 그렇게 부대에 집착하는 거야?”
“멋있잖아! 까리하잖아!”
“그럼 태화부대 해라, 응? 너 혼자 태화부대 해. 네가 대장 하고 대원 하고 다 해. 그럼 되잖아.”
“쌤하고 같은 부대가 되는 게 중요한 거야!”
“에휴…….”
상호는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게, 형.”
“야, 근데 상호야. 그렇게 셋이서 다니는 거야? 거기 옆에 친구는 특기가 뭐야?”
“얘? 얘는 주술이야.”
“그래?”
도현이 고개를 기웃했다.
“신앙인 한 명 필요하지 않겠어?”
“……있긴 해야겠지.”
악마가 빠져나간 사람, 혹은 악마에게 습격을 당한 사람을 치료해야 할 수도 있으니.
사람이 늘어나면 이동하기가 영 귀찮아지겠지만, 그래도 분명 필요하긴 했다.
“왜, 협회에서 보내주려고?”
“필요할 것 같아서. 한 명 데려가.”
“아니, 아냐. 그냥 내 제자 데려갈게.”
나빛은 날 수 있으니까. 전투사제가 아닌 이들보다는 훨씬 발이 빨랐다.
그런데 상호의 말에 태화가 눈살을 찌푸렸다.
“걔도 데려간다고?”
“또 왜 임마. 어차피 이츠키도 있는데 뭐 어때. 나빛이 한 명쯤 늘어도 상관없잖아.”
“아니, 걔가 늘어나는 것 자체는 상관이 없는데……. 에이, 몰라. 걍 쌤 알아서 해.”
“뭐야, 뭔데 그래? 뭐 문제 있어?”
“바보.”
“…….”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걸까. 상호는 입맛을 다시고 집무실의 문가로 향했다.
* * *
그래서.
“헤헤헤…….”
나빛이 돈가스를 우물거리며 웃었다.
“헤헤……, 선생님.”
“……응.”
“제가 필요하셨어요?”
“으응…….”
“헤헤헤헤…….”
피할 이유가 없는데도 부담스러운 웃음. 상호는 너무 환한 미소를 피해 고개를 돌린 채로 된장국을 홀짝였다.
식탁에서는 혁구가 돈가스 부스러기를 쪼아 먹고 있었다.
“그러면 이제 하루종일 선생님하고 같이 있는 거예요?”
“응.”
“헤헤헤…… 앗.”
나빛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돈가스를 허겁지겁 먹더니 태화를 돌아보았다.
“빨리 먹어! 악마 빨리 찾아야지!”
“먹고 있거든? 니나 빨리 먹어. 제일 느려터진 게…….”
“말대꾸하는 거야……?”
“뺙.”
“…….”
태화는 조용히 밥을 먹었다.
그때, 이츠키가 살짝 흠칫하더니 태화의 어깨를 톡 쳤다.
“이양.”
“응? 뭐.”
“화장실 같이 갑시다.”
그러자 태화가 나빛의 정강이를 툭 찼다.
“야, 니가 같이 가.”
“응? 왜?”
“쌤이 화장실 꼭 같이 가라 그랬어. 난 안 마려우니까 니가 가.”
“나 지금 안 마려운데…….”
“이따가 마렵다고 하지 말고 지금 가라고!”
또 남한테 떠넘기려 한다. 상호는 태화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야, 이태화. 네가 같이 가.”
“왜!”
“사카시타가 너랑 가자고 했잖아. 그럼 그냥 같이 가는 거야. 남한테 미루지 마.”
“우씨…….”
결국 태화는 툴툴거리며 이츠키와 함께 화장실로 향했다.
나빛은 그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상호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화장실을 꼭 둘이 가야 해요?”
“으응, 사건 중에 화장실에서 일어난 게 있어서…….”
“아하……. 앗.”
갑자기 나빛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선생님…….”
그 안절부절한 목소리에 상호의 표정도 덩달아 창백해졌다.
“……응? 왜?”
“저 소변…… 마려운데…….”
“……조금만 참았다가 애들이랑 가면 안 될까?”
“급해요…….”
나빛이 눈물을 글썽이며 발을 살짝 굴렀다.
“저기 지금 태화랑 이츠키도 기다리고 있어요…….”
그 말대로 식당 화장실 앞에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상호의 머릿속이 아뜩해졌다.
“……한 칸밖에 없나?”
“네…….”
“어떻게 참을 수 없을까? 지금 가면 선생님이랑 같은 칸에 들어가야 해…….”
여자화장실 안에 멀뚱히 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화장실 밖에서 기다리기에는 들락날락거리거나 숨어 있는 사람을 잡아낼 수 없고.
결국 칸 안에 함께 들어가야 하는데, 나빛과 함께 들어가는 것은 허들이 너무도 높았다.
하지만 나빛의 눈물샘이 터지려 하고 있었다.
“급해요…….”
“……그래. 가자.”
남한테 들킬까 무섭다. 그는 나빛의 손을 잡고 서둘러 식당을 나섰다.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필사적으로 가리며.
하지만 나빛의 머리에 앉은 혁구가 눈치없이 뺙뺙 울어대고 있었다.
“뺙.”
“혁구야, 조용히 좀…….”
“뺙─뺙─.”
“……에휴.”
상호는 눈물을 삼키며 나빛과 함께 여자화장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