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화>
371. 책임져
“우앙.”
“아잇, 조용히 좀 해봐.”
태화는 다혜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언니 때문에 하나도 안 들리잖아!”
“으아으아으…….”
다혜는 덜덜 떨며 온몸을 바싹 긴장시켰다. 내공을 푸는 순간 수백 미터 아래로 추락할 테니.
발밑 까마득한 곳에 펼쳐진 도시가 모형보다도 작게 보였다.
등에 업힌 세희가 다혜의 정수리를 톡톡 두드렸다.
“들키겠다, 언니. 쫌만 아래로.”
“느우우…….”
“뭘 불공평해. 난 아직 내공이 부족해서 허공답보 못한단 말야.”
“꾸웅…….”
“절대로 편해서 이러는 거 아니야.”
세희는 그렇게 말하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유리창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고급스러운 집무실. 검은 나무로 된 책상보다 가까운 쪽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뒷모습을 보니 아마 도현. 담임의 형.
책상 건너편에 놓인 소파에는 담임이 앉은 게 보였다.
“야, 야.”
공중에 뜬 태화가 세희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들리냐? 난 씨 도대체가 들리지가 않는데.”
“유리가 좀 특이한가 본데.”
고층 건물이라 그런지 진동을 흡수하는 특수한 공법이 적용된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렇지 않으면 시도 때도 없이 바람 소리가 방을 울릴 테니.
다행히 이럴 때 쓸 만한 수법을 배워 놨다. 세희는 눈을 감고 귀를 유리창에 붙였다.
“내가 들어 볼 테니까 조용히 해.”
“텔레파시야?”
“그놈의 텔레파시……. 좀 조용히 하라고.”
뜨거운 내공이 귀 안쪽에 흘렀다.
내공으로 청력을 강화하는 지청술. 본래 땅에 귀를 대고 땅의 진동을 듣는 기술이지만 지금은 유리창에 적용하고 있었다.
아르게스에 가게 될 때를 대비해 상호가 알려 준 생존 기술이었다.
“……그 친구…….”
“악마를…….”
그래도 잘 안 들린다. 세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태화가 세희의 귀에 대고 말을 했다.
“들려?”
“……!”
지청술을 쓰는 중이라 천둥보다 크게 들렸다. 세희는 깜짝 놀라서는 혼이 쏙 빠진 표정으로 비틀거리다가 뒤로 넘어갈 뻔했다.
간신히 중심을 되찾자 분노가 확 치솟았다.
“야! 말하지 말랬잖아!”
“말도 못하냐? 이젠 말도 허락 받고 말해야 돼? 참나…….”
“귀 터지는 줄 알았다고, 멍청아! 내가 조용히 하랬잖아! 그게 어려워?”
“또 잔소리 잔소리 X랄X랄……. 그래서 듣기는 했어?”
“아니. 안 들리는데.”
“쓸모없는 년…….”
태화가 고개를 살짝 들어 유리창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세희는 다급히 태화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겼다.
“야! 너무 올라가지 말라니까!”
“기다려 봐. 좀 보자. 내가 요튜브로 배운 독순술을…….”
“니는 느려터져서 다 들킨다고! 선생님이 너 고개 숙이는 걸 못 볼 것 같아?”
“지는 빠른 줄 아네. 퉤다 이뇬아. 퉤퉤.”
태화는 기어코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야, 야. 눈 마주쳤어!”
“당연하지 등신아. 그거 달고 안 보이길 바랬냐?”
이미 들켰으면 어쩔 수 없다. 세희도 그냥 고개를 들어 상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상호는 계속 도현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뭐야.”
“왜?”
“아직 모르시는 거 같은데.”
“진짜?”
태화도 다시 고개를 쓱 들었다.
“진짜네? 밖이 잘 안 보이나?”
“몰라. 야, 너 소리 잘 듣는 마법 같은 건 없어? 나한테 걸으면 들을 수 있을 거 같은데…….”
“모르는데. 구멍을 살짝 뚫어 볼까? 니가 뚫어 봐.”
“꾸아웅…….”
셋은 공중에 뜬 채로 염탐을 계속했다.
* * *
상호는 멀뚱히 눈을 끔뻑였다.
바닥 쪽 유리창 바깥. 하늘을 배경으로 삐죽 솟은 빨간 뿔 때문에.
‘쟤가 왜 저기에…….’
누가 봐도 상호의 하나밖에 없는 악마 융합체 제자였다.
대체 언제 여기까지 쫓아왔는지.
“…….”
상호가 한참 동안 말이 없자 도현이 어리둥절해했다.
“야, 상호야. 뭘 그렇게 고민하냐?”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때 빨간 뿔이 쏘오옥 자라났다.
뿔 아래로 딸려 올라오는 구불구불한 검은 언덕. 그 아래로 슬금슬금 나타나는 붉은 보석 같은 눈동자.
눈동자는 상호와 눈을 마주치고는 깜짝 놀라 아래로 쏙 내려갔지만, 뿔은 채 숨기지 못해서 그대로 빼꼼히 솟아 있었다.
‘뭔 타조도 아니고…….’
제 눈에 안 보이면 다 안 보이는 줄 아나 보다. 상호는 태화를 무시하고 도현과 이야기를 계속하려 했다.
그런데 뿔 옆에 무언가가 또 쏙 올라왔다.
동그란 눈을 깜작이는 세희.
‘…….’
세희까지 왔을 줄이야.
상호는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악마가 최소 한 놈이 더 있는 거잖아.”
“그렇지. 그 애랑 애 아버지랑 동선이 안 겹치는 사건들이 있었으니까.”
“그럼 이제 그놈을 찾아야 하는데…….”
상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창밖에서 두더지마냥 쏙쏙 올라왔다가 내려가는 아이들이 자꾸 시선을 강탈해서.
도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에 그렇게 정신이 팔린 거야?”
“아니, 그냥…….”
그때 상호의 눈에 태화의 빨간 뿔이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만.”
“응?”
2년 전, 태화가 의족을 만들어 줬던 날의 기억.
그는 다시 위로 올라왔다가 쏙 내려가는 태화의 눈을 보며 중얼거렸다.
“방법이 있는 것 같아.”
* * *
“웅?”
태화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뭐를…… 해야 된다구?”
“악마.”
상호가 똑바로 눈을 마주쳐 왔다.
“악마를 찾아야 돼.”
“어…….”
태화의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미행한 걸 들켜서 꼼짝없이 혼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오히려 잘 왔다며 악마를 찾아야 한다니.
굳어버린 머리가 정보를 받아들이질 못했다.
“……왜?”
“얼마 전에 살인사건 있잖아. 그거 범인이 악마거든.”
“……왜 나야?”
“너 악마 알아볼 수 있잖아.”
상호의 눈빛은 부담스러울 정도의 확신을 담고 있었다.
“내 다리 봤을 때 익숙한 느낌 든다고 했었잖아.”
“그…….”
태화는 상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고 도현을 흘끔했다. 눈앞에 있는 사람들의 면면만 봐도 뭔가 엄청 막중한 일이라는 직감이 팍팍 왔다.
스스로가 그 정도의 일을 맡을 그릇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치만 그거…… 그냥 느낌뿐이구…… 그것도 쌤이 보여주고 나서야 알아차린 거구…….”
“그래도 어떤 느낌이 온 건 맞잖아.”
“그건 맞긴 한데…….”
“부담 갖지 마.”
상호는 태화의 갈팡질팡하는 시선을 알아차리고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네가 그걸 못한다고 해서 사건이 더 커지는 것도 아니고, 손해도 없어. 넌 그냥 한번 해보면 돼. 다치지도 않을 거야. 내가 무조건 네 옆에 붙어 있을 테니까. 어때?”
“어…….”
그렇게 말하니 시도해보는 것쯤은 별 상관없겠다 싶었다. 태화는 눈을 내리깔고 떠듬거리며 물었다.
“정확히…… 뭘 해야 하는데?”
“그냥 나랑 돌아다니면서 뭔가 악마 같은 사람을 찾아주면 돼. 내 다리 봤을 때랑 비슷한 느낌이 드는 사람. 그러면 내가 알아서 검사할 거야.”
“그냥 그거면 돼?”
“응.”
단둘이 돌아다닌다라. 태화는 옆에 앉아 있는 세희를 흘끗하고 상호에게 물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그치. 찾을 때까지는 그렇게 되겠지.”
“밥도 밖에서 쌤이랑?”
“응.”
태화에게는 꽤나 구미가 당기는 조건이었다. 힘든 것도 없이, 밖에서 온종일 상호와 같이 다니는 것뿐이라니. 게다가 외식까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그럼…… 할게.”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희의 눈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하지만 막을 명분은 없고. 따라갈 명분도 없고. 맘 같아서는 알바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상호는 바라지 않을 터였다.
상호는 그런 세희의 맘도 모르고 웃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준비하러 가자. 아, 세희는 다혜랑 먼저 들어가. 선생님 바로 일하러 가야 해서.”
“……네.”
세희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 * *
그렇게 사제 대신에 악마 융합체가 투입된, 악마 추적 2인조.
상호는 거리를 걷다가 옆을 돌아보았다.
“뭐해?”
“우웅…….”
태화가 관자놀이에 검지를 얹은 채로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말 시키지 마.”
“뭔데, 그게.”
“주변에 있는 악마의 기운을 읽는 거야.”
“그래?”
상호는 태화의 앞에 놓인 전봇대를 흘끗했다.
“그래도 앞은 보고 걸어야 되지 않을까?”
콰앙
“……크아악! 우씨, 쌤! 막아줬어야지!”
“너는 몸으로 배워야 기억하잖아.”
“이렇게 머리 박다가 뇌세포 다 죽어가지고 바보 되면! 응? 쌤이 책임질 거야?! 나 일 안 하고 놀고먹어도 되게 해줄 거냐구!”
“넌 이미 바보야.”
“크악!”
태화는 입에서 불을 뿜다가 붉게 물든 이마를 문질렀다.
“쌤, 쌤. 근데 있자나.”
“응.”
“악마가 사람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거잖아.”
“응.”
“피를 뽑아서 검사한다고 했잖아.”
“응.”
“그게 나 같은 악마 융합체면 어떻게 알아봐?”
“…….”
그는 당황해서 잠시 몸이 굳었다.
태화의 말이 맞다. 원래 악마 인자가 있으니 검사를 해도 구별할 수 없고, 악마 융합체들은 선천적으로 마나 친화력이 높으니 순간이동으로 도망도 잘 칠 터.
악마가 악마 융합체의 몸에 들어가면 그야말로 대참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기 전에 무조건 잡아야지.”
그게 최선이다. 상호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태화의 등을 두드렸다.
“진지하게 좀 찾자. 뭐 수천수백만 명 중 하나를 찾는 거지만…… 당장 여기에 있을 확률도 분명히 있으니까.”
“응.”
태화가 진지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태화는 곧 몸을 움찔하며 상호를 돌아보았다.
“……쌤.”
“뭐야, 찾았어? 어디야? 누구야?”
“아니, 아니……. 나 화장실.”
“……아.”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상호는 태화의 말을 듣고 얼굴을 붉혔다. 영락없이 악마를 찾은 줄 알았는데.
“그래, 갔다 오…….”
순간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장례식장의 화장실에서. 성연과 따로 떨어졌던 그 잠깐 사이에 일어났던 일.
“……아니, 아니다.”
“응?”
상호의 말에 태화가 당황했다.
“뭐야, 참아야 돼? 화장실도 막 가면 안 돼?”
“아니, 그게 아니고…….”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상호는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이 악마란 놈들은 원체 종잡을 수가 없고.
태화는 무조건 지켜야 하니까.
“……같이 가자.”
* * *
쏴아아……
변기 물 내려가는 소리를 뒤로하며.
상호는 태화와 함께 같은 칸에서 나왔다.
“…….”
“…….”
어색한 침묵.
함께 세면대로 다가가 수도꼭지를 틀자 태화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쌤.”
“……응.”
“나 시집 다 간 거 맞지?”
“……안 봤어.”
“소리 들었잖아.”
“……귀 막았어.”
“냄새 맡았잖아.”
“…….”
“책임져.”
이젠 그럴 수밖에 없게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누가 오기 전에 빨리 여자화장실에서 나가야 한다. 상호는 손을 털고 재빠르게 돌아섰다.
“가자. 나가자. 악마 잡으러…….”
“쌤은 오줌 안 싸?”
“……안 마려워.”
“시원하게 한 발 싸고 출발하지 그래? 그게 편하잖아.”
“난 하루 종일도 참을 수 있어.”
“그래? 그럼 어쩔 수 없구.”
태화가 상호의 곁에 찰싹 다가붙었다. 무언가 아쉬운 듯 입술을 삐죽 내밀며.
상호는 그런 태화와 함께 여자화장실을 나서며 속으로 결심했다.
‘오늘은 절대 물 마시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