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여고의 남선생-370화 (370/501)

<370화>

370. 사람의 빛

상호는 검을 뽑았다.

벨지 말지는 결정하지 못했으나 검부터 뽑았다. 검푸른 강기가 검을 휩싸고 맹렬하게 불타올랐다.

성연, 아니 악마는 그 불꽃을 바라보며 실그러지게 웃었다.

“죄 없는 이를 죽일 셈입니까?”

“넌 그 녀석이 아니잖아, 이 새끼야.”

초혼강기가 악마를 겨누었다.

“악마 주제에 인간인 척 흉내내지 마라.”

“이건 흉내가 아니지요.”

거리에는 아무도 없다. 악마는 상호의 주변을 둥글게 돌았다.

“나는 이 육신의 기억을 전부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기에 귀하가 지금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겁니다. 완벽하게 하나가 된 게지요. 혼연일체라 하던가요.”

성연의 손가락이 상호를 가리켰다.

“귀하도 참으로 보기 드문 걸물입니다. 속을 듯 말 듯 하더니 마침내 진실을 알아보는군요. 역시 우리의 신을 몰아붙인 이답습니다. 그러나 실은, 그마저도 부질없는 일이니…….”

가느다란 눈이 짓는 눈빛은, 명백한 비웃음.

“귀하는 내가 누군지도 모를 테니까.”

“네가 누군데?”

“귀하가 알 필요 없습니다.”

상호는 성연의 눈동자 너머로 살기를 쏘아 보냈다.

그의 머릿속에 베르멜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악마의 6요소. 야성, 신비, 욕망, 지배, 불사, 그리고 정체 모를 하나.

예상이 맞다면, 눈앞의 악마는.

“네가 지배의 악마냐?”

그 말에 성연의 눈이 살짝 커졌다.

“누가 말해 준 겁니까? 아, 하긴 물어볼 필요도 없지요. 혈마녀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나 보군요. 자, 내가 지배의 악마가 맞다고 칩시다. 그럼 어쩌시렵니까?”

“너.”

상호는 칼끝으로 성연의 얼굴을 겨눴다.

“본체는 아르게스에 있다 이거지?”

“귀하가 우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건 알겠습니다.”

악마가 웃었다.

“아르게스의 온 땅을 뒤져도 나를 찾진 못할 겁니다.”

“상관없어.”

상호의 손에 힘줄이 솟았다.

“네가 어디 있든 널 찾아낼 거다. 지배의 악마. 이 다섯 글자는 똑똑히 기억해서……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 찾아내서……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준다.”

“기대가 됩니다.”

성연의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또 모르는 일이지요. 귀하가 우리의 신을 몰아붙였던 것처럼 놀라운 기적을 보여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이거 하난 확실한 것 같군요.”

씩 웃는 성연의 눈에서 검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귀하는 이 인간은 구하지 못할 겁니다.”

“……!”

상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곧 성연의 코에서, 귀에서, 입에서 새카만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악마가 성연을 죽이려는 것이다.

상호는 무작정 손을 뻗었다. 더 생각할 겨를이 없어서.

화르륵……

검푸른 불꽃을 두른 손이 성연의 이마를 잡았다.

하지만 그뿐, 상호는 대체 어찌해야 성연의 몸에 있는 악마 인자를, 마음속의 악마를 몰아낼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무작정 내공을 불어넣었다가는 혈맥이 터질 게 뻔했다.

그의 손 아래에서 성연의 얼굴이 느긋한 웃음을 지었다. 칠공에서 검은 피를 흘리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지옥 끝에서.”

그 말이 끝나자 검은 피가 성연의 코와 입에서 확 쏟아져 나왔다.

후두둑……

상호는 피를 뒤집어쓴 채로 굳었다.

곧 성연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굳어 있던 상호는 황급히 성연의 몸을 잡아 천천히 바닥에 눕혔다.

검은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은 모습.

심장은 이미 뛰지 않았다.

“…….”

상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안 돼.’

이래서는 안 된다.

이런 세상은 잘못됐다.

옳은 사람이 죽는 세상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안 돼…….”

상호는 성연의 옆에 주저앉은 채로, 머리를 싸쥐고 앞으로 고꾸라지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이마가 성연의 명치에 닿았다.

싸늘한 겨울 공기에 주검이 빠른 속도로 식어가고 있었다.

* * *

성연의 시신을 협회 사람들에게 인계하고, 터덜터덜 걸어서 돌아온 학교.

상호는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욕실로 들어가 피 묻은 옷을 벗었다.

‘…….’

머릿속이 멍했다.

태화가 협회에 끌려갔을 때처럼. 죄 없는 이들이 고통받고 희생하는 이유로 번뇌에 빠졌을 때처럼. 그때는 그나마 사람들에게 화를 낼 수 있었지만, 악마에게는 화를 내도 소용이 없었다.

쏴아아……

샤워기가 몸에 묻은 피를 씻어내도,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죽은 아이. 그 아이에게 죽은 아버지.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여인. 지금까지 나온 희생자, 앞으로도 생길 희생자.

‘악마 놈들…….’

상호는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서 물을 맞았다.

간신히 다시 기운을 차리고 샤워를 마친 후, 옷을 입고 밖으로 나오자 자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아이를 잃은 여인의 표정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너희만은…….’

그는 아이들에게 다가가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나보다 먼저 떠나지 말아줘.’

그렇지 않다면, 더는 견딜 수 없을 테니.

상호는 다헤의 입에 물린 태화의 꼬리를 빼내고 세희의 옆에 누웠다.

‘……피곤하다.’

평소보다 더 늦은 시간이라 그럴까. 몸이 납덩이를 달아 놓은 듯 무거웠다. 눈꺼풀 또한 그랬다.

그는 눈을 감고 깊은 물에 빠져들듯 곯아떨어졌다.

* * *

다음 날 아침.

“크아앙…….”

“쿠울…….”

평소보다 늦게 자서 늦게 일어나 버렸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잠에 빠져 있었다.

상호는 한데 뒤엉킨 아이들을 바라보며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잘 지내는 것 같네.’

요즘 잘 챙겨주지 못해서 불안했는데, 세상 걱정 없이 자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오늘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성연은 죽었고. 악마 한 놈은 찾았지만 다른 놈들이 더 있을 텐데. 게다가 앞으로는 더 많아질 텐데.

앞날이 캄캄해서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일단 형이랑 이야기해봐야겠다.’

그는 한숨을 쉬며 현관을 나섰다.

* * *

“갔어?”

“응.”

“므앙.”

태화를 필두로 세희와 다혜도 고개를 들었다.

셋은 번개같이 침대에서 뛰쳐나와 신속하게 미리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었다. 하나같이 눈에 띄지 않는 검은색, 회색 일색이었다.

“야, 빨리 입어. 선생님 날아가신다고.”

“괜찮아, 쪼금은 늦어도 돼.”

태화가 핸드폰을 세희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화면에 뜬 것은 예현여고 일대의 지도와 빨간 동그라미.

빨간 동그라미는 빠른 속도로 예현여고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세희는 그 동그라미를 바라보며 눈을 끔뻑였다.

“이게 뭔데?”

“남편 감시 앱. 쌤 폰에도 미리 깔아 뒀지.”

“……나도 알려줘.”

“시른뒈에에~.”

“됐어. 빨리 가자고.”

둘은 앞다투어 현관을 나서려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주방에서 다혜가 다급하게 주머니에 먹을 것을 쑤셔 넣고 있었다.

“언니! 빨리 와!”

“아으아으아…….”

“돌아다니면서 사먹으면 될 거 아냐! 빨리 오라고! 늦는다고!”

“으, 므웅…….”

“아오, 진짜!”

결국 세희와 태화는 다혜를 붙잡고 현관을 나섰다. 양 팔을 붙들려 질질 끌려가는 다혜의 입에는 어묵과 바나나 따위가 가득 물려 있었다.

* * *

“여기야?”

“응. 아, 저기 있다.”

“우앙.”

세희와 태화, 다혜는 협회의 화단에 숨어 협회 입구를 훔쳐보았다.

상호가 협회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가고 있었다.

“바람피는 건 아니었네.”

“그러게.”

세희는 태화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협회의 입구를 살폈다.

“너 협회 와본 적 있어?”

“나? 난 자주 와봤지.”

“뭐 신분증 같은 거 필요한 건 아니지? 바로 들어갈 수 있지?”

“그럴걸? 아닌가? 지금은 모르겠넹.”

“들어가자.”

“므앙.”

셋은 상호가 너무 멀어지기 전에 뒤를 따랐다.

아직까지는 미행을 들키지 않은 듯싶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사람 속에 숨어서, 사람이 적은 곳에서는 거리를 많이 두고 핸드폰의 추적 앱에 의지했기 때문에.

다만 그 두 방법에도 한계는 있었다.

“야.”

세희는 저 멀리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상호를 바라보며 당황했다.

“엘리베이터 타시는데?”

“층수를 보고 따라가야지.”

“누가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알아? 안에 탄 게 한두 명도 아닌데…….”

“오~케이. 이번에야말로 텔레파시를…….”

“바보짓 하지 말고 방법이나 생각해. 그거 높이 같은 건 안 나와? 마법으로 어떻게 안 돼?”

“안돼!”

“쓸모없는 년…….”

“아!”

태화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딱 알았어. 어디로 가는지.”

“진짜? 또 텔레파시 이X랄 하는 거 아니지?”

“아니야! 이번엔 진짜야. 뭐 내 감이긴 한데…… 그래도 내가 니보단 쌤에 대해서 잘 아니까.”

“X랄 맞네.”

“야야야, 손 내려! 안 내려?! 신고한다!”

개소리만 하니 안 팰 수가 있나. 세희는 태화를 패려던 손을 내리고 혀를 찼다.

“그래서 어딘데.”

“와봐. 아니, 아니, 잠깐만.”

태화는 어디론가로 걸어가려다가 우뚝 멈춰서 세희를 돌아보았다.

“근데 너 날 수 있냐?”

* * *

“그 친구가 악마였어.”

상호는 도현의 집무실 소파에 앉아서 중얼거렸다.

“화장실에 쓰러져 있던 애 아버지 몸에…… 악마가 계속 들어 있었던 거지. 상처로 악마가 빠져나간 다음에 쓰러진 게 아니었던 거야. 내가 창문으로 나가니까 그때 일어나서 그 녀석에게 들어간 거고.”

“방심했구나.”

의자에 앉은 도현이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악마를 쫓는 게 우선이어서 쫓았고, 그 친구는 사람을 살리는 게 우선이라 살리려 했고…… 결국은 넌 있지도 않은 악마를 쫓았고, 그 친구는 사람이 아닌 걸 살리려 했다, 이 말이지?”

“응.”

“사람이 한 명만 더 있었어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내 불찰이다.”

도현의 말에 상호는 멍한 눈으로 창가를 돌아보았다.

“……누가 상상했겠어. 그렇게 낚일 줄.”

둘이면 충분할 줄 알았다. 전투든 치료든. 하지만 악마는 그 틈을 파고들었다. 셋이 아니라 둘이라는 점을.

결국은 보기 좋게 당해 버렸다.

“내가…… 우리가 너무 자만했던 것 같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상호는 눈을 지그시 감고 말을 이었다.

“더 철저하게 예상하고 대비해야 했어.”

“이미 일어난 건 어쩔 수 없지. 너무 자책하지 마. 그래도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다.”

“……뭐?”

상호에게는 그 말이 아주 이상하게 느껴졌다. 여러 사람이 죽고 협회 최고 신앙인까지 죽었는데. 애초에 끝도 아니고.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죽으면 안 될 사람이 죽었는데 다행이 어디 있어?”

“아, 너 아직 모르는구나.”

도현이 입맛을 다셨다.

“그 친구, 이성연. 살아 있어.”

“……뭐?”

상호의 눈이 퉁방울만해졌다.

분명 심장이 멈춘 걸 확인했는데. 심지어 그렇게 피를 흘렸는데도 살아있다니.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무슨 소리야? 분명…….”

“우리 치료사도 죽은 줄 알았다는데…… 잠깐 한눈판 사이에 갑자기 살아나 있었다더라. 아직 일어나진 못했지만.”

“……갑자기?”

“기적 같은 게 아닐까? 몰라. 신앙인은 뭔가 다를지도.”

산 넘어 산이니 첩첩산중이라. 상호는 도대체가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살았다니 다행이긴 한데.

“일어나질 못하고 있다는 건…… 악마 인자 때문인 것 같네.”

“그렇겠지.”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시야에 잡힌 무언가가 상호의 의식을 훅 파고들었다. 도현의 뒤쪽, 통유리창의 맨 아래 부분에 튀어나온 두 개의 빨간 뿔.

“…….”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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