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화>
367.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우씨…….”
아침부터 태화가 입을 삐죽거렸다.
“쌤 또 어디 갔어?”
“그런가 본데.”
세희는 밥을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나 일어났을 때도 이미 안 계셨어.”
“어딜 이렇게 돌아다니는 건지…….”
태화는 뒤통수를 벅벅 긁다가 눈을 번쩍 떴다.
“딴 살림 차린 거 아냐?!”
“그럴 리가.”
“왜 그렇게 태연해? 너 뭐 알고 있지! 나 몰래 쌤이랑 이따가 만나기로 한 거 아냐?!”
“아으!”
태화의 말에 다혜가 빵을 흔들며 맞장구를 쳤다. 죽이 척척 맞는 둘을 바라보는 세희의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
“그랬으면 좋겠네. 빨리 밥이나 먹어. 나 알바 가니까 설거지는 둘이서 해.”
“쌤이 밖에 나가지 말랬잖아.”
“알바는 조심해서 다녀오랬어.”
태화는 세희가 차린 밥상이 영 맘에 들지 않는 듯 숟가락만 깨작거리다가, 곧 찬장으로 달려가 햄을 꺼내서 굽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세희가 분통을 터트렸다.
“야, 먼저 먹어야 할 게 있으니까 이걸 먼저 먹으라고! 니 먹고 싶은 것만 먹으면 이건 누가 치우는데!”
“스햄 볶음밥을 잘 만드는 남자~.”
“야!”
“난 그런 남자가 좋더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햄을 굽던 태화는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세희를 홱 돌아보았다.
“야, 요즘 묻지마 살인범 있잖아.”
“어.”
“그거 우리가 잡아볼까?”
“뭐?”
세희는 자신이 뭘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걸 우리가 왜 잡아?”
“우리 쫌 강하기도 하고, 할 일도 없어서 심심하잖아. 쌤은 맨날 어디 나갔다가 늦게 돌아오고…….”
“할 일을 찾아, 바보야. 알바를 하든가.”
“그리고 딱 잡아서? 경찰에 넘기고? 표창장 받고? 쌤한테 자랑하면?”
“위험하게 무슨 짓이냐고 엄청 화내시겠지.”
“그치만 헌터가 원래 위험한 직업인데?”
태화가 햄 뒤집던 뒤집개를 치켜들었다.
“난 사람을 구할 거야!”
“그래. 니 알아서 해. 근데 선생님한테 말 안 하고 그런 짓 했다가는 다음 뉴스에 너랑 선생님이 나오게 될걸.”
“Y여고 남선생, 제자와 부적절한 관계 들통나…….”
“Y여고 남선생 제자 폭행치사 후 자수겠지.”
세희는 혀를 차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선생님 피곤해 보이시던데 괜히 일 벌리지 마. 심심하면 언니랑 놀든가.”
“언니랑 놀라고? 야, 이거 봐봐.”
태화는 가스레인지를 끄고 다혜를 향해 다가갔다.
“언니, 언니. 가위바위보.”
“므아?”
“가위, 바위, 보!”
그러자 다혜는 검을 허공섭물로 끌어와 뽑아서 치켜들었다. 이게 제일 강하니까 내가 이겼다는 듯이.
“아으!”
“……이런 바보하고 뭘 하고 놀아!”
“그건 니가 생각해야지. 어쨌든 난 알바 간다.”
“X불뇬…….”
태화의 입술이 댓 발 튀어나왔다.
“아~. 쌤 오면 찐~하게 뽀뽀나 해줘야겠다. 근데 쌤은 뭐 때문에 피곤해하는 거지?”
“선생님한테 물어는 봤어?”
“물어봐도 말 안 해주던데. 너는 아냐? 넌 뭐 쌤이랑 비밀 같은 거 없다매?”
“나도 몰라.”
“수제자 별거 없네~.”
“난 안 물어봤거든. 선생님이 말 안 해주는 건 이유가 있을 테니까.”
알아야 하는 이야기였다면 당연히 알려줬을 것이다. 그게 아니니까 지금까지 말을 해주지 않는 것이고.
세희는 새침하게 태화를 흘겨보고는 외투를 챙겨 현관으로 향했다.
“난 선생님 믿는데 넌 못 믿나 봐? 난 갈게. 잘 있어.”
“퉤.”
태화는 침 뱉는 시늉을 하고는 햄을 구웠던 가스레인지로 갔다가, 프라이팬이 텅텅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눈을 부릅떴다.
“아니 X바! 언제 가져갔어!”
“앙냠냠~.”
* * *
“휴가가 길군.”
“포상휴가를 받았죠.”
“포상?”
“치명상이라고 부르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고생이네.”
상호는 시큰둥하게 답하고 거리를 걸었다. 뒷짐을 진 손에 검을 든 채로.
옆에서는 청년 사제가 태블릿 PC를 만지작거리며 걷고 있었다.
“얼마나 더 가야 되는 거야?”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그런데 좋은 직장 다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왜 차가 없으십니까?”
“……사연이 길어.”
상호의 차는 효은이 가져갔다. 자기 차는 비싸서 시골에 갖다놓으면 눈에 확 띈다는 이유로.
어차피 걸어다니면서 골목을 순찰하는 것도 도움이 될 테니, 효은에게서 차를 받았더라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둘의 걸음은 한 아파트 속 현관 앞에서 멈췄다.
“여깁니다.”
사제는 그렇게 말하며 초인종을 눌렀다.
한참이 지난 후 초인종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신고 받고 왔습니다.”
[아, 잠시만요.]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나타난 이는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오늘은 외출할 생각이 없었던 듯 맨얼굴에 머리를 말아 올린 채였다. 그리고 지나치게 가벼운 옷차림.
사제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물었다.
“범인으로 의심 가는 사람이 있다구요.”
“네, 네.”
“누구죠?”
“윗집이요.”
여인이 팔짱을 끼고 검지로 위를 가리켰다. 콕콕 찌르듯이.
“맨날 밤늦게 돌아다니고, 한밤중에 샤워를 해서 사람 깨게 만들고…… 눈빛도 이상해요. 말수도 적은 게 꼭 사이코패스 살인마 같아요.”
“…….”
사제는 고개를 뒤로 돌려 상호에게 당황한 눈빛을 보냈다. 아무래도 단순한 층간소음 문제 같았다.
“그것 말고…… 무언가 더 이상한 점은 없었나요?”
“그냥 딱 보면 알아요. 엄청 수상해요. 제 말 믿고 딱 한 번만 올라가서 보세요.”
“……알겠습니다.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제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서려 했지만, 여인은 오히려 문을 활짝 열고 사제와 상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런데 왜 신부님이 살인범을 쫓아요? 모양은 무슨 퇴마사 분들 같은데…….”
“아……하하. 조금,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는 거지요.”
여인이 입술을 살짝 핥았다.
“안에서 천천히 이야기 듣다 갈래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일이 바빠서.”
사제는 손사래를 치고 문을 밀어붙여 닫았다.
한숨 돌린 둘은 위층으로 향하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둘이 올라서고 문이 닫히자 사제는 무언가 생각난 듯이 상호를 돌아보았다.
“한 층인데 그냥 계단으로 올라가면 됐던 거 아닙니까?”
“습관이 됐어.”
건물에서 돌아다닐 일이 있으면 엘리베이터부터 찾는 게 상호의 습관이었다.
짧은 이동 후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둘은 아래층에서 갔던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 같은 위치의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늦게 돌아다닌다고 했으니…… 지금은 자고 있겠네요.”
사제는 상호를 흘끗했다.
“돌아갈까요? 악마일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겠지만 피는 채취해야지.”
악마일 가능성이 5천만분의 1이라도 분명히 존재하고. 피를 채취해 놓으면 다음에 사건에 연루될 때도 도움이 될 테니.
상호가 초인종을 꾹 누르자 사제가 눈을 끔뻑였다.
“그거 세게 누른다고 초인종이 크게 울립니까?”
“총도 방아쇠 세게 누르면 세게 쏴져.”
사제의 눈이 퉁방울만해졌다.
“진짜요?”
“……일단 네가 과학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알겠네.”
“저는 교단에서는 꽤 진보적인 쪽…….”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딱 봐도 자다 깬 꼴. 화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나타난 사내는 검을 든 상호를 보고 움찔했다.
“뭐, 뭐예요?”
“조사차 나왔습니다.”
사제가 사람 좋게 웃으며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냈다.
사내는 부스스한 머리를 긁으며 그 신분증을 읽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괴렵협회? 헌터들이 무슨 일로…….”
“연쇄살인사건을 조사하느라 민간에서 피를 채혈하는 중입니다. 협조해 주시겠습니까?”
사내는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사제의 뒤에 서 있는 상호가 무서워서 강하게 내쫓지 못했다.
그래도 하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그거 꼭 해야 해요?”
“지금 안 하시면 나중에 강제로 당하실 수도 있으십니다.”
“그럼 지금도 강제인 거지, 쯧…….”
사내는 툴툴거리며 소매를 걷었다.
자발적으로 피를 내어주는 시점에서 악마가 아닌 건 기정사실. 사제는 안심하고 주머니에서 작은 채혈도구를 꺼내 사내의 피를 뽑았다.
상호는 그 모습을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다 됐습니다.”
역시나 연기는 피어오르지 않았다.
사제는 사내의 팔을 소독하고 반창고를 붙였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예.”
짤막한 대꾸를 끝으로 문이 쾅 닫혔다.
좋은 대우 받기는 힘들 일이다. 사제는 쓰게 웃고 상호를 돌아보았다.
“가지요. 다음 신고자한테.”
* * *
“아니 누가 그런 신고를 해요?!”
빽 지르는 소리가 고막을 뚫어버릴 듯했다.
사제는 진땀을 흘리며 뒤를 흘끗했다. 상호는 시끄러운 소란을 피해서 난간에 기대어 한가롭게 경치를 구경하는 중이었다.
도와주지 않는 게 야속했지만, 어쨌든 상호는 협회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 우리도 신고할게. 그 인간이 누군데요? 그 자식이 더 수상한데? 우리가 뭘 했다고 조사를 받아야 돼요?!”
뒤에 칼을 찬 사람이 있는데도 여인은 기세를 죽이지 않았다. 가끔 이렇게 겁 없는 사람들이 있곤 했다.
사제는 고개를 푹 숙였다.
“피만 뽑으면 됩니다. 간단하게…….”
“나가요! 그 새끼부터 조사하고 오든가!”
“잠깐, 잠깐만…….”
닫히려는 문을 사제의 손이 가까스로 부여잡았다.
이런 일은 익숙하다. 욕을 듣는 건 별일 아니었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악마가 죄 없는 시민들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래서 해야만 했다.
“저기, 조금이면 됩니다. 피 조금만…….”
“이거 놔요. 닫는다? 닫는다고!”
여인은 사제를 확 밀치고 문을 닫으려 했지만, 사제는 문을 놓지 않았다. 여인이 문을 당기자 사제의 손가락이 찧이려 했다.
그때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문을 턱 잡았다.
“응?”
여인의 눈이 퉁방울만해졌다.
보이지 않는 힘은 곧 문을 강제로 열고는, 여인과 집 안에 있는 가족까지 꺼내서 일렬로 정렬시켰다.
“윽……!”
여인과 남편은 당황했고, 어린 사내아이는 울먹거렸다.
하지만 상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사제에게 손을 내밀었다.
“줘.”
사제는 눈치껏 채혈기를 꺼냈다.
채혈기를 받아든 상호는 순서대로 피를 뽑기 시작했다. 말없이. 조용히.
“으응…….”
무거운 공기가 일가를 짓누르자 아이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여인과 남편의 채혈을 끝낸 상호는 몸을 숙이고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며 바늘을 꽂기 시작했다.
바늘이 아픈지, 상호가 무서워서인지. 아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악마의 속임수일 수도 있으니.
“다 됐다.”
연기는 피어오르지 않았다.
악마 인자는 없다. 상호는 그걸 확인하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해.”
아이는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지켜야 할 아이들이 있었으니. 상호는 돌아서서 문을 나섰다. 그가 문을 닫을 때까지 일가는 꿈쩍도 않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상호가 문을 닫자 사제가 상호의 등을 토닥였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괘념치 마세요.”
“딱히 힘들어하는 건 아닌데.”
상호는 피가 담긴 통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이 짓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
“정의는 변하는 겁니다.”
사제는 상호의 손에서 피 담긴 통을 가져갔다.
“사람들은 정의는 안 변하고 사람의 마음이 변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정의는 변할 수밖에 없고, 사람의 마음이 변하지 말아야 하지요. 사람이 사람을 위하는 마음이.”
정의는 변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변하고, 마음은 변하지만 변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죄 없는 이들을 핍박하는 게 귀하에게 어려운 일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
“…….”
“어쩔 수 없다는 변명도 싫겠지요. 그래도 우리는…… 사람을 구하는 일을 멈추면 안 됩니다.”
사제는 상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가지요. 다음 신고자한테.”
“……그래.”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떼었다. 발이 아무리 무거워도 멈추지 않겠다 다짐하며.
다만 사람을 베어야 할 일은 오지 않기를. 마음으로 빌고 또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