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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여고의 남선생-366화 (366/501)

<366화>

366. 악마 추적

남쪽의 겨울은 따뜻했다.

아직 이 마을에 온 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듣기로는 눈이 오지 않는다는 것 같았다. 마루에 앉은 혜소는 보리차를 홀짝이며 회색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도 무언가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넌 왜 하늘만 보고 있냐.”

누군가가 옆에 다가와 앉았다.

옆을 돌아보니 효은이 고구마가 담긴 쟁반을 내려놓고 있었다.

“네 나이면 동네 똥개들 꼬랑지 잡으면서 놀아야지, 뭔 세상 다 살아본 인간처럼 하늘을 보고 있어.”

“그러게요.”

“오빠가 애를 아주 버려 놨구나.”

“헤헤.”

혜소는 빙긋 웃고 보리차를 한 번 더 홀짝였다.

효은이 가져온 고구마는 크기가 작았다. 노파가 옆집에서 남은 것을 얻어 온 것이었다. 그래도 혜소가 가볍게 간식으로 먹기에는 딱 좋았다.

“김치는 안 드세요?”

“너도 고구마에 김치 먹냐? 아니 왜 김치를 먹지? 동치미 국물이면 어떻게든 이해를 하겠는데…….”

“같이 드셔 보세요. 맛있어요.”

“난 모르겠다.”

효은은 혀를 내두르고는 마루에 드러누웠다.

역시 김치가 있으면 좋겠다. 혜소는 고구마를 입에 문 채로 주방에 달려가 김치를 찾다가, 결국 어디 있는지 찾지 못해서 노파가 있는 안방의 문을 열었다.

“할머니.”

“으응?”

“김치 어디 있어요?”

“김치?”

침대에 누워 있던 노파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기다려 봐라. 옆집 김할매한테서 뜯어오마.”

“……아녜요. 그냥 물어봤어요.”

혜소는 노파를 말리다가 TV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화면에는 양복을 입은 사람 여럿이 심각한 표정으로 토론을 하고 있었다. 혜소가 TV에 시선을 고정하자 노파가 말했다.

“또 누가 죽었댄다.”

“그새요?”

“이번에는 어린애라는구나. 살날이 창창한 아이를……. 천벌을 받을 놈들.”

노파는 혀를 차고 채널을 돌렸다. 아이가 보기에는 너무 잔인한 이야기라고 생각한 듯했다.

혜소도 제 또래가 죽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디서 있었던 일이래요?”

“서울인가…….”

노파는 그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지 않은 듯했지만, 그래도 혜소가 물으니 대화는 이어 주었다.

“윗지방에서나 떠드는 이야기다. 여기까지 오지는 않을 게야. 너는 괜한 걱정 말아라.”

“네.”

노파에게는 그렇게 대답을 했지만, 나름대로의 대비를 해 두고 싶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온 혜소는 효은을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고모, 염주 재료 사주세요.”

* * *

또 한 명이 죽었다. 이번엔 어린아이.

사건 현장은 건물 뒤 외진 골목. 골목의 입구에는 경관과 형사, 기자들이 한데 섞여 있었다.

그런 이들 사이로 파고드는 한 쌍의 사내들.

한 명은 눈이 가늘고 사제복을 입은 청년. 다른 한 명은 기다란 장대를 들고 양복을 입은 사내.

양복을 입은 사내가 손을 양옆으로 휘저으며 인파를 갈랐다.

“지나가겠습니다.”

그 뒤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사내를 따랐다. 경찰복과 비슷하지만 온통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허리춤엔 짧은 칼.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가 그들이 헌터 경찰, 그것도 강력계 헌터 경찰임을 알아보고 길을 내주었다.

경관 몇이 그들을 슬쩍 막아섰다.

“신분증 한번 보여주시겠습니까?”

경관의 말에 양복 입은 사내가 신분증을 꺼냈다.

헌터 협회의 부협회장, 서도현.

“감사합니다.”

경관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그들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골목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 작은 몸에서 어찌 저렇게 많은 피가 나왔는지 궁금할 정도로. 도현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고 다시 안쪽으로 걸어갔다.

작은 시신이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손대지 않았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잘했습니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옆을 돌아보았다. 청년 사제가 시체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사제는 황금빛이 감도는 손으로 아이의 몸을 쓸다가, 역시 틀렸다는 듯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도현은 그 모습을 보고 헌터 경찰들에게 명령했다.

“채취하세요.”

“예.”

헌터 경찰 한 명이 다가와 주사기로 아이의 피를 채취했다. 그리곤 주머니에서 시험관 같은 것을 꺼내 그 안에 주사기의 피를 넣었다.

시험관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반응합니다.”

“오케이.”

도현은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고 헌터 경찰들 중 한 명을 가리켰다.

“정령은?”

“도망쳤습니다. 사건을 본 아이들이 없어요.”

“마나의 흔적은?”

“없습니다. 순수하게 육탄전으로 싸운 것 같습니다.”

“그런가.”

도현은 낮게 중얼거리며 다시 한번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이번에는 손가락에 내공이 실려 있었다.

내공의 파동이 골목 사이에 울려 퍼졌다.

쿠웅……

건물 위쪽에서 둔중한 소리가 들렸다. 당황한 일반 경관들이 허둥지둥 무기를 꺼내려 했지만, 이어진 도현의 말에 금방 평정을 되찾았다.

“놀라지 마세요. 제가 부른 겁니다.”

그 말이 끝나자 한 인영이 홀연히 그늘 아래에 나타났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모자를 푹 눌러쓴 사내. 허리춤에는 헌터 경찰들의 것보다는 약간 긴, 그러나 키에 비해서는 짧은 검을 차고 있었다.

사내는 모자를 더욱 푹 누르고 도현에게 다가왔다.

“조사했어?”

“응.”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맡을 사건이야.”

“그럼 사람들을 좀 물려야겠는데.”

상호는 한쪽 눈으로 일반 경찰들을 둘러보았다.

악마에 관한 이야기는 새어 나가서 좋을 것이 없었다. 사람들에게 새어 나가든, 악마들에게 새어 나가든. 최대한 극비리에 추적해야 최소한의 피해로 악마를 잡아낼 터였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일반 경찰들에게 말했다.

“이제 저희가 맡겠습니다. 경관 분들은 계속 입구에서 통제해 주세요.”

“예.”

경관들은 고개를 숙이고 골목 밖으로 나갔다.

상호는 피에 흠뻑 젖은 아이의 시신을 둘러보다가 청년 사제와 눈이 마주쳤다.

“많이 바쁘구만.”

“놀랍게도 지금 휴가를 나와 있는 겁니다.”

“고생이군.”

“교인이면 당연히 휴일에도 자원봉사를 해야지요.”

청년은 눈을 감았다.

“어떻게 보십니까?”

“글쎄…….”

상호가 뒷짐을 지고 시체 주변을 둥글게 걷기 시작했다.

“일단…… 악마가 인간의 몸을 갈아타고 있다. 이건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이지?”

“그렇죠.”

청년과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희생자의 주변에서는 꼭 다른 이의 혈액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다른 이는 꼭 다음번에 희생자로 발견되었고.

아마도 목표로 한 육신에 상처를 내서 그 혈관 속으로 타고 들어가는 것. 이제는 피를 매개로 육신을 옮겨 다닌다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우리가 악마라고 상상해 보자.”

“교인으로선 거북한 상상이군요.”

“나는 적군의 진영 속으로 들어가 혼란을 조장해야 한다.”

상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둥글게, 둥글게 걸었다.

“혹은 적군의 수장을 죽이거나 그 근처에 다가가 정보를 얻어내야 한다. 그러려면 강한 인간의 몸으로 갈아타야 선택의 폭이 늘어나겠지.”

“그렇죠.”

청년의 실눈 사이에서 눈동자가 옆으로 굴러갔다.

“굳이 아이의 몸을 거쳤다는 건…….”

“인간의 몸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 라는 거겠지.”

급해서 아무거나 처먹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이의 몸으로 갈아탔고…… 또 다른 몸으로 갈아타기 위해 약한 몸으로라도 혈투를 벌였다. 이런 이야기가 되는군요.”

“그래.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빙의가 풀린다거나. 빙의체가 죽는다거나. 혹은 악마의 형질이 발현해서 인간의 모습을 취할 수 없게 된다거나…… 어떤 이유로든, 놈들은 언젠가는 다른 사람의 몸으로 갈아타야 하는 거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게 함정이라면?”

모자의 그늘 속에서 상호의 눈이 번득였다. 살기로 느껴질 만큼 날카롭게.

“우리를 착각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아이의 몸으로 갈아탄 거라면?”

“그래서 얻는 이득이 뭘까요?”

“모르지.”

하지만 상대는 악마. 그 무엇도 알려지지 않은 존재.

가장 강한 인간도 가장 약한 악마를 죽일 수 없다면.

가장 멍청한 악마가 가장 똑똑한 인간을 속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나보다 똑똑한 양반들이 고민해야지. 어쨌든 지금 당면한 문제는 이놈을 찾는 거잖아?”

상호의 말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어떻게 찾지?”

아무도 쉬이 답을 내놓지 못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상호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갈아탄 빙의체의 피를 찾는다 해도…….”

“그 사람이 누군지를 찾기는…… 힘들지.”

이 골목 주변을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검사할 순 없으니.

도현은 입술을 잘근거리다가 말했다.

“그래도 이만한 혈투라면 피가 묻을 수밖에 없었을 테니…… CCTV를 확인하면 성과가 있을지도.”

하지만 상호는 비관적이었다.

“난 이놈들이 이미 인간 세상에 통달한 것 같아. 어쩌면 인간보다 더…….”

인간의 사각을 파고드는 놈들. 이미 CCTV에 대한 지식은 습득이 끝났을 테고, 백주대낮에 피가 묻은 옷을 입고 돌아다녀도 의심을 받지 않을 정도로 심리를 꿰뚫었을지도 모른다. 모종의 방법으로 피를 씻어냈을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사람들한테 당신들 중에 악마가 섞여 있소, 했다가는 그걸 이용하는 사람들이 생기겠지. 평소에 싫어했던 사람을 얼씨구나 죽여 버리고 악마인 줄 알았다고 입을 씻어 버리거나, 사이비 종교를 만들고, 믿고…….”

“그거야말로 악마들이 원하는 세상이겠죠.”

“그렇지.”

시민들의 도움은 받을 수 없다.

도현이 한숨을 푹 쉬었다.

“지금으로서는…… 평소랑 뭔가 다른 사람을 신고하고, 절대 혼자서 다니지 말고, 웬만하면 항상 셋이서 다녀라…… 라고 알리는 수밖에.”

상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악마들을 얼른 찾아내지 않으면 자신의 제자들, 지인들까지 해를 입게 될 터였다.

‘얼른 찾아서 해치우는 수밖에…….’

그는 그렇게 결의를 다지며 골목 출구를 향해 돌아섰다.

“그럼 조사하고…… 결과 알려줘, 형. 찾기 힘들다 해도 노력은 해 봐야겠지.”

“그래.”

도현은 멀어지는 상호에게 손을 흔들었다.

밖을 향해 걷는 상호의 옆에 사제 청년이 다가와 나란히 걸었다.

“영웅 헌터님.”

“……이름으로 불러.”

“인간과 악마의 차이가 뭔지 아십니까?”

상호는 고민하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청년을 돌아보았다.

“뭔데?”

“퀴즈가 아니라 제가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

“……쳇.”

그런 거였나. 그는 혀를 차고 돌아섰다.

“내가 어찌 알아.”

악마가 인간 행세를 하며 돌아다닌다고는 했지만, 사실 악마의 입장에서는 딱히 그러고 있진 않을지도 몰랐다.

구태여 행세를 하지 않아도, 알아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런 거 궁금해할 시간이 있으면 어떻게 잡을지나 고민해. 쓸데없는 생각에 낭비하지 말고.”

“예. 노력해 보죠.”

청년은 쓰게 웃고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서 다시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의 밖에 다다르자 기자들이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상호는 모자를 더욱 푹 눌러썼다. 아무도 자신이 요즘 뜨는 요튜브 스타임을 모르게.

다리를 고쳐서 이목을 끌지 않는 게 참으로 다행이었다.

만약 안 고쳤다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도 하기 싫네…….’

그는 혀를 차고 사람들 사이를 지나 골목 앞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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