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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여고의 남선생-362화 (362/501)

<362화>

362. 재회

“으음…….”

눈을 감은 태화의 뒤에서 꼬리가 요동쳤다.

“으으음…….”

“뭐하냐?”

“말 시키지 마.”

“뭐?”

지는 남이 운기조식 할 때 쫑알쫑알 떠드는 주제에. 세희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태화의 꼬리를 잡아챘다.

태화의 몸이 번개를 맞은 듯 움찔했다.

“악! 왜! 집중하고 있다고!”

“너도 나 집중할 때 이러잖아. 그래서 뭐 하고 있는데.”

“텔레파시.”

“……텔레파시?”

“쌤이랑 나는 연결되어 있걸랑.”

태화는 양손의 검지와 중지로 양쪽 관자놀이를 짚었다.

“몸과 영혼은 불가분. 쌤과 나는 몸을 섞었으니 영혼도 섞인 관계가 되는 거지.”

“…….”

세희는 개소리를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꽈악

“으기기긱!”

“그딴 거에 시간 낭비하지 말고 애들한테 문자나 돌려. 내일까진 찾아야 할 거 아냐.”

내일은 설날.

세희도 모처럼 알바를 쉬고 상호와 놀려고 했는데, 가출해버려서는 코빼기도 보이질 않으니. 속은 타는데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세희와 태화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떡국 먹방 해야 하는데…….”

“한복 은호 먹방 해야 하는데……. 야, 천세희. 너도 텔레파시 한번 해봐. 쌤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 보라고. 언니도 눈만 끔뻑~ 끔뻑거리지 말고!”

“므앙.”

다혜가 눈을 감았다가 번쩍 떴다.

“으아으!”

“뭐야. 뭔가 느껴졌어?”

그러더니 쪼르르 달려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으아~.”

“배고픔이 느껴졌던 거였구만.”

태화는 혀를 차고 다시 검지와 중지를 모아 관자놀이에 붙였다.

참 쓸데없는 짓만 골라서 한다. 세희는 혀를 차며 돌아섰다.

돌아서며 눈을 감는 순간.

“……윽!”

“응?”

태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왜 그래? 뭐 느꼈어?”

“……아니.”

세희는 당황하며 눈을 문질렀다.

방금 눈꺼풀 속에 떠올랐던 광경은 분명.

‘혜소랑…… 수녀님…….’

둘의 자는 모습.

헛것을 본 걸까. 하지만 너무 선명했다. 스쳐지나간 것이 아주 잠깐이었더라도.

세희는 그 광경을 멍하니 곱씹다가 털어내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착각이겠지…….’

상상일 뿐이다.

말도 안 되는 고민에 시간을 낭비할 이유는 없다. 세희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냉장고를 향해 걸어갔다.

“언니, 그거 내가 먹으려고 사온 건데.”

“므아?!”

“아니, 먹어. 근데 내일 아침은 안 줄 거야.”

“아으으아으아…….”

“제발 좀 물어보고 먹어. 입에 넣고 생각하지 말고.”

“꾸웅…….”

* * *

“…….”

혜소는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끼어 눈을 끔뻑였다.

혜소에게 등을 돌린 채로 침대에 걸터앉은, 어른으로 돌아온 상호.

그리고 마찬가지로, 상호의 반대편에 등을 돌린 채로 걸터앉은 효은.

둘은 동시에 일어났는데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바보들.’

혜소는 한심해하는 눈빛으로 상호와 효은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자신보다 서너 배 더 나이를 먹었으면서 하는 짓은 왜 더 어린지.

“혜소야.”

상호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혜소를 돌아보며 물었다.

“내일부터 설 연휸데. 어디 놀러 갈래?”

“고모랑 화해하면요.”

“고모? 고모가 어딨어.”

“지금 코앞에 있잖아요.”

“내 눈엔 안 보이는데?”

그때 침대 옆 탁자에서 상호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침부터 누구일까. 아마 아이들일 것이다. 상호가 그렇게 예상하며 핸드폰을 집으려는데 효은이 먼저 핸드폰을 낚아챘다.

“……흠.”

효은은 화면을 확인하고는 군말 없이 상호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꼭 꼴이 다른 여자한테 연락이 왔는지 확인한 것 같았다.

‘언제는 상관없다면서…….’

안 놀아주니까 없던 질투심이 생겼나.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화면을 확인했다.

전화를 건 이는 도현이었다.

“어, 형.”

[야, 상호야.]

어리둥절한 목소리였다.

[네가 저번에 찾아달라고 했던 분 있잖아. 영주네 할머니.]

“아……, 어. 왜?”

[찾은 것 같다.]

“……뭐?”

상호는 눈을 끔뻑이다가 옆을 돌아보았다.

통화를 들은 혜소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 * *

“여기예요?”

혜소가 차창에 손바닥을 얹은 채로 바깥을 내다보며 물었다.

부서지기 전처럼 멀쩡해진 대문과 돌담. 아니 오히려 한 번 부쉈다 고치니 이전보다 좀 더 말끔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땐 다 쓰러져 가던 집이었으니. 상호는 담 옆에 차를 세우며 대답했다.

“응.”

“여기에 거사님 할머니께서 살고 계셔요?”

“그랬는데 잠깐 어디 가셨다가 오늘 오신 모양이네.”

연휴 직전이라 차가 밀리는데다 남해 끝까지 달려오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른 아침에 출발했는데도 점심때가 지나 있었다.

상호는 차 밖으로 나와 대문으로 다가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차에서 혜소만 내리고 효은이 내리질 않아서.

‘참나…….’

휴게소에서 혜소 먹을 아이스크림만 챙겼던 게 그리도 꼬왔던 모양이다. 그는 혀를 차고 내공을 움직였다.

혜소의 두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어, 어…….”

두둥실 떠오른 혜소는 다리를 조금 버둥거리다가, 이내 조수석 문 앞까지 날아오자 상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니가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라는 듯.

“아저씨.”

“……열어 줘.”

“에휴…….”

혜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문을 열었지만, 조수석에서는 아무도 걸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상호는 분통을 터트리며 조수석으로 다가가 효은을 끌어냈다.

“야, 아이스크림 하나 가지고 언제까지 꽁해 있을 거야!”

“…….”

“갈 때 사주면 될 거 아냐! 니가 애야? 안 놀아줘서 삐지고, 아이스크림 안 사줘서 삐지고……. 빨리 나와. 놀러 온 거 아니라고.”

“…….”

“하아…….”

한숨을 쉬어도 묵묵부답. 효은은 인형처럼 앉아만 있었다.

반쯤 감은 눈으로, 무심한 눈빛으로 정면만 응시하는 모습. 아주 단단히 삐친 듯했다.

상호는 그 차가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슬쩍 입술을 가져갔다.

짜악

“아이씨…….”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따귀. 그는 볼을 부여잡고 투덜거리며 대문으로 걸어갔다.

“몰라. 너 알아서 해. 여기 있든 말든.”

그러자 차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효은이 당당하게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청개구리가 따로 없군…….’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효은에게 말했듯이 그는 이곳에 놀러 온 게 아니었다. 단순히 명절 인사를 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고, 혜소에게 영주의 할머니를 만나게 해주기 위해서만도 아니었다.

부고를 전해야 했다.

‘춥네.’

그는 입맛을 다시며 대문을 열었다.

마당은 휑했다. 집도 휑해 보였다. 폐가로 착각하고 들어왔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외벽에 보이던 잔금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계세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루를 넘어 큰방으로 들어서는데 싸늘한 냉기가 발바닥에 닿았다.

‘오신 거 맞나?’

사람 사는 곳이 이리도 추울 수가 있나.

괜스레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보일러도 못 켜고 어디 쓰러져 있는 건 아닌지. 이 집에 보일러가 있기는 한지 모르겠지만.

그가 닫힌 안방 문을 향해 다가가자 혜소가 물었다.

“막 들어가도 돼요?”

“확인을 해야…… 헉.”

상호는 문을 열었다가 깜짝 놀랐다. 노파가 침대에 눈을 감고 누워 있어서.

저번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는 진짜로 죽은 것 같았다. 방에 흐르는 싸늘한 공기 때문에.

“할머니? 할머니!”

그는 다급히 노파를 흔들어 깨웠다.

“할머니! 안 되겠다, 119…… 응?”

손에 느껴지는 뜨끈한 온기.

요를 슬쩍 들어 보니 전기장판이 깔려 있었다.

“…….”

노파의 눈이 상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너는 꼭 내가 단잠을 잘 때 오는구나.”

“……정정해 보이셔서 다행이네요.”

“이 나이에 잠을 못 자면 명줄이 깎이는데. 네 덕분에 하루 먼저 귀천하게 생겼다.”

“……주무세요.”

상호는 혜소와 효은을 데리고 슬그머니 방을 빠져나왔다.

* * *

“……그렇게 됐습니다.”

상호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모든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당신의 손자는 살아 있었고, 내가 아는 바로 그 사람이었으며, 당신과 내가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죽는 날까지 세상을 구하는 일을 했다고.

이야기를 다 들은 노파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랬더냐.”

한참 후에야 흘러나온 목소리는, 회색 구름처럼 흐릿하고 먹먹했다.

“다행이구나. 제 죽을 날을 정하고 죽었다니.”

“……예.”

“내 눈치 볼 것 없다.”

방석에 앉은 노파가 눈을 감았다.

“어차피 죽은 줄 알고 있었으니…… 오히려 소식을 들을 수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그런데…….”

다시 눈을 뜬 노파의 시선은 혜소를 향하고 있었다.

“너는……?”

“아, 얘는 영주 형이 돌보던 애인데…….”

“누가 너한테 물었냐?”

“예?”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그럼 누구한테 물었단 말인가.

그의 궁금증은 노파의 이어진 말을 듣고 풀렸다.

“다리 다섯 달린 짐승은 찾았더냐?”

혜소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나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

이미 만난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상호는 고개를 주억거리는 노파와 눈을 감은 혜소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조용히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노파가 상호를 불렀다.

“그런데 너 말이다.”

“아, 예.”

노파는 상호의 옆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웃했다.

“저번엔 이 처자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상호는 뜨끔해서 몸이 굳었다.

옆에서 효은이 냉랭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너 애들이랑만 다니는 거 맞지 않느냐, 내가 삐치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 그런 투로.

“……걔는 제자예요, 할머니.”

“세상이 아무리 바뀌었어도 어느 선생이 제자랑 한 이불 속에서 잔단 말이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러니까 보통 제자는 아닌 게 맞는데…….”

“어느 선생이 제자랑 깨벗고 씻더냐?”

“……그런 적 없어요!”

“없기는 개뿔이…….”

노파가 콧방귀를 뀌었다.

“네가 그리 말하는 것은 이 처자가 네 애인이란 뜻이렷다.”

“그…… 맞긴 한데요…….”

“천벌을 받을 놈이구나. 금수도 짝을 지어 다니는데 너는 어찌 무리를 지어 다니려 하냐. 아무리 어린 것이 좋다 하더라도…….”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어디 소리를 지르고 X랄이여 이놈아.”

“악!”

얻어맞은 건 이마인데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상호는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아니 그런 적이 없다니까요! 왜 직접 보지도 않은 걸 지어내세요!”

“선생이란 자식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느냐? 네가 매일 그 아가 데리고 바닷가로 나가서 껴안고 갯바위 구석진 곳으로 데려가는 걸 배 타는 양반들이 다 봤는…….”

“아니라니까요…… 악!”

이번엔 뒤통수. 상호는 머리를 싸쥐고 옆을 돌아보았다.

효은이 그의 얼굴에 정권을 지르려 하고 있었다.

“야, 잠깐만! 잠깐만…… 그런 적 없어! 그냥 바다 구경만 했어! 진짜로!”

“애들일 뿐이라더니…….”

효은의 눈에 살기가 깃들었다.

“진짜로 애를 건드려?”

“아니라고! 너도 나랑 태화 사정 다 알고 있으면서 왜……!”

“증인들이 있다잖아, 이 새끼야. 니는 진짜 개새끼야, 인간이 드러운 새끼야 너는. 꺼져, 꺼져. 내 눈앞에서 꺼져.”

이대로 가다간 또 처맞겠다. 상호는 일부러 눈을 부라렸다.

“자꾸 억지 부리지 마. 나도 화낼 거야. 야, 너는 오늘 처음 본 사람보다 내가 못 미더워? 상황을 정확히 아는 사람 말을 들어야지 잘 모르는 분 말을 그렇게 덥석…….”

뻐억

“악!”

“어디 눈깔을 그렇게 떠? 뒤질래?”

“미안…….”

“니가 나만 데리고 바다를 가봤으면 내가 말도 안 해. 야. 야 X밸럼아. 눈 돌리지 말고 나 봐. 니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어 이새끼야.”

“없어요…….”

“없지? 니가 생각해도 없지?”

“악! 악……!”

몸을 수그린 상호와 구타를 시작한 효은. 혜소와 노파는 그 꼴을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린 밥이나 먹자.”

“네.”

혜소가 노파를 쪼르르 따라가자 효은의 구타가 한층 심해졌다.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다는 듯이.

얻어맞던 상호는 주방을 향해 애처롭게 손을 뻗었다.

“악! 혜소야, 혜소야. 얘 좀 말려…… 악!”

“뭐? 속이 좁아? 별것도 아닌 걸로 삐져? 걍 죽어, 죽어. 언니도 니가 이런 새끼인 줄 알았으면 침뱉고 도망갔을 거다. 죽어!”

“악! 잘못했어, 미안해……. 혜소야! 할머니!”

“쟤들은 자주 저러냐?”

“저게 나름대로 사랑하는 방식인가 봐요.”

“이게 어딜 봐서 사랑…… 커헉!”

“뒤져!”

“악……!”

상호는 그날, 죄를 몸으로 때우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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