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여고의 남선생-361화 (361/501)

<361화>

361. 많이 먹어

“므아──.”

“밥 먹은 지 얼마 안 됐잖아.”

“아웅. ……으아?”

현관으로 폴짝 들어선 다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으.”

“응?”

선생님이 안 계시다니.

이 시간엔 늘 계셨는데. 세희는 방을 둘러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일이 있으신 거겠지.”

“아으.”

다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냉장고로 쪼르르 달려갔다.

냉장고 문을 연 다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으?”

“왜?”

세희는 다혜를 따라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냉장고 안에는 뭐가 많았다. 커다란 냄비들, 군것질거리들. 냄비의 뚜껑을 열어 보니 카레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뚜껑에 붙은 쪽지.

-얘들아 선생님 출장가~ 당분간 통화도 힘들 것 같아~ 절대로 은호 목소리 들킬까봐 못 하는 건 아니구~ 밥 잘 챙겨 먹어~

“…….”

선생님이 튀었다. 아마도 은호와 함께.

쪽지를 쥔 채로 부들거리던 세희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혜가 국자로 카레를 퍼먹고 있었다.

“므아~.”

“언니, 그거 지금 다 먹으면 저녁 굶길 거야.”

“므앙?!”

“뭘 므앙이야. 아껴서 먹어야지. 오늘부터 밥 한 공기만 먹일 거니까 그렇게 알아.”

“느아아악!”

“소리지르지 마.”

“꾸웅…….”

다혜는 코를 훌쩍이며 카레 냄비를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 * *

“…….”

다음날 아침.

혜소는 민정의 집 주방 앞에 서서 눈을 끔뻑였다.

“……안녕하세요.”

“어, 혜소야.”

상호는 프라이팬에 버터를 바르며 씩 웃었다.

“일어났어?”

“언제 오셨어요?”

“어제 밤에 왔지.”

식빵 굽는 고소한 냄새가 민정의 집에 퍼졌다.

혜소는 빵보다는 밥을 더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냄새가 먹음직스러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들은 상호는 서둘러 빵을 접시에 담았다.

“얼른 먹어.”

“아저씨는요?”

“나는 만들면서 먹으면 돼.”

“고모는요?”

상호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얼른 먹어. 계란후라이도 해 줄까?”

“고모는요?”

“……자게 둬.”

그 말을 하자마자 안방이 벌컥 열렸다.

안방에서 걸어 나온 이는 당연히 효은. 반쯤 잠에 취한 듯 맹한 눈동자가 상호를 향했다.

“…….”

허공에서 둘의 눈이 마주쳤다.

혜소는 식탁에 앉아 빵을 오물거리며 둘의 반응을 살폈다. 또 한바탕 싸울까봐 귀를 막을 준비를 하면서.

하지만 턱을 수십 번을 움직였는데도,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치이이……

프라이팬에서 계란 프라이가 튀기듯이 익어 갔다.

보다 못한 혜소는 식탁을 탁탁 두드렸다.

“아저씨.”

“어, 응.”

“고모.”

“응.”

“식사해요.”

효은은 상호를 노려보며 식탁 앞 의자를 꺼냈다.

효은이 자리에 앉자 상호가 접시를 들고 왔다. 토스트와 계란 프라이를 담아서. 누가 봐도 딱 성인의 1인분만큼을.

“흥…….”

효은이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꼭 ‘괘씸하지만 성의를 봐서 먹어는 주겠다’라는 투. 하지만 접시가 놓인 곳은 효은의 앞이 아니었다.

“많이 먹어.”

상호는 혜소의 접시에 음식들을 덜어냈다.

“…….”

효은의 표정이 썩어들어 갔다.

음식의 양은 혜소가 먹기엔 너무 많았다. 혜소는 빵을 오물거리다가 효은의 눈치를 보며 접시를 슬쩍 밀었다.

하지만 효은은 손도 대지 않았다.

‘어른들이란…….’

결국 혜소는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려 거실로 대피했다.

혜소가 도망치자 상호는 더 이상 요리할 이유가 없다는 듯 전기레인지를 끄고 프라이팬을 싱크대에 던지고는, 누구 들으라는 듯 대놓고 큰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아이고~ 힘들다~.”

“…….”

“밥은 내가 차렸는데 설거지는 누가 안 해주나~.”

“…….”

“하긴 맨날 나 혼자 하는데~ 누가 해줄 리가 없지~ 아무렴~.”

“……X새끼.”

효은은 작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식이 담긴 접시를 식탁에 놔둔 채로.

그 접시가 저 혼자 두둥실 떠올랐다.

“혜소야. 왜 다 안 먹었어?”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세요.”

“……네가 남기면 이거 다 버려야 되잖아~.”

“아저씨는 양심을 버리신 것 같은데요.”

“왜 그러냐, 혜소야. 꼭 내가 뭘 잘못했다는 것처럼…….”

“대체로 아저씨가 잘못을 하더라구요.”

“……으흠.”

상호는 헛기침을 하고 토스트를 집었다.

“그래. 그럼 버릴게.”

“저는 버리라고는 한 적이 없는데요.”

“버릴게~.”

내공이 효은의 입을 벌렸다.

“……우붑!”

효은은 상호가 밀어 넣는 음식을 우물거리며 앙칼진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상호는 먹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됐다.”

마지막 한 조각까지 욱여넣은 그는 손을 탁탁 털고 싱크대를 향해 돌아섰다.

“다 버렸다. 어휴, 나도 음식물 처리기처럼 밥 먹고 똥만 싸면서 살고 싶네.”

“…….”

“설거지나 해야겠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돌아서는 상호의 등에, 효은의 비수 같은 눈빛이 사정없이 꽂히고 있었다.

* * *

“머라꼬?”

지윤은 눈을 끔뻑였다.

“쌤이 가출을 했다꼬?”

[응.]

핸드폰의 화면에는 세희와 태화와 다혜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윤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니는 그래가꼬 가게를 안 왔나? 뭐하는 가스나고?”

[중대사항이야! 요튜브 망하게 생겼어!]

“까고 있네 마. 쌤 읎다고 땡땡이 치는 거겠제.”

[어쨌든!]

태화가 화면에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오지윤 너 아는 거 없어? 쌤이 갈 만한 데?]

“내가 뭘 알겠노? 그래 물어봤자…….”

지윤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나빛이헌티는 전화 해 봤나?”

[아니. 걔는 맨 마지막에 하려고.]

“왜?”

[유력 후보야.]

태화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태화의 어깨 너머로 세희와 다혜가 쌍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게 보였다.

[돈 많고, 집 넓고. 쌤이 도망치기 딱 좋은 곳이잖아.]

[므아.]

[그리고 선생님 나빛이네 집밥 엄청 좋아하셔.]

[아으아으.]

[언니가 뭘 알아. 언니는 가본 적도 없잖아.]

[꾸웅…….]

다혜가 화면 밖으로 쪼그라들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 지윤은 깊은 고민에 빠진 채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디 글타 혀도 우짤라고. 쌤을 납치하기라도 할 기가?”

[들고 나와야지.]

세희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곧 은호로 변할 때가 됐어.]

“아하…….”

지윤은 그제서야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고거 땜에 글케 환장하믄서 찾고 있었고마.”

[그러니까 중대사항이라니까! 오지윤 너도 쌤 잡고 싶지? 그치? 가게 쉬고 우리랑 같이 찾아다닐래?]

“뭔 가게를 비우노.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래잉.”

은호와 놀고 싶긴 했지만, 그래도 가게가 먼저. 지윤은 혀를 차고 세희와 태화에게 말했다.

“내는 몰겄은게 니덜끼리 찾으라잉. 끊는디.”

[야! 잠깐만.]

“머고.”

[나 땡땡이친 거 쌤한테 말하지 마!]

“칵 뒤지뿌라.”

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끊겼다.

“……쯥.”

지윤은 통화 버튼을 아쉬운 듯 내려다보다가, 곧 가게 열 준비를 하기 위해 식당의 주방으로 향했다.

* * *

다음 날.

‘……큰일 날 뻔했군.’

상호는 작아진 손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가출이 하루만 늦었더라도 아이들에게 3분할을 당했을 것이다. 아이가 개미를 찢듯이. 머리 가슴 배로.

그래도 어쨌든 이렇게 도망을 쳤으니,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터.

그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밤인가…….’

좀 일찍 일어난 모양이었다.

창밖에는 하늘밖에 보이지 않았다. 학회의 건물이 워낙 높아서. 온통 검어진 통유리창이 꼭 창문 없는 벽처럼 느껴졌다.

‘아침 준비나 할까.’

그는 소파에서 내려와 헐렁해진 어른 옷을 아이 옷으로 갈아입었다.

효은과는 아직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먼저 사과하기 싫어서. 별것도 아닌 걸로 툭하면 토라지는 버릇을 이참에 고쳐 볼 생각이었다.

어떻게 어른이 안 놀아줬다고 삐지나.

‘참나, 내가 밥을 해도 그릇 하나 안 닦으면서, 스스로 뭐가 이상한지 느끼질 못하나…….’

툴툴거리던 상호는 작은 손으로 냉장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냉장고에 든 건 대부분 즉석 식품이었다. 빵. 그리고 만두 따위의 냉동식품. 혜소가 좋아하는 나물 몇 개만 마트에서 사온 듯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있었다.

‘애 밥이나 좀 제대로 챙겨주지…….’

사실 그도 나물을 직접 무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괜히 아니꼬운 맘이 들어서 별 트집을 잡는 것이었다.

상호는 냉장고 문을 닫고 찬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밥이 없네…….’

쌀도 없고.

아무래도 장을 좀 봐야 할 것 같았다.

‘지갑이 어디 있나…….’

그는 어른 옷에서 지갑을 챙겨 현관으로 향했다.

* * *

‘햇밥은 샀고…….’

상호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쇼핑카트를 밀었다.

어깨 높이까지 오는 손잡이. 시야의 반 이상을 가리는 카트. 눈높이가 낮아졌다 보니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X급 헌터의 짬밥이 있으니, 주변의 기척쯤이야 얼마든지 느낄 수 있고.

한눈 좀 팔아도 어딘가에 부딪힐 일은 없…….

퍼억

“악!”

……어야 할 텐데.

상호는 깜짝 놀라 핸드폰을 내리고 카트 앞을 돌아보았다.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여자 셋. 그 중 한 명이 허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아으……, 앞을 제대로 보고 다녀야……!”

신경질을 내려던 여인은 카트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상호를 보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여인, 아니 여인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좀 못 볼 수도 있지~ 그치?”

“아유, 너는 애한테 왜 그래~.”

“애잖아~. 좀 봐줘~.”

“미안해, 아가~.”

“…….”

아가 아닌데.

상호는 카트 손잡이를 잡은 채로 눈을 끔뻑였다.

‘딱히 다친 건 아닌가 보군.’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듯했다.

필요한 물품은 전부 담았다. 이제 계산하고 돌아가면 된다. 그는 계산대로 가서 물건들을 계산하고 다시 카트에 담았다.

물건이 좀 많긴 하지만, 내공으로 들고 가면 될 터.

“……어라?”

상호는 계산대를 나서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 * *

우웅──

침대 옆 탁자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새벽부터 대체 누구인가. 효은은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뒤척이다가 결국 소음을 못 이기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강상호.

‘뒤져.’

그녀는 거절 버튼을 누르고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런데 또.

우웅──

‘개X발…….’

누가 이기나 해 볼까.

아니, 그래도 뭐 때문인지는 들어 볼까. 효은은 또 거절을 누르려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뭐.”

[효은이 누나아…….]

안절부절못해하는 아이 목소리.

무언가 망치처럼 단단한 것이 효은의 심장을 때렸다.

[나 밥하려고 장보러 왔는데……. 물건이 너무 많아서…….]

“어디야.”

[응……?]

“어디냐고.”

[여기 학회 근처에 마트인데……. 위치 보내 줄게…….]

“기다리고 있어.”

효은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옷을 입으러 달려갔다.

* * *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진 밥상.

졸린 눈으로 식탁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혜소는, 고개를 들어 맞은편을 빤히 쳐다보았다.

효은.

그리고 그 무릎에 앉은 은호.

“아.”

“나 혼자 먹을게……. 혜소나 줘.”

“아가리.”

“……아앙.”

상호는 볼을 붉히고는 효은이 내민 반찬을 받아먹었다.

혜소에게는 그런 둘의 모습이 퍽 낯설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눈에 보이기는 하는지 의문이었는데.

지금은 아주 깨가 쏟아지고 있었다.

“아가리.”

“아니 너 먹으라고……. 내가 한 음식인데 왜 니가 생색을…….”

“벌려.”

“아앙…….”

상호는 입에 든 것을 우물거리며 진땀을 흘렸다. 효은이 밥도 안 먹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어서.

그는 숟가락에 밥과 반찬을 얹고 효은에게 내밀었다.

“너도 아.”

그 말에 효은의 무표정한 얼굴이 흔들렸다.

내민 밥을 받아먹은 효은이 상호의 입에 반찬을 쉼 없이 쑤셔 넣기 시작했다. 특별히 맛있는 것들로만 골라서.

상호의 볼이 다람쥐처럼 미어터졌다.

“우웁! 웁!”

“벌려.”

“아욱, 안드러가…… 우욱!”

“들어가는데?”

“우우욱!”

“넣을게.”

그 후로도 효은은 상호에게 음식을 욱여넣었고.

혜소는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어느새 한 그릇을 다 비웠다는 것을 깨닫고,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려 싱크대로 쪼르르 달려갔다.

“우웁…….”

뒤에서 들려오는, 도움을 청하는 듯한, 말이 되지 못한 신음을 무시하면서.

“혜소야, 살려, 얘 왜 이래…… 우웁!”

“대체로 아저씨가 잘못을 하더라구요.”

“그런…… 우웅! 웅!”

상호는 입으로 쏟아지는 음식들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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