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화>
359. 집념
학교로 돌아와 방에 들어서자 누군가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선생님~.”
나빛이 방에 들어와 있었다.
학교에 들렀다는 문자를 받긴 했지만 지금까지 있었을 줄이야. 상호는 달려드는 나빛을 엉거주춤 안으며 당황했다.
“계속 여기 있었어? 집에 안 가고?”
“네?”
나빛이 눈을 깜빡였다.
“왜 그렇게 물으세요……?”
“……응?”
“집에 안 갔구나, 다행이다, 기쁘다, 이러셔야죠…….”
“……다, 다행이다~.”
“늦었어요…….”
나빛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선생님은 아주아주아주 무서운 시간을 보내게 되실 거예요…….”
“지금도 충분히 무서워, 나빛아…….”
“볼일을 보면 휴지가 없고, 머리를 감다가 물이 단수되고…….”
“그걸로 끝나면 다행이네…….”
“냉장고에 수상할 정도로 맛있는 반찬들이 쌓여서 살이 뒤룩뒤룩 찌실 거예요…….”
“제발……!”
그것만은 견딜 수 없다. 상호는 바닥에 이마를 박고 손을 싹싹 비볐다.
“선생님, 선생님이 잘못했어. 선생님은 나빛이가 여기 있어서 기뻐…….”
“앞으로는 조심하세요…….”
“으응…….”
“헤헤헤…….”
나빛은 다시 방글방글 웃었다.
냉장고 근처에서는 다혜가 무언가를 오물거리고 있었다. 점심을 못 먹이고 봉인소에 갔다 왔는데 밥은 잘 먹었을까. 상호는 다혜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얼굴이 핼쑥해졌다.
다혜의 입술 사이로 삐져나온 황금색 깃털 때문에.
“다혜야?”
“므앙.”
“지금 뭐 먹는……?”
그때 다혜의 입 안에서 가냘픈 소리가 새어나왔다.
“삐이이…….”
상호와 나빛의 눈알이 튀어나올 듯 불거졌다.
“……꾸꾸야!”
“다혜야! 뱉어, 뱉어! 먹는 거 아니야!”
“아, 아으?!”
깜짝 놀란 다혜는 입에 있는 것을 꿀떡 삼켜 버리고 말았다.
“……므아?”
목구멍으로 내려가는 둥그런 실루엣.
상호와 나빛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가는 그때.
“뺙.”
다혜의 정수리에서 혁구가 튀어나왔다.
“뺙.”
“므앙.”
“뺙뺙.”
“므앙으앙.”
“…….”
상호는 멀뚱히 그를 바라보는 다혜와 혁구를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마주하다가, 역시 마찬가지로 넋을 잃은 나빛을 돌아보았다.
나빛의 눈이 점점 반짝이기 시작했다.
“……꾸꾸가 순간이동을 뗐나 봐요!”
“아니, 분명히 씹혀서 삼켜졌는데…….”
“우리 꾸꾸가 부활에 재능이 있나 봐요!”
“그런 거야……?”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배에 집어넣은 음식이 부활하자 다혜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상호는 황급히 냉장고에서 재료를 챙겼다.
“조금만 기다려. 금방 만들어 줄게.”
“므앙…….”
다혜는 주린 배를 움켜잡으며 군침을 흘렸다.
* * *
“뭐야.”
늦은 밤. 상호와 함께 들어온 태화가 나빛을 발견하고 눈을 끔뻑였다.
“얜 언제 왔어?”
“태화야아~.”
나빛이 헤헤 웃으며 태화를 끌어안았다. 상호의 방에서 자고 간다는 사실 때문인지 기분이 아주 좋은 상태였다.
“수고했어엉~.”
“수고한 건 맞는데 딱히 너한테 듣고 싶진 않았는데.”
“힝……. 난 태화 쪼아하는데…….”
나빛이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다혜의 머리에 앉아 있던 혁구가 태화의 머리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태화는 팔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이를 갈았다.
“이래서 니한테 듣기 싫은 거라고! 야이씨, 꺼져! 꺼져 치킨새꺄!”
“난 태화 진짜 쪼아하는데……. 쪼아하고 쪼아하고 엄청 쪼아하는데…….”
“아아아아악!”
“나빛아, 혁구야. 그만해.”
“네~.”
상호의 중재에 태화는 나빛의 마수에서 벗어났고, 둘은 그때서야 비로소 잠자리에 들 준비를 시작했다.
씻고 머리를 말린 상호는 별생각 없이 침대에 누우려다가 멈칫했다. 침대에 이미 세희, 태화, 다혜와 나빛이 누워 있어서.
성인 남자가 누울 공간은 없었다.
‘바닥에서 자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돌아서는데, 보이지 않는 힘이 상호의 어깨를 턱 잡았다.
“므앙.”
“다혜야? 누울 자리가 없어…….”
“으아.”
다혜가 심통이 난 듯 볼을 부풀리며 태화를 반으로 접기 시작했다.
“으아으으──.”
“악! 왜, 왜 나한테 그래!”
“므으응…….”
“갸아아아악!”
다혜가 사람을 차곡차곡 접을 순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을 때는 태화의 허리가 이미 활처럼 휘어지고 난 후였다.
게거품을 바각바각 흘리는 태화의 옆에서 세희가 상호를 바라보았다.
“제가 바닥에서 잘게요.”
“아니, 한 명만 바닥에서 자도 되니까, 내가 바닥에서…….”
“아니요.”
나빛이 침대를 팡팡 두드렸다.
“누우세요. 다 같이 잘 수 있어요.”
“어떻게? 너무 좁은데…….”
“한 명이 선생님 위에서 자면 돼요.”
그 말에 다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므아아앙!”
“끄으……, 이 언니 뭐라는 거야?”
“너 천재냐는데.”
“흥, 드디어 이 몸의 천재성을 알아보는 사람이…….”
“너 말고 나빛이, 멍청아.”
아무도 나빛의 해결책에 태클을 걸지 않는다. 상호는 그 사실에 진땀을 흘리며 의문을 품었다.
이 당연한 사실을 자기 입으로 말해야 하는지.
“얘들아?”
“네?”
“그런 꼴로 자면…… 나도, 내 위에서 자는 사람도 제대로 못 잘 것 같은데…….”
“감수해야죠.”
“업계포상인데.”
“나한텐 아니라고…….”
“선생님……?”
나빛의 눈에서 또다시 빛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상호는 기겁하며 말을 고쳤다.
“아이고 기쁘다~, 제자들이 내 위에서…… 자네…….”
누가 듣기라도 했다가는 혀 깨물고 자살할 말이었지만, 지금은 말해야만 했다. 나빛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다행히 나빛은 금방 환한 웃음을 되찾았다.
“그렇죠~?”
“으응…….”
“그럼 누가 선생님 위에서 자야 할까요~?”
“……응?”
상호는 정신을 차리고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네 쌍의 눈동자가 상호를 맹렬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혜가…… 성인이니까, 차라리 다혜가…….”
“므흐흐흥~.”
다혜가 볼을 붉히며 몸을 배배꼬았다. 하지만 나빛이 손을 내저었다.
“안돼요.”
“……므앙?”
“언니는 우리 반에 늦게 와서 안 돼.”
“느아아악!”
“떼쓰지 마.”
“……므앙.”
눈을 부릅뜨고 반항을 시도하던 다혜는, 나빛의 인형처럼 무감정한 표정을 마주하고는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하게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그걸로 모두가 진압당한 건 아니었다.
“나빛아.”
“응?”
“너 세 번째잖아.”
세희가 나빛을 빤히 바라보았다.
“맨 처음 온 건 나야.”
“느아아앙!”
“뭐라는 거야, 언니는. 가만히 좀 있어.”
“느아아악!”
“뭘 언니가 선생님을 제일 먼저 만나?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고 잠이나 자.”
“므우웅…….”
세희도 다혜가 상호를 제일 먼저 만난 건 알고 있다. 다 알면서 저러는 것이다.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손바닥을 뻗어 아이들을 막았다.
“그럼…… 그럼 이렇게 하자. 나도 잠은 편히 자고 싶거든?”
“네.”
“몸무게 제일 적게 나가는 사람이…… 올라와서 자는 걸로 하자.”
그 말에 아이들의 눈에서 불꽃이 확 타올랐다.
뭔가 건드리면 안 되는 영역을 건드린 것 같다. 상호는 말을 꺼낸 것을 후회하며 침대 구석에 쪼그라들었다.
“아니, 취소, 취소. 다른 방법을…….”
“나야.”
나빛이 당당하게 가슴팍을 두드렸다.
“내가 제일 가벼워.”
“아이씨, 지금은 힘든데…….”
태화가 몸 이곳저곳을 주무르면서 중얼거렸다.
“그래도 뭐…… 한번 해 보자고. 쌤! 체중계!”
“……여기.”
상호는 옷장 아래에서 체중계를 꺼냈다.
야밤에 잠도 못 자고 이게 뭐 하는 짓일까. 그는 체중계 주변으로 모여드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키가 제일 작은 건 나빛. 하지만 몸이 제일 얇은 건 세희.
‘누가 이기려나…….’
그래도 세희가 이기는 게 잠들기는 더 편할 것 같다. 여러 번 같이 자봤으니까.
상호는 마른침을 삼키며 다혜가 체중계로 올라서는 것을 지켜보았다.
“므앙.”
55kg.
‘?’
예상치 못한 숫자에 상호의 눈이 끔뻑였다. 다혜도 엄청 마른 편인데.
설마 근육 때문일까. 근육을 압축하기라도 한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세희가 내공을 뻗는 게 느껴졌다.
‘아하…….’
집념이란 참으로 무섭다. 그는 못 본 척하고 입을 다물기로 했다.
계기판의 숫자를 본 다혜가 기겁하며 체중계에서 뛰어내렸다.
“느아아앙?!”
“언니 55키로.”
“느아아악! 아으아으, 으아으…….”
“자꾸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뭘 체중계가 이상해. 언니 뱃살이 더 이상해.”
“으아으아……!”
“비켜.”
다음은 세희.
눈금이 41kg을 가리켰다.
“봤지? 내가 이겼네.”
“므아앙!”
“뭘 이상해. 나 원래 이 정도야.”
1학년 때보다 오히려 빠졌다. 물론 상호는 저게 세희의 진짜 몸무게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실제로는 아마 45kg 언저리.
‘집념이란…….’
참으로 너무나 무섭다. 상호는 또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다음은 태화.
이번에도 미약한 마나의 파동이 느껴졌다.
“……야.”
눈금을 본 세희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게 말이 돼?”
“왱?”
“니 키에 어떻게 36이 나와, 멍청아!”
“나오는뎅?”
태화가 능청스럽게 휘파람을 불었다.
“난 니들같은 통뼈가 아니라성~. 근육도 없구, 여리여리하구, 바람 불면 날아가는 가련한 잎새 같은 여자거든~.”
“잎새 이X랄하네. 얍새겠지 등신아. 마법 안 풀어!”
“너도 경공 썼잖아! 누굴 호구로 아나!”
“괜찮아, 괜찮아. 싸우지 마~.”
나빛이 씩 웃었다.
“내가 태화보다 가벼우면 되잖아.”
“뭐? 야,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사람이 어떻게 36보다 가벼워?”
“36은 말이 되는 줄 알아?!”
“시끄러, 졌으면 꺼져. 40키로 돼지년…… 흐으으응!”
“안 잡을라 해도 기어코…….”
세희가 태화의 꼬리를 잡고 끌어냈다.
상호는 체중계로 올라서는 나빛의 발밑에서 황금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방어막에 올라탈 생각인 듯했다.
나빛이 헤헤 웃었다.
“올라간다아~.”
눈금이 가리키는 숫자는.
“0키로~.”
“……야! 미친년아!”
상식을 박살내는 무게에 태화가 분통을 터트렸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니가 풍선이냐? 치면 날아가냐?! 앙?!”
“응~.”
“야!”
태화가 눈을 부라리자 나빛의 표정이 스산해졌다.
“태화야…….”
“뭐.”
“내가 선생님 위에서 자는 게 그렇게 싫어?”
“야, 시합이 공정해야 할 거 아니…….”
“너희는 선생님이랑 매일 같이 잤잖아…….”
그 말에 태화마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윽.”
“너희는 선생님 자는 모습도 핸드폰으로 찍으면서…… 막 만지고 그랬잖아…….”
상호의 이마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나빛아? 그런 적은 없었…….”
“숨기지 않으셔도 돼요……. 선생님은 피해자니까…….”
“…….”
집념이란 참으로.
“나도 선생님이랑 잘 거야…….”
“…….”
“지금 나는 계시를 받았어. 하나님한테. 세상에서 제일 가벼운 사람이라고…….”
“…….”
“그런데 태화 네가 나보다 가볍다는 거야……? 내 신앙심을 모독하는 거야……?”
“……아니.”
태화의 꼬리가 축 늘어졌다.
“니가 짱 먹어…….”
“……헤헤.”
나빛은 그제서야 웃었다.
* * *
결국은 한이 쌓인 사람의 집념이 더 컸던 것이다. 상호는 고개를 살짝 들어 그의 몸 위에 누운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나빛이 볼을 붉히며 방글 웃었다.
“헤헤…….”
네가 좋다면 그걸로 됐다. 상호는 쓰게 웃으며 나빛의 연회색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그런 그의 옆에서는 세희와 태화와 다혜가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쌤.”
“응?”
“내일은 내가 위에서 잘래.”
태화의 말에 세희와 다혜에게서 투기가 뿜어져 나왔다.
무공의 고하와는 관계없는 순수한 감정의 발산. 공기를 짓누르는 기운이 숨을 쉬기 힘들게 했다.
“내일은 나야.”
“므앙.”
“천세희 넌 뼈 때문에 딱딱해서 안 돼. 언니는 근육 때문에 단단해서 안 되고.”
“니는 뱃살 때문에 푹신하냐?”
“난 온몸이 부드러워서 상관없어.”
“염병하네…….”
세희는 혀를 차고 상호를 향해 돌아누웠다.
상호는 빨리 잠을 청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나빛이 자꾸 위에서 꼬물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견디다 못한 상호는 나빛을 살짝 토닥이며 가만히 있어 달라고 말하려 했다.
그때 나빛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선생님.”
“응?”
“가볍죠.”
“응.”
“얼마나 가벼워요?”
“깃털만큼……?”
“부드럽죠?”
“……으응.”
“얼마나?”
“깃털만큼…….”
그 말에 나빛은 그의 품에 얼굴을 폭 묻었다.
“……헤헤.”
옷 속으로 스며드는 뜨끈한 날숨이 살갗을 간질였다.
상호는 몸을 지그시 누르는 나빛의 무게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눈을 감았다. 내일도 태화를 출근시켜야 하기에.
하지만 몸 위에서 자꾸 꾸물거리는 나빛의 움직임이, 여지껏 겪었던 그 어떤 감각보다도 강렬하게 뇌를 자극했다.
그는 결국 눈을 뜨고 나빛에게 속삭였다.
“나빛아.”
“네.”
“둘이만 내려가서 잘까?”
“아니요.”
나빛이 방긋 웃었다.
“이대로가 좋아요.”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눈을 감았다.
나빛이 이불을 끌어올려 상호의 머리 위까지 덮는 게 느껴졌다.
“헤헤헤…….”
이불 속의 작은 목소리가, 오로지 상호의 귀에만 닿으며.
둘만의 작은 공간을, 따스한 웃음과 부드러운 살내로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