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화>
356. 쌓이는 것
첩자가 있다.
여행 일정을 해련에게 알린 첩자가 있다. 그 유력한 용의자는 지금 상호의 바로 뒤 리프트에서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의일까, 타의일까. 그게 궁금했지만 지금 상호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교장선생님.”
“응.”
해련이 고글을 올리고 웃었다. 눈만 빼고 다 가리는 발라클라바 사이로 잡티 하나 없는 맑은 피부가 보였다.
옆에 앉은 커플이 이 여인의 진짜 나이를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상호는 그런 의문을 품은 채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속삭였다.
“아니, 애들 노는 곳에 왜 따라오신 거예요?”
“나도 이제 애야~.”
“교장선생님이 어른이지 어떻게 애예요. 손녀도 있으시면서…….”
일부러 손녀 이야기까지 꺼냈건만, 해련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해련은 상호의 팔에 은근히 몸을 기대며 속삭였다.
“응애.”
“…….”
몸이 아니라 정신을 어려지게 하는 저주도 있는 걸까.
이걸 녹음해서 하솔에게 들려줘야 하는데. 상호는 핸드폰을 꺼내서 녹취록을 채증하고픈 욕구를 억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일단 내리면 이야기해요.”
“응애.”
“……한 번만 더 응애라고 하면 입에 분유병 물릴 거예요.”
“맘마 줘.”
“교장선생님은 먹는 쪽이 아니라 주는 쪽이잖아요.”
그 말에 해련이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강 선생.”
“왜요.”
“상사한테 그렇게 거침없이 성희롱을…….”
“……지금 누가 누구를 희롱하는 중인데요!”
그들이 옥신각신하는 와중에도 리프트는 잘만 올라갔다.
리프트가 도착한 곳은 초급자 코스의 꼭대기. 상호는 리프트에서 내려 초급자 코스로 향했다.
해련이 그의 뒤를 졸졸 쫓아왔다.
“강 선생~.”
“네.”
“요 스키란 거, 어떻게 타는 것인감~?”
“교장선생님은 안 배워도 탈 줄 알잖아요.”
“나는 이런 거 타본 적이 없어~.”
“이미 잘 타고 계시네요.”
그때 상호의 옆에 서려던 해련이 상호를 향해 쓰러졌다.
“아이쿠!”
상호는 반사적으로 스키폴을 휘둘러 쓰러지는 해련을 멈춰 세웠다.
퍽
폴이 해련의 머리를 가격했다.
“…….”
“…….”
해련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상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고개를 느리게 기웃거리는 꼴이 꼭 ‘이 새끼 어디 아픈가?’ 하고 고민하는 것 같았다.
“강 선생…….”
“……네.”
“손으로 받아 줄 순 없었어?”
“검을 휘두르는 게 습관이 돼서……요.”
“그 말은 내가 몬스터란 뜻인가?”
‘비슷하죠.’
사람 잡아먹는 게 말이다. 마지막 말은 속으로 삼켰다.
다음 리프트가 도착하고 태화, 지윤, 하솔, 단비가 상호를 향해 다가왔다. 폴을 땅에 마구 찍으며 다가오던 태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쌤? 그거 누구야?”
‘우리 교장.’
이 말도 속으로 삼켰다.
상호는 하솔을 향해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여인이 뭔가 눈에 익지 않느냐, 그런 뜻을 담아서.
하지만 하솔은 멀뚱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젠장.’
할머니가 쫓아온 줄은 꿈에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는 일단 해련의 정체를 숨기고 코스의 가장자리 쪽을 향하며 말했다.
“그냥 아는 사람이야. 너희끼리 타고 있어, 선생님은 이야기 좀 하고 있을게.”
“으엥…….”
태화와 아이들은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스키를 타고 내려갔다.
그렇게 두 번째 리프트의 승객들이 떠나고, 곧 세 번째 리프트의 승객들이 상호를 향해 달려왔다.
“선생님~.”
나빛, 나디아, 은율, 다혜.
나빛이 상호의 곁에 선 여인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선생님?”
“으응.”
“그거 누구예요?”
“아는 사람…….”
상호는 차마 교장이 스토킹을 해서 쫓아왔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그의 말에 나빛이 동그랗고 큰 눈을 깜작이다가 방긋 웃었다.
“그럼 저흰 먼저 타고 있을게요~.”
“응. 너희끼리 타고 있어.”
상호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떠나가는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들 경사로를 향해 스키를 미끄러트리며 나아갔지만, 딱 한 명, 다혜만은 자꾸 상호와 여인을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 해련의 기색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감이 좋은데다가 많이 싸워 보기도 했으니.
그래도 결국은 허겁지겁 아이들의 꽁무니를 쫓았다.
‘이제…….’
그는 다혜에게서 눈길을 떼고 해련을 돌아보았다.
아이들과 놀아 주기로 마음먹은 이상, 해련과 노닥거리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았다.
그의 목적은 해련을 설득해서 돌려보내는 것.
“교장선생님.”
“응?”
“혼자 타세요.”
그러자 해련이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같이 놀아주지도 못하겠다는 게야……?”
“아니, 애들 봐야 될 거 아니에요. 저랑 교장선생님이 놀면 애들은 누가 보는데요. 외국 애도 있고 다혜도 있구만…….”
상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어쨌든 저는 애들이랑 놀아야겠으니까, 교장선생님도 애들이랑 다 같이 놀든가, 아니면 혼자 놀든가 하세요. 전 갑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눈밭을 쭉 미끄러져 나아갔다.
그런데 기척이 영 조용했다.
‘응?’
뒤를 돌아보니 해련이 오도카니 서서 울먹이고 있었다.
‘아 씨…….’
왜 또 사람 마음 아프게 이럴까.
상호는 해련에게 다가가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해련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왜 울어요. 다 큰 어른이.”
“젊은놈들 노는 곳에 큰맘 먹고 준비해서 왔는데에…….”
해련이 코를 훌쩍였다.
“시퍼렇게 어린놈이 어른 맘을 갖고 놀잖아아…….”
“제가 언제 갖고 놀았어요.”
상호가 쓴웃음을 지으며 손수건으로 해련의 코를 닦자 해련이 더욱 울상을 지었다.
“지금! 매몰차게 그러더니 또 이렇게 와서 들었다 놨다 하잖아!”
“아니 우는 사람 두고 어떻게 놀아요.”
그는 해련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리 와요. 이리 와. 꼴사납게 울지 말고 스키나 타요.”
“강 선생…….”
해련이 끌려가지 않고 버티며 그를 젖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놀아 줄 거야?”
“네, 네. 놀아 드릴게요. 애들이랑 다 같이…….”
“이따가 침대에서 갖고 놀면서 들었다 놨다 해줄 거야……?”
“……당일치기예요.”
조금만 방심해도 또 이렇게 잡아먹을 기회를 노린다. 상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장갑을 다시 꼈다.
“그럼 이렇게 해요. 저기 리프트 줄 선 데 있죠.”
“응.”
“저기까지 누가 먼저 가는지. 제가 이기면 애들이랑 다 같이 노는 거고, 교장선생님이 이기면 둘이서만 노는 걸로. 어때요?”
해련이 입술을 삐죽였다.
“나 스키 못 탄다고 했잖아…….”
“그래서 이기든 지든 같이 노는 거잖아요. 애들이 있냐 없냐 차이지……. 그리고 스키 별로 안 어려워요.”
“그래도 처음인데…….”
“그럼 3초 정도만 감 잡게 먼저 출발시켜 드릴게요.”
“진짜?”
해련이 눈을 반짝였다.
상호는 순간 괜한 말을 했나 싶었다. 스스로 제 무덤을 판 것은 아닐는지.
그래도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순 없고.
“……한번 해 보죠.”
“그래~.”
해련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총알같이 튀어나갔다.
‘……아니 X발!’
처음이네 모르네 하더니, 1초 만에 이미 까마득히 멀리까지 갔다. 3초를 주면 반 넘게 주파할 속도였다.
심장이 덜컥한 상호는 약속도 잊어버리고 그 즉시 출발했다. 내공까지 끌어올려 등을 밀면서.
촤아아악
초급 코스에 어울리지 않는 눈보라가 두 줄기 휘몰아쳤다.
눈보라에 휘말린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지만 상호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질 게 뻔했기에.
등을 떠미는 내공이 한층 강해졌다.
콰아아아……
사람이 제트기 소리를 내는 진귀한 광경에 사람들이 넋을 잃고 두 사람의 경주를 지켜보았다.
“저 미친 양반들은 뭐야? 초보들 타는 곳에서…….”
“부딪히면 죽겠는데?”
그들이 뭐라 하든 상호는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그들은 한 번도 꺾지 않고 리프트를 향해 곧은 직선으로 달려갔다. 코스의 60%쯤 되는 지점에 이르러서야 상호는 해련의 바로 옆까지 추격할 수 있었다.
그의 이마에 혈관이 솟았다.
“아니 못 탄다면서요!”
“나 탈 줄 몰라~.”
해련의 능청에 상호는 대화를 포기하고 경주에 집중했다.
내공을 한층 더하자 속도가 더욱 올라갔다. 해련 또한 속도를 붙였지만 상호에게는 조금 모자랐다. 이미 레이싱카 정도는 뺨을 좌우로 후려칠 만큼 빨랐지만.
결승선, 리프트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치익……
상호는 가볍게 발을 틀어 몸을 멈췄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전혀 가볍지 않았다.
콰아아아
제동하면서 밀어낸 눈. 그리고 여태 끌고 내려온 눈보라. 둘이 합쳐진 작은 눈사태가 리프트에 줄을 선 사람들을 덮쳤다.
“꺅!”
“으아아악!”
‘……이런.’
눈사태가 한바탕 휘몰아친 후.
상호는 자신을 노려보는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민폐도 이런 민폐가 따로 없다. 초급 코스에서 난폭운전을 한 것도 모자라 애먼 사람들한테 눈까지 끼얹다니. 사람들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꽂힐수록 상호의 몸은 점점 쪼그라들었다.
그때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강 선생~!”
뒤를 돌아보니 해련이 그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이거 어떻게 멈추…….”
‘추’를 말하는 순간 이미 둘 사이의 거리는 한 뼘도 되지 않았고.
그래서 상호는 말을 끝까지 다 뱉지 못했다.
“아니 씨…….”
콰아아앙
하얀 눈의 폭발이 모두를 덮쳤다.
* * *
“하…….”
상호는 입술을 질겅이다가 고글을 벗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쓰러진 그의 품속에서 해련이 눈웃음을 치며 올려다보고 있었다.
“일부러 덮치신 거죠?”
“들켰어?”
“경공을 쓰는 사람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하아.”
허공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인간이 어떻게 스키를 못 멈출 수 있냐. 상호는 한숨을 푹푹 쉬다가 고개를 살짝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의 폭발을 정통으로 처맞은 이들이 주변에 널브러져 있었다.
한마디로 초토화.
“……교장선생님.”
“응.”
“일단 도망칠까요?”
“그러자.”
둘은 황급히 일어나 리프트를 타는 곳으로 달려갔다.
* * *
“쌤.”
벤치에 앉은 태화가 핫도그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나 진리를 하나 깨우쳤어.”
그 옆에 나란히 앉은 상호는 아무런 대꾸도 해주지 못했다. 정신연령이 17~18세인 아홉 명과 놀아 주느라 진이 다 빠져서.
들고 있는 핫도그에서 소스가 맥없이 흘러내렸다.
“주식은 스키와 같아.”
“…….”
“꼬라박을 땐 빠르고 올라갈 땐 느린 거지.”
맞은편에 앉은 해련이 상호에게 속삭였다.
“강 선생이랑 반대네.”
“……뭐가요.”
“강 선생은 올라타기까진 한세월인데 박는 건 빠르잖아.”
“……핫도그나 드세요.”
“강 선생의 핫도그가 먹고 싶은데…….”
그 말에 상호는 들고 있던 핫도그를 해련의 입에 욱여넣었다.
“드세요. 실컷 드세요.”
“우욱우붑! 우웅!”
해련이 발버둥을 쳐도 핫도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제야 좀 조용하겠군…….’
작업을 마친 상호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산더미 같은 핫도그를 해치우고 있는 지윤과 다혜. 핫도그를 사서 상호에게 달려오고 있는 나빛. 그리고 아직 스키를 더 타고 있는 아이들. 수많은 연인과 가족들.
그 어디에도 전쟁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보석 같구나.’
눈부시다. 설산의 눈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들이. 풍경이, 사람이. 공간도 시간도.
‘X발스럽게 싫었는데.’
이걸 그리도 원망했던가.
초혼강기를 쓰게 된 이후로 느껴지는 것이 하나 있었다. 운명에 대한 직감. 스스로 택한 이 길의 끝이 언제일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상호는 다음번 겨울은 이번 겨울과 다르리란 것을 직감했다.
아주 하찮고.
너무도 작은 것이.
‘또 올 수 있으면 좋겠군.’
그는 눈부신 빛을 피해 고글을 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먹고 와. 난 더 타러 갈게.”
“아, 잠깐만. 나도 같이 가. 야, 돼지뇬아. 이거 너 먹어.”
“이 미친 가스나가 묵다 남은 걸 주노. 내가 잔반통이가 이 새끼야.”
“그래? 그럼 단비 너 먹어.”
“멍, 고마워.”
“쌤예, 이 가스나가 단비한테 지가 처묵다 냄긴 거 준다 아입니꺼!”
“넌 그거 다 먹고 와.”
“치…….”
그렇게 첫 스키장의 기억이.
누군가에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기억이 소복소복 쌓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