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화>
355. 어른은 어른끼리
“그러고보니 요즘은 어떻게 됐냐?”
상호는 빨간불에 차를 세우고 옆을 돌아보았다. 조수석에 앉은 태화가 그를 돌아보며 눈을 깜작였다.
“뭐?”
“주식 어떻게 됐냐고.”
“아아, 그거……. 살짝 올랐어.”
“얼마나?”
“2천 8백 됐어.”
“꽤 복구했네.”
“응.”
태화는 무언가 생각난 듯 갑자기 상호를 향해 몸을 돌려세웠다.
“쌤.”
“뭐.”
“나 그럼 이제 2백만원 잃은 거자나. 웅?”
상호는 태화가 왜 애교를 떠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도 5백만원어치 시킬 거야.”
“……치.”
역시나. 고개를 팩 돌리며 삐진 척을 한다. 그는 태화의 볼을 손끝으로 깔짝이며 혀를 찼다.
순두부 같은 볼이 검지를 따라 우묵해졌다.
“다 채우면 노트북 사준다고 했잖아. 요령피우지 말고 열심히 해 봐.”
“열심히 하고 있어!”
태화가 눈을 치켜뜨며 그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쌤은 모르잖아! 내가 얼마나 칭찬을 많이 듣는데! 이제 요리도 몇 개는 내가 하고! 아주머니도 나 덕분에 손님 늘었다고 그랬어!”
“그래, 그래.”
“내가 그릇을 닦으면 빛이 나고! 맹물을 끓이면 육수가 되고! 국수 두 그릇과 만두 다섯 개로 모든 손님을 배불리 먹일 수 있노라!”
“대단하네~.”
상호는 심드렁하게 대꾸하고 다시 핸들을 잡았다.
“그럼 내일은 쉬자.”
“어? 진짜?!”
“응. 스키장 가려고.”
그 말에 태화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둘이서만?!”
“아니, 다혜랑 지윤이랑…… 또 나디아랑 나빛이랑 은율이, 단비랑 하솔이도 오고.”
“우씨, 나만 빼놓고 가려고 했어?!”
분통을 터트리던 태화는 돌연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나랑 오지윤이 가면…… 가게는?”
“지윤이 동생이 일하기로 했어.”
“세희는? 세희는 안 가?”
“알바 때문에.”
“오옹…….”
상호는 태화의 입가에 웃음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놀리지 마.”
“헹.”
“너 돈까스 사달라고 할 때 세희만 치즈돈까스…….”
“아이씨, 그만해! 알았어! 알았어! 안 하면 되잖아!”
“안 한다고 약속했다, 너. 하기만 해 봐.”
“붸에엥~ 뿌에엥~.”
곧 파란불이 들어오고, 차가 다시 달렸다.
* * *
“치~즈~.”
태화가 브이를 그리며 핸드폰으로 셀카를 찍었다. 그 옆에는 눈동자를 옆으로 굴린 은율과, 동그란 눈을 멍하니 끔뻑이는 다혜가 서 있었다.
셋 모두 스키복 차림.
스키에 필요한 용품을 빌리는 가게였다.
“야, 은율. 웃어, 웃어. 웃어야 세희도 좋아하지!”
“…….”
“언니도! 그렇게 멍청하게 있지 말고! 따라해 봐. 치즈! 김치!”
“으이……므으…….”
보다 못한 상호는 태화의 핸드폰을 뺏어 들었다.
“야, 안 놀리기로 했잖아.”
“이게 왜 놀리는 거야? 난 그냥 우리의 행복한 모습을 세희랑 나누려는 것뿐인데?”
“헛소리 말고 스키화 사이즈나 재.”
그 말에 태화가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쌤.”
“응?”
“나 스노보드 타볼래.”
“네가? 너 탈 줄 알아?”
“아니. 쌤은 탈 줄 아는 거 아냐?”
“알긴 하지만…….”
“그럼 가르쳐줘.”
보드는 스키보다 배우기 어려운데. 심지어 무예가도 아닌 태화는 배우는 속도가 훨씬 느릴 터였다. 순간이동을 쓸 수 있으니 딱히 위험하지는 않겠지만.
가르치려면 온종일 붙어 있어야 할 텐데.
“그냥 스키 타. 보드 타면 너 오늘 못 놀아. 내일까지 타는 것도 아니고 오늘 하루 타는 건데…….”
“아 왜~. 가르쳐죠오오~.”
태화는 상호의 팔을 붙잡고 떼를 썼다.
그런데 은율이 갑자기 태화의 어깨를 턱 잡았다.
“……응?”
“나 스키 못 타.”
은율의 눈동자 속 깊은 곳에서 불꽃이 일렁였다.
“내가 선생님한테 배워야 돼.”
그 말에 태화는 당황하다가도 삿대질을 했다.
“구라치지 마! 말이 되냐? 야, 넌 누가 봐도 스키 X나 잘 타게 생겼어!”
“나 스키장 한 번도 가본 적 없어.”
“너같이 생긴 애들은 처음 타도 잘 탄다고. 넌 그냥 저기 돼지뇬한테 가서 배워. 쌤은 나 가르쳐야 돼.”
“내 말이가?”
스키복을 고르던 지윤이 눈을 끔뻑였다.
“내가 뭔 스키를 가르치노?”
“뭐? 너 스키 탈 줄 몰라?”
“내 형편에 무신 놈의 스키고? 동네 언덕에서 눈썰매나 탔제.”
“참나, 운동은 다 잘하는 것처럼 떠들더니…….”
스키를 못 타는 애들이 많은가 보다. 상호는 눈을 끔뻑이며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태화, 은율, 다혜, 지윤. 그리고 나빛, 나디아, 단비, 하솔.
“얘들아. 너희…… 스키 누구누구 탈 줄 알아?”
“저요.”
“네.”
하솔과 나디아가 손을 들었다.
단비와 다혜와 나빛도 탈 줄 모르는 건가. 상호는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해야 빠르게 배우고 빨리 놀 수 있을지.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은율이랑 다혜랑 지윤이는 어차피 혼자서도 탈 수 있을 거야. 어디 부딪혀 봤자 다치지도 않을 거고…… 태화만 나한테 살짝 배우고, 나빛이는 나디아한테, 단비가 하솔이한테 배우자.”
“네.”
“네!”
대답을 한 아이는 하솔과 나디아뿐. 나머지 아이들은 전부 태화를 샐쭉한 눈초리로 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상호는 그런 아이들의 눈빛을 눈치채지 못하고, 스스로의 명판결에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박수를 짝짝 쳤다.
“자, 얼른 스키화 사이즈 재고 스키 빌리자.”
“……네에.”
아이들은 스키가 놓인 곳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 * *
스키장은 인산인해였다.
눈 덮인 산에 점점이 박힌 총천연색이 눈에 띄었다.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그 모습이 꼭 하얀 아이스크림에 박힌 팝핑 캔디들 같았다.
개벽 이전보다 훨씬 붐비는 모습. 새해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주된 이유는 몬스터들 때문에 여행을 갈 곳이 제한되어서였다. 강원도 쪽 스키장은 더 이상 못 쓰게 되었으니.
상호는 고글을 이마 위로 올리고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안대를 벗어서 오른눈의 흉터가 드러나 있었다.
“사람이 되게 많네. 줄을 빨리 서야겠는데…… 어라?”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아보는데, 어째 아이들의 수가 적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아이들의 머릿수를 세던 상호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뭐야, 지윤이랑 다혜랑 단비는?”
“저기…….”
하솔이 우물쭈물하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다혜와 지윤과 단비가 쪼그려 앉아서 한데 모여 있었다. 손에 숟가락과 단팥을 든 채로.
“마, 단비야. 팍팍 스까바라.”
“맛있겠다, 멍.”
“이기 진짜 제대로 된 팥빙수제. 언니야도 퍼뜩 무이소.”
“므앙.”
아이들이 인공눈을 퍼먹기 시작하자 상호는 기겁해서 달려갔다.
“얘들아! 먹지 마! 먹는 거 아냐!”
“엥, 무면 안 되예?”
“그렇게 퍼먹으라고 만든 게 아니야! 저수지 물이야!”
“에이, 좀 묵는다고 안 죽습니더.”
“맛있어요, 멍. 선생님도 드세요.”
“제발…….”
이미 주변의 시선이 몰려들고 있었다. 상호의 옆을 지나가던 아이가 팥 뿌린 눈더미를 가리키며 엄마를 졸랐다.
“엄마, 저 누나들 눈 먹어. 나도 저거 먹을래…….”
“쉿, 이리 와. 이상한 누나들이야.”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상호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는 내공을 뻗어 눈더미를 치워버리고 아이들을 일으켰다.
“스키, 스키 타자, 얘들아. 먹을 거는 이따가 사줄게.”
“팥빙수로 뽕 뽑아야 하는디…….”
“므아으앙…….”
다혜는 못내 아쉬운지 단팥 봉지를 쪽쪽 빨았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어쨌든 다들 스키를 신었다. 오리처럼 뒤뚱뒤뚱 걷게 된 아이들이 상호의 뒤를 따라 리프트로 향했다.
줄을 서자 상호의 옆에 나빛이 다가섰다.
“네 명까지 같이 타는 거예요?”
“그런가 봐.”
그 말에 나빛이 상호의 곁에 꼭 달라붙었다.
낌새를 눈치 챈 아이들이 하이에나처럼 몰려들었다. 지윤, 태화, 은율, 다혜.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아이들을 밀어냈다.
“얘, 얘들아. 지금 우리 아홉 명이니까…… 선생님만 따로 탈게. 너희 넷씩 같이 타.”
“왜?”
“4, 3, 2로 나누면 되잖아요.”
태화가 눈을 부라리고 은율이 성큼 다가섰다.
키가 큰 은율이라 눈도 유난히 가까웠다. 상호는 그 조용하면서도 뜨거운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글을 쓰고 슬쩍 앞으로 치고 나갔다.
“앗! 선생님!”
“으델 가십니꺼, 이리 오이소.”
“어허, 얘들아. 사람 많은데 소란 피우면 안 되지.”
상호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아이들은 입술을 삐쭉이면서도 뒤로 물러났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까지 난동을 부리지는 못하리라. 상호에게는 참으로 다행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은 그냥 애들이랑 편하게 놀고 가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상호는 모르는 사람 세 명과 리프트에 올랐다.
그의 자리는 오른쪽 끝. 왼쪽에는 커플로 보이는 남녀가 한 쌍, 그리고 바로 옆에 사람이 한 명 앉아 있었다.
고글과 발라클라바 때문에 이목구비는 보이지 않았다.
‘……뭐지?’
그런데도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사람의 기척을 이루는 요소들. 숨소리. 미세한 습관, 버릇. 그 모든 것들이 상호에게 두 가지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친근함.
그리고 위험함.
‘……누구지?’
여자인 건 확실한데. 후드를 푹 눌러써서 헤어스타일도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기웃거리던 상호는 곧 착각이라 치부하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경치 좋네…….’
스키장 너머로 이어지는 눈 덮인 산맥. 가만히 보고 있자니 전쟁 때를 떠올리게 했다.
겨울에 민정과 함께 동굴에서 밤을 지냈던 기억.
‘누나도 보러 가야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뒤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퍼억
‘……끄응.’
그는 입맛을 다시며 뒤를 돌아보았다.
바로 뒤의 리프트에서 태화가 시치미를 떼며 먼 산을 돌아보는 중이었다.
“태화야.”
“나 아닌뎅?”
“다른 분들 계시잖아. 하지 마.”
“나 아니라니까.”
“에휴…….”
상호는 한숨을 푹 쉬고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옆에 앉은 커플이 그를 돌아보며 웃고 있었다.
“여동생이세요?”
“아, 아니요. 학교 제자예요.”
“아, 학교 선생님이세요? 제자들이랑 온 거구나.”
“네.”
그때 눈덩이 하나가 더 날아왔다.
퍼억
이번에 맞은 사람은 상호가 아니었다.
“…….”
옆에 앉아있던 여인의 머리가 앞으로 조금 숙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뒤통수에 묻은 하얀 눈가루.
상호는 그걸 보고 뒤를 돌아보며 눈을 부릅떴다.
“야, 임마!”
태화가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나, 나 아냐. 하솔이야!”
“저, 저 아니에요…….”
“어?! 그럼 누구지?! 오지윤인가 보다!”
“머라카노, 문디 가스나야.”
“몰라몰라몰라! 나 아냐! 진짜!”
“넌 진짜…… 하아.”
1학년 때부터 명중률 높이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3학년이 되어서도 사람을 잘못 맞히냐. 그렇게 일장 훈계를 하고 싶었지만, 놀러 오기도 했고 옆에 사람들도 많아서 참았다.
“너 내리면 봐.”
“……웅.”
태화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상호는 쏟아지는 한숨을 삼키고 옆의 여인을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저희 학생이 철이 없어서…….”
여인은 괜찮다는 듯 손을 살짝 저었다.
그 움직임마저도 상호에겐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살짝 느긋한 듯하면서도 인자한 느낌이 드는.
그러면서도 위험한.
‘뭐지…….’
고개를 기웃거리는데 갑자기 여인이 그의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응?’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갑자기 이 여자가 왜 이러는지.
하지만 다음 순간, 여인의 손이 허벅지를 주무르기 시작하자 그의 안색이 급변했다.
‘……!’
너무도 익숙한 손놀림.
얼어버린 상호에게 여인이 나직이 말했다.
“내리면 티 내지 말고 조용히 따라와.”
“…….”
“감히 날 떼어놓고 놀러 오다니…….”
고글 속의 눈이 부드럽게 구부러졌다.
“하기야 그런 발칙함이 젊은이의 특권이지. 안 그래?”
“…….”
돌이 된 상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고.
그런 그의 귀에 여인이 속삭였다.
“어른은 어른들끼리 놀자고, 강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