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화>
354. 팔면초가
거절하지 못했다.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런 눈으로, 그렇게 말을 해버리면.
세상 그 누구도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므아앙~.”
다혜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느아앙~.”
살짝 알딸딸하게 취한 듯, 흔들리는 웃음을 흘리며.
상호는 그런 다혜를 부축하며 멍한 눈으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미쳤지.’
애인도 있는 놈이 제자에게 술을 먹이고 고백까지 받다니.
누가 알기라도 하면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을 터였다.
‘미쳤지, 미쳤어…….’
그렇지만 도로 물릴 수도 없고. 그저 다혜가 술이 깨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혜와 함께 교문 안으로 들어섰다.
“므아~읍!”
“쉿, 쉿…….”
취기가 올랐는지 좀 크게 목소리를 흘린다. 상호는 다혜의 입을 황급히 막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학생도 교사도 대부분 집으로 돌아갔지만, 그래도 남아있는 몇몇이 소리를 듣고 깰 수도 있었다.
“세희 깰라. 조용히 들어가자.”
“므응.”
다혜는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소란을 멈췄다.
비틀거리는 다혜를 데리고 숙소 현관으로, 계단으로. 이윽고 방에 도착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안에서 자고 있는 세희와 태화가 깨지 않도록. 어차피 씻으면 깨기는 하겠지만.
신발을 벗고 외투를 벗자 다혜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
“아으.”
말이 되지 못한 옹알거림.
아까는 온 힘을 다해 말을 쥐어짜낸 걸까. 상호는 다혜의 속삭임을 해석하려고 애썼다.
“같이 씻자구?”
“느아아악!”
“……아니야? 그럼…… 먼저 씻으라구?”
“아으아으~.”
“아냐, 너 먼저 씻어.”
그 말에 다혜가 시선을 옆으로 피하며 배를 문질렀다.
“므아앙…….”
“아, 알았어. 금방 씻을게…….”
상호는 황급히 욕실로 달려 들어갔다.
* * *
“느아아…….”
다혜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 상호는 이미 이불을 깔아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침대에서는 세희와 태화가 자고 있었기에.
이불에 멍하니 앉아 있는 상호에게 다혜가 무언가를 들고 다가왔다.
“으아으.”
검은 비닐봉투.
제야의 종 직후에 잠깐 사라졌다가 나타났을 때 들고 있었던 봉투. 상호는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거 뭐야?”
“므흐흐…….”
다혜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뭐 이상한 거라도 들었나. 어리둥절해하는 상호의 뇌리에 다혜의 주민등록증이 떠올랐다.
오늘부터 성인.
‘……설마.’
그는 아니길 바라며 재차 물었다.
“혹시…… 같이 쓰는 거야?”
“므아!”
그렇다는 듯했다.
상호는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며 다시 물었다.
“혹시…… 후회하지 않기 위해 쓰는 거야?”
“므아!”
“혹시…… 내일 아침 후회하지 않기 위해 꼭 써야 하는 물건이야?”
“므아아!”
그럼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뿐인데.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는 다혜를 바라보며 점차 표정이 굳어갔다.
그때 다혜가 비닐봉투에 손을 넣어 그 물건을 꺼냈다.
“아으!”
“……응?”
숙취해소제.
“…….”
상호는 자신의 관념이 뒤틀려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고마워.”
“므히히히~.”
“얼른 자자. 피곤하다…….”
“아웅.”
다혜가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그의 곁에 누웠다.
* * *
꿈속에서도 꿈을 꿀 수 있을까.
그 해답을 알지는 못했지만, 상호는 꿈속에서도 자신이 잠을 자고 있다고 느꼈다.
그런 와중에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머리를 어루만졌다.
“바람둥이야.”
다정한 목소리.
“또 애인이 늘었구나.”
또 희미한 목소리.
가냘픈 의식으로도 그리움이 샘솟아 마음을 푹 적셨다.
“내가 이 일을 끝내고 난 후에는 얼마나 늘어 있을까……. 그래도 너만 좋다면야. 애인이 몇 명으로 늘든…… 나는 좋지.”
상호가 들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변명을 했겠지만, 그는 지금 자고 있었다.
부드럽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너는 네 행복만 생각해. 널 아프게 하는 것들, 널 힘들게 하는 것들…… 전부 내가 부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산 사람이 죽은 사람에게 듣기에는 너무 염치없는 내용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상호의 안색은 조금 밝아졌다.
애틋한 손길이 상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또 왔나 보다. 또 싸우러 가야겠어. 싸워도 싸워도 끝이 없네……. 그래도 걱정 마.”
절대로 걱정시키지 않으려 하는.
“늘 그랬듯 이겨낼 테니까.”
늘 그랬듯 믿음직한 목소리.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그 말을 끝으로 목소리는 떠났지만, 손길은 남았다.
한참 후에 상호가 꿈에서 깨어나 기억을 더듬었을 때에는, 침대에 누운 세희가 팔을 늘어뜨린 채로 상호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 * *
술이 깼다.
숙취가 심하진 않았다. 숙취해소제 덕이기도 했고, 애초에 조금 마시기도 했고. 다혜는 아직 자고 있었지만, 상호는 태화를 데려다주러 일어나야 했다.
몸을 일으켜 이불에 앉은 상호에게, 침대 위에 누운 태화가 데굴데굴 굴러와 코를 킁킁거렸다.
“아빠 냄새.”
“……아빠 아냐.”
“쌤도 딸 칠거야?”
“안 쳐, 임마.”
“그치만 맨날 딱밤 때리는걸.”
“내가 딱밤을 때리는 게 아냐. 네가 내 손가락을 부르는 거지. 이렇게.”
“아야! 우씨…….”
“세수하고 옷 입어.”
그는 완전히 일어나서 태화를 데려다줄 준비를 했다.
* * *
태화는 가게에 데려다줬고, 세희는 편의점 알바를 갔고. 그렇게 방에는 상호와 다혜만 남았다.
침대에 누워 TV를 보는 상호의 곁에 다혜가 찰싹 달라붙었다.
“므아.”
흐뭇한 얼굴로, 배시시 웃으면서.
상호는 팔뚝에 닿는 다혜의 몸을 느끼며 진땀을 흘렸다.
‘말해야 하는데…….’
잘못 생각한 것 같다고.
너는 학생이고, 나는 선생이라고. 그 사실이 변하진 않는다고. 너는 내겐 어린애고, 어제는 얼떨결에 대답해 버렸다고.
하지만 다시 잘 생각해 보면.
‘……얘랑은 다섯 살 차이구나.’
그와 예경의 차이보다 더 적었다. 다혜는 세희보다 한 살 많으니까.
팔뚝에 느껴지는 몸은 분명 조그마한데, 가늘고 여리고 얇은데. 이미 어른이라는 사실을 상호는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어쨌든 할 말은 해야 했다.
“다혜야.”
“므앙.”
다혜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그를 끌어안았다.
“아으아으.”
“저기 있잖아, 선생님이 할 말이 있는데…….”
“아으~.”
“우리, 역시 사귀기는 좀 힘들 것 같…….”
상호의 사타구니로 다혜의 손이 날아왔다.
가질 수 없으면 부숴 버리겠다는 걸까. 상호는 기겁하며 다혜의 손을 잡았다.
“들어봐! 들어봐! 우리 나이 차이도 좀 있고…….”
“느아아악!”
하지만 다혜는 다른 손으로 상호의 바지를 벗겨버렸다.
졸지에 팬티 바람이 된 상호는 황급히 이불로 하체를 가렸다.
“야, 다혜야. 그러니까 선생님은 너한테 이런 거 못해준다니끄아아악!”
“므아아악!”
상호의 위에 올라탄 다혜가 그의 가랑이를 엉덩이로 찍어버렸다.
진심을, 순정을 가지고 논 대가가 이렇게 큰가. 상호는 가랑이를 부여잡고 숨을 헐떡였다.
다혜는 몸이 가벼운 편이었지만, 그만큼 완충부도 적었다.
“다……혜야, 선생님 아들딸들…… 죽일 뻔…….”
“느앙.”
“그러니까 네 아들딸이 아니고……. 선생님은 너랑 못 사귀니까…….”
“크르…….”
“아니, 아니! 다혜야, 뿔! 뿔!”
다혜의 머리 양옆에서 뿔이 살짝 솟았다가 사라졌다.
상호는 주홍빛이 살짝 감돌았던 다혜의 눈을 마주하고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았다.
“다혜야. 일단 진정하고…… 잘 들어 봐.”
“므앙.”
“일단 내 눈에는 네가 애로 보이거든?”
그 말에 다혜가 볼을 붉히며 몸을 배배꼬았다.
“므웅…….”
“……아니, 뭔가 착오가 있나 본데……. 에로가 아니라, 애, 로, 보인다고.”
“……느아아앙!”
다혜는 자신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항변했다. 항변이라고 해봤자 소리 지르는 게 다였지만.
그 주장의 근거는 태화보다도 작았다.
“잘 봐. 다혜 너랑 나랑 키도 20센치 넘게 차이나지?”
“므웅.”
“효은이는 너보다 10센치 가까이 크단 말야. 애초에 나보다 한 살 위고……. 분명히 말하는데, 선생님 취향은 연상이야. 지금까지 사귄 사람, 같이 잔 사…… 아니 내가 뭐라는 거야. 어쨌든 애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다 나보다 연상이었어.”
“……꾸우웅.”
다혜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다혜 네가 매력이 없다는 게 아니라, 내 취향이 많이 확고하다…… 그런 뜻으로 알아들어 줬으면 좋겠…….”
상호는 말을 맺으려다가 삼켰다.
다혜의 동그란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으.”
말 못 하는 것도 서러운데.
얼마나 진심인지 설명하지 못 하는 것도 서러운데. 밀어내는 변명들을 반박하지 못하는 것도, 그냥 제 감정이 어떤지조차 설명하지 못하는 것도 서러운데.
다혜는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으…….”
“…….”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따지고 보면 원인은 그 자신이었다. 빠따로를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준 그의 잘못.
그가 꼬아버린 매듭이니, 그가 풀어야 했다.
“다혜야.”
다혜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일단 이건 알아줘. 제일 큰 이유는 네가 내 학생이고 우리 학교 학생이라서야. 그래서…… 사귈 수 없어. 이건 안 바뀌어.”
단호한 대답에 다혜는 풀이 죽었다.
“아으…….”
“대신에.”
“……므아?”
상호는 다혜의 휘둥그런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졸업한 후에. 그리고 되도록이면 말로 네 생각을 전할 수 있게 됐을 때…… 그때 다시 한번 말해 줘. 그럼 그땐……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
“……아으.”
다혜가 눈을 깜작였다.
그러다가 씩 웃고는, 앞으로 푹 엎어져 상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으아으.”
상호는 다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냥 안아주는 것 정도는 뭐…….’
그때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다혜와 몸을 겹치고 있던 상호는 현관에서 걸어 들어오는 세희를 발견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선생님?”
둘을 본 세희의 눈동자가 살벌하게 빛났다.
“뭐 하고 계세요?”
“……운동.”
상호는 다혜의 위치를 슬쩍 아래로 내리고 무릎으로 비행기를 태우듯 들어 올렸다.
세희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떡방아도 운동이 돼요?”
“……아니! 세희야, 그게 아니야!”
“저도 오늘부터 운동 좀 해야겠어요.”
“아니,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 근데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오늘만 시간 바꾸기로 했어요. 저녁이 펑크 나서.”
“그렇구나…….”
상호는 한숨을 쉬며 다혜를 옆으로 밀어내고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발목 근처에서 뭔가가 걸리적거렸다.
고개를 기웃하며 이불을 들추자 다혜가 벗겨놨던 바지가 드러났다.
“…….”
“선생님.”
세희가 그의 팬티를 흘겨보았다.
“언니 성인 됐다고 바로 달려들으신 거예요?”
“…….”
“하루도 안 됐는데?”
“…….”
“뭐, 이해해요.”
가까이 다가온 세희가 상호의 등을 토닥였다.
“수녀님도 안 계시는데, 바로 옆에 제가 있으니까…… 계속 쌓이기만 하신 거죠?”
“…….”
“그런데 선생님은 저를 차마 건드릴 수가 없어서…… 제일 가까이 있는 성인한테 푼 것뿐이죠? 저 때문에 쌓인 욕구를?”
“…….”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이해해요.”
어쩔 수 없었음을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듯, 한없이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하지만 예경의 것과는 색이 달랐다.
전혀, 절대로. 세희가 말한 이유들 때문이 아니었지만.
상호는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치만…… 선생님이 이렇게 욕구를 못 참는 분이신 줄은 몰랐어요. 남자들은 다 그래요?”
“…….”
“선생님도 남자였던 거네요.”
“…….”
“이러다간 발정 난 개처럼 여기저기 갈겨대고 다니시겠어요.”
“…….”
“1년만 기다리세요.”
세희는 상호의 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제가 철저하게 관리해드릴 테니까.”
“…….”
상호는 바지도 올리지 못한 채로 굳어 버렸다.
오늘로부터 딱 1년.
졸업을 하는 아이가 여덟.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이, 팔방에서 그의 숨통을 옥죄어 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