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화>
353. 첫 잔
뎅──
끝과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
상호는 세희와 태화에게 양 팔을 내어준 채로 제야의 종을 바라보았다.
“3학년이네.”
“웅.”
“네.”
태화가 세희를 째려보았다.
“뭐야, 너한테 한 말 아니거든?”
“무슨 자신감이야?”
“쌤은 나한테 말한 거야. 그치? 그치?”
“어이가 없네.”
세희는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콧방귀를 뀌고는 상호의 곁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보다 조금 더 옆에서는 나빛이 입술을 삐죽 내민 채로 세희와 태화를 흘겨보는 중이었다.
그 뒤에 선 나로가 나빛의 양 볼을 검지와 엄지로 잡아당겼다.
“우리 동생은 왜 이렇게 삐졌을까?”
“……몰라도 돼.”
“입술이 아주 떨어져 나가려고 하는데?”
“몰라도 된다구.”
나빛이 팩 고개를 돌렸다.
상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지윤과 정애가 종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나디아는 그 사이에서 사진을 찍고 있고.
‘……어라?’
다혜는 어디 갔을까.
타종이 끝나가자 광장이 한산해지기 시작했다. 어깨가 밀릴 정도로 붐비던 인파도 널찍이 흩어졌다. 그런 와중에도 다혜의 모습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애가 미아가 됐나. 상호의 등에 진땀이 흘렀다.
‘어딜 간 거지……?’
그때 저 멀리서 다혜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편의점이라도 들렀다 온 걸까. 한 손에 든 검은 비닐봉투가 털레털레 흔들리고 있었다.
상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혜야, 어디 갔었어. 말하고 가야지…….”
“아으!”
다혜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눈을 치켜떴다. 자기는 애가 아니라는 듯이.
“으아으으아아!”
“알았어, 알았어……. 그래도 어디 갔는지 말해야 안심하고 기다릴 거 아냐.”
“느아아아!”
“아니, 알아, 다혜 네가 어디 가서 당할 애는 아닌 거…….”
“므흐흐흥.”
다혜는 금방 풀어진 얼굴로 콧대를 세우다가, 곧 하품을 하며 세희에게 몸을 기댔다.
“흐아아암…….”
“졸리구나.”
상호는 아이들을 쓱 둘러보았다.
“집에 가자. 어머님도 이제 가서 쉬셔야 하니까…….”
“내가 젤 열심히 일했는뎅.”
“그래. 너도 가서 쉬어. 푹 쉬고 또 출근해.”
“아아아아악! 출근 얘기 하지 마! 왜 그래!”
그는 아이들과 나로, 그리고 정애와 함께 차를 향해 걸었다.
* * *
“빨리 씻고 자고 출근해.”
“출근 얘기 하지 말라니까아아!”
태화가 상호의 등을 뿔로 들이받고는 침대로 쪼르르 달려가 몸을 던졌다.
“내일은 휴일이야!”
“그런 말씀 안 하시던데.”
“1월 1일이잖아!”
“넌 휴일이면 숨도 안 쉬냐? 씻고 누워, 임마.”
상호는 한숨을 푹 쉬고 세희와 다혜를 향해 돌아섰다.
“자자, 얘들아. 늦었다.”
“저 방에서 씻고 올게요.”
“응.”
창턱을 넘은 세희가 기숙사로 달려갔다.
상호도 내일 아침에 태화를 데려다주려면 일찍 일어나야 했다. 그는 씻기 위해 욕실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의 소매를 잡았다.
“므아.”
뒤를 돌아보니 다혜가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다혜야? 왜?”
“아으으아.”
다혜는 욕실로 향하려는 그를 자꾸 잡아끌었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 곰곰이 고민하던 상호의 눈동자가 덜컥 흔들렸다.
“……같이 씻자고?”
“……므아?”
순간 다혜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게 아닌가. 상호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하자마자 뺨에 따귀가 날아왔다.
쫘악
“느아아앙!”
“미안…….”
그런 뜻일 리가 없는데. 상호는 자신의 비틀어져 버린 관념을 원망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럼 뭐야……. 씻지 말라고?”
“므아!”
“왜?”
그렇게 묻자 다혜가 볼을 붉히며 웃었다.
“므히히히~.”
말을 할 줄 알았더라도 언어는 아니었을, 그러나 무언가 의도가 담긴 웃음.
상호는 그 뜻을 알지 못해 고개를 기웃거리며 냉장고로 걸어갔다.
“그래. 나중에 씻을게.”
야식이나 먹을까 해서 냉장고 문을 열려는데, 거기에도 다혜가 끼어들어 냉장고 문을 닫아버렸다.
상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먹지도 마?”
“므아!”
“알았어…….”
그럼 그냥 자야겠다. 상호는 침대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런데 누우려는 순간 다혜가 그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아으아으아!”
“잠도…… 자면 안 돼?”
“므아!”
다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뭘 잘못했다고 씻지도 먹지도 자지도 못하게 하는 걸까.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그럼 난 뭐 해……?”
“므앙~.”
다혜는 웃으며 상호의 머리카락으로 손을 뻗었다.
* * *
‘……꼴이 말이 아니군.’
상호는 작게 땋인 머리카락을 올려다보며 침음했다.
걸터앉은 침대에는 태화와 세희가 자고 있었다. 잘 때는 풀어놓는 세희의 기다란 머리카락이 태화의 볼에까지 묻어 있었다.
아이들을 돌아보는 그의 등을 누군가가 살살 토닥였다.
“므아.”
다혜가 귀에 속삭였다.
그리고 소매를 잡아끄는 손.
“아으아으아.”
“……따라오라고?”
“우앙.”
상호는 슬그머니 일어나 땋인 머리를 풀어버리고 다혜를 따랐다.
다혜가 향한 곳은 현관이었다.
“나가자고?”
“므앙.”
“늦었는데…….”
둘은 외투를 챙겨 입었다.
시간은 새벽 1시. 어디를 가기에는 조금 늦은 시간인데. 현관을 나서는 다혜의 표정에는 장난기가 가득 어려 있었다.
‘뭐가 그렇게 좋을까…….’
상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1월 1일의 밤공기는 차가웠다. 금세 코가 빨개진 다혜는 이따금씩 상호를 향해 벙긋벙긋 웃었다. 그게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상호는 마냥 좋았다. 다혜가 웃는 게.
숙소를 나와 교문을 지나면, 한창 시끄러운 중심상가가 멀리에 보였다. 12월 31일을 아직 보내지 못했거나 벌써부터 1월 1일의 휴일을 즐기는 사람들.
다혜는 그쪽을 향해 상호를 끌고 갔다.
“어디로 가는 거야?”
“므앙.”
상호는 묻기를 포기하고 묵묵히 따라갔다.
상가의 가장자리, 주거지역과 상업지역이 겹치는 곳에. 빨갛고 반투명한 천막으로 지어진 포장마차가 보였다.
겉에 붙은 메뉴판을 읽던 상호의 표정이 점차 굳어갔다.
닭발, 오돌뼈, 파전, 계란말이, 홍합탕, 골뱅이찜.
‘분식집이 아닌데……?’
떡볶이나 오뎅, 순대가 아니라 소주를 마시러 오는 곳.
상호는 당황하며 다혜를 돌아보았다.
“……응?”
“아으.”
다혜가 카드 같은 것을 흔들고 있었다.
“므아, 므아.”
주민등록증.
잊고 있던 사실이 상호의 머리를 강타했다.
“……오늘부터 성인이라고?”
“아으~.”
다혜가 정답이라는 듯 웃었다.
그러고는 이제 거칠 것이 없다는 듯, 상호의 뒷덜미를 잡아채고는 포장마차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아으! 아으!”
“다혜야, 다혜야, 잠깐…….”
“으아아으아응앙아앙아!”
“넌 아직 학생…….”
“느아아악!”
“성인이지만…….”
“느아아아아아악!”
“학생……!”
상호는 결국 포장마차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말았다.
* * *
쪼르륵……
투명한 잔에 투명한 술이 담겼다.
그 술을 따르는 다혜의 투명한 눈빛을, 상호는 괜스레 잔을 만지작거리며 슬쩍 훔쳐보았다. 똑바로 마주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워서.
‘벌써부터 제자한테 술을 받을 줄이야…….’
아직 졸업시킨 제자가 아무도 없는데.
세상일은 참으로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상호는 다혜에게서 술병을 받아들었다.
잔에 따라주는 속도가 많이 느렸다.
“포장마차에 와 보고 싶었어?”
“으아으으.”
“그래, 그래.”
대화는 일방통행이었다.
상호는 탁자에 놓인 안주를 쓱 훑었다. 계란말이, 홍합탕, 닭발. 다혜가 먹기에는 양이 적었다.
“더 시켜야지.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므아웅.”
“파전 세 장 주세요.”
그는 주문을 마치고 잔을 들었다.
“첫 잔이겠네. 그치?”
“므아.”
“첫 짠이기도 하고?”
“므앙?”
“……아니야. 미안해. 잘못했어.”
“아으.”
다혜는 피식 웃고는 상호가 든 잔에 잔을 부딪쳤다.
상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한껏 돌리고 잔을 비웠다. 이 술을 즐기기가 썩 쉽지 않아서.
다혜도 잔을 쭉 비우더니, 헛 하고 숨을 들이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화아.”
“왜?”
“화아아아!”
“화~해?”
“크아아아~.”
“벌써 맛이 들렸구나.”
상호는 쓴 술을 삼키고 쓰게 웃었다. 그래도 안주는 맛이 좋았다.
“계란말이에 뭐가 많이 들었네. 햄이고 치즈고…….”
“아으아으.”
“계란많이가 아니라 딴거많이네.”
“꾸우…….”
“……미안.”
말이 안 통하니 실없는 농담밖에 안 나왔다.
평소보다 마시는 속도가 느렸다. 남들하고 마시던 것처럼 마셨다간 다혜가 금방 뻗을 게 뻔했기에. 특히 얼마 전에 해련과 폭주를 했던 기억이 몸에 남아 있어서, 상호는 의식적으로 속도를 조절했다.
그때 다혜가 상호의 손등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므아.”
“응?”
“아으.”
“더 시키자고?”
“아──으.”
아니라는 것 같았다.
“그럼?”
“므아.”
“미안, 잘 모르겠어…….”
“아으아으.”
그거라는 것 같았다.
상호는 당황해서 멀거니 다혜를 바라보다가 그 뜻을 깨달았다.
“아무 이야기나 해 보라고?”
“아으~.”
맞다는 것 같았다.
애한테 무슨 이야기를 해 줘야 하나. 뭘 물어봐도 대답을 못하는데. 멍한 머릿속을 열심히 굴리며 상호는 안주를 우물거렸다.
다혜는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으.”
입을 연다고 해서 말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신 다혜의 주머니에서 뭔가가 나왔다.
“아으, 아으.”
“응?”
상호는 다혜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을 바라보았다.
작은 쪽지.
“그게 뭐야?”
상호의 말에 다혜가 갑자기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상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성을 냈다.
“므아아악!”
“왜, 왜……?”
영문을 몰라 당황하는데, 눈에 쪽지의 글귀가 들어왔다.
-나랑 사귈래?
‘이게 뭐…….’
순간 상호의 머릿속에 지난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빠따로 속에 들어 있던 쪽지들.
‘……으아아아아악!’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게 다혜에게도 갔던 건가. 하긴 같은 가게에서 같이 산 빠따로들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하필 이런 내용일 줄은 몰랐다. 상호는 기겁하며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런 그에게 다혜가 잔을 들이밀었다.
“아으.”
“저, 저기 다혜야. 그거는 내가 쓴 게 아니고…….”
“아으.”
잔에서 소주가 찰랑였다.
“아으아으.”
“……응?”
“느아앙!”
다혜는 계속 잔을 들이밀었다. 빨리 받으라는 듯.
그러더니 상호가 늦장을 부리자 이번엔 쪽지를 내밀었다.
“아으.”
“다혜야, 그러니까 이건…….”
“아으.”
잔.
쪽지.
상호는 그제서야 다혜가 왜 자꾸 잔과 쪽지를 밀어붙이는지 알아차렸다.
“……이거 마시면 너랑 사귀는 거라고?”
“아으.”
다혜가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상호의 등에 진땀이 배어났다. 효은의 존재를 다혜가 모르지 않을 텐데.
“안 받으면…… 어떻게 되는데?”
다혜의 꽉 쥔 주먹에 붉은 강기가 피어올랐다.
“므앙~.”
“…….”
소녀의 순정을 가지고 논 대가일까.
하지만 상호에게는 이미 애인이 있었다.
아니, 애인이 많았다.
‘한 명쯤 더 는다고 티 안 날 것 같기도 하……기는 개뿔이!’
절대 안 된다. 상호는 눈을 부릅뜨고 다혜의 잔을 밀어냈다.
하지만 다혜에게서 뻗어 나온 강대한 기운이 상호의 손바닥을 역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끄응…….’
내공을 꺼내어 맞붙이면 이기기야 하겠지만, 진심을 진심으로 밀어낼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상호는 설득을 시도했다.
“다혜야, 너는 아직 학생이고…… 나는 선생이고…….”
“아으.”
“물론 네가 성인이긴 하지만, 나는 애인이 있고…….”
“아으!”
“집에 없다고 해서 없는 게 아니야! 엄연히 애인이…….”
“사……으…….”
“응?”
상호의 눈이 번쩍 뜨였다. 방금 다혜가 뭐라고 말을 한 것 같아서.
“다혜……야?”
“사……그으…….”
다혜는 떠듬떠듬 힘겹게 말을 지었다.
“사……귀이……자매……여…….”
“…….”
“왜…… 말……바꺼…….”
“…….”
“아저……씨……발……뺌하지…… 마러…….”
중간에 욕 같은 게 들린 것 같았지만, 상호에게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는 말이 되지 못한 멍청한 소리만 새어나오고 있었다.
“어…….”
다혜가.
했다.
말을.
“……어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