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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여고의 남선생-352화 (352/501)

<352화>

352. 제야

“……끄응.”

상호는 가슴을 누르는 묵직한 무게감에 잠을 깼다.

방은 아직 어두웠다. 창밖에선 서늘한 겨울의 새벽이 조용히 입김을 불어 유리에 투명한 꽃 모양 서리를 묻히고 있었다.

왜 이런 시간에 깼을까.

아래를 내려다보니 태화가 그의 배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쿠아아…….”

‘잠버릇도 참…….’

깬 김에 물이나 마셔야겠다. 그는 주방을 향해 내공을 뻗어 컵에 물을 받았다.

침대 옆에는 세희와 다혜가 누워서 자고 있었다. 다혜는 꿈에서 아리라도 만났는지 세희의 뺨을 신명나게 빨아댔다.

“쮸와아앙.”

“으으…….”

세희는 아마 악몽을 꾸는 듯했다. 상호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쓴웃음을 짓고 물을 쭉 들이켰다.

시계의 시침은 5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가 일어나기에는 아무래도 좋은 시간이지만, 아이들이 일어나기에는 좀 이른 시간.

단번에 비운 컵을 내려놓고 태화를 슬그머니 밀어내는데, 태화가 웅얼거리며 그에게 더욱 달라붙었다.

“아빠…….”

“응?”

“애아빠…….”

“…….”

“날카로운 둘째 각……. 쿠울…….”

상호는 문득 궁금해져서 고개를 숙이고 속삭였다.

“첫째 이름이 뭐더라?”

“도…….”

“도?”

“강도…….”

“…….”

그는 태화를 치우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 * *

12월 31일.

1년의 끝. 새로운 시작의 바로 전날. 그리고 상호에게는 잊으면 안 되는 약속이 있는 날이기도 했다.

“태화야.”

“응?”

“오늘은 지윤이네 집에서 자.”

“왜?”

“나 오늘 약속이 있어서 못 데리러 온다.”

“우씨…….”

조수석에 앉은 태화가 툴툴거렸다.

“꼬맹이들이랑 놀아주기 힘든데……. 그럼 그만큼 초과근무로 쳐 줘.”

“노는 게 어떻게 근무야, 임마.”

“나는 노는 게 아니란 말이야!”

“알았어. 두 시간 정도는 쳐 줄게.”

“……흐음.”

그 말에 태화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생각에 잠겼다.

“근데 무슨 약속인데?”

상호는 입맛을 다셨다. 말해주면 화낼 게 뻔해서.

“있어.”

“밤에 뭘 하길래? 누구랑 제야의 종이라도 보러 가?”

“……아니.”

“맞구나?”

태화가 샐쭉한 눈빛으로 상호를 흘겨보았다.

“잘 보고 오셔.”

“아니라니까.”

“나는 평~생 쌤이랑 고등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는 제야의 종소리 못 듣겠네. 인생에 다시는 안 돌아올 시간인데 말이야. 뭐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쌤은 나 싫어하니까.”

“야, 앞으로 할 거 많잖아…….”

“흥. 오빠는 나 미워하잖아.”

토라지는 꼴이 꼭 여동생이다. 상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푹 쉬었다.

원하는 게 뭔지는 뻔했다.

“……열두 시간 더 일한 걸로 쳐 줄게.”

“아싸~.”

목적을 달성한 태화가 키득거리며 상호의 어깨에 볼을 비볐다.

* * *

그렇게 태화를 지윤의 집에 데려다주고. 상호가 향한 곳은.

“안녕하세요~.”

나빛이 문을 열며 방긋 웃었다.

“일찍 오셨네요~. 식사는 하셨어요~?”

“아니.”

“잘됐다~.”

주방 쪽에서 이미 어두운 빛깔의 공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밥 같이 먹어요~.”

“뺙──. 뺙──.”

나빛의 머리 위에서는 혁구가 독가스 맡은 카나리아처럼 좌우로 헤드뱅잉을 하고 있었지만, 상호는 어쩔 수 없다 여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유연이 만든 음식이 있을 테니, 아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같이 먹자. 근데 가족들은?”

“부모님은 약속 가셨구~. 집에는 오빠랑 나디아만 있어요~.”

“그럼 식사는…… 나빛이 너 혼자 만들었어?”

“네~.”

나빛이 환하게 웃었다. 매캐한 연기를 몸에 두른 채.

그 매캐한 연기가 상호의 눈앞을 캄캄하게, 눈물이 나게 했다.

“오빠가 도와준다고 했는데~. 오빠는 저보다 요리를 못해서요~.”

“…….”

“그냥 제가 혼자 다 했어요~.”

“…….”

인생이 고되다.

상호는 당장 발을 돌려서 치킨을 사오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김치는 있지?”

“제가 담갔어요~.”

“어머님 김치는……?”

“부족하면 꺼내다 드릴게요~.”

“그래…….”

* * *

“야~. 상호야~.”

나로가 화장실 문을 두들겼다.

“아직도 변기 밥주냐~.”

“쓰읍……. 너희 집 화장실 두 개잖아.”

“나디아가 들어갔나 봐.”

“……금방 나갈게.”

오후 3시가 되도록 이 지경이었다.

뒤처리를 하고 밖으로 나가니 창백한 표정의 나로와 걱정 가득한 표정의 나빛이 서 있었다. 나로는 바로 화장실로 달려 들어가 문을 닫았다.

“선생님…….”

나빛이 울먹이며 성력 담긴 손으로 상호의 배를 쓸었다.

“죄송해요…….”

“아냐, 괜찮아.”

“다음부턴 밥에 설탕 안 넣을게요…….”

“그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나빛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체내의 독이 전부 해독되기 전에는 밖에 나가기 힘들 것 같았다. 아마 12시까지는 나을 거라 생각하지만, 종을 가까이서 보려면 한두 시간 전에는 미리 가 있어야 할 텐데.

“나빛아.”

“네?”

“우리 그냥 제야의 종은 티비로…….”

상호의 배를 쓸던 나빛의 손이 멈췄다.

“왜요?”

창밖의 겨울보다 서늘한 목소리.

이게 그렇게 못할 말인가. 상호는 덜덜 떨며 자신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제야의 종은…… 지금까지도 많이 봤고…… 앞으로도 많이 볼 거고…….”

“저는 선생님이랑 지내면서 하나 깨달은 게 있어요…….”

나빛의 눈빛이 창처럼 상호를 찔렀다.

“뻥은 뽑을 수 있을 때 뽑아야 해요…….”

“뽕이겠지…….”

“뽑을 수 있을 때 뽑지 않으면…… 다른 애들한테 다 빼앗겨버려요…….”

상호의 배에 얹힌 나빛의 손에서 성력이 태양처럼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아직도 배가 아프세요……?”

“다…….”

상호의 눈이 덜덜 떨렸다.

“……다 나았어.”

“정말이죠……?”

“으응…….”

“헤헤헤…….”

나빛이 상호의 품에 얼굴을 폭 묻었다.

“나디아는 배탈 난 것 같으니까 둘이서만 가요.”

“아니……, 나디아도 한국에서 처음 맞는 새해인데……. 잠깐만.”

상호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나빛이 너 설마……?”

“네?”

나빛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천진난만하게 눈을 깜빡였다.

“왜 그러세요?”

“…….”

나디아와 나로에게 일부러 배탈을 일으킨 거 아니냐.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상호는 두려움에 입을 열지 못했다.

‘에이, 아닐 거야. 나빛이가 그럴 리가…….’

혼란에 빠진 상호에게 나빛이 생긋 웃었다.

“밖에서 조금 늦게 저녁 먹고, 종 보러 가는 거예요~.”

“……으응.”

“다른 애들 부르시면 안 돼요~.”

“응…….”

상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 * *

“회복!”

나디아가 은은한 금빛이 도는 손을 번쩍 들었다.

“완료!”

“……와아~.”

나빛이 살짝 시무룩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나디아도 성력을 쓸 수 있다는 걸 잊고 있었을까. 상호는 나빛의 눈치를 보며 같이 박수를 쳤다.

치료를 받은 나로는 그제서야 안색이 좀 밝아졌다.

“아이고, 이제 살겠네. 내장이 다 쏟아지는 줄 알았어…….”

“약손이 엄마 손이다! 나는 네 엄마다!”

“어순이 이상한데…….”

그래도 학원에 다닌 덕인지 한국어가 늘긴 했다.

어쨌든 이렇게 넷이서 갈 수 있게 되었다. 집 밖에 나가자 수행원들이 운전 겸 경호를 하러 다가왔지만, 나로는 상호가 있으니 괜찮다며 수행원들을 즉석에서 퇴근시켰다.

상호는 운전석에 올라 뒤를 돌아보았다.

“뭐 먹고 싶어? 나빛이랑 나디아.”

“한식.”

나디아가 파란 눈을 깜작였다.

“한식 오늘 먹지 않았다.”

“아까 먹지 않았어?”

“오전의 기억은 나에게 없다! 사라졌다!”

“애초에 밥이 아니었지.”

나로의 맞장구에 나빛이 입술을 샐룩였다.

“선생님은 밥 드셨어. 다른 거 먹고 싶으실 거야.”

“그러면…….”

상호는 은근슬쩍 핸들을 돌렸다.

“선생님이 아는 가게로 갈까?”

“아시는 곳이요?”

“응. 만두랑 국수랑 맛있게 하는 데가 있는데…… 거기로 가 보자.”

“네.”

“그 전에 어디 좀 들르고.”

차가 익숙한 방향을 향했다.

* * *

“어서오이…….”

두건과 앞치마를 두른 지윤이 입구를 보고 눈을 끔뻑였다.

“……가들도 알바 시킬라고예?”

“아니, 그냥 먹으러 왔어.”

상호의 곁에는 나로와 나빛, 나디아, 그리고 세희와 다혜가 서 있었다.

지윤은 나빛의 입술이 두루미처럼 댓 발 나와 있는 것을 보고는 실소를 흘렸다.

“나빛이 니 와 그라노.”

“……몰라.”

“둘만의 데이트가 방해를 받았나?”

“모른다구.”

나빛은 픽 토라진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좁은 가게라 식탁이 몇 개 없어도 복작복작했다. 상호는 탁자 두 개를 붙이고 의자를 몇 개 더 끌어와 아이들을 앉히고 자리를 잡았다.

“먹고 싶은 거 시켜…… 엥?”

다혜가 벌써 무언가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식탁엔 음식이 없는데.

상호는 어리벙벙한 눈으로 다혜를 바라보았다.

“다혜야?”

“므앙.”

“뭐 먹고 있는……?”

그때 뒤쪽의 테이블에서 다른 손님들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야, 만두를 그새 두 개를 먹었냐?”

“아니? 손도 안 댔는데?”

“뭐? 나도 안 먹었는데?”

“…….”

상호는 못 들은 척하고 서둘러 메뉴판을 살폈다.

“지윤아.”

“아, 예. 시키시소.”

“만둣국 다섯이랑, 국수 둘이랑…… 쫄면 세 개. 그리고 만두도 세 판. 일단 이렇게 해 줘.”

“예에~. 태화야, 육수 일곱 올려놔라잉~.”

“또 왔어?!”

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른 태화가 뛰쳐나왔다. 손에 든 국자에서는 국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테이블이 몇 갠데 사람이 어떻게…… 뭐야! 왜 다 거기 있어!”

“육수나 후딱 올리라, 임마. 손님을 기다리게 하믄 우짜노.”

“야, 천세희! 니가 와서 도와!”

“난 오늘 알바 하고 왔어.”

“의리없는 년…….”

태화는 툴툴거리며 국자를 들고 주방으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빛이 상호를 돌아보았다.

“태화 여기서 일해요?”

“응, 내가 시켜서.”

“우와…….”

나빛이 갑자기 일어나서 주방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별생각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상호는 몸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기겁하며 나빛을 쫓았다.

“나빛아! 나빛아! 이리 와! 안돼!”

“네? 왜요? 주방 구경하고 싶어요…….”

“안 돼! 여기 지윤이 어머님 가게야! 아무것도 건드리지 마!”

“저도 여기서 일해 보고 싶어요…….”

“네 오빠한테 식당을 하나 사 달라고 해! 여기는 안 돼!”

“여기가 좋은데…….”

나빛은 결국 상호에게 붙들려서 주방에서 빠져나왔다.

하마터면 1월 1일 신문을 단체 식중독으로 장식할 뻔했다. 상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빛과 함께 자리로 돌아왔다.

“나빛아, 다른 사람 주방에는 함부로 가지 마……. 알았지?”

“네…….”

얼마 후 지윤이 시킨 음식을 들고 왔다.

다혜 앞에는 만둣국과 만두, 국수와 쫄면이 한 그릇씩 놓였다. 배가 많이 고팠을까, 다혜는 만두를 무슨 푸딩처럼 목구멍으로 술술 넘겨버렸다.

“앙냠냠.”

“천천히 먹어, 다혜야…….”

“아우웅.”

빵빵하게 부푼 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게 꼭 다람쥐 같다. 상호는 피식 웃고는 숟가락을 들었다.

국수를 먹던 세희가 상호와 눈을 마주쳤다.

“맛있어요.”

“그치?”

“약간 삼삼한 게 혜소도 좋아했을 것 같은데.”

“…….”

상호는 그 말을 듣고 슬그머니 핸드폰을 꺼냈다.

매일밤 효은에게 문자를 보냈지만, 효은은 읽기만 하고 답장은 보내지 않았다. 못마땅해도 어쩌랴. 씹어도 계속 보낼 수밖에.

그는 만둣국을 찍어 효은에게 전송했다.

-야 이거 형수가 만든 거거든

-다음에 같이 와서 먹자

-그니까 화좀 풀어 밴댕이 소갈딱지야

그러자 효은에게서도 사진이 왔다. 혜소와 함께 밥을 먹는 모습.

배경으로는 마법학회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쩔 ㄲㅈ

‘……참나.’

상호는 혀를 차고 답장을 보냈다.

-속좁은 거 보소

-ㅇ? 성희롱 신고 ㅅㄱ

-뭐라는거야 미친년아

상호는 한숨을 쉬고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새해에는 이 삐순이 마음이 풀릴까.

속이 타서 냉수를 들이키는데, 자리에 태화와 지윤이 의자를 들고 와 끼어들었다.

“마, 나디아. 맛이 어떻드나. 여그 와서 요래 맛있는 기는 묵어본 적 없제?”

“네!”

“야, 천세희. 맛있냐? 그 육수 내가 만든 거야.”

“네가 개발한 게 아니잖아. 지윤이 어머니가 만든 거겠지.”

“내가 거품 걷고 다 했는데 내가 만든 거지! 그게 다 내 손맛이라고! 쌤, 그치? 같은 레시피라도 누가 만들었는지가 다른 법이잖아! 맞지? 맞지?”

“어쩐지 저번보다 맛이 덜하더라.”

“구라치지 마! 왜 또 세희 편들어! 우씨, 먹지 마! 내 육수 먹지 마!”

“오늘 그냥 퇴근시키고 제야의 종 같이 보고 열두 시간 더 일한 걸로 쳐주려고 했는데…….”

“……많이 드세용~.”

그렇게 복작복작한 가게 속에서, 1년의 마지막 식사가 떠들썩한 수다와 함께 꽃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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