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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여고의 남선생-351화 (351/501)

<351화>

351. 집 나간 아내

“찌발럼아아아! 으헝헝헝…….”

“…….”

혜소는 말없이 휴게소 알감자를 오물거렸다.

옆에서는 효은이 펑펑 울면서 운전대를 손으로 두들기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에 나랑 놀아주는 게 그렇게 X같았냐! 개새꺄! 으어엉헝헝헝…….”

차가 앞으로 확 튀어나갔다.

혜소는 아직 이 자동차란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이렇게 난폭한 운전은 더더욱. 몸이 관성을 따라 뒤로 쏠리자 혜소의 마음속에 불안감이 싹텄다.

“울지 마요, 고모…….”

“안 울게 생겼어?! 남친이란 새끼가 나만 무시하는데! 흐윽, 흑…….”

“사정이 있었을 거예요…….”

“사정이 없어서 문제야!”

“…….”

무슨 말인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일단 설득이 통할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이 차는 대체 어디로 향하는 걸까. 키가 낮은 혜소에게는 창턱 너머로 보이는 것이 밤하늘과 가로등뿐이었다.

“고모.”

“흐끅, 흑…….”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

“있어, 흐윽…….”

사실 어디라고 해봤자 알 턱이 없다. 혜소는 눈을 끔뻑이며 다시 알감자를 입에 집어넣었다.

검은 하늘에 주황색 가로등이 줄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 * *

“그러니까…….”

아침.

상호는 침대에 앉은 세희와 다혜를 바라보았다.

“어제 걔가 부탁해서 너희가 혜소를 데려갔었는데…… 몇 시간 후에 오더니 울면서 혜소를 도로 데려갔다고?”

“네.”

“우앙.”

세희와 다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둘의 뒤에 누워있던 태화가 고개를 불쑥 들었다.

“쌤 까였어?”

“몰라…….”

상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나빛과 지윤에게서 살아남은 줄 알았는데 이런 복병이 도사리고 있었을 줄이야.

달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일단은 찾기는 해야 할 텐데…….’

핸드폰을 꺼내 보니 부재중 전화가 가득 쌓여 있었다.

전부 어제 점심, 저녁, 밤에 효은이 보낸 것. 지윤이 집중하라며 핸드폰을 무음으로 돌린 탓에 전화가 왔던 줄도 몰랐다.

혹시나 해서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

‘난감하네…….’

사람 찾아줄 이츠키도 없는데.

상호는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그래도 효은이 갈 곳은 몇 군데로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출발할 준비를 했다.

그때 어느새 사라져 있던 태화가 욕실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쌤! 내가 입어 봤어!”

산타 원피스를 입은 채로.

“좀 늦긴 했지만! 악마의 크리스마스는 하루 늦게 오는 법이야! 가자! 놀러 가자!”

“출근해.”

“히잉…….”

둘은 밖에 나갈 준비를 했다.

* * *

“없어요?”

“없어요.”

수녀가 고개를 저었다.

태화를 출근시키고 달려온 수녀원. 가장 확률이 높은 곳이라 생각했는데 이곳에 없다니. 상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효은의 차는 보이지 않았다.

“조금 실례긴 한데…… 숨기고 계신 건 아니시죠?”

“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면 후보는 두 군데 남았다. 상호는 수녀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차를 향해 돌아섰다.

* * *

“없어요?”

“없습니다.”

신앙회 구원교단 본부.

상호의 앞에 선 사제는 없다고 했지만, 워낙 넓은 곳이라 단순히 이 사제가 못 봤을 수도 있었다. 상호는 깊은 곳을 향해 들어섰다.

사제가 옆으로 따라붙으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냥 안 보여서요.”

“저승부대의 전우 분이시지요?”

“예.”

“그렇다면 내성당에 윗방 빼는 것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수녀님이 쓰시던 곳인데…… 침대 아래에 그 뭐랄까, 외설적인 것들이 있어서 말입니다. 이걸 버려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이따가 제가 가져갈게요.”

수갑이나 목줄 따위를 말하는 것일 테다. 상호는 그렇게 얼버무리고 사제를 돌려보냈다.

내성당, 성당 안에 마당을 두고 지어진 또 하나의 성당에는 잡상인의 출입을 금한다는 엄중한 경고가 붙어 있었다.

들어가보니 효은이 마구 새겼던 글씨들이 그를 반겼다.

‘나도 여기서 로또 번호나 찾아볼까…….’

그는 그 글씨들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술병이 가득했던 안쪽의 방에도. 하긴 혜소를 같이 데려갔는데 저 방에 있을 리는 없긴 했다.

상호는 사제가 말했던 윗방, 효은이 생활했던 방으로 향했다.

‘……여기도 없군.’

남은 후보는 하나.

거기로 향하기 전에, 상호는 아무도 없는 주변을 괜히 쓱 둘러보고는, 누가 볼까 두려워 재빠르게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 * *

‘……흐음.’

상호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유리창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마지막 후보. 효은의 집.

정확히는 효은의 부모의 집.

‘……여기도 없는 것 같군.’

집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하나뿐이었다.

얼굴 보기가 좀 데면데면해서 창문으로 몰래 살피는 것이었다. 상호는 허공에 떠서 아파트를 한번 빙 돌았다.

거실을 봐도, 방을 봐도 일단 혜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없는 건 확실하고…….’

그러던 차에 작은 방이 눈에 띄었다.

‘여기가 걔 방인가?’

상호는 내공을 뻗어 잠금장치를 내리고 창문을 슬쩍 열었다.

작은 방. 침대는 없고, 책상과 옷장, 그리고 가구 몇 개. 이제는 창고로 쓰는 느낌이었다.

‘사진 같은 건 없나…….’

찾으면 엄청 놀려 줄 텐데.

그가 손을 뻗자 옷장과 서랍이 소리 없이 스르르 열렸다.

‘음?’

상호는 옷장 속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여자 교복. 촌스런 녹색.

‘이야…….’

여자 교복이 녹색이기 쉽지 않은데. 상호는 감탄을 하며 그 교복을 꺼냈다.

예현여고의 세련된 디자인과는 차원이 다른 쌈마이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누런 상의 하며, 풀색 치마 하며.

입꼬리가 슬슬 올라갔다.

‘가져가서 놀려줘야지.’

그래서 챙겼다.

아기 때 사진도 한번 보고 싶었는데, 그건 다른 방에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찾아도 없는 걸 보면.

상호는 방을 원래대로 돌려놓고 창문을 넘다가 고개를 기웃했다.

‘그나저나 얜 어디 있는 건지…….’

* * *

혜소는 빵을 두 손으로 잡고 오물거렸다.

떡처럼 쫀득한 빵 속에 든 크림이 달지 않고 고소한 게 꼭 쌀 음료수 맛이 나는 것도 같았다. 과연 한 가게의 명물이라 할 법했다.

그 명물을 먹어보자며 데려온 사람은, 정작 울면서 통화를 하느라 한 입도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니까! 그 X발새끼, 나랑은 맛집이고 뭐고 귀찮다면서 아무거나 처먹는데, 애들이 사달라고 하면 쪼르르 달려가서 사준다고!”

[너흰 왜 또 싸우니…….]

핸드폰 너머에서 민정이 한숨을 쉬었다.

[말을 안 하니까 그렇게 싸우는 거야. 가서 말해 봐. 상호가 널 미워하는 게 아니잖아…….]

“아니야! 그 새끼 나 싫어해. 그 새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 때렸어. X불놈이 나보다 한 살 어린 주제에, 반말 찍찍 싸면서 머리를…… 흐엉엉엉…….”

효은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학기면 학기라서 수업한다고, 방학이면 방학이라서 애들 본다고! 그럼 나는 언제 볼 건데! 으흑, 흑…….”

카페의 모든 사람들이 효은을 흘끗댔다.

그 앞에 앉은 혜소는 이제 다 포기하고 해탈한 표정으로 빵만 우물거렸다. 남들이 보든 말든 죄만 아니면 되는 것이다.

‘빵 맛있네…….’

혜소가 우유를 홀짝일 때 민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가 나중에 한마디 할게. 그치만 서운하다고 말도 안 하고 떠나버리면 풀기 더 힘들어져. 네가 이러다가 상호도 화나면 어떡해. 너도 상호 싫어서 이러는 거 아니잖아?]

“끅…….”

그 말에 효은은 코를 훌쩍이면서 눈을 끔뻑이더니, 다시 펑펑 울면서 핸드폰을 부여잡았다.

“그럼 어떡해! 그 새끼가 나 무시하는데!”

[지금은 네가 무시하고 있잖아. 적당히 갚아주다가 풀리면 그때 대화해 봐.]

“말한다고 들을 놈이 아니라니까!”

[너도 그래…….]

민정이 쓴웃음을 짓는 게 눈에 선했다.

[너희 성격이 똑같아서 그래. 조금만 서로 양보하면 훨씬 편해질 텐데……. 서로 원하는 게 뭔지 잘 알 거 아냐.]

“몰라!”

[절대 양보할 생각이 없구나…….]

핸드폰에서 민정의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뭐…… 그게 너희가 여태 해온 방식이니까. 알아서 해 봐. 너희도 이제 애가 아니니까……. 근데 그럼 혜소랑은 어디로 갈 거야? 교단?]

“몰라. 걍 호텔에서 지내든가 하려고.”

[지낼 데 필요하면 학회로 가. 내 집 비어 있으니까.]

“……응.”

[끊을게. 상호랑 너무 싸우지 말고.]

그렇게 통화가 끊겼다.

효은은 젖은 눈으로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빵을 하나 집어 우걱우걱 먹었다. 빵에게 분풀이를 하는 듯이.

저래서 맛은 느낄 수 있나 의문이었다.

“고모, 이거 먹어 봐요. 맛있어요.”

“너 먹어.”

효은은 볼이 미어터지도록 빵을 욱여넣었다. 그런데 탁자에 놓았던 핸드폰이 한 번 진동했다.

문자가 온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 놈에게서.

“……쯧.”

확인해 보니 역시나 그 놈이었다.

-야

-어딘데

-전화 좀 받아

효은은 빵을 신경질적으로 씹어대며 자판을 두드리다가, 마음을 바꿔서 썼던 답장을 지워버렸다.

-야

-읽었으면 대답을 해

-미안하다니까

-아니 그렇다고 애까지 데려가면 어떡하냐

‘또 나보다 애가 먼저지…….’

괘씸한 마음에 효은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맘 같아서는 답장으로 욕을 한 사발 퍼부어 주고 싶지만, 지금은 무시를 하는 게 더 효과적일 터였다. 이 되먹지 못한 놈팽이를 고치려면.

그러자 문자가 더 왔다.

-아니 집에 좀 늦게 올 수도 있지 그거 가지고 그렇게 화낼 일이냐

-사람이 좀 바쁘면 전화 못받을 수도 있는거고

-내가 잘못하긴 했는데 다 사정이 있었다니까

-씹고 싶어서 씹은 게 아니잖아

-그리고 내가 어디 다른 여자랑 붙어먹은 것도 아니고 성철이 형 집에 갔다온건데

-니가 그렇게 화내면 내가 어딜 가냐 이제

듣고 보니 아주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여태까지의 응어리가 있어서. 누가 너처럼 좀생이인 줄 아냐고, 혜소랑 좀 놀다 들어가는 것뿐이라고 보내려고 했는데.

-그리고 너 자꾸 이상한 옷 입는데

-그러지 말고 그냥 한판 뜨자고 말하면 안 되냐

-니 그런 거 입는 거 볼 때마다 무서워 죽겠다

-우리 그런 사이 아니잖아

효은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졌다.

다음 순간, 그녀는 충혈된 눈으로 자기도 모르게 자판을 마구 두드리고 있었다.

-개X-발창갈새끼야

-니 좋으라고 사서 입은건데 X발새끼야

-니는 나한테 뭐 해주려는 것도 엇븡면서

-이땃닉으로 사ㄹ람성으리ㅡㄹ 개무싷ㅆ발령나

그러자 짧은 답장이 왔다.

-뭐라는거야 똑바로말해

“……으아아아악!”

효은은 분을 이기지 못해 핸드폰을 집어던졌다.

“개 X같은 새끼야! 나도, 나도 좋아서 입은 줄 아냐! 니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쪽팔려도 입은 거야, X발새꺄! 으헝헝헝…….”

“고모, 단 거 드세요. 단 거…….”

“어헝헝헝……!”

“……에휴.”

혜소는 대성통곡을 하는 효은을 내버려두고 빵을 더 고르러 쪼르르 달려갔다.

* * *

“그러니까…….”

세희와 태화와 다혜가 눈을 끔뻑였다.

“수녀님이…… 당분간 안 오신다구요?”

“……그렇게 됐어.”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민정이 누나한테 듣기로는 아마 자기 학회 집에 있을 거라는데……. 지금 갔다가는 더 싸울 거라고, 화 풀릴 때까지 기다리라대.”

“빡빡이도 수녀님이랑 지내?”

“그렇겠지.”

태화가 눈을 반짝였다.

“그럼 오늘부터 쌤 옆에서 자도 돼?”

“아니.”

“왜! 우리 사이에!”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 안 돼.”

“우씨, 도망칠 때가 좋았는데…….”

상호는 꿍얼거리는 태화를 무시하고 방의 한쪽을 흘끗했다. 그곳에는 효은이 쓰던 옷장과 작은 화장대가 놓여 있었다.

‘……언제까지 가려나.’

또 삐질지 모르니, 잠자기 전에 문자 한번 보내야겠다. 그는 그렇게 다짐하고 TV를 켰다.

“퇴근했으면 빨리 씻고 잘 준비해. 또 늦잠 자지 말고.”

“먼저 씻으면 쌤 옆에서 자도 돼?”

“알바 500시간 채우면 생각해볼게.”

“우씨…….”

“저는요?”

“세희는 돼.”

“야이씨, 편애 좀 하지말라고오오오!”

그렇게 아이들은 잘 준비를 했고.

상호는 4인분의 아침 메뉴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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