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화>
350. 크리스마스의 악몽
“저기요.”
태화는 뒤를 돌아보았다.
“넹?”
“여기 이거…….”
사내는 앞에 놓인 만둣국을 내려다보았다.
“만두가 다 터져 있는데…….”
“아아, 그거요.”
태화는 방긋 웃으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게 메뉴라서 그래요.”
“……응?”
사내의 시선이 그 방향을 향했다.
벽에 붙은 메뉴판. ‘만둣국’이라고 쓰인 글자 앞에 무언가가 테이프로 붙여져 있었다.
-오늘만! 터진만둣국
“…….”
“맛있게 드세요~.”
태화는 총총걸음으로 주방에 들어갔다.
* * *
“쌤예.”
지윤이 상영관 출구를 나오며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와 이런 영화라고 말을 안 했습니꺼…….”
“내가 어떻게 아니…….”
상호도 찔찔 흐르는 콧물을 훌쩍였다.
크리스마스다운 가족 영화. 그런데 하필이면 늙은 노파가 어릴 때 사별한 아버지를 노래로 기억해낸다는 이야기라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
상호는 손수건을 꺼내 지윤의 코 밑을 쓱쓱 문질렀다.
“코 나온다, 지윤아.”
“예에…….”
얼굴을 맡기고 코를 훌쩍이던 지윤이 갑자기 상호에게 팔짱을 끼었다.
“그래서 이제 어디 갑니꺼?”
“응? 글쎄, 뭐 어디…… 가고 싶은 데라도 있어?”
“지는 단둘이서 레슬링을 좀 하고 싶은데예.”
“……으음, 지윤이 운동 좋아하니까…… 볼링이라도 할까? 아니면 겨울이니까 아이스링크라도 갈래?”
“아이스링크라…… 나쁘지 않네예.”
지윤이 고개를 기웃하다가 씩 웃었다.
“근데 쌤예. 지들이랑 스키장은 은제 갈랍니꺼?”
“스키장? 으음, 뭐 한 번쯤 가면 좋기야 하겠지? 가고 싶어?”
“예.”
“그래, 그럼 한번 시간 잡아 볼게. 그럼 지금은…… 아이스링크 가까운 데로 가볼까?”
“예.”
“그래, 그러자.”
상호는 팔에 껌딱지처럼 달라붙은 지윤을 데리고 밖으로 향했다.
* * *
그 시각 태화는, 산더미처럼 쌓인 그릇을 바락바락 닦으며.
“으아아아!”
“태화야, 그거 하고 식탁 좀 닦아줘.”
“으아아아아아아!”
* * *
“이얍!”
스케이트 날이 얼음을 박찼다.
훌쩍 뛰어오른 지윤의 몸이 공중에서 너댓 바퀴를 돌았고, 착지하자 지켜보던 이들이 탄성을 흘렸다.
지윤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상호를 바라보았다.
“짠~.”
“……잘하네.”
기술이라기보다는 힘. 빙판에 사람 주먹만한 홈이 생겼지만, 상호는 못 본 척 박수를 쳐 주었다.
이곳도 사람이 많았다. 영화관처럼. 패밀리 레스토랑처럼. 아이가 있으면 가족, 아이가 없으면 연인. 혹은 연인에 준하는 단계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사제지간은 없을 터였다.
미끄러지듯 다가온 지윤이 상호의 품에 기대어 섰다.
“쌤은 스케이트 잘 탑니꺼?”
“글쎄……. 그냥 탈 줄은 안다 정도.”
“총은 잘 쏜다믄서 왜 스케이트는 그래 자신이 없어예.”
“…….”
“흐흐, 쌤은 은호가 아닐 때도 귀엽습니더.”
지윤은 키득거리고는 상호의 양 뺨을 문질렀다.
“내기하실랍니꺼? 한 바퀴 누가 먼저 도는지.”
“뭐 소원이라도 있어?”
“지가 이기믄 쌤이 지 방에서 자고 가는 깁니더.”
“태화 학교 데려가야지…….”
“출발합니데이~.”
상호는 먼저 슝 달려 나가는 지윤을 쫓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출발은 지윤이 먼저 했지만 속도는 상호가 빨랐다. 굳이 내공을 쓰지 않아도 순식간에 따라잡아 역전할 수 있었다.
상호는 지윤의 옆을 지나치며 얼굴을 흘끗했다.
‘……!’
서늘한 눈빛.
그렇게 나랑 놀아주기 싫냐, 그렇게 태화가 좋냐. 그냥 태화랑 살림 차리고 평생 같이 자라. 그런 눈빛이었다.
‘미안…….’
그래도 집에는 들어가야겠다. 상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지윤을 지나쳤다.
결국은 상호의 승리.
“쌤예~.”
지윤이 뒷짐을 진 채로 다가오며 씩 웃었다.
“자~알 알겠심더~.”
“아니, 그치만 학교에 있는 애들도 봐야 하니까…….”
“알겠심더~.”
“……끄응.”
상호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의 곁에 다가붙은 지윤이 주변을 쓱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쌤예, 쌤예.”
“응?”
“드라마 같은 기를 보믄 말입니더. 꼭 이럴 때 누가 부딪치가꼬 남자랑 여자랑 서로 덮치지 않습니꺼.”
“……그런 게 있나?”
“누가 한번 부딪히줬으믄 좋겠는디…….”
그때 누군가가 지윤의 등 뒤로 달려들었다.
키가 작은 예닐곱 살 꼬마 아이.
쿵
“아야!”
지윤을 넘어뜨리기엔 몸이 너무 작았다.
지윤은 자신의 엉덩이에 튕겨나가 엉덩방아를 찧은 아이를 돌아보며 당황해했다.
“머꼬. 아이고, 아가야. 와 니가 넘어지노. 좀만 더 커서 오지…….”
“우에에엥!”
그때 상호의 뒤로도 누군가 달려들었다.
퍼억
“컥!”
덩치 큰 사내가 빙판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이걸 처음 타봐가지고…….”
“……아뇨, 그럴 수도 있죠.”
상호는 고개를 숙이는 사내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손사래를 쳤다. 사내의 덩치가 더 큰데도, 상호의 위치는 처음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채였다.
넘어지기엔 너무 강한 스승과 제자. 둘은 각자가 쓰러트린 이들을 일으켜 세우고는, 서로를 돌아보며 쓰게 웃었다.
* * *
저녁 열 시.
정애의 가게 문이 닫힐 시간. 상호는 차를 몰아 가게로 향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산타 모자를 쓴 지윤이 상호가 따낸 인형들을 품에 안고 있었다.
“동생들이 인형 좋아해?”
“서마터폰을 더 좋아하지예. 사주진 않지만.”
“그야 뭐, 아직 애기들이니까……. 응?”
가게의 문이 닫혀 있었다.
유리창 속을 들여다보던 상호는 인기척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눈을 끔뻑였다.
“뭐지?”
“일찍 닫으셨나 봅니더.”
지윤은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어, 어무이예. 가게에 없네예.”
[으응, 일찍 닫았다. 집으로 와.]
“알겠심더~.”
상호는 모녀의 통화를 듣고 지윤의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이라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호는 차에서 내려 지윤과 함께 집으로 들어섰다.
현관을 열자 태화의 비명이 쏟아져 나왔다.
“아아아아악!”
“악마 퇴치!”
“악마때찌!”
지영이 태화의 꼬리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뿅망치로 태화의 머리를 두들기던 지성이 현관을 돌아보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우왓! 삼촌 와써!”
“삼촌~.”
둘이 상호에게 달려오자 태화는 그제서야 자유를 되찾았다. 검은 연기가 펑 하고 터지더니 상호의 등 뒤에 태화가 나타났다.
태화의 뿔이 상호의 등에 박혔다.
“쌔애애애앰! 나 집에 갈래! 학교 갈래!”
“뭐야, 왜 그래.”
“나, 나 휴일인데 놀지도 못하구 일했는데! 저 꼬맹이들이 막 때리구, 막, 막 때리구우…… 으헝헝헝……!”
“그래그래.”
상호는 품에 안겨 울먹이는 태화의 등을 토닥였다.
“가자, 가자. 학교 가자. 지성이 지영이 잘 놀았어?”
“응.”
“이제 삼촌 차례야.”
고사리손이 상호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이제 삼촌까지 퇴치하려는 건가. 당황한 상호의 눈동자가 덜덜 떨렸다.
“……얘들아?”
“때찌!”
상호의 가랑이로 뿅망치가 날아들었다. 지성은 그냥 휘둘렀겠지만 높이가 하필 그 위치였다.
식겁한 상호가 내공을 꺼내려는 순간, 지윤이 뿅망치를 쳐내며 지성의 코를 검지로 툭 쳤다.
“마, 니 누나가 머랬노.”
“아야! 왜애!”
“누나 물건 막 건드리지 말라 캤제.”
‘?’
상호는 자신의 가랑이를 내려다보며 눈을 끔뻑였다.
‘분명 내 물건인데……?’
대체 언제 훔쳐간 걸까. 이 물건의 소유권의 소재에 대해서 골똘히 고민하고 있는데, 지윤이 동생들에게 인형을 던졌다.
“느덜은 이거나 갖고 놀으래이.”
“앗! 산타!”
“산타…… 어?”
지성과 지영은 인형을 받고 신나하다가, 산타의 이마에 총알구멍이 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 굳어 버렸다.
“……산……타?”
지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삼촌이 했디. 산타도 루돌프도 총으로 쏴버맀다.”
“……산타할아버지이이이!”
“우와아아아악!”
지성과 지영이 대성통곡을 하자 방에 있던 지예와 지훈, 정애가 밖으로 나와 멀뚱히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언니 왔어?”
“너희 뭐하냐?”
“삼촌이! 삼촌이!”
“산타랑 루돌프를 총으로 쏴죽였어!”
“……뭔 소리야?”
“산타를 살려야 대!”
지성의 말에 지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뜨케?”
“만화에서 그래써! 악마한테 빌면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고!”
“우와!”
그렇게 두 아기는 태화의 앞에 산타를 놓고 절을 하기 시작했다.
“악마님~ 우리 할아버지 살려주세요~.”
“한평생 배달만 하다 돌아가신 산타 할아버지 살려주세요~.”
“……쌤! 나 얘들이랑 못 놀겠어! 감당이 안 돼!”
“도망치자…….”
더 있다가는 개판이 되겠다. 상호는 정애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태화와 함께 도망쳐 나오려고 했지만.
지윤이 그의 소매를 꽉 움켜잡았다.
“어디 갑니꺼.”
“학교…….”
“벌써 가믄 아덜이 서운해 할 거 아입니꺼. 놀다 가이소.”
“그치만…….”
“아이고~, 휴일에 일만 한 어무이가 또 아덜 돌보겠구마~.”
“…….”
상호는 구두를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 * *
결국은 열두 시를 넘기고,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야 탈출할 수 있었다. 상호는 핸들을 돌리며 하품을 했다.
조수석에 앉은 태화가 그를 돌아보았다.
“쌤.”
“응.”
“며칠 일하라고 했었지?”
“500시간.”
“그럼 나 얼마나 깐 거야?”
“아침 여덟 시부터 저녁 열 시까지니까…… 점심시간 빼면 13시간이네. 그걸 이틀 했고. 오늘은 일찍 끝났으니까 11시간 쳐서. 그럼 37시간이지.”
“점심시간을 왜 빼! 휴식도 일의 연장이야!”
“저녁도 뺄까?”
“……꾸웅.”
태화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손가락을 접었다가 폈다가 했다.
“500에서 37 빼면 463이고, 13으로 나누면……. 뭐어? 그럼 35일을 더 해야 돼?!”
“그렇게 해야 니가 날린 500만원이 생기는 거야, 임마.”
“그럼 주식으로 500만원만 따도 35일을 놀고먹을 수 있다는 거잖아! 시간은 금보다 귀해! 쌤도 당장 주식에 통장 박아!”
“그래서 니가 땄냐?! 잃었잖아!”
“오른다니까아아아!”
발을 구르던 태화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상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쌤, 쌤.”
“안 빌려줄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나 있잖아, 주식 올라서 돈 많이 벌면, 둘이서 해외여행 갈까?”
“해외여행?”
상호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로 가고 싶은데?”
“모히또.”
“몰디브겠지……. 근데 좀 힘들 것 같은데.”
“왜?”
“내가 어디 갔다가 전쟁나면 어떡하냐.”
제주도나 일본 정도라면 경공으로 왔다 갔다 할 수 있겠지만,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가는 것보다는 몇 배의 시간과 수고가 들 수밖에 없었다. 태화가 가고 싶어 하는 휴양지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래도 태화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부협회장 아저씨한테 제트기 같은 거 못 빌려?”
“……낭비야, 임마.”
“제트기 하나 사자! 아니면 미래한테 만들어 달라고 하면 안 돼?”
“몰디브를 만드는 게 더 빠르겠는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예현여고가 눈앞에 보였다.
교문을 지나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남교사 현관으로 들어가 상호의 방으로. 밤인데다가 숙소에 남은 교사가 없어 복도는 아주 조용했다.
상호는 문을 열었다가 불이 꺼져 있는 것을 보고 소리를 죽였다.
“자나 보다. 조용히 들……어?”
그런데 이상하게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숨소리도 없고, 체온도 없고. 대신에 침대 끄트머리에 무언가 널브러진 게 보였다.
빨간 천. 하얀 털뭉치.
산타 옷.
아니, 산타 원피스.
아주 야한 디자인의 옷이, 누군가가 화나서 벗어던진 듯이 내팽개쳐져 있었다.
“…….”
불을 켜자 그 위에 쪽지가 하나 놓인 게 보였다.
‘설마…….’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 한다.
불안감을 억누르며 집어든 쪽지에는, 틀림없는 효은의 필적으로 글씨가 적혀 있었다.
-개X발창갈X새끼
“…….”
상호는 쪽지를 든 채로 굳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