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화>
349. 크리스마스의 약속
“헤헤…….”
나빛이 웃었다.
“헤헤헤헤헤…….”
“…….”
상호는 양반다리 위에 앉힌 나빛을 내려다보며 진땀을 흘렸다.
정애의 가게에서 밥을 먹고 곧바로 달려온 나빛의 집. 서릿발 같던 나빛의 눈빛은 어느새 봄날 햇살처럼 녹아내려 있었다.
“정말로 까먹으신 건 아닌 거예요?”
“그럼, 까먹었으면 먼저 말을 했겠니…….”
“헤헤헤…….”
둘은 그렇게 나빛의 침대에 앉아 있었다.
봉진도, 유연도, 나로도 바빠서 그런지 집에 없었다. 나디아도 한국어 학원을 갔다는 모양이고.
지금 집에는 그들 둘뿐. 상호는 그 사실에 묘한 부담감을 느끼며 하릴없이 나빛을 품에 앉혀만 놓았다.
나빛은 그래도 심심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선생님.”
“응.”
“오늘 자고 가실 거죠?”
“……아니, 태화 데리러 가야 돼.”
“언제요?”
“저녁에, 한 열시 반쯤…….”
“그럼 그때까지 자고 가세요.”
“벌써……? 다른 걸 하고 노는 게…… 좋지 않을까?”
“오늘 부모님 늦게 오세요.”
나빛의 하얀 손이 상호의 멱살을 꼭 잡았다.
“그러니까 같이 자요.”
“…….”
나빛이 말하는 건 정말로 잠만 자자는 거겠지만. 상호는 텅텅 빈 집에서 나빛과 단둘이 잤다가는 봉진과 유연에게 들켰을 때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갖은 핑계를 대며 도망치려고 했다.
“선생님 내일도 일찍 일어나야 돼. 지금 자면 잠시간 망가지잖아.”
“선생님 어차피 수녀님이랑 밤새면서 생체시계 망가뜨린 게 한두 번이 아니잖아요…….”
“…….”
“되도 않는 핑계 대지 마세요…….”
“…….”
상호는 포기하고 침대에 누웠다.
“그래, 그럼 조금만 자고 갈게…….”
“……헤헤.”
나빛이 만면에 흡족한 웃음을 띠우며 상호의 품에 얼굴을 폭 묻었다.
* * *
“왜 이렇게 늦었어?”
“……자다 왔어.”
상호는 한숨을 푹 쉬고 헝클어진 머리를 쓸었다.
침대가 푹신하고 나빛이 포근해서 예정에 없던 꿀잠을 자 버렸다. 덕분에 11시가 되어서야 지윤의 집으로 올 수 있었다.
현관 앞, 태화의 옆에 선 지윤이 상호를 바라보았다.
“아덜 안 보십니꺼? 좋아할 턴디.”
“지금 보면 애들 못 잘 것 같아서…….”
볼 때마다 사람 혼을 쏙 빼놓는 아이들이라 들어가기가 무서웠다. 상호는 쓰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다음에 일찍 보러 올게.”
“쌤예.”
지윤이 허리에 손을 얹고 상호를 향해 가까이 다가왔다.
“약속, 기억하고 계십니꺼?”
빤히 올려다보는 사나운 눈초리.
상호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 당연히 기억하지.”
“나빛이 약속도 까묵어가꼬 오늘 달래러 간 기 아니구예?”
“…….”
참으로 용하다. 여자는 다 점쟁이인 걸까.
더 말을 끌었다가는 불리해질 터.
“……피곤할 텐데 어서 들어가서 쉬어. 태화야, 가자.”
“와 말을 돌립니꺼. 목뼈도 돌려드릴까예.”
“다음에, 다음에 올게, 지윤아…….”
“준비 단단히 하고 오이소.”
지윤은 상호를 째려보며 집으로 들어갔다.
‘큰일 날 뻔했군…….’
작전을 안 세웠으면 목과 몸이 이별하게 되었을 것이다. 상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운전석에 올랐다.
조수석에 검은 연기가 터지더니 태화가 나타났다.
“태화야.”
“웅.”
“어떻게 됐어?”
“크리스마스야, 무조건.”
태화가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크리스마스에 뭐하냐고 물어보니까 비밀이래. 그럼 뻔하지 뭐.”
“역시…….”
약속은 크리스마스였던 것이다.
크리스마스까지는 이틀이 남았다. 일찍 대응하지 않았더라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졌을지도 몰랐다. 상호는 태화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첩보를 성공적으로 전해준 게 기특해서.
태화가 그를 흘끗했다.
“약속 지켰으니까 선물 줄 거지?”
“그래. 대신 너도 약속 잘 지켜.”
약속은 두 개. 지윤에게서 정보를 캐내는 대가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주기로 한 것. 그리고 주식으로 날린 500만원의 가치를 알 수 있게 그만큼 정애의 가게에서 일할 것.
상호는 차를 출발시키려다가 문득 의문이 들어 태화를 돌아보았다.
“근데 노트북은 왜 필요한 거야?”
“다 쓸 데가 있어.”
태화는 그렇게 얼버무리고 중얼거렸다.
“미래 있으면 걔랑 하면 되는데…….”
“뭘 하려고 그러는데?”
“그런 게 있어. 사업이야.”
“또 뭘 말아먹으려고…….”
이젠 말리기도 지친다. 돈을 날리든 노트북을 말아먹든 모르는 일이다.
상호는 한숨을 푹 쉬고 핸들을 잡았다.
* * *
그렇게 크리스마스 당일.
“아 왜! 왜 크리스마스까지 일해야 하는데! 휴일이자나!”
“식당일은 원래 그런 거야, 임마. 남들 논다고 너도 놀면 일을 왜 하냐? 빨리 준비 안 해!”
“나 안 가! 쌤이 가! 개백수처럼 뒹굴거리는 오빠나 가아아!”
“이 짜식이…….”
상호는 침대 다리를 붙잡고 빼액거리는 태화를 억지로 잡아끌었다.
옆에서는 잠옷을 입은 세희와 다혜와 혜소와 효은이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뭔데 아침부터 소란이야? 어딜 가는 건데?”
“얘 알바……. 야, 빨리 세수하고 옷 갈아입어. 안 일어나? 너 그대로 이불에 싸서 들고 간다!”
“해봐! 해봐! 해봐! 해봐! 응~ 순간이동으로 튀면 그만이야~!”
“튀어 봐 임마. 너 사달라는 거 세희만 사줄 거야. 돈까스 사달라고 하면 세희만 치즈돈까스 사줄 거고, 패딩 사달라고 하면 세희만 거위털 비싼 거로 사줄 거야!”
“아아아아아악! 왜! 왜! 그러지 마! 제발!”
결국 태화는 발버둥을 치다가 이불로 둘둘 싸여 상호의 어깨에 둘러메어졌다.
“아 싫어! 진짜 싫어! 나 휴일에는 놀아야 된단 말야! 아 진짜아아앙!”
“시끄러. 가자 임마. 내가 너 옷 안 입으면 못 데려갈 줄 알았지?”
“아, 알았어. 세수할래, 옷 입을래……. 대신 밥 줘.”
“가서 먹을 거야. 빨리 준비해.”
“힝…….”
* * *
현관에 기대어 선 지윤이 씩 웃었다.
“용케도 기억했네예.”
“으응.”
상호도 씩 웃어 보였다. 능청스럽게. 태연한 척. 그가 약속을 까먹었었단 사실을 지윤이 알지 못하도록.
상호의 옆에서는 태화가 입술을 댓 발 내밀고 있었다.
“쌤은 나만 미워해.”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흥.”
“야, 몇 번을 말하냐. 내가 너 진짜로 미워하면 이러겠어?”
“치.”
“낼모레면 성인인데 언제 철들래?”
“뿡.”
“방귀대장 볼 거야? 우리 태화 유치원 갈까?”
“웅.”
“……일해, 임마.”
“꾸웅…….”
태화는 입술을 우물거리며 현관 쪽으로 걸어가다가, 정애가 나오는 것을 보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안녕하세용.”
“안녕.”
정애는 손을 흔들고 상호를 바라보았다.
“잘 놀고 오세요.”
“네, 저녁에 오겠습니다. 가자, 지윤아.”
상호가 지윤의 손을 잡자 태화가 펄쩍 뛰었다.
“야! 가족 버리고 놀러 가냐! 니가 그러고도 편히 놀 수 있을 것 같아!”
“머라카노. 내는 일한지 5년이 넘었다. 그러게 누가 주식에 꼬라박으랬나. 쌤이랑 놀고 올 텡게 뺑이치라잉~.”
“왜 나만 일해야 하는데에에!”
“태화야, 어서 가서 준비하자.”
“앗, 넹. 짐은 저 주세용.”
태화와 정애는 시장을 향했고, 상호와 지윤은 그런 둘을 바라보다가 서로를 향해 씩 웃어 보이고는 차로 향했다.
* * *
“쌤예.”
“응.”
“총 잘 쏘십니꺼?”
“많이 쏴 봤지.”
“함 해 보이소.”
상호의 손에 비비탄 총이 쥐여졌다.
목표는 눈앞의 산타 인형과 루돌프 인형. 엉덩이로 앉은 산타보다는 네 다리로 선 루돌프가 더 넘어뜨리기 좋을 것 같았다.
‘초탄은 실수할 수도 있지만…….’
기회는 천 원에 세 번. 첫 발사로 총알이 어디로 날아가는지를 확인하면, 두 번째부터는 필중.
예경을 만나기 전에는 총으로 수없이 몬스터를 잡았던 상호였다. 그는 소싯적의 감각을 끌어내며 총을 루돌프에게 겨눴다.
투웅
비비탄이 루돌프의 뿔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 조금만 낮추면…….’
상호는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투웅
총알이 루돌프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갔다.
실탄보다 훨씬 느린 비비탄의 궤적을 상호가 잘못 볼 리 없었다. 이번에는 틀림없는 명중. 루돌프의 미간에 정확히 꽂힐 터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타악……
그러나 루돌프는 쓰러지지 않았다.
‘……어라?’
상호는 당황해서 눈만 끔뻑였다.
분명 미간을 정통으로 맞췄는데. 총알이 너무 가벼웠던 걸까. 하지만 루돌프의 위치에는 변함이 없었다.
‘붙여놨구만…….’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럼 그 옆의 산타는 어떨까. 방아쇠를 당기자 총알이 산타의 이마를 향해 날아갔다.
타악……
결과는 마찬가지.
과연 산타도 붙여놨던 것이다. 멀쩡한 산타와 루돌프를 본 지윤이 키득거리며 팔꿈치로 상호를 쿡쿡 찔렀다.
“총은 안 되네예~.”
“……기다려 봐.”
오기가 생긴 상호는 천 원을 꺼내 다시 총알을 받았다.
기회는 다시 세 번.
‘거 장사를 하려면 어쩔 수 없었겠지만…….’
비대칭 전력을 썼으니 이쪽도 비대칭 전력을 쓸 수밖에.
상호는 산타의 이마를 겨누고 내공을 끌어올렸다.
피잉──
공기를 가르며 날아가는 비비탄.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검푸른 색의 그림자.
‘이 정도 힘이면…….’
상호는 산타가 뒤로 넘어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총알이 명중하고.
퍼억
산타의 이마가 관통당했다.
‘……?’
상호는 흩날리는 솜을 바라보며 그대로 굳어 버렸다.
당황한 점원이 달려와서 산타 인형을 둘러보았고, 주변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이, 인형을 뚫었어……?”
“엄마! 저 아저씨가 산타 죽였어!”
“쉿, 눈 마주치지 마. 이리 와. 이리.”
“아이고, 쌤예. 산타를 쥑이뿌믄 어뜨캅니꺼~.”
지윤이 깔깔거리며 상호의 등짝을 두들겼다.
“X급 헌터가 인형 따겠다고~ 총 잘 쏜다 자랑할라고~ 꺄하핫! 아덜이 이 꼴을 봤어야 하는디~.”
“…….”
상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지갑을 열었다.
“저거 그냥 살게요…….”
* * *
그렇게 루돌프를 총으로 쏘고 산타를 죽인 상호는, 지윤이 이끄는 대로 따라와 영화관에서 상영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영화관 안에 위치한 패밀리 레스토랑.
주변에는 연인과 가족들이 가득했다.
“그래가꼬~. 쌤이 총으로 산타를 쐈는디~.”
지윤이 통화를 하며 낄낄거렸다.
“이마에 총알구멍이 빡! 나부린기라~.”
[아아~, 그래~?]
태화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핸드폰에서 흘러나왔다.
[좋겠네~. 니 어머니께서는 가게에서 이렇게 고생하시는데~. 불효녀는 밖에서 오빠랑 싸돌아다니고~.]
“응~, 이미 어무이한테 허락 받았데이~. 글고 쌤은 울 아부지 친구라서 어무이도 뭐라 안 한데이~.”
[응~ 니엄마 내가 가져감, 수고~. 엄마!]
[응? 태화야, 혹시 뭐라고 했니?]
[……아니용.]
[육수는 잘 되고 있니?]
[넹.]
태화의 목소리가 기어들자 지윤은 피식 웃었다.
“내는 쌤이랑 놀고 들어간다잉~.”
[꺼져. 돼지뇬.]
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끊겼다.
상호는 파스타를 포크로 빙빙 돌리며 물었다.
“너희는 꼭 그렇게 서로 놀려야겠어?”
“야가 먼저 시작했습니더.”
“태화는 네가 먼저 시작했다고 하겠지…….”
“그라믄 가가 양심이 읎는 거지예.”
“너희는 참…….”
그때 상호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먹으려던 파스타를 도로 내려놓으며 핸드폰을 꺼냈다.
통화를 걸어온 이는 나빛.
지윤이 스테이크를 우물거리며 물었다.
“누굽니꺼? 태홥니꺼? 받지 마이소.”
“아니, 나빛이.”
“가도 받지 마이소.”
“……응?”
상호가 멍하니 눈을 끔뻑이는 동안 지윤이 재빠르게 그의 핸드폰을 낚아챘다.
“오늘은 지랑 노는 거잖아예. 딴 아덜이랑 얘기하지 마이소.”
“너도 방금 태화랑 통화했잖아…….”
상호의 손에 진땀이 배어났다. 나빛의 연락을 안 받으면 큰 화가 닥칠 텐데.
그는 지윤이 든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지윤은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잠깐만 받을게. 응?”
“아입니더. 아, 지가 받으믄 되겠네예.”
“지윤이 네가 받으면 자랑할 거잖아……! 안 돼, 안 돼.”
정말로 안 된다. 상호는 내공을 뻗어 핸드폰을 회수하고 전화를 받았다.
나빛의 환한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응, 나빛아.”
[지금 뭐하고 계세요~?]
“으응, 선생님 지금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통화를 길게 못 할 것 같아.”
[네?]
환했던 목소리가 시무룩해졌다.
[많이 바쁘세요……?]
“응. 미안해. 금방 끊어야 돼. 나빛이 크리스마스 잘 보내고…….”
[지윤이가 그렇게 중요해요……?]
“……응?”
상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빛아? 그걸 네가 어떻게……?”
[태화가 다 말해 줬어요~.]
시무룩했던 목소리가 다시 밝아졌다. 전혀 따스하지 않은, 서늘한 빛으로.
[선생님이 지윤이랑 하루종일 놀기로 했다고~.]
“…….”
[그래도 태화는 믿을 수가 없어서, 수녀님한테 연락을 했는데~ 아침부터 방을 나가서는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겠다고~.]
“…….”
[그런데 선생님은 지윤이랑 있는 게~ 저랑 잠깐 통화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신가 봐요~.]
“…….”
[그래도 저는 선생님 사랑해요~.]
나빛이 헤헤 웃었다.
[제야의 종은 누구랑 보실 거예요~?]
대답은 정해져 있다.
“……나빛이 너지.”
[지윤이는 아니구요~?]
“아니야, 나빛이랑 봐야지.”
[세희나 태화는 아니구요~?]
“……아니야.”
[저랑 보실 거죠~?]
“으응…….”
상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꼭 갈게.”
[기다릴게요~.]
“으응, 그때 보자…….”
[사랑해요~.]
“선생님도 사랑해…….”
그렇게 통화가 끊기고.
고개를 들자 이번에는 지윤이 서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빛이랑은 사랑헌다카는 사인가 보네예.”
“…….”
“세희랑 태화 귀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꺼?”
“……아니.”
“그럼 우째 해야 되겠습니꺼?”
“…….”
상호는 말없이 메뉴판을 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