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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여고의 남선생-348화 (348/501)

<348화>

348. 사람 만들기

찰싹

커다란 손이 하얀 종아리를 쳤다.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하던 태화가 고개를 쓱 돌려 상호를 바라보았다.

“왱.”

“좀 나가서 놀아, 임마. 방에서 빈둥거리기만 하지 말고…….”

“쌤도 안 나가고 있잖아.”

“난 쉬어야 해서 쉬는 거야.”

“나두임.”

태화는 혀를 쏙 빼물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다.

침대 옆에는 귤껍질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그 꼬라지를 본 상호는 이마에 핏줄을 올리며 이불을 손바닥으로 마구 후렸다.

“아야야! 왜 때려!”

“야, 누가 귤껍질을 이따구로 던져 놔! 치우든가 모아 놓든가 해야 할 거 아냐!”

“이따 치울라고 했어! 우씨, 귤껍질 좀 던져두면 뭐 어때! 벌레 꼬이는 것도 아니잖아!”

“벌레가 꼬이는 게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지 벌레처럼 살면 되겠냐!”

“악! 악!”

“……으휴.”

상호는 매질을 멈추고 한숨을 푹 쉬었다.

방학의 아침. 세희와 다혜는 심심하다며 목검으로 대련을 하러 갔고, 효은은 혜소를 데리고 학교 밖으로 외출했다. 덕분에 방에 남은 것은 상호와 태화뿐.

간만에 할 일이 없는 한가한 날이었다.

“치워, 치우고 놀아.”

“웅~.”

태화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이불을 몸에 둘둘 말았다. 상호의 말을 들을 생각이 하나도 없는 모습이었다.

상호는 한숨을 푹 쉬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이따 꼭 치워. 또 까먹었다 하지 말고.”

“웅.”

태화는 그렇게 대답하며 상호의 옆으로 꼼지락꼼지락 달라붙었다.

한데 꼭 붙어서 핸드폰이나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스승과 제자가 아니라 꼭 남매인 것 같았다. 상호는 뺨을 자꾸 찌르는 태화의 뿔을 밀어내며 핸드폰을 보았다.

화면에는 문자 앱이 켜져 있었다.

상대는 지윤.

‘무슨 약속을 했던 것 같긴 한데…….’

그 내용이 기억나질 않았다.

그래도 특별한 약속이면 따로 기억을 해 놨을 테니. 기껏해야 만나자는 약속일 텐데. 그게 크리스마스인지, 새해인지, 아니면 다른 어느 날인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한번 떠보려는 참이었다.

-지윤아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어머니 식당 일을 돕는 모양이었다.

-잘 지내고 있어? 보면 연락해

그는 그렇게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옆에서는 태화가 핸드폰에 몰두하고 있었다. 완전히 삼매경. 영화나 드라마라기엔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게임이라기엔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상호는 태화의 얼굴 옆으로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뭐 하는…….”

주식 그래프.

태화가 움찔하며 핸드폰을 숨겼다.

“뭘봐!”

“왜 숨겨.”

“프라이버시 침해야!”

“이미 봤어, 임마.”

주식을 한다는 것과 태궐에 넣었다는 건 알고 있다. 문제는 방금 본 화면이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는 것.

상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얼마 넣었댔지?”

“처……천.”

“벌었어?”

“…….”

“잃었냐?”

“…….”

상호의 손이 태화의 팔뚝을 후렸다.

“아야!”

“당장 빼 임마. 그러게 왜 잘 알지도 못하는 걸 가지고…….”

“아니야! 좀 있으면 오를 거야…….”

태화는 꿍얼거리면서 상호에게서 돌아누웠다.

“하나빛이 1월에 태궐에서 신제품 발표한다고 했어.”

“나빛이가 회장이냐? 그리고 그런 건 회장이 말해도 믿으면 안 되는 거야. 너 혜소한테 돈 빌린 거 있잖아. 잃기까지 하면 언제 갚으려고?”

“…….”

꿀 먹은 벙어리. 상호는 태화의 등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너 안 되겠다. 넌 노동을 좀 해봐야 돼.”

“오른다니까아아아!”

태화가 빽 소리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난 믿어! 태궐 믿어! 개같이 부활할 거야! 일해서 돈 벌면 평생 일만 해야 한다고!”

“하…….”

말을 들어먹질 않는다.

상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태화의 핸드폰을 뺏어들었다.

“앗!”

“한번 보자. 대체 어떻게 됐길래…….”

화면을 본 그의 목소리가 점차 흐려졌다. 그래프는 위로 붉게 치솟다가 파랗게 곤두박질친 상태였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

“야.”

“으……응.”

“천만원 넣었다며.”

“웅…….”

“잃었다며.”

“……웅.”

“왜 자산이 2천 5백이냐?”

“…….”

태화는 이불 속으로 슬그머니 기어들었다.

“주웟쪄.”

“뻥치지 마, 임마. 어디서 난 거야. 똑바로 말 안 해?”

“……빌렷써.”

“누구한테.”

“이 방 주인한테…….”

“……효은?”

상호는 다시 한번 그래프를 확인했다.

“야.”

“웅.”

“얼마 빌렸는데.”

“……2천.”

“뭐?”

어이가 없었다. 그걸 덜컥 빌리는 인간이나, 빌려주는 인간이나.

그나저나 그럼 3천이 2천 5백이 됐다는 말인가. 상호는 태화의 뿔을 잡고 고개를 강제로 돌렸다.

“야. 쌤 봐. 똑바로 봐. 어쭈, 버텨?”

“아, 자, 잘못했어!”

“5백이 뉘 집 개 이름이냐? 야, 5백이면 니가 맨날 사달라고 조르는 음식들 배터지게 먹고도 남겠다!”

“그치만 또 오를 거란 말이야! 연말에도 오르고, 연초에도 오르고, 신제품 발표하면 또 오를 거란 말이야!”

“정신이 있냐 없냐? 어? 떨어지면 어떡할래?!”

“떨어지면 수녀님하고 빡빡이한테 신체포기각서를 줄게!”

“이 짜식이…….”

상호가 태화에게 관절기를 걸려는 그때, 상호의 핸드폰에서 문자가 왔음을 알리는 소리가 났다.

“……너 좀 있다 보자.”

“오른다니까아아~.”

그는 뿔을 들이미는 태화를 밀어내고 핸드폰을 보았다. 지윤에게서 답장이 도착해 있었다.

-쌤예~

-이제야 제가 보고싶었슴까~

상호가 문자를 보고 쓴웃음을 짓자 태화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어? 뭐야. 쌤 왜 웃어. 이 돼지뇬이 좋아?”

“웃는 것도 맘대로 못하냐? 야, 살찐 걸로 따지면 네가 더 쪘어.”

“나는 쪄야 하는 곳에만 쪘잖아!”

“시끄러. 너 같으면 주식에 돈 잃은 애가 기특하겠냐, 엄마 도와서 일하는 애가 기특하겠냐?”

“그럼 나도 엄마를 주든가!”

“하…….”

그때 지윤이 문자를 더 보냈다.

-나빛이한테는 맨날 연락해싸믄서~

-저한텐 일주일 다되니까 연락하네예~

‘?’

멈춰버린 뇌 속에서 세 단어가 맴돌았다.

매일. 나빛. 연락.

‘……깜빡했다!’

깜빡했다.

상호의 등에 진땀이 줄줄 흘렀다.

-답이 없는 걸 보니까 역시나 까먹으셨네예~

-하긴 쌤이 그렇지예~

-저랑 약속한 것도 까먹고 물어보려고 연락했겠지예~

-뻔합니데이~

“…….”

상호는 할 말을 찾지 못해 이모티콘을 보냈다. 곰돌이가 후다닥 도망가는 그림 이모티콘.

그러자 지윤이 바로 답장을 보냈다.

-못 도망가던 시절이 참 좋았는데예~

-이제는 약속 좀 깜빡해도~ 도망치면 되고~ 참 편해졌지예~

-미안해 지윤아

-선생님이 잘못했어...

상호는 그렇게 답장을 보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서 약속이 언제냐고 물어보면 진짜로 화낼 것 같은데. 거기다가 방학식 이후로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은 나빛의 문제까지.

해결하려면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방법……. 뭔가 좋은 방법이…….’

주변을 둘러보던 상호의 시야에 동그란 눈을 끔뻑이는 태화가 들어왔다.

‘……아하.’

방법이 있는 것 같았다.

* * *

“안녕하세용…….”

태화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방향의 끝에는 얼떨떨한 표정의 두 사람이 있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국자를 든 지윤, 그리고 마찬가지로 앞치마를 두르고 만두피를 집다가 멈춘 정애.

골목시장의 가장 허름한 외곽에 자리한, 정애의 가게였다.

“……뭐꼬?”

지윤이 얼빠진 목소리로 묻자 태화의 옆에 선 상호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얘 일 좀 시키려고.”

“안 되입니더. 가게 망할 일 있습니꺼. 그 가스나가 무슨 일을 해봤는데예. 처묵을 줄밖에 모르는 가스나를…….”

“청소랑 설거지랑, 뭐 그런 거 있잖아. 한번 시켜보고 영 못써먹겠다 싶으면 나한테 말해 줘. 다른 데로 데려갈 테니까.”

그는 정애를 돌아보았다.

“형수님. 어떻게…… 안 될까요?”

“…….”

정애는 눈을 끔뻑이며 만두피를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요.”

“어무이! 저 가스나는…….”

“감사함다~.”

태화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정애에게 까불면 상호가 어떻게 나올지는 태화도 알고 있을 터였다. 상호는 태화의 등을 두드리며 지윤과 정애를 향해 멋쩍게 웃었다.

“사람 좀 만들어 주세요.”

“곰은 사람이 돼도 저 가스나는 안 되입니더.”

“에이, 얘도 노력하면 할 수 있어.”

“노력을 안 하는 기 문제지예.”

지윤이 혀를 차고는 주방으로 걸어갔다.

“국시라도 한 그릇 하고 가이소. 아이믄 만둣국이라도 해드릴까예?”

“으음, 그러면…… 형수님, 국수 한 그릇만 먹고 가도 될까요?”

“좋을 대로 하세요.”

“감사합니다. 야, 넌 뭐해. 빨리 가서 일 배워.”

“우씨…….”

태화는 꿍얼거리며 주방으로 향했고, 상호는 자리에 앉았다. 정애는 그런 둘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다시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

* * *

“니 설거지가 와 그래 느리노.”

지윤이 눈살을 찌푸리며 태화의 등짝을 쳤다.

“냄비에 묻은 거 뜯어뭇나?”

“열심히 하고 있잖아!”

“빨리 해라 마. 그래 해싸서 은제 끝낼 기고? 일이 산더미인디.”

태화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중얼거렸다.

“설거지 빨리 하면 시끄럽다고 아빠한테 맞았어.”

“내가 니 애비가? 여기 느 집 아이니까 빨리 허고 식탁이나 한 번씩 닦으래이.”

“칫…….”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좀 더 잦아졌다.

지윤은 육수가 잘 끓고 있나 확인하려다가, 정애가 말없이 손짓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어무이?”

정애는 태화 쪽을 흘끗했다. 태화가 이쪽을 보고 있진 않은지 확인하는 듯했다.

“네 친구. 선생님이랑 사는 거니?”

“대충 그렇심더.”

“아버지랑 사이가 안 좋아?”

“그랬는디 그건 옛날 일이고, 지금은 아부지가 죽었어예. 쟈 지금 가족이 하나도 없심더.”

“어쩌다가?”

“어무이 쪽은 어릴 때 집 나갔고, 아부지 쪽은…… 어무이 쟈 본 적 없어예? 테레비에 나왔는디.”

“아, 저번에 몇 달 전에……. 저 애가 그 아이니?”

“예. 쟈가 일이 있어서 쫓깄는디, 그거 때문에 쟈 아부지가 잡히부렀다가…… 업보 때문인지, 곱게 가진 못했다 카드라구예.”

“……그렇구나.”

정애는 다시 만두를 빚었다.

곧 문이 열리고 노인이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어서오이소~.”

지윤이 인사를 하자 노인이 눈을 끔뻑이다가 정애를 돌아보았다.

“이 아가 낯이 익은데…… 내가 야를 어디서 봤더라?”

“딸이에요.”

“으잉? 딸이었어? 그 머스마가?”

그 말에 지윤의 이마에 혈관이 솟고, 주방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꺄하하하학!”

“……아재요, 지가 으딜 봐서 머스마입니꺼.”

“어잇, 내가 전쟁 후로 여길 계속 왔는데…… 여태 사내놈인 줄 알았구먼. 신기하네. 어떻게 이런 아가씨가 되었나……. 허어, 참.”

노인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자리에 앉았다.

“다시 봐도 신기하네, 천상 여자인데 어찌 사내로 봤을까. 허어……. 하여튼 만둣국 하나.”

“……예.”

주방으로 돌아서는 지윤의 목소리는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육수를 끓이고. 파를 썰고. 그렇게 요리를 준비하는 지윤의 옆에서 태화가 깐죽거렸다.

“좋냐? 천상 여자?”

“끄지라.”

“내가 볼 땐 저 할아버지가 안경을 집에 놓고 온 것 같은데.”

“……흥.”

태화는 콧방귀를 뀌는 지윤을 흘겨보다가 물었다.

“야, 너 근데 크리스마스에 뭐하냐?”

“……비밀이데이.”

“뭐 쌤이랑 약속이라도 잡았냐?”

“…….”

“맞구만~.”

알기 참 쉽다. 목적을 달성한 태화는 다시 설거지를 시작했다.

만둣국을 끓이는 지윤의 뺨이 점점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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