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화>
347. 술버릇
“힉! 끅…….”
설미가 딸꾹질을 했다.
이미 많이 취해서 뺨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지만, 해련은 술병을 멈추지 않았다.
“설미느은~, 어떤 남자가 취향이드냐아~?”
“즈어……저어는…… 끅! 글셰여어…….”
“안대 쓰고~ 근육 있고~ 나쁜 남자 같지만 알고 보면 착한~?”
“그, 글쎼요…….”
“대답 못하면 마셔야지~.”
“녜에…….”
또 한 잔이 설미의 입으로 들어갔다.
상호는 어떻게든 끼어들어 같이 먹고 같이 취한 척 하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가 말을 걸 새도 없이 해련이 입을 열어서.
“설미는…… 뽀뽀는 해본 적 있냐~?”
“아마……아마도요…….”
“하면 한 거지 아마도요는 뭣이냐아~. 그럼 밤일도 한 번 못해본 게야~?”
상호의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성희롱이라고요, 할머니!’
그것도 바로 옆에서 남자가 듣고 있는데.
하지만 설미는 취해서인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 아니여어…….”
“무어~? 숫처녀가 아니야?”
“녜에…….”
“상대가 누구였는데에~?”
상호는 듣다못해 말리기로 했다.
“저기요, 교장선새…….”
“얘…….”
“응?”
설미가 꼬부라진 검지로 상호를 가리키고 있었다.
“얘요…….”
상호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오우 X발…….’
마주 앉은 두 여자의 분위기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미진의 표정은 살얼음 띄운 냉면처럼, 해련의 눈빛은 불판 아래 숯불처럼.
아무래도 X된 것 같았다.
“강 선생~.”
“…….”
“애인이 있지 않았나~?”
“……있죠.”
“이상하다~.”
해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가 아는 강 선생은~ 마음에 사람이 비어있던 적이 없는데~.”
“…….”
“설미는 언제 비집고 들어갔나아~?”
“…….”
고운 이마에 혈관이 솟았다.
“강 선생~.”
“……네.”
“혹시 나는 들어갈 수 없나~?”
“무슨 말씀이신지…….”
“그래~?”
해련이 상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오늘은 꼭 사냥에 성공하고 말겠다는 맹수의 눈빛으로.
그러다가 설미를 향해 술병을 내밀었다.
“이따 한번 보자고~. 자, 자. 받아야지?”
“녜에에…….”
이제는 이유도 없다. 설미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왜 술을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완전히 비몽사몽. 더 취했다가는 미진이 설미를 끌고 나가게 될 것이다. 상호는 애가 타서 컵에 물을 따랐다.
“누나, 물 좀 먹어요, 물. 시원하게…….”
“우움…….”
물을 받아 꼴깍이던 설미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도로 쏟아내 버렸다.
“부웨에엥.”
“누나……!”
“아이고~ 완전히 취했네~.”
해련이 빙긋 웃으며 미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막내도 슬슬 쉬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할래. 둘이 먼저 가도 되고.”
“제가 데려다 줄…….”
“예.”
선수는 상호가 먼저 쳤는데도 미진이 벌떡 일어났다.
미진의 한심해하는 눈빛이 상호를 푹 찔렀다. 애인도 있는 양반이 부끄럽지도 않느냐, 라는 표정이었다.
“저흰 먼저 가겠습니다.”
“그래~ 그래~.”
그렇게 둘은 떠나고.
해련이 새 술병을 땄다.
“자, 우린 이제 시작해야지?”
“…….”
상호는 갑자기 날카로운 눈빛을 지으며 잔을 만지작거렸다.
“교장선생님.”
“응?”
“악마가 사람들 사이에 숨어들고 있어요.”
무거운 목소리에 해련도 술병을 내려놓았다.
“악마들한테 당한 헌터들이 이상 반응을 보인대요. 사람을 해치고, 자해를 하고…… 발견할 때마다 전부 구속해서 재워 놓고 있지만, 그 사람들의 영혼이 무사할지는 미지수고, 전쟁에 참여할 헌터들도 부족해지고 있어요.”
아주 진지한 이야기.
하지만 실상은 해련의 술을 막기 위한 이유였다. 아무리 해련이라도 이런 이야기에 그딴 거 모르겠고 술이나 마시라고는 하지 못할 테니까.
그런데 해련이 벌떡 일어나더니.
“그래?”
상호의 옆에 앉아, 그를 벽으로 은근하게 밀어붙였다.
“좀 더 자세히 들어볼까?”
“저기, 교장과 교사치고 너무 가까운…….”
“뭐 어때. 설마 손자뻘에게 손을 댈 거라고 생각이나 하겠어~?”
“아니…….”
상호는 자신의 어깨로 다가오는 해련의 팔을 필사적으로 떨궈냈지만, 해련은 키득거리며 기어코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야기나 더 해봐.”
“그러니까…… 악마가 사람을…….”
“응응.”
해련이 그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상호가 아무 말이나 대충 꺼내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앙큼해 죽겠다는 듯한 표정을 보면.
가까이 다가붙은 그녀의 몸에서 뭉근하고 달달한, 솜사탕과도 같은 계수나무 향기가 났다.
“……교장선생님.”
“응?”
“조금만 옆으로…….”
“옆으로?”
해련은 옆으로 상호를 밀어붙였다.
‘끄응…….’
상호는 자기도 모르게 뺨이 붉어졌다.
포근하게 맞대오는 몸이 그리 싫지는 않았지만, 이미 애인‘들’이 있는데 여기서 더 늘릴 수는 없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더 진지한 이야기가 필요했다.
“교장선생님.”
“응.”
“제가 저번에 내공에 영혼을 담을 수 있다고 했잖아요.”
“응.”
“그래서 제 몸에 누나 내공이 있거든요? 아시죠? 백 하사…….”
“응.”
“그래서 누나 영혼도 제 몸에 있었는데…….”
상호는 울적한 표정으로 잔을 기울이고 말을 이었다.
“언젠가부터 느껴지질 않아요.”
“저런…….”
해련의 손이 상호의 팔뚝을 주물렀다.
“나라도 느낄래……?”
“아니 그럴 기분이 아니라는 뜻…….”
“기분은 만들면 되지. 자.”
해련은 상호가 방금 막 비워낸 잔을 툭 쳐내고는 그 옆의 맥주잔에 술을 콸콸 쏟았다.
“마셔라~, 마셔라~.”
“……예.”
피할 수 없으면 승부를 보자.
상호는 병을 건네받아 해련의 잔에 술을 따랐다.
‘한번 해 보자고.’
그리고 잔을 쭉 들이켰다.
* * *
“교장선생님, 저희 가보겠습니다.”
“응…….”
해련은 꼬부라진 혀로 대꾸했다.
“조심히 들어가아…….”
“예.”
한 무리의 교사들이 식당을 빠져나갔다.
해련과 상호의 앞에는 빈 소주병이 스무 병 남짓 놓여 있었다. 설미와 미진이 마시고 간 몫과 상호가 쏟은 것을 계산하면 각자 일고여덟 병 마신 셈이었다.
상호는 눈을 힘주어 깜빡였다. 눈 주변 근육이 영 찌뿌둥해서.
얼굴이 좀 부은 모양이었다.
‘좀 마셨나…….’
더 마셨다간 내일의 아침 해를 해련과 함께 보게 될 것이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물을 들이켰다. 해련이 교사들에게 인사하는 틈을 타서.
하지만 해련의 손이 그의 어깨를 턱 잡았다.
“무리 드러갈 자리가 잇으면~ 수를 너어야지~.”
“말도 제대로 못 하면서…… 대체 언제까지 마시려고 하는 건데요. 그만 좀 드세요. 아드님 부를 거예요…….”
“안 취했는데?”
해련의 혀가 갑자기 펴졌다.
내 오늘 너를 반드시 먹고 말리라, 그런 뜻이 담긴 눈빛이 상호에게 꽂혔다. 잔을 든 상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저는 이제 못 먹겠어요…….”
“그래? 어디 침대 있는 데 가서 쉴까?”
“학교 가고 싶어요…….”
“방학이라 안 가도 돼~. 슬슬 나가자~. 누워서 푹 쉬고 싶잖아~.”
“술이 맛있네요. 쭉쭉 들어가네.”
해련이 상호의 앞섶을 움켜잡으며 빙긋 웃었다.
“강 선생은 확실히 연상을 좋아하는가 보더라~. 누나들도 건드리고~ 설미도 건드리고~.”
“……너무 확실한 연상은 건드리기 좀 그래요.”
“원래 묵을수록 좋은 법이야~. 술도~ 산삼도~.”
“사람은 먹는 게 아니에요.”
잔에 다시 술이 채워졌다.
잡아먹으려는 자와 잡아먹히지 않으려는 자. 술로 승부를 보려고 해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마치 밑 빠진 독에 술을 붓는 것 같았다.
식탁에 놓인 병의 개수가 서른을 바라볼 때쯤, 상호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잔을 내려놓았다.
“……교장선생님.”
“응? 이제 좀 눕고 싶어?”
“저 화장실이요.”
이렇게라도 튀어야 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해련을 넘어 나오려 했다. 그런데 머리가 갑자기 확 어지러워졌다.
일어서니까 취기가 도는 모양이었다.
“윽…….”
벌써 이렇게 먹었나. 하긴 서로 취하게 할 목적으로 달리기만 했으니 그럴 법도 했다.
상호는 이마를 짚으며 앞으로 비틀거렸다.
그때 그의 다리가 해련의 다리에 부딪혔다.
“……앗.”
걸려서 넘어지는 상호의 앞으로, 해련도 의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쓰러지고 있었다.
콰당탕
“아야야…….”
“끄응…… 어라?”
상호는 침음하다가 눈을 번쩍 떴다. 양 뺨에 보드랍고 뭉실뭉실한 것이 닿고 있어서.
급히 고개를 들어 보니, 바닥에 널브러진 해련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강 선생.”
“죄, 죄송…….”
“이렇게 적극적일 줄 몰랐네.”
해련의 손이 상호의 넥타이를 꽉 잡았다.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웃어른을 덮치다니…….”
“……아닙니다.”
상호는 황급히 해련의 위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해련이 넥타이를 놔주지 않았다.
주변 교사들의 이목이 그들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강 선생.”
해련이 넥타이를 확 잡아당겨 그의 귀에 속삭였다.
“나 셋째가 보고 싶어.”
“집에 가서 보세요…….”
“나 아직 둘째까지밖에 없어…….”
‘……!’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상호는 넥타이를 풀어버리고 식당 입구를 향해 도주했다.
“앗! 강 선생! 어디 가!”
“화장실 간다고 했잖아요! 찾지 마요. 안 오면 싸다가 뒤졌나 보다 하세요!”
“이눔아! 가슴에 불을 질러놓고 가버리면 어째! 차라리 나한테 싸라, 응?!”
“갈게요! 들어가세요!”
“아이구우…… 좀만 더 하면 됐는데에…….”
그는 서럽게 우는 해련을 내버려두고 식당 밖으로 도망쳐 나왔다.
뛰다 보니 열기가 확확 올라왔다. 얼굴이 발갛게 부어서 눈이 잘 뜨이지도 않았다.
‘진짜 취했나…….’
이쯤 달렸으면 안전할 것이다. 상호는 뜀박질을 멈추고 가로수를 향해 비틀비틀 걸어갔다.
가로수에 기대어 숨을 몰아쉴 때. 잠깐 억눌렀던 취기가 다시 몰아쳤고.
‘끄응……. 머리가…….’
거기서 필름이 끊겼다.
* * *
“……으음.”
아침 햇살이 눈꺼풀을 뚫고 들어왔다. 상호는 눈을 감은 채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아이고, 머리야…….’
머릿속이 멍하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릿한 고통만 조금 느껴질 뿐.
하지만 등에 닿는 침대의 푹신함과.
“쿠울…….”
옆에서 느껴지는 작은 숨결에,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어?”
“쿠아…….”
태화가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얘가 왜 여기 있냐. 상호는 기겁해서 뒤로 물러나다가 무언가에 뒤통수를 빡 하고 부딪혔다.
이건 또 뭐냐, 어안이 벙벙해서 뒤를 돌아보니 이마를 부여잡은 효은이 눈물을 글썽이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X발새끼야.”
“……미안.”
효은의 주먹이 그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악! 야, 진짜 때리면 어떡…… 악!”
“밤늦게 쳐 들어와서는 애들까지 다 깨운 것도 모자라서, 아침에 때려서 깨우기까지 해? 뒤져, 뒤져 X밸럼아!”
“아야, 아야야…… 애들?”
상호는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왼쪽에는 효은. 오른쪽에는 태화. 그리고 태화 너머 침대 아래에는 세희와 다혜, 혜소가 이불을 깔고 자고 있었다.
“……쟤들은 왜 여깄어?”
“애들이 혜소랑 논댔어. 잠깐만, 이 새끼 은근슬쩍 말 돌리네?”
효은의 스트레이트가 상호의 턱을 깔끔하게 돌렸다.
“악! 미안해, 미안해…….”
“술 처먹은 날은 차라리 외박을 해 개새끼야. 한 번만 더 이래 봐. 확 깨물어 버린다.”
“……넵.”
“밥해.”
“넵.”
상호는 벌떡 일어나서 주방으로 걸어갔다.
아침부터 소란이 너무 시끄러웠을까. 아이들이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몸을 일으켰다.
세희의 황당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야, 이태화.”
“엉?”
“아니 어이가 없네. 니가 눕겠다고 침대에 누워 있던 애 자리를 뺏어?”
“메롱.”
“참나…….”
세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상호의 곁으로 다가왔다. 냉장고를 뒤적이던 상호는 기척을 느끼고 세희를 돌아보았다.
“잘 잤어?”
“네.”
그렇게 상호를 바라보는 세희의 눈빛에는 미묘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상호는 순간 가슴이 덜컥했다.
“……세희야?”
“네.”
“혹시 나…… 어제 뭐 잘못했어?”
“아니요.”
“그럼……?”
세희가 볼을 붉혔다.
“딱히 별일 없었어요.”
“그래……?”
“네. 그냥 자고 있는 저희들 깨워서 끌어안다가, 갑자기 혜소 보고는 펑펑 울더니 미안하다면서 난데없이 밥상을 차리고…….”
“…….”
“혜소는 자다 깨서 꼬박꼬박 조는데 선생님은 다 먹을 때까지 앞에서 지켜보고 있고…… 간신히 다 먹고 자나 했는데 저를 사조님 이름으로 부르면서 막 끌어안고 울고…….”
“…….”
“별일 없었어요.”
세희는 태연하게 말을 맺고 냉장고를 뒤적였다.
굳어 버린 상호의 귀에 효은이 통화를 하는 소리가 흘러들었다.
“여보세요. 심리치료센터 맞죠? 상담을 좀 하려고 하는데요. 예약이 몇 시부터……. 아뇨, 본인은 아니고 애인인데…….”
“…….”
상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싸쥐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