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여고의 남선생-346화 (346/501)

<346화>

346. 응큼한 술수

날이 지나 방학식.

학생에게는 당연히 기쁜 날이고, 원래대로라면 교사에게도 기쁜 날이 되어야 했지만, 상호에게는 그닥 좋기만 한 날은 아니었다.

무거운 한숨이 푹 쏟아져 나왔다.

“……에휴.”

“선생님…….”

나빛이 울먹거렸다.

“저 못 보는 게 그렇게 많이 아쉬우세요……?”

“어? 응? 아, 뭐, 그렇지…….”

“그럼 매일 아침점심저녁으로 영상통화해요…….”

무슨 통화를 하루에 세 번씩이나 하란 말인가. 상호는 애써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에이……, 하루 한 번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 말에 동그랗게 뜬 나빛의 눈이 희게 번득였다.

“제가 싫으세요……?”

“나빛아? 눈이 무서워…….”

“저는 아주아주아주 무서워질 수 있어요…….”

나빛의 눈이 점점 동그래졌다. 범의 부릅뜬 고리눈처럼.

상호는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아침이랑 자기 전에 전화할게…….”

“생각날 때마다 전화하세요.”

“응, 응.”

“문자 무시하지 마세요.”

“……으응.”

자꾸 눈물이 났다.

어쨌든 지금은 방학식 종례 중. 점심도 안 먹고 일찍 끝나는 날. 얼른 집에 가고 싶은 아이들도 있을 테니, 그는 정신을 차리고 말을 이었다.

“집 가는 애들은 조심히 가고.”

“네~.”

“남는 애들은…….”

겨울방학에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여름방학보다 두 배는 길기에.

미래는 로봇을 챙겨 집으로 돌아갈 거라 했고, 이서와 가은 또한 집으로. 이츠키도 일본으로 잠시 귀국. 나디아는 나빛의 집으로. 그래서 남은 아이는 셋.

세희, 태화, 다혜.

“어차피 점심도 같이 먹을 거니까…… 그때 보자.”

“웅.”

“네.”

“아으.”

아이들이 차례대로 대답했다.

* * *

“쌤예~. 지 갑니데이~.”

“응.”

상호는 팔을 머리 위로 붕붕 흔드는 지윤에게 마주 손을 흔들었다.

“조심히 가.”

“갑니데이~. 약속 잊지 마이소~.”

“……응?”

무슨 약속을 했던가. 상호의 손이 순간 멈췄다.

하지만 물어볼 새도 없이, 지윤은 이미 저 멀리 정류장 쪽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큰일 났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문자로 살살 간을 보면서 단서를 얻어나가야겠다. 상호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뒤로 돌아섰다.

세 아이가 눈을 깜작이고 있었다.

“밥 줘.”

“므아.”

“……그래, 그래.”

상호는 효은과 혜소를 부르기 위해 핸드폰을 꺼냈다.

“뭐 먹을지 생각해 놔.”

“지금 여기 고아밖에 없으니까 푹 고아 만든 소머리국밥 어때?”

“너 이리 와.”

“붸에에에에.”

넷은 차를 향해 걸어갔다.

* * *

“에휴…….”

푹 꺼지는 한숨에 효은이 눈썹을 치켰다.

“왜 또 한숨이야. 밥 먹는 데 복 달아나게.”

“그냥 그런 게 있어.”

상호는 대충 얼버무리고 국밥을 깨작였지만, 효은은 그런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효은의 젓가락이 상호의 혀를 잡았다.

“말해, 새꺄.”

“……여를 나야 애기하꺼 아니야.”

젓가락이 혀를 놓자 상호는 또 한숨을 쉬었다.

효은은 그런 그를 째려보며 젓가락을 쪽 빨고는 내려놓았다.

“빨리 말해. 또 지어내려고 시간 끌지 말고.”

“회식 때문에.”

“회식?”

“응.”

방학식 당일 저녁부터 회식 일정이 잡혀 있었다.

며칠만 지나면 교사들도 집에 갈 테니 지금이 적기겠지만. 한편으로는 지금 회식을 한다는 것은 연말에 또 할 수도 있고 연초에는 반드시 또 하겠다는 뜻이라서.

한숨이 끊이질 않았다.

‘회식에 너무 진심이셔…….’

호호호 웃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머리를 싸쥐고 절망하는 상호에게 태화가 물었다.

“회식 가면 좋은 거 아냐? 공짜 밥 먹잖아.”

“밥만 먹는 게 아니라서 그래.”

“술 때문이야?”

태화는 국밥을 우물거리며 상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쌤이 취한 건 좀 보고 싶네.”

“안 취해, 임마. 열 병은 마셔야 취할까 말까야.”

그 말에 다혜의 숟가락이 갑자기 뚝 멈췄다.

뭐 때문에 그러나. 상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다혜를 바라보았지만 다혜는 다시 맹한 얼굴로 식사를 계속했다.

“우아앙.”

“……많이 먹어.”

“쌤, 쌤. 나 좋은 생각이 났어.”

“뭔데.”

“날 데려가는 거야!”

밥알 하나가 둥실 떠올라 태화의 목젖을 쳤다.

“커헉! 켁! 켁!”

“너 데려가서 사고치는 걸 보느니 혼자 가지.”

“그치만~ 우리 학교 돈 많자나~ 비싼 거 먹을 거 아냐~.”

“그냥 고깃집이야.”

상호는 한숨을 푹 쉬고 숟가락을 들었다.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너희는 신경쓰지 마. 그냥 피곤한 것뿐이니까…….”

“그렇게 싫으면 가지 말든가.”

“눈치가 보여…….”

“니가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썼다고…… 참나.”

효은이 혀를 찼다.

“그래. 니 알아서 해. 밤늦게 들어와서 깨우지나 말고.”

“……응.”

그는 묵묵히 식사를 계속했다.

* * *

‘……결국 와버렸군.’

상호는 불안한 눈빛으로 식당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유리창 안쪽에는 먼저 도착한 교사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람 앉은키만한 칸막이 사이마다 식탁과 의자가 놓인 게 보였다.

옆에 서 있던 설미가 그를 돌아보았다.

“술 마실 거야? 내가 안 마실까?”

“저는 제 의지랑 상관없이 마시게 될 것 같아요.”

“그럼 내가 안 마실게.”

“네…….”

둘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자리를 정할 필요는 없었다. 저 멀리 칸막이 위로 하얀 양복을 입은 하얀 손이 흔들리고 있었기에.

“강 선생~. 임 선생~.”

“네, 네…….”

상호는 설미와 함께 그 자리로 향했다.

자리에는 이미 해련과 미진이 앉아 고기를 굽는 중이었다. 방금 막 올렸는지 아직은 빛깔이 선홍색이었다.

“둘이도 시켜요. 뭐를 좋아하나? 채끝? 업진?”

“먹으면서 생각해 볼게요.”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해련이 다짜고짜 술병을 들이밀었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빈속에 술부터 채우라 하는가.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잔 대신 젓가락을 집었다.

“……저 배부터 좀 채울게요.”

“받아만 놔~.”

“받으면 건배하고 건배하면 마시게 할 거잖아요.”

“그런가?”

해련이 빙긋 웃었다.

아닌 척 능청을 떨지만, 가늘게 뜬 눈 속에는 어차피 도망 못 치니까 포기하라는 빛을 품고 있었다. 상호는 그 뜻을 알아채고 손을 덜덜 떨었다.

“그래도 건배는 한 번 하고 시작해야지~.”

“……네에.”

“자, 자.”

“아, 저는 운전…….”

“대리 불러~.”

네 개의 잔에 술이 채워졌다.

해련은 잔을 두 손으로 살짝 든 상호와 설미와 미진에게 씩 웃어 보였다.

“올 한 해 고생 많았고~.”

“네.”

“강 선생은 특히 더 고생 많았고~.”

“감사합니다.”

“미진 선생은 강 선생이 싸지른 거 받아주느라 고생 많았고~.”

가운데로 모이던 미진의 잔이 우뚝 멈췄다.

“네?”

“응? 강 선생 바빠서 자꾸 부담임한테 떠넘기잖아~.”

“……아아, 예.”

미진은 한숨을 쉬고 잔을 부딪쳤다.

한 잔이 들어가자 다음 잔은 쉬웠다. 해련은 상호가 고기를 먹기도 전에 다음 잔을 권했고, 상호는 어쩔 수 없이 술을 받았다.

금세 빈 병 하나가 식탁 가장자리에 놓였다.

‘취하면 또 주책이나 부리시겠지…….’

하나 다행인 점은, 옆이 아니라 맞은편에 앉아 있다는 것. 적어도 허벅지를 주무르거나 엉덩이를 쓰다듬을 일은 없을 터였다.

그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 위해 미리 물을 마셔두었다.

“그런데 설미 선생.”

고기를 뒤집던 해련이 말을 꺼냈다.

“설미 선생은 남자친구 안 만들어?”

“네?”

설미는 갑자기 날아온 질문에 당황해서 얼굴을 붉혔다.

“남……남자친구요?”

“설미 선생 강 선생보다 한 살 많잖아. 그런데도 애인이 없으니까. 결혼하려면 슬슬 사람도 만나고 연애도 해봐야 이게 인연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을 텐데…….”

“저, 저는 아직…….”

“별로 그럴 생각이 없어?”

“……네.”

설미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동안 상호를 향했다.

동체시력이 총알보다 빠른 이들이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설미의 시선을 받은 상호는 속이 타서 물만 들이켰고, 해련은 그런 둘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웃었다.

“그럴 수 있지. 그래도 사람은 여러 번 만나보는 게 좋은데…… 슬슬 외롭거나 하진 않아?”

“네, 아직은…….”

“마음에 둔 남자가 있나? 주변에?”

“그, 그게…….”

설미는 쉬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해련도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설미가 마음에 둔 사람이 누구인지. 하지만 이미 애인이 있는 남자에게 마음을 뒀다고는 말할 수가 없으니.

대답을 하지 못하는 설미에게 해련이 술병을 들이밀었다.

“자, 자. 대답 못 하면 한 잔 받아야지.”

“네, 네에…….”

설미가 술을 받아 마셨다.

상호는 문득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수많은 전장을 거쳐 오며 발달된 직감이 머릿속에서 삐용삐용 사이렌을 울리고 있었다.

‘……이상해.’

예상대로라면 저 잔은 그에게 와야 했다. 해련의 목적은 상호지 설미가 아닐 텐데.

지금도 해련은 설미에게 곤란한 질문들을 던지며 대답을 못 할 때마다 한 잔씩 마시게 하고 있었다.

“자, 자, 쭉 해. 쭉~.”

“네에…….”

그때 조용히 물을 마시는 미진의 모습이 상호의 시야에 들어왔다.

‘……아하.’

그제서야 진상을 알 수 있었다.

상호와 설미가 가게에 들어오기 전, 해련과 미진이 모종의 거래를 한 것이다. 혹은 미진이 해련의 계략에 자기도 모르게 넘어갔거나.

해련의 목적은, 설미를 먼저 취하게 해서 미진과 함께 보내버리는 것.

‘그렇겐 안 되지.’

상호는 새 소주병과 빈 소주병을 하나씩, 그리고 물병을 슬쩍해서 식탁 아래로 가져갔다.

그런 다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새 소주병을 따서 약간은 빈 병에 담고, 나머지는 정강이에 쏟았다. 딱 한 잔 분량만 남기고.

구두가 소주로 가득 찼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살살…….’

들키지 않게.

그렇게 딱 한 잔만 남긴 병은 허공섭물로 몰래 식탁에 올리고, 빈 병에는 물을 가득 채운 후, 비워낸 소주병에서 가져온 뚜껑으로 단단히 밀봉했다.

‘됐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술병을 집었다. 한 잔만 남긴 병.

“제가 한 잔씩 올릴게요.”

“어머, 그래?”

해련이 씩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술이 해련의 잔에 담기고, 병의 입에서 술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이야~, 벌써 한 병 끝냈네.”

상호는 능청스럽게 물을 채운 술병을 집었다.

이제 이걸 설미와 미진에게 따르고, 자연스럽게 해련에게 넘겨서 자신도 받은 후, 해련의 옆에 놓고 그걸 설미에게 먹이도록 유도하면.

설미는 물만 먹게 되는 것이다.

‘계획대로야……!’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설미와 미진도 그에게 술을 받았다. 술이 아니라 물이지만. 이제부터는 연기가 중요했다.

‘자연스럽게…….’

상호는 해련에게 병을 넘겼다.

“……응?”

병을 받아든 해련이 멈칫했다.

설마 들킨 걸까. 그럴 리 없는데. 병을 따기 전에 헌 뚜껑을 들켰다면 모를까, 이미 딴 지 한참이 된 시점에서는 들킬 이유가 없었다.

상호의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왜 그러세요?”

“강 선생.”

“네?”

“섭섭하네…….”

해련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우리 짬밥에 이런 속임수가 통할 리 없잖아.”

“무슨…… 말씀이신지…….”

“술이랑 물은 무게가 달라.”

상호의 머릿속에 천둥이 쳤다.

‘……그걸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데!’

“술이 가볍고 물이 무겁지. 어머, 이거 묵직한 거 봐. 눈 감고도 칼에 핏방울이 맺혔는지 안 맺혔는지 맞추는 우리 사이에, 요런 앙큼한 장난을 치다니…….”

해련이 입술을 핥았다.

“아주 귀여워, 강 선생.”

“…….”

누가 알았으랴. 세상에 이 정도로 술에 미친 인간이 있을 줄.

상호는 고개를 푹 숙이고 벨을 눌렀다.

“이모,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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