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화>
345. 스며드는 운명
“므앙.”
언제나처럼 아리를 빨아먹는 다혜.
“네?”
그리고 그 옆의 나디아.
“아으.”
“네?”
“으아으아아~.”
“네!”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세희는 그런 둘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다혜의 침이 묻은 아리의 볼을 휴지로 닦았다.
“침 좀 묻히지 마.”
“므아…….”
“핥으려면 한쪽만 핥든가.”
“아웅.”
그러자 다혜는 아리의 뿔을 빨기 시작했다.
아리는 이걸 기뻐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쮸와아아아앙.”
“으……에에엑…….”
세희는 다혜를 말리는 것을 포기하고 책을 꺼내 펼쳤다. 그러자 옆자리에 앉은 태화가 고개를 불쑥 들이밀었다.
“뭐 봄?”
뭘 보든 놀릴 게 뻔하다. 세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책을 품에 숨겼다.
“저리 가.”
“왜 숨겨? 야설이야?”
“그냥 소설이야.”
“흐음…….”
예상과 달리 태화는 더 놀리지 않고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완전히 정신이 팔려 있다. 전재산을 꼴아박은 도박중독자처럼. 세희는 책을 읽는 척하다가 태화의 핸드폰을 슬쩍 보았다.
빨간 막대가 여럿 줄지은 그래프.
“뭐야, 그거?”
“올랐어.”
“뭐?”
“올랐다고…….”
태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번에 서울 터지고 시장 싹 다 나락갔을 때 영끌해서 사라고 해서 샀는데…….”
“주식이냐?”
“그땐 6만원이었는데 지금은 10만 뚫기 직전이야……!”
“얼마를 넣었는데.”
“처음엔 천이었는데, 2천 더 넣어서 3천……. 지금 그게 4천 5백이 됐어!”
“뭐?”
세희의 눈썹이 꿈틀했다.
“니가 3천만원이 어딨어?”
그 말에 태화는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대답을 똑바로 하지 못했다. 세희는 그걸 보고 확신했다.
“미쳤냐?”
“……뭐, 뭐가.”
“선생님 지갑에 손을 대?”
“뭔 지갑에 손을 대! 아니거든?!”
“폰이구만. 선생님 폰으로 너한테 송금했지?”
“아니라고! 수녀님한테 빌렸어. 따서 갚는다고…….”
태화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끝끝내 세희와 눈을 마주치진 못했다.
그래도 벌었다니 다행이다. 잃었으면 상병신 취급했을 텐데. 세희는 혀를 찼다.
“그만큼 벌었으면 팔지 그래.”
“아직 1월이 안 됐어…….”
태화가 초조한 듯 손톱을 잘근거렸다.
“1월이 되면 확실하게 오를 거란 말이야…….”
“그럼 냅두든가.”
“그 전에 떨어지면 어떡하지……?”
“븅신…….”
이 년은 상병신이 맞다. 세희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어디 넣었는데?”
“태궐전자.”
“앗!”
나빛이 눈을 반짝이며 끼어들었다.
“태화 태궐전자 주식 샀어?”
“엉.”
“그거 있잖아, 오빠랑 아빠가 1월에 신제품 예고한댔어!”
“뭐? 진짜? 그럼 X나 오르겠네?”
“응!”
태화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나빛에게 절을 했다.
“태궐 만세! 하나빛 만세!”
“찬양하라~.”
“태궐은 진리다! 하나빛은 빛이다!”
“칭송하라~.”
나빛이 헤헤 웃으며 두 팔을 높이 들었다.
그때 앞문이 열리고 미진이 들어왔다.
“앗.”
절을 하던 태화는 부리나케 의자에 다시 앉았다.
“안녕하세용.”
“뭐 하고 있었어?”
“그냥 운동 좀, 히히……. 근데 강쌤은요?”
“출장 갔대.”
그 말에 다혜가 눈을 끔뻑였다.
“아으아으아아.”
“세희야?”
“어디로 가셨냐는 것 같아요.”
“강원도에. 악마 때문에 볼일이 있대. 참나, 그럼 어제 말하든가 했어야지 아침이 되어서나…….”
시동 걸렸다. 세희는 말없이 친구들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바쁘면 왜 계속 교사 일을 하는 거야? 뭐 뻔하지. 애들 보고 싶어서겠지. 말로는 항상 연상밖에 안 사귀었다면서, 사실은 어린애들을 더 좋아하는…… 기분나빠, 진짜.”
“…….”
미진의 꿍얼거림에 아이들은 눈치를 보며 입을 닫았다. 미진은 기분이 나쁠 때면 상호를 씹는 게 일상이었다.
그때 제일 눈치 없는 인간이 손을 들었다.
“선생님~.”
“어, 나빛아. 왜.”
“혹시 상호 선생님한테 안마 받으셨어요~?”
그 말에 미진의 이마에 혈관이 솟았다. 세희와 아이들은 그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그것 때문이었구나…….’
“무슨 안마야! 추행이지, 진짜 쓰레기 같은 인간…….”
“선생님은 미안해서 그러셨을 거예요…….”
“미안하면 더 하지 말았어야지!”
미진은 이를 갈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됐다. 여기서 화낸다고 그 인간이 듣겠니. 돌아오면 또 미안하다면서 만지려고 하…… 아니, 그만하자. 수업하자, 수업.”
“넵.”
아이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다혜는 온 신경을 집중했다.
“으…….”
혼신의 힘을 다해, 마지막 한 줄기.
“……으아!”
성공. 다혜는 자신이 만든 작품을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수십 다발로 내려오는 기다란 드레드 머리.
세희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나직하게 딱 한 마디를 했다.
“풀어.”
“……므앙.”
다혜는 서둘러 땋은 머리를 풀기 시작했다.
상호가 지켜보고 있지 않으면 수업을 할 수 없는 두 아이. 둘은 미진에게 부름을 받을 일이 없어 스탠드에 앉아 딴짓을 하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수업을 하는 도중에도.
다만 딴짓을 하는 아이는 둘뿐만이 아니었다.
세희의 시선이 옆에 앉은 태화를 향했다.
“아직도 보고 있냐?”
“…….”
“안 들려?”
“…….”
안 들리는 모양이었다.
또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다. 이쯤 되면 중독이었다. 세희는 눈살을 찌푸리다가 태화의 꼬리를 툭 쳤다.
“흐익! 왜, 왜 치는데!”
“하루종일 폰만 보게?”
“십만원이 왔다갔다 백만원이 왔다갔다하는데 그럼 봐야지!”
“1월에 무조건 오른다며. 냅두면 되잖아, 멍청아.”
“그 전에 떨어지면 어떡해!”
빨간 눈동자는 불타오르면서도 흔들리고 있었다.
“떨어지는 그 순간에 팔았다가! 저점에 다시 들어가면! 그만큼 이득이란 말이야!”
옆에서 듣고 있던 지윤이 태화의 뒤통수를 쳤다.
“자알 한다 임마.”
“악! 왜 때려, 개년아!”
“그 X랄할 시간에 마법공학을 배우지 그랬나. 미래가 오늘 암것도 안 허고 번 돈이 니 폰 쳐보고 번 돈보다 많을 기다.”
“뭐? 야, 미래야. 미래 어딨어. 돈 좀 빌려줘! 따서 갚으면 되잖…….”
“작작해.”
세희는 태화의 핸드폰을 뺏었다.
“너 수업도 안 하고 폰만 본다고 선생님한테 말한다?”
“수업 안 하는 건 너잖아!”
“나는 강하니까 안 하는 거고.”
“폰 내놔, X뇬아! 니가 뭔데!”
“니가 나한테서 뺏을 수 있을 것 같아?”
팔을 휘두르며 아웅다웅하는 둘을 향해 지윤이 혀를 찼다.
“또 시작했구마, 희격태격…….”
“저러고 또 매점 같이 가겠지, 멍.”
“싸우지 마!”
갑자기 미래가 둘 사이에 끼어들더니 태화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핸드폰에 끼울 법한 아주 작은 USB 메모리.
“이걸 쓰면 돼!”
“이게 뭔데?”
“주식 그래프 데이터를 분석해서 가장 완벽한 매수 매도 타이밍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이야!”
“그런 게 있어?”
“마법사면서 로그도 모르는 멍청이 태화 언니를 위해 만들었어!”
“고마우면서도 빡치는 이 기분은 뭐지……?”
태화는 고개를 기웃거리며 그 USB를 받았다.
“어쨌든, 이걸 쓰면 언제 사고팔면 되는지 알 수 있다 이거지?”
“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한다면 인간이 잘못 분석한 거야!”
“오케이. 좋아. 성의를 봐서 특별히 써 주지.”
“고맙다고 하믄 되지 임마는…… 에휴.”
지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그때, 세희가 갑자기 태화의 손에서 USB를 뺏어 들었다.
태화가 입에서 불을 뿜었다.
“야! 내놔! 니가 뭔데 자꾸 가져가는데!”
“잘못되면 미래 네 탓할 게 뻔해. 이런 거 주지 마.”
“아, 그건 맞지. 언니는 바보니까.”
“뭘 맞아! 너희 날 뭘로 보는 거야!”
그래도 세희는 USB와 핸드폰을 돌려주지 않았다.
운동장에서는 은율과 이츠키의 대련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츠키는 부적이 붙은 발등으로 은율을 걷어차려 했지만, 은율의 보법을 따라가지 못하고 공중에 헛발을 치고 말았다.
은율의 검이 이츠키의 등을 때렸다.
“윽…….”
“잘했어. 들어와서 쉬어.”
미진이 박수를 한 번 치자 은율과 이츠키가 스탠드로 걸어갔다.
그녀는 조언을 많이 하지 않았다. 학생에게 소홀한 것이 아니라 그녀 나름대로 상호의 교육을 존중하는 방식이었다. 서로의 가르침이 충돌하면 아이들이 헷갈려하니까. 그냥 스스로 느끼도록 놔두는 것이었다.
스탠드로 돌아온 은율과 이츠키는 세희의 양옆에 나뉘어 앉았다.
이츠키가 세희를 돌아보며 눈을 끔뻑였다.
“세희.”
“응?”
“머리가 왜 그렇습니까?”
“……언니가.”
“굉장히 멋진데.”
이츠키가 세희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어떻게 땋는 겁니까?”
“아으.”
그 말에 다혜가 순식간에 머리를 땋았다. 가늘고 길게.
“으아으앙.”
“저도 한번 해보겠습니다.”
이츠키가 세희의 머리를 땋기 시작했다.
당황한 세희는 그러지 말라고 말하려 했지만, 어느새 바싹 다가앉은 은율이 가세한 탓에 입을 닫고 말았다.
“언니 손이 되게 빠릅니다.”
“므아앙.”
“좀 더 가늘게 하는 겁니까?”
“아으.”
“도양은 그새 하나 다 했습니다.”
“저기…….”
“세희는 가만히 있는 겁니다.”
“내 머리인데……?”
힘을 잃고 기어드는 세희의 항변 뒤로, 한마음 한뜻이 된 아이들이 열심히 머리를 땋고 있었다.
* * *
“……세희야?”
차에서 내린 상호는 세희의 몰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애가 부두술 레게 래퍼가 되어 있었다.
“꼴이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아니요.”
세희는 한숨을 폭 쉬었다.
“사연이…… 있어요.”
“풀어 줄까……?”
“네…….”
굵은 손가락이 가느다란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세희는 그 손길에 몸을 맡긴 채로 눈을 감았다.
“출장은 무슨 일로 가셨던 거예요?”
“악마 때문에.”
푹 내쉰 한숨이 세희의 뒷목에 닿았다.
“네가 말한 대로…… 악마가 사람 몸에 들어오나 봐. 악마랑 싸우다가 다친 사람들, 악마와 너무 오래 지낸 사람들……. 여기저기서 이상한 사람들이 갑자기 많이 늘어났대. 특히 헌터들이…….”
“악마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검사한 사람들한테서 악마 인자가 나왔어.”
의심스러운 이들에게서는 빠짐없이 검출됐다. 상호는 세희의 땋인 머리를 빠른 속도로 풀어내며 말을 이었다.
“악마가 사회에 침투하는 걸 보니…… 아마 그놈의 힘이 강해지는 것 같아. 헌터들의 수를 줄이고 전쟁을 준비하는 거지.”
“전쟁…….”
세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몰랐던 건 아니다. 언젠가 다가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던 걱정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은 그 무게감이 달랐다.
“……인가요.”
“응.”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비해야 할 것 같다.”
세희는 돌아서서 상호의 품에 얼굴을 폭 묻었다.
넓은 품은 얼굴을 몇 개고 더 품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품이 좋았다.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단단한 가슴이, 또 그 안에서 수많은 인연들을 잃어왔을 흉터 진 마음이, 믿음직하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워서.
먼젓번의 이야기를 되풀이하진 않겠노라 다짐하며, 자신의 명을 받아들였다.
“선생님.”
“응?”
“내가 지켜줄게요.”
세희의 손이 상호의 옷을 움켜쥐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래.”
상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세희의 구불구불해진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믿고 있을게.”
그리고 다시 땋인 머리를 풀어갔다. 세희를 품에 안은 채로.
그들은 수십 가닥의 땋인 머리가 다 풀릴 때까지, 해가 다 떨어지도록 꼭 붙어서 서로를 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