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4화 (344/501)

* * *

“그러니까…….”

상호는 방금 사내에게 들었던 말을 정리했다.

“너희 보스는 교회와 관련된 정부 요인인데…… 지금 교계도 정계도 혼란해서 보스의 가족들이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렇다.”

“그래서 딸을 데려가려고 왔다?”

“그렇다.”

통역을 맡은 사내가 중년인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러시아는 정교회가 정계와 밀접하게 유착되어 있는데, 개벽 이후 성력이란 것이 나타나자 종교계가 혼란에 빠졌다. 비단 러시아뿐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다 그랬다.

종교가 같을지라도 수많은 계파가 존재하고 교리의 해석에 따른 여러 충돌이 일어나는데, 그들 모두에게 성력이 나타나니 내가 옳네 네가 그르네 싸우게 된 것이다.

덕분에 종교계는 한차례 태풍이 불었고, 그 영향은 교계와 가까운 정부 인사들에게까지 번졌다.

“너희 보스의 자리를 노리는 이들이 있고, 그놈들이 나디아를 노리고 있다고?”

“나챌니크를 직접 죽이기는 정부의 눈치가 보이니, 가족을 암살해서 위협하려는 것이다. 흔한 수법이지.”

“……흠.”

방금 들은 내용에서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상호는 검지로 그들을 가리켰다.

“성력 때문에 종교인들이 혼란스러워졌다고 했지? 성력이 정통성을 판가름하는 기준…… 뭐 그런 건가?”

“바로 그렇다.”

“그게 너희가 나디아를 찾는 이유는 아닌가?”

“무슨 뜻이지?”

사내가 되묻자 상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력 때문에 혼란해진 종교계. 흔들리는 입지……. 성력을 쓰는 딸을 이용하기에 아주 좋은 상황이잖아?”

“뭘 말하고 싶은지는 알겠지만…… 나챌니크는 그럴 분이 아니다.”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그렇게 대꾸하는 상호의 눈빛은 중년인에게 꽂혀 있었다.

말은 안 통해도 눈빛은 읽을 수 있다. 딸을 찾는 눈빛인지, 소유물을 찾는 눈빛인지는.

그런데 눈빛이 깊어서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증명할 기회를 한 번 줄까.’

그는 중년인과 통역을 맡은 사내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전해.”

“말해라.”

“너희 보스, 그리고 너만 날 따라와. 나머지는 전부 여기 남는다. 만약 내가 돌아오기 전에 이 방에서 벗어나면…… 굳이 말 안 해도 알아듣겠지?”

“……으음.”

사내는 작게 침음하고 러시아어로 뭐라 중얼거렸다.

“전했다.”

“페트로브. 당신들이 예상한 대로 당신 딸은 이 학교에 다니고 있다. 만약 당신이 당신 딸을 찾아낸다면 이야기를 나누는 걸 허락하지. 대신 찾아내지 못한다면…… 당신들은 조용히 러시아로 돌아가는 거다.”

어차피 그들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사내가 그 말을 통역하자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납득하지 못했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볼멘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왔다.

“불만이라도 있나?”

“네가 아가씨를 숨겨놓고 안 보여주는 건지 나챌니크가 못 찾는 건지, 우리가 어떻게 구분하지?”

“그건 미안하지만 양심에 맡기는 수밖에 없을 것 같군. 하지만 나는 진심이야.”

“…….”

“여고이기 때문에 당신과 내가 갈 수 없는 구역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나는 당신 딸이 어디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우리가 갈 수 없는 구역에는 당신 딸도 없다고 분명하게 약속할 수 있어. 당신 딸은 지금 당신이 갈 수 있는 곳에 있다. 자, 어떻게 하겠어?”

지나치게 한쪽에 유리한 조건. 하지만 힘의 차이도 지나치게 한쪽이 유리하니.

사내들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중년인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했다.

“좋다고 하시는군.”

“현명하네.”

상호는 씩 웃고 문가로 걸어갔다.

“따라와. 나머지는 이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마라.”

“……그래.”

사내가 마지못해 대답했고.

곧 사내와 중년인이 상호의 뒤를 따랐다.

344. 눈사람이 아니라 사람

상호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설미에게 연락해 교장실의 인원들을 감시해 달라고 부탁한 참이었다. 그의 옆에서는 나디아의 아버지, 블라디미르 페트로브와 통역을 맡은 사내, 이고르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이고르가 이화관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건물은 뭐지?”

“여학생 기숙사다. 우린 못 들어가.”

“들어갈 수 있는 건물이 있긴 한가?”

툴툴거릴 만도 했다. 백합관 이화관 목련관에 여교사 숙소까지 못 들어가게 하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주말이라 텅텅 빈 본관 별관 식당에 나디아가 있을 리 없는 남교사 숙소뿐이니.

그렇지만 상호는 떳떳했다.

“저기엔 없어. 내가 약속한다. 나디아는 당신들이 찾을 수 있는 곳에 있어.”

“…….”

앵무새 같은 대꾸에 이고르는 통역조차 하지 않고 입술을 우물거렸다.

돌아다니는 길에 상호의 반 학생들을 몇 마주쳤지만, 옆에 있는 외국인들과 심상치 않은 상호의 표정을 보고는 눈치껏 눈인사만 나눴다.

상호와 두 러시아인은 학생 기숙사들을 지나 눈사람들이 즐비한 너른 마당으로 들어섰다.

“스네고비크가 많군. 뭔가 의미가 있나?”

“의미라고 할 건 없고. 그냥 즐기는 거지.”

“프라즈드니크라도 열린 줄 알았군.”

“프라즈드니크?”

“페스티벌.”

이고르가 눈사람을 쓱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스네고비크를 만드는 프라즈드니크가 열린다.”

눈사람 축제라. 상호는 나디아가 어릴 때부터 커다란 눈사람을 만드는 게 꿈이었다던 말을 떠올렸다.

“아이들이 좋아하겠군.”

“아이들의 프라즈드니크지.”

부지는 넓어도 둘러보는 데에 긴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한 바퀴를 다 돈 그들은 교장실이 있는 본관의 현관으로 돌아왔다.

페트로브가 교장실을 나선 이후 처음으로 무어라 말을 하자, 곧바로 이고르가 통역했다.

“교실은 어디지?”

상호는 말없이 위를 가리켰다.

계단을 올라 교실에 도착한 그들은 교실 문가에 붙은 사진의 앞으로 다가갔다.

“있군.”

사진 속의 나디아를 확인한 이고르가 작게 중얼거렸다.

금발과 벽안. 정면을 응시한 채로 빙긋 웃고 있는 소녀.

“여기가 네 교실인가?”

“어.”

상호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페트로브를 주시했다. 페트로브는 사진을 관찰하고 있었다.

푸른 눈의 아버지는 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교실로 쓱 들어갔다. 당연히 나디아는 거기 없었지만, 페트로브는 그게 목적이 아니라는 듯 교실을 쓱 둘러보면서 창가로 다가갔다.

창가에서는 본관 앞 운동장이 훤하게 내려다보였다.

거기에서는 한 로봇이 제 몸보다 더 큰 눈덩이를 굴리고 있었다.

“…….”

페트로브는 아주 오랫동안 그 로봇을 바라보았다.

그보다 약간 뒤쪽에 서 있던 상호는 부녀를 한눈에 담으며 입맛을 다셨다.

‘알아봤나.’

아버지로서의 직감 같은 게 있었던 것일까. 최소한의 자격은 갖춘 것 같았다.

페트로브와 상호가 멀거니 창문만 보고 있자 이고르가 헛기침으로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나 곧 페트로브가 무어라 말하자 바로 통역을 했다.

“딸은 어디에 있지?”

“……음?”

상호가 이고르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이고르가 재빨리 다시 말했다.

“통역을 잘못했군. 딸은 무사한가, 라고 물었다.”

“무사하지.”

“이곳은 안전한가?”

“이 학교? 안전하지. 내가 봤을 땐 우리나라에서 제일 안전한 곳이다.”

이고르가 그 말을 전하자 페트로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무엇을 묻는지 확인한 상호는 한 번 기회를 주어 봐도 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고르.”

“응?”

“넌 교장실로 돌아가.”

“…….”

이고르는 눈에 띄게 망설였다. 페트로브의 곁을 뜨는 게 아주 불안한 듯이.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상호가 손에 초강기를 두르자 다급히 페트로브에게 러시아어로 물었다.

페트로브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고르가 작게 중얼거리며 교실 밖으로 나갔다.

러시아어라 상호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페트로브.”

상호의 부름에 페트로브가 그와 눈을 마주쳤다.

상호는 페트로브를 향해 따라오라는 눈짓을 했다.

* * *

눈밭에서 눈덩이를 굴리는 로봇에게 두 남자가 다가왔다.

로봇을 조종하던 나디아는 곁으로 다가오는 상호와, 그 옆의 중년인을 보고 몸을 움찔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내지 않았다.

“나디아.”

상호는 로봇의 다리를 툭툭 두드렸다.

“괜찮으니까 나와 봐.”

[…….]

“억지로 데려가려고 하면 선생님이 지켜줄게.”

그 말에 로봇의 뚜껑이 열렸다.

뚜껑에서 금발이 쏙 튀어나오자 페트로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디아.”

“……파파.”

로봇에서 내려선 나디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상호는 둘이 편히 이야기할 수 있도록 뒷짐을 진 채로 자리를 떴다.

멀리서 지켜본 부녀는 분위기가 썩 나쁘지 않았다. 러시아어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으나 그냥 페트로브와 함께 눈길을 거니는 나디아의 걸음만 봐도, 저게 진짜 부녀인지 단순한 혈연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나눌 이야기가 많았을까. 벽안의 부녀는 다시 눈이 내리는 운동장을 돌고 또 돌았다. 느린 걸음인데도 네 바퀴를 돌도록 부녀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섯 바퀴 반, 상호의 반대쪽 저 먼 곳에서 둘의 걸음이 멈추고.

나디아가 페트로브의 품에 폭 안겼다.

‘그냥 평범한 아버지였나.’

상호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미 한 번 실패한 적이 있어서.

그래도 페트로브는 그런 인간이 아니었으니. 상호는 기회를 한 번 주기를 잘했다고 여기며 운동장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부녀는 머리에 눈이 쌓일 만큼 오래 서로에게 안겼다.

* * *

상호는 차 옆에 선 페트로브와 그의 부하들, 이고르를 바라보았다.

“먼 길 왔을 텐데 차 한 잔밖에 대접하지 못해서 미안하군.”

“…….”

이고르는 그게 아주 불만인 모양이었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나디아는 못 데려가고 차만 마시고 돌아가는 게.

그는 툴툴거리다가 검고 긴 차의 문을 열었고, 페트로브가 제일 먼저 차에 올랐다.

부하들이 전부 차에 오르자 이고르는 상호를 흘끗하고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또 툴툴거리다가 차에 타서 문을 닫으려 했다.

‘참 무뚝뚝한 양반들이군.’

인사도 없이 그냥 가는 게.

상호는 닫히는 문을 잡았다.

“응?”

이고르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지?”

“페트로브.”

상호는 페트로브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딸은 걱정하지 마세요.”

“…….”

통역이 없어도 페트로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고르는 상호와 페트로브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힘주어 차문을 닫았다.

그리고 운전수를 향해 러시아어로 소리쳤다.

“출발해.”

* * *

“블라디미르 알렉세예비치.”

검은 차창 속. 마주 놓인 기다란 좌석.

맞은편에 앉은 이고르가 페트로브를 바라보았다.

“딸은 찾았습니까?”

“아니.”

페트로브는 고개를 저었다.

“못 찾았다.”

“거짓말이군요.”

이고르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그게 당신 뜻이라면 어쩔 수 없지요. 그나저나 한 잔 어떠십니까?”

탁자의 밑에는 보드카가 놓여 있었다. 페트로브는 고개를 저었다.

“난 됐으니 너희나 마셔라.”

“그럼.”

이고르는 보드카를 따서 곁에 앉은 동료들에게 돌렸다.

그게 두 잔째가 되었을 때.

“컥……!”

사내들이 손을 덜덜 떨더니 비명도 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며.

페트로브는 이고르를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냐?”

“이곳의 땅은 따뜻하더군요.”

이고르는 품에서 검을 꺼냈다.

“묻혀 지내기 딱 좋을 만큼.”

“…….”

“사적인 감정은 없습니다. 그저 내 가족들이 인질로 잡혀 있다는 것만 알아줘요, 블라디미르.”

“파벨도?”

“예.”

파벨은 운전수의 이름이었다.

파벨이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페트로브는 얼굴 근육을 씰룩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언제부터?”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딸을 찾느라 입지를 지키는 데 소홀했던 탓이죠.”

이고르의 검이 불빛을 받아 노랗게 빛났다.

“원래대로라면 나디아와 함께 교통사고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그러지 못하는 게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유감이군요. 걱정 마세요. 나디아도 언젠가 당신의 옆에 묻어줄 테니까.”

페트로브는 말없이 이고르를 노려보았지만, 헌터가 아닌 일반인의 몸으로는 저항할 수 없었다.

이고르가 눈썹을 치켰다.

“그간의 정을 보아…… 마지막 선택지를 주겠습니다. 칼, 보드카. 둘 중 하나를 고르십시오.”

“…….”

“하긴 교인이 자살을 할 리가 없군요.”

이고르의 검이 올라갔다.

“함께 일해서 즐거웠습니다. 블라디미르 알렉세예비치 페트로브.”

허공에 번득이는 노란빛.

페트로브는 눈을 감았다. 1년 만에 품어본 딸의 온기를 그리며.

그 순간 트렁크 쪽에서 보이지 않는 힘이 터져 나왔다.

“윽……?!”

이고르는 칼을 든 채로 굳어 버렸다.

운전을 하던 파벨의 몸도 단단히 굳었다. 그의 발목이 서서히 브레이크를 누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뒷좌석에서 칼이 튀어나왔다.

“후우…….”

상호는 칼로 네모난 통로를 만들어 트렁크에서 뒷좌석으로 빠져나왔다.

“운전을 드럽게 못하는군. 설마 저 양반도 술 마시고 운전하는 건가?”

“너…….”

이고르가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알고……?”

“그러게 통역을 정직하게 했어야지.”

이고르는 페트로브가 ‘나디아는 어디에 있냐’라고 물었다고 했지만, 그때 페트로브는 나디아를 보고 있었다.

그게 미심쩍어서 따라왔는데 촉이 맞았다. 상호는 무심한 표정으로 이고르의 검을 잡아 우그러뜨렸다.

꽈드득……

이고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헉…….”

“마음 같아서는 그냥 죽이고 싶지만…….”

상호는 그들이 나눈 대화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나디아의 아버지를 암살하려 한 이들을 곱게 놔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죄를 지을 순 없으니.

“경찰을…… 응?”

상호의 말이 끊겼다. 페트로브가 유리잔을 집어서.

페트로브는 거기에 보드카를 따라 이고르와 파벨에게 내밀었다.

“마셔라.”

“…….”

이고르는 페트로브의 눈에서 분노가 아닌 연민을 읽었다.

가족이 인질로 잡혔으니, 임무를 실패한 채로 살아 돌아가면 배신자 취급을 당해 모두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죽음으로 충성을 증명해야 했다.

“……고맙습니다.”

이고르는 잔을 받아들었다.

“함께 일해서…… 즐거웠습니다. 블라디미르.”

그리고 잔을 쭉 비웠다.

살아서 충성을 증명할 때가 좋았다. 이고르는 생의 마지막 보드카가 목구멍을 태우는 것을 음미하다가, 몸을 한 번 떨고는 앞으로 픽 고꾸라졌다.

그리고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 * *

“돌아가실 겁니까?”

상호는 페트로브를 향해 물었다.

“가면 또 위험해지는 거 아니에요?”

“저는 거기가 더 안전합니다. 딸은 여기가 더 안전하겠지만요. ……라고 하시네요.”

둘 사이에 선 여인은 범상치 않은 내용에 진땀을 흘리면서도 성실하게 통역을 했다.

그녀는 공항에서 찾은 통역사. 이곳은 공항. 대답을 들은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암살은 외지에서 더 쉬울 테니까……. 그럼 나디아한텐 러시아로 잘 돌아가셨다고 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페트로브가 상호에게 악수를 건넸다.

“제 딸과 눈사람도 많이 만드세요.”

그 눈빛이 나디아처럼 맑았다.

처음 봤을 때 상호가 로봇과 눈사람을 만들던 걸 본 모양이다. 상호는 그의 손을 잡고 씩 웃었다.

“들어가세요.”

“고맙습니다.”

페트로프는 차에서 챙긴 트렁크를 끌며 공항 안쪽으로 사라졌다.

상호는 멀어지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통역사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감사합니다. 이제 들어가셔도 돼요.”

“아, 그게……, 저기, 혹시 번호를 좀 여쭤봐도 될까요……?”

“……죄송합니다.”

살짝 숙였던 고개가 푹 숙여졌다.

도망치듯이 자리를 뜬 상호는 공항 밖에 나오고 나서야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나디아, 아버님 비행기 타시는 거 확인했어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답장이 왔다.

-ㄱㅅ

애들한테 배운 모양이었다. 상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학교 다니는 거 허락받았지?

-ㅇㅇ

-다행이네

-근데 나디아, 궁금한 게 있는데... 아버님은 네가 여기 다니는 줄도 모르셨잖아. 등록금은 어디서 났어?

-나빛

-혹시 그 핸드폰도...?

-나빛

‘역시 그랬구나…….’

의문이 풀리자 또 의문이 들었다. 유연에게 졸랐을 것 같진 않은데. 봉진에게 조른 걸까. 어쩌면 나로가 내줬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걸 나디아에게 물어볼 필요는 없으니. 상호는 페트로브가 남긴 말을 나디아에게 전해주었다.

-같이 눈사람 많이 만들라고 하셨어

-사람을?

-?

-같이 사람 많이 만들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상호의 손가락과 눈동자가 덜덜 떨렸다.

-아니 나디아

-말이 아니고 글인데 헷갈릴 리 없잖아

-잘 모르겠고 같이 사람 많이 만들어

‘일부러 그러는구나…….’

상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눈사람... 눈사람 많이 만들자

-돌아가면 아까 만들던 거 같이 만들어 줄게

-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바로 날아온 답장.

말이 아니라 글인데도, 신난 듯 밝은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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