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므흐흐흥~.”
다혜는 책상에 수북이 쌓인 소원권을 품에 가득 끌어모았다. 책상 밑의 다리가 신난 강아지 꼬리처럼 마구 파닥였다.
“느흐흐흥~.”
“……잘했어.”
상호는 애써 웃었다.
“다혜 아직 말을 못 하고 글도 못 쓰지만…… 선생님이 어떻게든 알아들어 볼 테니까, 네가 쓰고 싶을 때 마음대로 써……. 알겠지?”
“아우웅.”
“그래…….”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는 눈물을 삼키며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자, 너희도 맞은 만큼 반납해야지.”
“증거 있어?”
“……응?”
돌처럼 굳어 버린 상호를 앞두고 태화가 다리를 건들거렸다.
“내가 52개 맞았다는 증거 있냐고.”
“그거야 내가 일일이 다 세서…… 야, 오히려 적게 센 거야! 몇 개는 못 셌고……!”
“증거 있냐니까?”
태화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배 째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희도, 지윤도, 심지어 나빛도.
모처럼 생각해낸 묘안이 물거품이 되게 생겼다. 상호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부라렸다.
“야, 하늘이 알고 땅이 알아! 쌤이 너희 그렇게 가르쳤어?! 거짓말을 하고 살면 인생이 거짓이 되고! 결국엔 자기가 손해를 보는 법……!”
“증거 있냐고. 증거 없잖아. 증거도 없는데 우기는 사람이 잘못이야, 증거를 확인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잘못이야?”
“증거가 없어도! 너희가 그걸 봤다는 사실과! 너희 마음속의 양심이……!”
“어쩔~. 증거 내놓으셈~.”
말이 안 통하니 이길 자신이 없다. 상호의 간절한 눈빛이 세희와 나빛을 향했다.
“얘들아, 너희는 알잖아…….”
“뭘요?”
“너희는 양심을 왜 따라야 하는지 알잖아……!”
“몰라요. 꾸꾸야, 그치~.”
“뺙.”
“꾸꾸도 모른대요~.”
“제발…….”
마지막으로 은율을 바라봤지만, 은율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 뿐이었다.
“안 돼요, 선생님.”
“은율아…….”
“한 명의 행복보다 열다섯 명의 행복이 더 중요해요.”
“행복보단 정의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저희가 행복하면 선생님도 행복해요.”
“전혀 행복하지 않아…….”
“아니에요. 선생님은 지금 행복하신 거예요.”
“그런 거니……?”
“네.”
은율의 단호한 대답에 상호는 교탁 아래로 주저앉고 말았다. 작게 코를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다혜는 그런 상호를 바라보며 입가에 장난기를 묻히고 웃었다. 이제 이 반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겠다는 듯이.
“므히히히…….”
아이들이 상호를 놀릴 때의 웃음과 퍽 닮아 있었다.
341. 눈사람은 대머리
그날도 눈이 내렸다.
주말이라 출근 준비는 하지 않았다. 상호는 사과를 우물거리면서 멍한 눈으로 창가를 바라보았다.
창틀에 눈사람 세 개가 앉아 있었다.
두 개는 크고, 하나는 작고.
‘이게 난가?’
큰 것들 중 하나는 얼굴에 단추가 하나만 달려 있었다.
그 옆에 놓인 두 번째 큰 눈사람은 머리에 실로 만든 조악한 가발을 쓰고 있었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쓴웃음을 짓다가, 옆에 혜소가 다가온 것을 알아차리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거 뭐야. 머리카락이야?”
“네.”
“나는 왜 없어?”
그 말에 혜소가 상호의 머리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괜히 뜨끔해진 상호는 황급히 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 선을 확인했다.
‘에이, 깜짝이야…….’
다행히 하나도 벗겨지지 않았다. 머리를 쓸어봐도 숱은 그대로. 그는 털 하나 묻어나지 않은 손바닥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저씨 탈모 아니야…….”
“운명이에요.”
“…….”
주술사의 말이 이보다 더 무서울 수 없었다.
장난일 것이다. 장난이어야 한다. 상호는 나중에 탈모 예방책을 꼭 검색해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창가에서 빨간 뿔이 불쑥 올라왔다.
“쌤~. 나 삼겹살 마려우…… 어라?”
태화가 창턱에 손을 얹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애꾸눈 눈사람이 추락했다.
태화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쌤! 강상호 떨어져 죽었어!”
“나 여기 있어.”
“아니! 강상호가 머리부터 박살이 났다니까!”
“그야 눈사람이니까.”
“내가 사람을 죽였어……!”
“눈사람이라고.”
“살인사건이야!”
호들갑을 떨던 태화의 손이 나머지 눈사람들까지 싹 추락시켜 버렸다.
태화가 눈을 부릅뜨고 손을 덜덜 떨었다.
“일가족 살인사건이야……!”
“그러게.”
“내가……, 내가! 행복한 한 가정을 파멸로……!”
“그래서 왜 온 건데?”
“밥 묵짜.”
상호는 태화의 초롱초롱한 눈을 마주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오늘 아침에는 선약이 잡혀 있던 차라.
“아침엔 다혜랑 세희랑 먹기로 했었는데…… 너도 갈 거면 가고. 대신 메뉴는 다혜가 고르게 할 거야.”
그 말에 태화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치, 또 천세희 먼저 약속 잡아 주네.”
“다혜랑 이야기하려고 가는 거야, 임마. 세희는 따라오는 거고.”
“어차피 그 언니 말 못 하잖아!”
“내가 할 말이 있으니까 그러지. 너 자꾸 그러면 떼놓고 간다?”
“흥!”
코로는 콧방귀를 뀌지만, 이미 꼬리를 흔들면서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몸에 묻은 눈을 툭툭 털어내면서.
상호는 남은 사과를 마저 해치우고 옷장을 향해 걸어갔다.
“쉬고 있어. 시간 되면 나가자.”
* * *
“므으으으응.”
다혜는 정체불명의 효과음을 내면서 기계처럼 자장면을 빨아들였다. 제면기 영상을 거꾸로 돌리는 것마냥 수많은 면이 입속으로 사라져 갔다.
상호는 탕수육을 우물거리며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맛있어?”
“므앙.”
“많이 먹어.”
“아으아으.”
식탁에는 이미 빈 그릇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호전됐다. 예전 같았으면 진작에 세 그릇은 먹었을 텐데. 용혈로 인한 허기가 많이 느껴지진 않는 모양이었다.
다혜의 옆에 앉은 세희가 휴지로 다혜의 입을 닦았다.
“나한텐 묻히지 말고 먹으랬으면서.”
“므아~.”
“좀 조신하게 먹어. 또 묻잖아.”
“아으~.”
상호는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왜?”
짬뽕을 먹던 태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가엔 빨간 국물이 그득히 묻어 있었다.
“뭐 묻었어?”
“아니.”
“휴지에 침 묻혀서 닦아조.”
“안 묻었다고.”
다 먹고 밖에 나가면 그때 놀려줘야지. 상호는 세희와 눈빛을 교환하며 같은 뜻을 확인했다.
그는 아이들이 먹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다혜도 장학금 받기로 했어.”
“으아?”
“그러니까 그 걱정은 이제 안 해도 돼.”
“므아…….”
다혜는 씩 웃고 다시 자장면을 흡입했다.
원래는 못 받을 장학금이었지만 상호가 어제 담판을 지었다.
혁은 이미 연말평가 상위 10명에 세희까지 더해서 장학금을 줬는데 시험도 통과 못 한 애한테 장학금을 주면 어떻게 될 것 같냐고 상호를 쪼았다. 안 그래도 예산이 빠듯하다면서.
하지만 상호도 할 말이 없지는 않아서, 다혜가 전국평가에서 1등을 해서 학교 명예를 올려주지 않았느냐고 설득을 했고.
결국 학교 예산에서 남은 만큼 지급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어쨌든 받기는 한 셈이었다. 부족하면 상호가 내면 될 것이고.
“잘했어. 너희 둘도. 이제 다들 졸업만 하면 되겠네.”
그 말에 태화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이제 놀아도 돼?”
“뭘 놀아. 헌터 시험 준비해야지.”
3학년 11월부터 응시 가능한 헌터 시험. 괴렵 수행 능력 평가.
거의 한 달에 걸쳐 실시되는, 헌터 지망생의 강함을 분별하는 시험. 시험을 통과해서 등급을 받으면 그 학생은 해당 등급으로 취급되어 그만큼의 능력을 요구하는 임무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C급을 받으면 C급의 임무에, S급을 받으면 S급의 임무에.
다만 S급으로 취급받는 것은 실력뿐. 진짜 S급은 아니고 S급의 대우를 받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헌터는 얼마나 강한지가 중요하고, S급 임무에 투입되어 성과를 올리면 금방 S급이 될 수 있으니. 헌터 시험에서 얼마나 높은 등급을 받는지는 헌터 지망생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네가 어디 가서 내 제자라고 하려면 높은 등급을 받아야 할 거 아냐. 나는 네가 C급이든 S급이든 본인만 행복하면 상관없는데, 세상 사람들이 널 게으른 인간으로 본다고. X급 선생한테 배웠으면서 C급밖에 안 된다고…….”
“그럼 쌤 제자라고 안 하면 되잖아.”
“그럴 생각 하지 말고 높은 등급을 딸 생각을 해.”
“쌤 애인이라고 하면 되잖아!”
“혼날래?”
상호는 태화의 이마에 딱밤을 날리고 젓가락을 들었다.
“네가 게으른 인간 취급을 받아도, 그거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상관없다면 나도 상관없어. 그게 네 선택이라면…… 그런데 네 실력이면 충분히 S급까지 노려볼 만하니까 그러는 거야.”
“왜 나한테만 그래? 얘는 S급 못 따도 돼?”
“세희는 S급을 못 받아도 자기가 알아서 S급까지 올라갈 애니까.”
“우씨…….”
꿍얼거리던 태화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세희와 눈을 마주쳤다.
“좋냐? 성실희?”
“좋지. 나태화.”
“쌤! 얘 내 이름 갖고 놀려!”
“밥이나 먹어.”
“나한텐 애들 별명으로 부른다고 막 그랬자나! 왜 얜 안 혼내?!”
“그걸로 언제 혼냈냐. 혼내는 게 뭔지 보여줘? 얼른 밥이나 먹어. 나태화게 질질 끌지 말고…….”
“은근슬쩍 놀리고 있잖아아아!”
셋은 한참을 더 옥신각신하며 식사를 하다가, 다혜의 앞에 네 번째 그릇이 놓이고 나서야 식당을 나섰다.
* * *
눈이 내리는 길을 달려 학교에 도착하니 학생들이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교문에 줄지어 놓인 큼지막한 눈사람들. 꼭 도열을 받는 것 같았다. 상호는 느릿하게 길을 지나 주차장에 차를 대고 밖으로 나왔다.
놀고 있는 아이들 중에 그의 반 아이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눈송이를 쫓으며 눈밭을 달리는 단비, 혁구에게 눈을 보여주고 있는 나빛, 뭔가 복잡한 모양의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 나디아.
그는 차에서 내리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놀고 들어갈까? 소화도 시킬 겸…….”
“웅.”
“으아으.”
태화와 다혜는 눈이 쌓인 곳을 향해 달려갔지만, 세희는 따라가지 않고 상호의 옆에서 걸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세희 왜?”
“그저께에 언니가 폭주했을 때 있잖아요.”
세희가 상호의 곁에 다가서서 팔짱을 끼었다.
“그때 제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어요.”
“목소리?”
상호는 예경을 떠올렸다.
“누나같이?”
“그런 식인데, 목소리는 전혀 달랐어요. 아마…… 악마였던 것 같아요.”
“악마?”
“네. 저랑, 선생님이랑, 언니가 싸워봤던 그 악마요.”
“악마 인자…… 때문인가 보구나.”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악마가 언니 몸을 뺏었었거든요.”
“몸을?”
“네.”
세희의 눈동자가 다혜를 향했다.
“제 안에서도 절 죽이려고 하고, 언니 몸으로도 절 죽이려고 했어요.”
“……으음.”
악마가 사람 몸까지 뺏을 수 있다니.
세희는 지금 무사히 곁에서 걷고 있었지만, 상호는 머릿속이 아뜩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저번에 다혜가 스스로 정신 차렸다고 하지 않았어?”
“네. 잠깐 동안이요. 그래서 그때 제가 언니 뿔을 잡고…… 초혼강기를 불어넣었는데.”
세희가 상호와 눈을 마주쳤다.
“악마가 나갔어요.”
“나갔다고?”
상호의 걸음이 멈췄다.
“완전히?”
“그것까진 모르겠어요. 근데…… 아마 제 생각에는, 초혼강기로 악마 인자를 없앨 수 있는 것 같아요.”
“초혼강기로…….”
그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악마 인자를 없앨 만한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초혼강기뿐일 것이다. 그렇지만 악마의 시체를 초혼강기로 태웠을 때는 다시 부활했는데.
고민에 빠진 상호에게 세희가 물었다.
“선생님은 악마 목소리 들어본 적 있으세요?”
“아니…….”
목소리는 들어본 적 없다.
하지만 심상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어본 적은 있다.
“……내 안에도 있긴 한 것 같아.”
“이것도 제 생각인데…… 초혼강기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악마에게 내성이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은 초혼강기를 쓸 수 있고, 제 몸에도 선생님 내공이 들어 있잖아요. 저희니까 그나마 목소리 정도에서 끝난 거지, 다른 사람이라면 악마에게 이미 지배당했을지도 몰라요.”
“충분히…….”
가능성 높은 추론이다. 상호는 그렇게 대답하다가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세희의 몸에 있는 그의 내공이 지금까지 악마 인자를 막아 왔다면, 그의 몸에 있는 예경의 내공도 악마 인자를 막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누나 목소리가…… 안 들렸던 건가.’
악마 인자를 막느라 바빠서.
오늘은 꼭 심상에 들어가 봐야겠다. 상호는 그렇게 결심하고 세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겠다. 그래서, 아프거나 목소리가 들리는 건 아니지?”
“네. 이제는 멀쩡…….”
퍼억
눈덩이가 날아와 세희의 얼굴을 강타했다.
“…….”
멀쩡하지 않아 보였다. 얼굴이 점점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상호는 눈덩이가 날아온 곳을 돌아보았다.
“붸에에~.”
태화가 혀를 쏙 내밀고 있었다.
“누가 여우년처럼 쌤 옆에 찰싹 붙어 있으래? 나처럼 동생들이랑 놀아주지도 않고 말이야. 붸에에~롱.”
“…….”
세희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때 태화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엥?”
위를 올려다보니 온통 하얀색.
하늘이 왜 새하얀지 고민하는 태화의 얼굴에, 큼지막한 눈사람 머리가 정통으로 내리꽂혔다.
퍼억
“아으!”
다혜가 세희를 향해 엄지를 치켰다. 나쁜 놈은 언니가 해치웠으니 안심하라는 듯이.
눈사람 머리 위에 빨간 뿔이 살짝 튀어나온 게 보였다.
“……! ……!”
태화는 눈사람 머리 속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쏟아내더니, 보이지 않는 앞을 손으로 마구 휘젓다가,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다른 학생들을 향해 돌진했다.
단비가 꼬리를 세우며 눈을 부릅떴다.
“몬스터다! 으르르르…….”
“꾸꾸야! 쪼아!”
“뺙?”
혁구는 당황한 듯 고개를 요리조리 돌렸다. 눈사람이 되어버린 태화를 알아보지 못해서.
대신에 상호를 발견하고는 그를 향해 출격했다.
“앗?! 아니야, 꾸꾸야! 선생님 말고!”
“뺙.”
“아야야! 나빛아, 혁구 좀 데려가…….”
“꾸꾸야!”
“뺙.”
나빛이 불러도 혁구는 상호의 머리를 쪼았다. 상호는 그제서야 아침에 혜소가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얘 때문에 탈모가 오는구나…….’
참으로 용한 예언이다. 그는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몸을 수그렸다. 소중한 머리카락들을 최대한 지키기 위해서.
눈물이 쏙 빠지도록 아픈데 머리카락까지 쏙 빠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갑절로 더 슬프게 만들고 있었다.
342. 눈의 사람들
“운기조식?”
조수석에 앉은 해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혼자 해도 되는 거 아니야?”
“불안해서요.”
상호는 핸들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몸에 있는 악마 때문에…… 주화입마에 걸릴 수도 있어서요. 최악의 경우에는 몸을 뺏길 수도 있고…….”
“나 강 선생 못 이길 텐데.”
“상태만 확인해 주세요. 혼자 갔다가 아무도 모르게 쓰러지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누가 소식이라도 전해줘야 할 것 아닌가. 그게 해련을 데려가는 이유였다. 해련이라면 적어도 도망은 칠 수 있을 테니.
깜깜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가로등이 지나갔다.
시간은 새벽 한 시.
“휴게소 들렀다 갈까요?”
“아니. 괜찮아.”
해련은 고개를 저으며 의자를 뒤로 눕혔다.
“아이구야…….”
“피곤하세요?”
“응. 요즘 일이 너무 많아서…….”
고운 입술에서 액면가답지 않은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이사장한테 치이고, 학생한테 치이고…… 아유, 삭신이 쑤시네.”
“안마라도 해 드릴까요?”
“회식 한번 하면 싹~ 씻겨 내려갈 것 같은데…….”
보통 회식하면 더 쌓이지 않나. 상호는 멀거니 눈을 끔뻑였다.
‘그나저나 회식이라…….’
12월이니 얼마 안 가 연말 회식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방학식 부근에.
회식에 안 좋은 기억만 있는 상호에게는 그다지 끌리는 행사가 아니었다.
‘튈까?’
효은을 데리고 어디 여행이라도 가버릴까. 더 이상 눈치 볼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상호는 그런 고민을 하다가 해련을 흘끗했다.
“피곤하면 지금 눈 좀 붙여 두세요. 운기조식도 한참 시간 걸리니까.”
“그래야겠다. 으응…….”
해련은 차창을 향해 돌아눕더니, 곧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내었다.
* * *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산의 정상.
차가운 밤공기와 스산하게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점차 사라져 갔다.
‘스읍…….’
상호는 심상 속에서 눈을 떴다.
끝없는 어둠. 지평선도 없는 어둠이 그를 반겼다. 예경을 만날 때마다 보이던 익숙한 풍경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 그런 건 어떻게 만드는 건지.
‘내 마음속인데 누나가 더 잘 아는구나.’
그는 어둠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희미한 빛이 뭉실거렸다. 하얀색, 회색 갈색.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색감들.
그러나 그 색감들은 형태를 갖추지는 못하고, 그저 물에 비친 등불처럼 잔잔히 일렁이기만 했다.
‘수행이 부족하구만.’
더 집중해서 형태를 만들어보려 했지만 결국은 잘되지 않았다.
주변에는 아무도 느껴지지 않았다. 예경도. 악마도. 상호는 방금 만든 빛을 기준 삼아 어둠 속을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츠츠츠츠……
방울뱀 꼬리에서 날 법한 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의 어둠.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존재는 느낄 수 있었다.
‘이건가.’
그가 그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상호야.”
뒤에서 누군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왔어?”
상호는 뒤를 돌아보았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얼굴. 항상 그리는 그녀가 눈앞에서 웃고 있었다.
“응.”
“웬일로?”
“누나 보고 싶어서.”
그의 손이 기다란 머리카락을 쓸었다.
“요즘 목소리를 못 들었어.”
“아하…….”
예경은 쓰게 웃고는 상호의 품에 얼굴을 박았다.
“미안, 요즘 좀 바빴어.”
“왜?”
“널 지키느라.”
목소리에 피곤한 기색이 묻어났다.
“네 안에서 악마를 잡으려고 돌아다니느라…… 바빠서 이야기할 겨를이 없었어. 미안해. 조금 힘들었어…….”
“그래?”
상호는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잠깐이라도 쉬어.”
“응…….”
예경도 그의 품에 얼굴을 더 깊숙이 묻었다.
그때 상호의 손에서 검푸른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윽……?!”
검푸른 불꽃이 몸을 감싸자 예경의 입에서 당황성이 튀어나왔다. 그래도 상호는 멈추지 않고 초혼강기를 예경에게 불어넣었다.
예경이 그의 품에서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상호……야?!”
“누나는 어리광을 부리지 않아.”
흔들림 없이 차가운 목소리였다.
“자기가 아무리 힘들어도…… 나까지 걱정시키진 않으려고 하지. 너 따위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킷…….”
예경의 얼굴이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불타 살라지는 살점과 뼈 속에서, 이빨이 부딪히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다음부턴…… 조심할게, 상호야…….”
퍼억
검푸르게 타오르는 손이 놈의 골통을 으스러뜨렸다.
끝까지 목소리를 흉내 내다니. 상호는 이를 갈며 어둠 속에 흩어지는 잿더미를 내려다보았다.
‘……X벌놈.’
방울뱀 같은 소리를 내던 어둠도 사라졌다. 아마 도망친 모양이었다.
그는 조금 더 어둠 속을 걸으며 예경을 찾아 헤맸지만, 별다른 소득은 얻지 못하고, 현실의 시간은 한참 흘렀을 것이란 생각에 아쉬움을 품고 심상에서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