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1화 (341/501)

* * *

결국 종명은 세희가 이긴 것을 인정하고 괴렵부로 돌아갔다.

다친 사람은 없다. 부서진 것도 없다. 모두 무사하다는 사실만으로도 상호는 감사했지만, 혁에게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이었다.

“그냥 넘어가기에는…….”

혁이 교장실 내의 모두를 둘러보았다.

“내가 너무 많은 걸 봐 버린 것 같군.”

창가에 기대어 선 해련. 혁이 앉은 소파의 맞은편에 누워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다혜. 그 양옆으로 나뉘어 선 건흠과 상호, 그리고 세희.

혁의 시선은 특히 다혜를 향하고 있었다.

“여태까지는 내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교장선생님의 손을 썰어버릴 정도로 강한지는 몰랐어.”

“이사장님.”

건흠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일단 내 생각부터 말하지요.”

혁이 일어나서 뒷짐을 지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난 기회를 많이 줬어요. 올여름부터 지금까지. 반년씩이나. 그런데 이젠 내 눈으로 봤습니다. 그 아이가 얼마나 위험한지.”

상호는 세희의 손을 잡은 채로 잠자코 들었다.

“이번이 네 번째요. 사고란 건 두 번이면 충분하고 세 번이면 많은데. 네 번째까지 그냥 넘기면 그건 그냥 천치지.”

“…….”

건흠은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다친 사람은 없지 않느냐, 라고 하기에는 다혜가 보여준 무력이 너무 컸다. 언제라도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면…….”

마른침을 삼키자 목이 한 번 꿀렁였다.

“조기 졸업……이라도…….”

“2학년한테 져 놓고 잘도 좋은 소문이 나겠군.”

혁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맘을 굳힌 듯싶었다.

“교사들이 너무 많이 봐 버렸어.”

“…….”

건흠은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 답은 다혜의 퇴학뿐인가. 반쯤 포기하고 있을 때 세희가 말했다.

“언니 아까…… 잠깐 정신 차렸었어요.”

“뭐?”

“절 공격하기 직전에 정신 차리고 공격을 멈췄었어요. 스스로. 아마 조금만 더 있으면 자기가 제어할 수 있게 될 거예요.”

“……흠.”

그래도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혁은 그런 눈빛이었다.

건흠은 도움을 구하기 위해 해련을 바라보았지만, 해련은 묵묵히 방관할 뿐. 건흠의 편도 혁의 편도 들지 않으려는 듯했다.

‘제발…….’

그때 건흠과 상호의 눈이 마주쳤다.

상호의 눈빛은 무언가를 묻고 있었다.

‘…….’

건흠은 그게 무슨 질문인지 알았다.

‘……받아들여야겠지.’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마자 상호가 입을 열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뭐?”

혁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호를 찔렀다.

“뭘 어떻게 책임지겠다는 거지?”

“다혜를 제가 돌볼게요.”

“자네 자꾸 그 꼴이 되던데…… 그럴 땐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오늘도 세희가 해결했잖아요. 그런 것까지 계산해서 책임지겠다는 거죠.”

“학생들의 목숨을 책임지겠다고?”

그 말에 상호는 작은 어깨를 들썩였다.

“이미 그러고 있는데요, 뭐.”

“…….”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이미 책임지고 있다. 혁은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래서 벽을 향해 돌아서며 작게 혀를 찼다.

“……일이 터지면 그땐 안 넘어가.”

“알죠, 알죠.”

상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알고 반 이동시키겠습니다.”

* * *

문을 뚫고 나오는 아이들의 목소리.

건흠은 옆에 선 다혜, 그리고 뒤편에 선 상호와 세희를 돌아보았다.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예.”

상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건흠과 다혜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교실의 소란이 멎었다. 담임만 온 거라면 금방 다시 활기를 되찾았겠지만, 오랫동안 등교를 하지 않은 다혜를 보자 아이들의 눈에 궁금함이 깃들었다.

건흠은 다혜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도 고생했다.”

이게 마지막 종례.

“2학기도 다 끝나가네. 그렇지?”

“네.”

어차피 원래대로라면 3학년이니, 조금 일찍 헤어지는 것뿐일 텐데.

“앞으로 남은 시간, 친구들이랑 잘 지내고…….”

살짝 떨리는 목소리.

“탈 없이…… 건강하게 보내자. 알았지?”

“네~.”

크게 대답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다혜가 말없이 웃었다.

그 모습을 본 건흠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교탁을 손으로 툭툭 치고 뒷짐을 지었다.

“자, 인사하고 끝내자.”

“차렷!”

반장이 일어나서 고개를 꼬박 숙였다.

“경례! 안녕히 계세요~.”

“그래.”

건흠은 나가는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나가지 않는 아이는 단 한 명. 다혜뿐.

다혜는 아이들이 다 나가기까지 기다렸다가, 건흠과 자신 단둘이 남은 교실을 쓱 둘러보고는.

“아으.”

자신의 책상을 손으로 쓸었다.

3년 전부터, 2년 동안 앉은 자리. 그 자리에 다혜가 앉는 것이 다혜에게도, 건흠에게도 익숙했다.

건흠은 다혜에게 다가가 옆 책상에 기대어 앉았다.

“좀 더 있다 갈 거니?”

“우으……아으.”

다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건흠에겐 어차피 익숙한 교실. 앞으로도 많이 볼 교실이었다. 하지만 다혜가 있는 교실은 앞으로는 볼 수 없을 터.

그래서 건흠도, 자리에 앉은 다혜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러기를 한참 동안.

“다혜야.”

“아으.”

“선생님은 항상 여기 있을 테니까.”

“으아.”

“가끔 한 번씩…… 얼굴 보여주고 가.”

“아으아으.”

다혜가 당연하다는 듯 파닥파닥 고개를 끄덕였다.

건흠의 입가에 걸린 희미한 미소가 조금 밝아졌다.

“강 선생 기다리겠다. 슬슬 갈까?”

“아웅.”

“가자.”

둘은 손을 잡고 함께 교실을 나섰다.

* * *

다음 날.

상호는 교탁 옆에 선 다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새 친구가 왔어.”

“므앙.”

다혜가 동그란 눈을 깜빡였다.

상호의 반 아이들은 다혜가 누군지 다 알고 있었다. 당황하지 않는 사람은 딱 한 명, 세희뿐.

아리의 안색이 특히 창백했다.

“어…….”

상호는 안절부절못하는 아리를 바라보다가 다혜를 흘끗했다. 아직은 특별한 반응이 없었다.

“다혜.”

“아으.”

“세희 옆에 앉을 거지?”

“아으아으.”

“그래. 가서 앉자.”

다혜는 교탁 옆에 놓은 책상과 의자를 번쩍 들어 세희의 옆으로 향했다.

그런데 걸음의 궤도가 조금씩 바뀌더니.

“므아…….”

아리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상호는 내공을 꺼낼 준비를 하며 둘을 관찰했다. 그동안의 치료가 효과가 있을까. 다른 아이들도 여차하면 막아설 기세였다.

곧 다혜가 아리의 옆에 책상을 내려놓았다.

“아으──.”

“으…….”

아리가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그뿐. 다혜는 멀쩡한 표정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침을 흘리지도, 눈동자가 풀리지도 않은 채.

상호가 만족한 표정을 짓는 순간.

‘됐…….’

다혜가 아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힉……!”

순간이동을 쓰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떨어지는 입술, 그 사이로 번득이는 하얀 이빨. 상호는 다혜가 입을 벌리는 것을 바라보며 내공을 뿜어내려 했다.

‘젠장…….’

아직 때가 아니었던 건가. 그렇게 뭉툭한 강검을 만들어 둘 사이에 끼워넣으려는데.

다혜가 아리의 볼을 빨았다.

“아웅.”

“……으?”

아리의 눈동자가 의문으로 흔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혜는 이제 아리를 꽉 끌어안고 본격적으로 빨아먹기 시작했다. 무슨 사탕이라도 되는 것마냥.

아리의 볼이 점점 침범벅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서, 선생님…….”

“아우우앙.”

“살려주세요…….”

상호는 멍청히 서서 눈만 끔뻑였다.

‘……용 맛이 나나?’

곁에서 잔뜩 긴장하고 있던 아이들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기 머고?”

“알사탕이 아니라 아리사탕이네.”

“살류어…….”

아리의 볼이 쫀득쫀득한 찹쌀떡처럼 쭉쭉 늘어났다.

“살류어쥬어요…… 선스앵니이임…….”

“조금만 참아. 다혜도 이제 우리 반이니까.”

“우째스어어…….”

“므앙.”

신나게 아리를 빨아제끼는 다혜를 내버려두고, 상호는 가볍게 박수를 한 번 쳤다.

“자, 수업해야지. 평가는 다 끝났어도 학기는 안 끝났다.”

“놀아야지! 평가 끝났는데!”

“놀았잖아 임마. 어제 세희 평가하는 동안…….”

“쌤이 봤어? 우리 노는 거 쌤이 봤어? 못봤잖아! 보지도 못했으면서 단정짓지 마!”

“야…….”

“꼬우면 오늘 우리랑 놀면서 노는 거 확인하던가!”

“그니까 놀겠단 소리잖아…….”

“누가 아니래?”

“끄응…….”

상호가 한숨을 푹 쉬었다.

다혜는 조용히 눈을 깜작였다. 이 반의 분위기에 아직 적응하지 못해서.

상호와 태화의 입씨름이 이어져도, 그저 아리를 핥으면서 모두를 지켜볼 뿐이었다.

“아웅.”

“스알……려…….”

아리의 모기처럼 가냘픈 목소리는 다혜의 입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고 말았다.

그 누구의 귀에도 닿지 못한 채.

340. 눈싸움

다음 날 아침.

상호는 거울 속의 원래대로 돌아온 자신을 바라보며 넥타이를 매었다.

이불 속에서 효은이 꿍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눈 온대.”

“그래?”

“첫눈도 같이 못 보는 X발새끼랑 사귀는 내 팔자…….”

“…….”

웬일로 날씨 걱정을 해주나 했더니. 상호는 입맛을 다시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겨울이구나.’

12월.

이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맞는 두 번째 겨울. 그는 창가로 다가가 하얗게 번진 듯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확실히 눈이 오긴 올 것 같았다.

“혜소랑 눈사람이라도 만들면서 놀아.”

“몰라. 잘 거야.”

“너처럼 게으른 마누라랑 사는 내 팔자가…….”

베개가 상호의 얼굴에 꽂혔다.

‘……튀어야겠군.’

더 있으면 또 잔소리 듣겠다.

그는 서둘러 검을 챙겨 현관으로 달아났다.

* * *

“므아아앙.”

오늘도 다혜는 아리의 볼을 빨고 있었다.

아예 제 무릎에 앉혀놓고 양팔로 껴안아 가둔 채. 피자의 치즈를 늘리는 것처럼 신나게. 아리는 단단한 비늘이 무색하게도 부정형의 액체괴물처럼 마구 쭉쭉 늘여졌다.

“으아…….”

“아웅.”

“으아아…….”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세희가 다혜의 등을 찰싹 쳤다.

“그만 빨아. 애 얼굴 늘어나잖아.”

그러자 이번에는 혀를 내밀어 핥기 시작했다.

동물이 물을 마시듯 빠르게 찹찹거리며. 프로펠러처럼 파닥파닥 잘도 움직이는 혀가 볼을, 귀 아래를 지나 뒷목까지 내려갔다.

다혜가 뒷목을 핥자 아리의 몸이 움찔거렸다.

“으, 으……! 으! 꺅……!”

“이상한 데 핥지 마.”

“꾸웅…….”

다혜는 꿍얼거리다가 이번에는 아리의 반대쪽 볼을 빨기 시작했다.

그때 앞문이 드르륵 열리고 상호가 들어왔다.

“좋은 아침~.”

“안녕하세요.”

“므앙.”

“으아아아…….”

태화가 책상을 두드렸다.

“쌤, 쌤.”

“응?”

“오늘 눈 온대.”

“그래서?”

“놀자.”

“또?”

어제도 놀았으면서 또 놀겠단 말인가.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손사래를 쳤다.

“안 돼.”

“아 왜! 하루 더 놀면 어디 덧나?”

태화는 책상을 쾅 내려치고 벌떡 일어났다.

“내가 놀고 싶어서 놀아?! 눈이 온다잖아! 저 밖에 눈이 있잖아!”

“놀기만 하면 언제 사람 될래 임마. 안 그래도 세상이 힘든데……. 너희가 강해져야 나도 헌터들도 편해질 거 아니야.”

“……그럼 오늘만 마지막으로 놀자!”

“안 돼.”

“우씨…….”

태화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이건 쌤 잘못이야!”

“갑자기?”

“쌤이 수업을 재미없게 하니까 그런 거야! 쌤 수업이 기대되면 내가 놀자고 그랬겠어? 이건 쌤이 노력을 안 해서야!”

“무슨 노력을 바라는 거야?”

“수업을 놀이처럼 재밌게 좀 해 봐!”

“……흠.”

상호는 턱을 괴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수업을 놀이처럼이라.

확실히, 재미도 잡고 성취도 잡을 수 있다면 좋기야 하겠지만. 보통 성취는 인내에서 오는 법이라서.

‘놀이와 수업을…… 으음…… 어떻게…….’

고민 때문에 귀가 닫힌 그는 태화와 아이들이 속닥거리는 것을 듣지 못했다.

“그냥 던져본 말인데 엄청 고민하네.”

“쌤 너무 순진해. 멍.”

“그래서 좋아. 헤헤헤…….”

“아우웅?”

“언니는 모르지? 우리 선생님 완전 바보야.”

“우리밖에 모르는 바보.”

“우앙.”

다혜는 아직도 고민 중인 상호를 바라보며 싱겁게 웃었다.

* * *

겨울의 첫날부터 첫눈이 두껍게 내렸다.

운동장에는 벌써부터 헌터 시험이 끝난 3학년들이 나와서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사람 머리통만한 눈덩이를 조약돌처럼 던지거나, 마법으로 자그마한 눈보라의 회오리를 만들거나, 정령을 시켜 하늘에서 폭설이 내리게 하거나.

그런 즐거운 난장판 사이로, 한 반이 줄을 지어 구석으로 향하고 있었다.

“쟤네 강쌤 반 아냐?”

“오늘도 수업하는구나.”

“환복까지 했네.”

수군대는 소리를 들은 태화의 입이 오리처럼 삐죽 튀어나왔다.

“쌤. 진짜 수업할 거야?”

“…….”

상호는 대꾸 없이 걷기만 했다. 뒷짐을 지고 다리를 휘적이면서.

태화는 그런 상호의 등을 뿔로 쿡쿡 찔렀다.

“수업할거냐구.”

“…….”

“수업할거냐고오오!”

“좀 조용히 와봐, 임마. 나도 생각이 다 있어.”

“진짜?”

생각이 있다는 말에 태화가 눈을 반짝였다.

“그치? 역시 노는 거지?”

“놀긴 놀지.”

“응? 놀면 노는 거지, 놀긴 놀지는 또 뭔데.”

상호는 운동장 구석에 자리를 잡고 섰다. 3학년들이 오지 않아 눈이 그대로 남은 곳이었다.

그의 발치에서 눈이 동그랗게 모이기 시작했다.

“눈싸움이야.”

“눈싸움?”

태화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까 뭔가 있구만.”

“있지, 물론. 수업시간이니까.”

상호의 주변에 눈덩이가 떠올랐다. 열 개 남짓.

“너희랑 내가 싸우는 거야.”

“너희? 우리 다?”

“응. 동시에.”

그 말에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쌤이랑예? 눈으로 말입니꺼?”

“응.”

상호가 갑자기 지윤을 향해 눈덩이를 던졌다. 속도가 빠르지 않았기에 지윤도 가볍게 눈덩이를 잡았다.

그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희가 내 눈덩이를 맞으면 소원권을 하나 반납하는 거야.”

“소원권을예?”

“왜요?”

아이들이 눈을 부릅떴다. 당장이라도 바락바락 대들을 듯이.

나빛이 성창을 꼭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수작부리지 마세요…….”

“……들어봐, 들어봐.”

한겨울에도 진땀이 났다. 상호는 소매로 이마를 훔치며 손바닥을 내보였다.

“말한 대로…… 너희가 내 눈덩이를 맞으면 소원권 하나 반납. 대신에 너희 중 한 명이 날 맞추면, 그 사람한테 그 소원권을 다 몰아줄 거야.”

“네?”

“다요? 저희한테서 뺏은 만큼?”

“응. 누적된 걸 주는 거지.”

그러면 죽기살기로 피하고 죽기살기로 맞출 것이다.

예상대로 아이들의 눈에서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소원권에 관심이 없는 아이들만 빼고.

하지만 그 아이들도 곧 어쩔 수 없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될 터였다.

“시간은 쉬는 시간 종 칠 때까지. 불만 없지?”

상호의 말에 아이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다시 상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습니더.”

“그래. 그럼…….”

씩 웃는 상호의 주변에서 눈덩이 수백 개가 일시에 솟아올랐다.

“시작하자.”

“……엑.”

아이들이 멍한 표정으로 눈덩이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눈덩이가 매서운 기세로 날아들자 혼비백산해서 이리저리 피하기 시작했다.

“쌤! 이거 너무 많자나아아!”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야.”

상호는 그렇게 대꾸하며 내공으로 눈덩이를 조종했다.

눈덩이는 직선으로만 날아가지 않았다. 변화구처럼 휘어지기도 하고, 허공에서 갑자기 멈췄다가 궤도를 바꿔 전혀 다른 목표를 노리기도 했다.

아이들은 변화무쌍한 눈덩이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느아아앙!”

“쌤예, 이기 우째 눈땡이를 든지는 깁니꺼. 눈땡이를 휘두르는 기지!”

“어쨌든 눈싸움이잖아~.”

“쌔애애애앰!”

아이들이 절규해도 상호는 흐뭇하게 웃을 뿐이었다.

소원권이 열 개. 열두 개. 열다섯 개. 눈덩이가 적중할 때마다 착실하게 하나씩 회수되고 있었기에.

‘흐흐…….’

오늘이야말로 소원권을 싹 회수하고 말리라. 그는 특히 소원권이 많은 아이들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세희, 태화, 나빛, 지윤, 그리고 은율.

무예가 아이들과 태화는 진땀을 흘리며 눈덩이를 피하고 있었지만, 나빛만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선생님~.”

주변에 펼친 방어막이 눈덩이를 막고 있어서.

활짝 웃은 나빛의 손에 조그맣고 귀여운 눈덩이 하나가 달랑 쥐인 게 보였다.

“헤헤헤…….”

입가에 자꾸 방실거리는 웃음이 걸렸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마 상호가 자신을 위해 이 수업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상호는 차마 그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너무 눈이 부셔서.

하지만 나빛도 예외가 될 순 없었다.

“……어?”

나빛의 눈에 의문이 가득 찼다.

밝은 회색 머리에서 눈가루가 부스스 떨어졌다.

“어……?”

방어막이 깨져 있었다.

눈덩이를 강기로 감쌌다가 방어막을 깬 후 푼 것이다. 상호는 눈을 질끈 감고 눈덩이를 깨진 방어막 안으로 쏟아부었다. 나빛은 특히 소원권이 많은 대주주라서.

“아야야야! 선생님? 선생님……!”

나빛의 슬픈 목소리는 눈에 파묻혀 사라졌다.

그때 마찬가지로 눈더미에 파묻혀 있던 단비가 바깥으로 쏙 튀어나오며 소리쳤다.

“멍! 나 이거 알았어! 몇 대를 맞는지는 상관없잖아! 한 대만 때리면 되는 거야!”

“그걸 왜 말해, 바보야!”

미래가 답답하다는 듯 외치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꼭 총처럼 생긴 도구였다. 아니, 총이 맞았다. 흰색과 하늘색으로 이뤄진 그 총은 상호를 향해 조그마한 얼음 총탄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상호는 보법을 몇 걸음 펼쳐 총알을 전부 피해냈다.

‘안 되지.’

소원권은 절대로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그의 목적은 오로지 회수. 한 번 그렇게 마음먹은 이상 아이들은 그의 털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아니 누군가들이 매서운 기세로 옆에 짓쳐들었다.

“…….”

무표정한 이서. 그리고 이서를 방패 삼은 은율.

소원권에 관심이 없는 이서는 눈덩이를 아무리 맞아도 무표정으로 일관했고, 은율은 그런 이서를 이용해 상호의 바로 옆까지 달려들었다.

양손에 큼지막한 눈덩이를 하나씩 들고서.

“흐읍……!”

아주 진심인 눈빛으로, 은율이 상호를 향해 눈덩이를 찔러 넣었다.

하지만 상호는 그대로 당해 줄 마음이 없었고.

‘……미안.’

손을 뻗어 은율의 눈덩이를 잡아서, 도로 은율의 어깨에 맞췄다.

퍼억 퍽

“……아.”

은율의 낙심한 표정이 상호의 양심을 콕콕 찔렀다.

그래도 그런 데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최대한 많은 소원권을 회수해야 하니까. 상호는 내공을 끌어올려 눈덩이를 기관총처럼 난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눈덩이 하나가 가은의 가슴팍을 때렸다.

“…….”

“…….”

상호의 몸이 순간 굳었다.

가은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그러고는 상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해명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듯이.

상호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가, 가은아. 그게,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그때 뒤에서 바람 한 줄기가 느껴졌다.

눈 위를 달려도 흔적이 남지 않을 정도의 경지. 달리는 소리도 흩날리는 눈도 없다. 상호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세희가 눈덩이 든 손을 휘두르고 있었다.

‘더 빨라졌네.’

상호는 감탄하며 옆으로 슬쩍 발을 옮겼다. 세희의 눈덩이가 그의 옆구리를 스칠 뻔했지만, 결국 닿지는 못했다.

회수한 소원권의 양은 200개를 앞두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눈덩이를 맞는다면 말짱 도루묵이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게 대주주들 중 한 명이라면 이전까지보다 더한 고생길이 펼쳐질 터였다. 안 그래도 요즘 슬슬 써볼까 하는 움직임이 있어서.

“윽…….”

아까워하는 세희의 앞으로 눈덩이가 한 무더기 쏟아졌다.

상호는 넘어진 세희를 뒤로하고 다른 아이들을 살폈다. 대부분은 눈덩이를 피하지도 못해 맞고만 있었고, 피하더라도 눈덩이들을 피해 상호에게 다가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리가 열두 개, 하솔이가 열여덟 개……. 아이고, 기억력이 딸리네.’

이제는 전투보다 숫자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태화와 지윤이 시야에 보이지 않았다. 곧 공격이 오겠구나. 대비를 하려는데 등 뒤에서 지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누는기다! 홀랑 먹지 말래이.”

“알았다고!”

널찍한 충격파가 상호를 덮쳤다.

상호가 그 충격파에 정신이 팔린 순간, 머리 위에서 펑 소리가 나더니 눈사태가 쏟아졌다.

“꺄하하하! 성공…… 어라?”

눈사태가 쏟아진 곳에는 사람의 모양이 남아있지 않았다. 눈더미가 사람의 키보다 낮은데도.

넘어져서 눈에 아예 파묻히기라도 했나. 공중에서 고개를 기우뚱하는 태화의 뒤로 한 줄기 바람이 날아들었다.

“응?”

뒤를 돌아본 태화의 얼굴에 눈덩이가 박혔다.

“……크아아악!”

“안 되지, 임마.”

방금은 좀 위험했지만. 상호는 일부러 큰소리를 치며 바닥에 내려섰다. 격추당한 태화는 자기가 만든 눈더미 위에 푹 처박혔다.

이제 그의 반 아이들은 완전히 눈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소원권을 뼛속까지 탈탈 털린 채로. 눈썹에까지 눈이 묻어서는 오들오들 떨었다.

‘슬슬 그만할까…… 어?’

그는 아이들을 살피다가 흠칫했다.

‘왜 13명이지?’

태화는 아직 눈더미에 파묻혀 있고. 그러면 14명인데. 어제부터 15명이 됐는데.

‘다혜는……?’

맨날 14명만 보고 살아서 알아차리지 못했다. 상호가 주변을 돌아보려는 찰나.

“아으!”

얼굴 옆에서 튀어나온 손이 상호의 얼굴에 눈덩이를 처박았다.

“아으아으!”

“…….”

또 다른 대주주의 탄생.

상호는 얼굴을 가린 눈 속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속절없이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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