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0화 (340/501)

* * *

“……으음.”

해련은 잘린 손목을 부여잡고 침음했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네.”

그녀의 앞에는 건흠이 검을 뽑아 들고 서 있었다.

짐승이 발톱을 꺼내듯 위협을 위해 검을 뽑긴 했지만, 그 상대가 제자라서 차마 휘두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제가 맡겠습니다.”

“주 선생 혼자서 어떡하게?”

“……그래도 담임이니까 어떻게든 될 겁니다.”

건흠은 그렇게 대답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주변의 땅은 흙장난을 친 듯 난장판이었다. 결계가 없었다면 별관은 물론이고 본관까지 피해가 갔을 터였다. 돌아다니던 학생이 다치는 불상사가 벌어졌을지도 몰랐다.

학교에 두기는 너무도 위험한 아이. 그는 이제서야 그 의미를 여실히 깨달았다.

“어서 치료받고 오시는 게 좋겠습니다.”

“……금방 올게.”

결정을 내리자 해련은 그 즉시 모습을 감췄다.

홀로 남은 건흠의 주변에 불길한 마나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크륵…….”

다혜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검은 뿔이 달려도, 검은 꼬리가 달려도. 변함없는 그의 제자. 건흠은 내공을 끌어올리며 쓸쓸한 눈빛으로 다혜를 바라보았다.

‘널 벨 순 없다.’

기껏 살아 돌아왔는데, 그의 검으로 벤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잠깐 정신을 차리게 하면 기절시킬 수 있다고 했다. 건흠은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입을 열었다.

“다혜야.”

“크르…….”

특별한 반응은 없었다. 주황색 눈을 번들거리며 침을 뚝뚝 흘릴 뿐.

그러다가 눈앞의 상대가 해련보다 약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곧 삐뚤게 입꼬리를 올리며 다가오는 속도를 높였다.

“키힛…….”

건흠은 검을 힘주어 잡았다.

그는 해련보다 검술이 뛰어나지 않았다. 강기의 수준도 훨씬 떨어졌다. 그러니 다혜의 공격을 받아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지만 도망칠 수도 없고.

해련과 다른 이들이 오기 전까지 시간을 벌어야 했다.

“다혜야, 선생님이다.”

그렇게 계속 말을 걸며, 검에 내공을 씌웠다. 다혜가 익숙한 기운을 알아차려 주기를 바라며.

“선생님도 못 알아보는 거니?”

“크륵?”

“정신 차려라, 다혜야. 넌 그런 아이가 아니잖아.”

다혜는 무시하고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손톱에서 뻗어 나온 다섯 가닥의 강기. 건흠은 아슬아슬하게 피해내고 습관적으로 검을 들었다.

하지만 휘두르지는 못했다.

“크르……?”

다혜는 왜 공격하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해 눈을 끔뻑이다가, 다시 손톱과 꼬리를 휘두르며 건흠을 압박했다. 건흠이 아는 그 어떤 몬스터보다도 빠르게.

간신히 피해내던 건흠의 허벅지에 다혜의 꼬리가 스쳤다.

촤아악

“윽……!”

건흠은 당황하며 뒤로 물러났다.

다리를 다쳐서 피하기는 힘들어지는데 공세는 더 가혹해졌다. 다혜의 손톱이 살기를 품고 건흠의 목을 스쳤다. 정말로 죽이겠다는 것처럼.

그게 건흠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다혜야.”

순간 다혜의 몸이 움찔했다.

그러나 아주 잠시일 뿐. 다혜는 곧 날카로운 눈빛으로 건흠을 노려보며 검붉은 강기를 휘둘렀다.

“키힉…….”

평소의 다혜와는 어울리지 않는 비웃음을 흘리며.

양옆에서 날아드는 기다란 강기. 피할 수 없는 위치. 건흠은 애끓는 눈빛으로 그 강기를 바라보았다.

헌터가 되었으니, 죽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다혜에게 살인의 죄를 지우는 일만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다혜야.”

힘을 주어 불러도 더는 반응이 없고. 무정한 강기만 속절없이 다가올 뿐.

건흠은 온 힘을 다해 땅을 박찼지만, 피할 수 없음을 이미 알았다.

‘……미안하다.’

못난 스승이 제자를 살인자로 만드는구나.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몸의 모든 옆면에 날카로운 예기가 파고들었다. 목, 어깨, 팔, 허리와 허벅지까지.

건흠이 죽음을 예감하는 그때, 몸 옆으로 바람이 지나갔다.

콰앙

강기와 강기가 부딪히는 소리. 다혜의 몸이 뒤로 쭉 밀려났다.

건흠은 눈앞에 선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물러나 계세요.”

세희는 그렇게 말하며 검을 힘주어 잡았다.

“이제 제가 상대할게요.”

“……그래.”

고맙다, 건흠은 작게 중얼거리고 다친 다리로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목숨은 지켰지만 온몸에 상처가 가득했다.

그가 자리를 피하자 세희의 눈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라도 그렇지…… 은사까지 죽이려고 들어?”

“크륵?”

“각오해.”

세희는 그 말을 남기고 다혜에게 달려들었다.

다친 팔은 전혀 낫지 않았다. 그래도 해련이 치료를 받으러 간 지금 다혜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파도 참았다.

그게 헌터라고 믿었다.

콰아앙

폭발이 몸을 밀어냈다.

앞서 해련이 싸웠던 방식대로, 날을 피해 면에만 공격을 날리는 중이었다. 손이 날아들면 손바닥에, 꼬리가 날아들면 갑피 부분에. 그럴 때마다 폭발이 일어 다혜의 자세를 흐트러뜨렸다.

“크륵…….”

슬슬 짜증이 났을까, 다혜가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 직후 들이쉰 들숨에 허공의 마나가 빨려 들어갔다.

세희는 그걸 알아채자마자 검에 초강기를 힘차게 불어넣었다.

화르륵

다혜의 입에서 시뻘건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강기가 아닌 마법. 용의 숨결은 바위마저 불태울 듯한 열기를 품고 쏟아져 나왔다. 그 불꽃에 세희의 검에서 뿜어진 하늘색 불꽃이 부딪혔다.

푸화아악

검 너머로 열기가 전해져 왔다.

평소에 보는 태화의 불꽃은 태화가 힘 조절을 하기도 했고, 시험 때 차는 보호 마법 목걸이 때문에 일정 한도 이상으로 뜨겁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살이 새까맣게 탈 것처럼 뜨거웠다.

‘마법까지…….’

세희는 검에 쏟은 내공의 일부를 호신강기로 돌렸다.

그때 마음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또 혼자구나.’

세희의 눈 밑이 꿈틀했다.

지겹지도 않은가. 끈덕지게 달라붙는 꼴이 근성 하나는 알아줘야 할 것 같았다.

그녀 자신을 닮은 것 같기도 했다.

‘난 원래 혼자였어.’

‘버려진 거지.’

목소리가 웃었다.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선생님은 어디서 뭘 하고 있지?’

‘……올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

‘널 두고 도망친 거야.’

불길 속에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환각처럼 희미하다. 눈과 입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 그러나 비웃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널 사랑했다면 널 걱정했겠지. 곁에 다가와서 어떻게 하라고 조언했겠지. 널 버린 거야. 네가 소중하지 않으니까. 선생님에게 넌 흔해 빠진 학생들 중 한 명일 뿐이야.’

‘……시끄러.’

‘네가 원하는 가족은 어디에도 없어…….’

불꽃이 일그러진 광소를 터트렸다.

‘너는 또 혼자야. 늘 혼자야.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몸이 편할 때도 안식하지 못할 거고, 혼자 있게 될 때마다 외로움에 몸부림치겠지. 네가 이불 속에서 홀로 울어왔던 날들처럼…….’

세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희미한 기억이 의식을 비집고 들어왔다.

‘……뭐지?’

누군가의 목소리.

맑고 담담한 선율이 마음을 가라앉혔다.

‘누구…….’

기억에 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세희는 자신이 전투 중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그 선율을 더듬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정말 직접 들은 목소리인지조차 확신이 들지 않았다.

정말 예쁜 목소리인데.

들었다면 기억했을 텐데.

‘대체……?’

세희는 아주 잠시 동안, 넋을 잃고 그 선율에 젖어 들었다.

* * *

머리가 아팠다.

온몸이 아팠다. 땀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바싹 말라가는 기분이었다. 살갗에 붙은 불이 감각을 태우고 의식을 살라 갔다.

‘으…….’

다혜는 흐릿한 눈으로 어둠을 바라보았다.

그림자 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움직였다. 희미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엄청나게 거대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 무언가가 날개를 펴고.

후텁지근한 숨결을 내뿜었다.

크르르르……

피 냄새가 났다.

따뜻하고 질척거리던 용의 뱃속. 지금 느껴지는 영혼을 불태울 듯한 열기. 눈앞에 선 거대한 존재의 압박감. 온갖 감각이 한데 뒤섞여 혼란스럽기만 했다.

‘정신을…… 차려야…….’

그때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굵고 낮은 목소리. 잘 들리진 않았지만, 앞에서 부르는 것 같았다. 다혜는 바닥에 엎드린 채로 어둠 속을 더듬었다.

무언가가 손끝에 닿았다.

검의 손잡이. 하지만 평범한 검과는 감촉이 조금 달랐다.

자루감기가 다른, 건흠의 반 아이들의 검.

‘……선생님.’

다혜는 그 검을 힘껏 움켜쥐었다.

검에서부터 맹렬한 기운이 체내로 쏟아져 들어왔다.

‘윽…….’

눈앞이 선명해졌다.

어둠 속 존재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눈이 뒤집히고 침을 뚝뚝 흘리는, 해골처럼 비쩍 마르고 기괴하게 뒤틀린 생김새의 용. 아니 용이 맞는지조차 의문이었다.

그러나 저것이 용인지 아닌지는 다혜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나가…….’

검에서 강기가 타올랐다.

‘내 안에서 나가!’

용이 코웃음을 쳤다.

용은 아래턱을 달그락거리며 다혜를 향해 불을 내뿜었다. 그러나 다혜는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전혀 뜨겁지 않았다. 그저 마음속의 환각임을 이제는 알았다.

그렇게 스승이 엮어준 검을, 인연을 꽉 움켜쥐고.

용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불꽃의 양옆으로 손톱이 날아들었다.

잠시 멍하니 불꽃을 바라보던 세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몸을 뒤로 뺐다. 길게 뻗은 붉은 강기가 아슬아슬하게 앞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크륵……!”

다혜는 더욱 사나워진 기세로 세희를 몰아붙였다.

단순히 눈앞의 상대가 거슬리니 치우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정확히 세희를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죽여버리겠다는 명확한 살의를 띠고 있었다.

‘뭐지……?’

갑자기 변한 다혜의 분위기에 세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더욱 뒤로 물러났다.

꼭 무언가에 쫓기는 듯이 서두르고 있지 않은가.

‘폭주가 곧 풀리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왜 세희 자신을 더 열심히 죽이려 하는지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이유를 고민하는 그때, 다시 속삭임이 시작되었다.

‘넌 이길 수 없어.’

‘안 지겹냐?’

‘네가 뭐래도 변하지 않아. 넌 이길 수 없으니까.’

거슬리는 웃음소리가 자꾸 신경을 분산시켰다. 세희는 다혜의 손바닥을 쳐내고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대꾸를 하지 않으니 목소리가 계속 말을 이었다.

‘초혼강기? 너는 만들 수 없어. 그건 선생님이니까 만들 수 있는 거야. 생사경도 안 겪어 본 네가 닿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야. 당연한 일이지. 그런 네가 다혜를 이길 수 없는 것도 너무 당연한 일이고.’

‘닥…….’

닥쳐, 라고 말하려는 순간 검에서 불꽃이 사라졌다.

‘……!’

내공이 바닥났다.

세희는 황급히 검을 던지고 뒤로 뛰었다. 내공 없는 검은 초강기를 상대로는 지푸라기나 다름없어서.

그러자 다혜가 검을 쳐내고 달려들더니.

눈앞으로, 붉은 강기가 다섯 줄 날아들었다.

‘죽어!’

마음속의 목소리가 사납게 외쳤다.

세희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자신을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목소리와,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의지가 같은 존재임을.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올리면서도, 내공 하나 없는 팔로는 절대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저 강기에 그녀의 몸이 두부처럼 찢겨나갈 터였다.

죽는다.

여기서 죽는다.

그렇게 묵묵히, 다가올 고통을 기다리는데.

터억

붉은 강기가 눈앞에서 멈췄다.

‘……어?’

세희는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다혜가 자신의 손목을 붙들고 있었다.

다혜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새…….”

처음 듣는 목소리.

기억에 없는데, 기억이 날 것만 같았다.

“히야…….”

한쪽 눈동자가 동그랗게 돌아와 있었다.

“도……망…….”

한쪽은 여전히 세로로 찢어진 동공. 여전히 세희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손을 다른 손으로 막으며, 반만 움직이는 입술과 혀로 간신히 말을 맺었다.

“쳐…….”

그 순간 세희의 머릿속에서, 그 목소리가 선율을 품었다.

* * *

“므아아.”

짧고 몽톡한 손에서 검을 든 로봇이 놀아났다.

고무 매트가 깔린 방. 햇살이 느긋하게 내려앉은 곳에서 아이들이 각자의 장난감으로 저마다의 놀이를 하고 있었다.

장난감들은 누가 쓰다 버린 것을 가져오기라도 했는지, 꼭 한 군데가 부러지거나 헤진 것들이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에 만족한다기보다는 새것이란 개념을 아직 본 적도, 겪은 적도 없어서.

여느 때처럼 바닥에 앉아 놀고 있는 세희의 뒤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새히야아~.”

“아으.”

“모해애~.”

“우앙.”

세희는 로봇을 들어 땅에다 냅다 꽂았다.

“꾸아아앙~.”

“그러면 안대애~.”

그 누군가는 세희의 뒤에 앉아 세희를 끌어안았다.

키가 머리통 하나만큼 차이가 났지만, 그래도 어른의 눈에는 똑같은 꼬마로 보일 아이였다.

“로봇이 아야해~. 새히는 인형 가꼬 놀아~.”

“뿌아아앙.”

“이건 남자애들 꺼야~. 또 도욱이 꿍야하고 뺏어 왔구나.”

“아웅.”

“그러면 안대애~.”

아이는 세희의 머리를 땋기 시작했다. 세희의 손보다 아주 조금 더 손가락이 길었다.

“머리 따아 주까?”

“뿌우우.”

“이미 따코 있찌 안냐고?”

“꾸웅.”

“언니만 믿어~.”

아이는 세희의 옹알이를 다 알아듣는 듯했다.

느리고 서툴렀지만 결과물은 야무졌다. 머리를 다 땋고 나자 세희는 다시 로봇을 가지고 놀려고 했지만, 뒤에 앉은 아이가 세희를 꼭 끌어안고 바닥에 굴렀다.

“새히야아~.”

“꾸우우웅!”

“언니랑 자까~?”

“아우웅.”

“자자~.”

아이는 햇빛이 내리쬐는 곳까지 세희와 함께 데굴데굴 굴러갔다.

봄볕이 창문을 데워 생기는 옅은 아지랑이가 꼭 물결처럼 바닥에 비쳤다. 세희는 그 흐르는 따뜻함 속에 누워 눈을 감았다.

아이가 세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새히야.”

“웅.”

“자장가 불러 주까? 언니가 오늘 배워와써.”

“우웅.”

세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가 세희의 배를 토닥이며 노래를 시작했다.

“엄마가 섬그늘에──.”

나직하고 청아한 목소리.

“굴 따러 가면──.”

담백하고 쓸쓸한 선율.

혀 짧은 아이의 노래치고는 퍽 아릿하면서도 적적했다.

“아기는 혼자 남아──.”

세희는 그 뜻을 몰랐다.

엄마가 어딜 갔는지. 아이는 왜 혼자 남았는지. 그 선율이 가슴을 저밀 듯 슬퍼도, 어린 마음에 슬픔을 모른 채.

그저 나른하게 눈을 감고, 아이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들었다.

* * *

세희는 눈을 부릅떴다.

더 이상 속삭임은 들리지 않았다. 혼자라는 말도, 죽으라는 말도. 그 빈자리에 무언가 새로운 기운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양손에서 하늘색 불꽃이 타올랐다.

이전까지보다 훨씬 밝고, 맑게.

‘네가 있을 곳은…….’

그 양손이 다혜의 뿔들을 덥석 잡았다.

‘우리 마음속엔 없어.’

세희는 다혜의 주홍색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 세로로 찢어진 동공을, 그 틈의 새까만 어둠을.

세희의 손에서 불꽃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나가!’

그 일갈에 주홍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검은 뿔이 우지직거리며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덜 굳은 용암처럼 쩍쩍 갈라진 틈 사이로 천색창염의 하늘색이 뿜어져 나왔다. 꼬리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을 본 세희는 확신을 가지고 내공을 다혜에게 밀어 넣었다.

“크르…….”

마지막 발악을 하려는지, 주홍빛 눈동자는 세희를 노려보며 입에 마나를 그러모았다.

그리고는 세희의 얼굴에 정통으로 불꽃을 쏟아냈다.

푸화아악

하지만 세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불꽃 사이로 세희의 눈이 번득였다. 그 눈빛은 쏟아지는 불꽃보다 뜨겁게, 맹렬하게 어둠 속 악마를 꿰뚫었다. 악마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고, 세희의 내공에 맞서 다혜의 몸을 되찾으려 했지만.

흔들림 없는 영혼의 힘은 그 어떤 악마도 받아낼 수 없었다.

“크…….”

다혜의 입에서 고통에 겨운 비명이 터져 나오고.

“크르……아아아……!”

하늘빛이 결계 속을 뒤덮었다.

339. 첫 제자와 마지막 제자

결계 속에서 하늘빛이 폭발했다.

치료를 다 받은 해련은 황급히 결계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곁에는 다혜를 감시하던 수호부대원, 소정이 따르고 있었다.

소정은 달리다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소령님?”

“응?”

“기가 느껴지지 않는데요.”

그 말대로였다. 사방을 찌르며 날뛰던 기운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당황한 해련은 점점 사그라지는 하늘빛의 중심을 바라보았다.

“……어?”

바닥에 주저앉은 소녀. 그리고 완전히 널브러진 소녀.

널브러진 소녀는 주저앉은 소녀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었다. 손끝 하나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리고 주저앉은 소녀는 널브러진 소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쏟아져,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세희야.”

해련은 움직이지 않는 다혜를 불안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다혜는……?”

“쉿.”

세희가 입술에 검지를 붙였다.

“잠들었어요.”

머리카락이 걷히며 드러난 다혜의 얼굴은 자장가를 듣는 아이처럼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해련은 그제서야 마음을 놓았다.

“팔은 어때?”

“괜찮아요.”

세희는 피가 흐르던 팔로 다혜를 토닥였다.

“이제는 안 아파요.”

결계가 내려가고, 텅 빈 세상이 무너지며.

푸른 하늘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 * *

“정말?”

“네.”

세희는 자신의 다리를 끌어안고 눈을 동그랗게 뜬 상호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제가 다 해결했어요.”

“……정말?”

“다들 무사해요.”

“……다행이다.”

상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희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고는 생각했지만, 승산이 큰 싸움이 아니었다. 최악의 경우 세희가 죽고 모두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잘했어…….’

상호는 눈물을 글썽이며 세희를 토닥였다. 키가 낮아서 등이 아니라 엉덩이를 토닥이고 있었지만, 본인은 깨닫지 못했다.

그런 상호를 세희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선생님.”

“응.”

“가족이 있었어요.”

“응?”

“저한테도…….”

세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진짜 가족이…….”

기억해낸 모양이다. 상호도 미소를 지으며 세희의 배에 얼굴을 폭 파묻었다.

“잘됐네.”

“네.”

둘은 한참 동안 그렇게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그러다가 상호는 마지막으로 정리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형, 안 와도 돼.”

[거의 다 왔다, 잠깐만 기다…… 뭐 임마?]

“형이 너무 늦게 와서 그냥 우리끼리 해결했어. 그냥 돌아가서 일 봐.”

[야 이 자식아! 사람을 불러놓고 임마!]

“그러게 좀 일찍 오지 그랬어.”

[뭐 임마? 니 지금 웃고 있지. 뭘 쪼개 이자식아! 전화 끊지 마. 끊지 말라고!]

“엉~. 수고해~.”

[강상호오오!]

분노에 찬 목소리가 별관 복도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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