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윽.”
세희는 입술을 깨물며 뒤로 물러났다.
한 번의 실수로 큰 손해를 볼 뻔했다. 날이 스쳐간 명치가 서늘하고 아릿했다. 실제로 베인 게 아닌데도.
그러나 가만히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다혜의 내공이 세희의 검을 잡으러 달려들고 있어서.
콰직……
칼날 근처에서 투명한 힘겨루기가 펼쳐졌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불꽃이 팔락거렸다. 한쪽은 다혜의 붉은색, 한쪽은 세희의 하늘색. 기가 서로를 밀어내며 밀도를 더하다가 이따금씩 강기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우드득……
다혜의 밀어붙이는 힘이 한층 강해졌다.
세희는 진땀을 흘리며 고민에 빠졌다. 몸의 호신강기를 풀고 허공섭물의 기에 내공을 보태야 하는지. 다혜의 기는 그만큼 막대했다.
그때 뒤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후웅……
‘윽……!’
세희는 본능적으로 온 힘을 다해 다혜의 허공섭물을 떨쳐내고 옆으로 굴렀다.
은빛의 무언가가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슉……
그 무언가는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세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세희는 그 물체를 바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대신에 다혜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어느새 사라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기어검……!’
어느새 그런 경지까지. 세희는 이를 갈며 검으로 다혜의 검을 쳐냈다.
다혜의 검은 허공에서 한 바퀴 빙글 돌더니, 스스로 생명을 지닌 듯 주인의 손으로 돌아갔다.
“아으.”
다혜는 검지 끝에 검을 올린 채로 세희에게 다가왔다.
교사들보다 강한 학생. 전투로는 이미 완벽에 가까운, 어엿한 한 명의 헌터.
평범한 학생이, 헌터 지망생이 당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세희도 평범한 학생의 범주엔 들지 않았다.
평범한 인간의 범주에도 들지 않았다.
“……흥.”
세희는 콧방귀를 뀌고 검을 들어 올렸다.
어검술은 이미 나빛을 통해 여러 번 겪었다. 비록 나빛은 감각이 모자라 어검술을 똑똑하게 구사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여러 방향의 공격에 대응하는 훈련만은, 분명 프로 헌터들보다도 훨씬 많이 해 봤다.
“해봐.”
세희가 검을 쥔 손으로 검지를 까딱이자 다혜가 냅다 검을 던졌다.
검은 살아 움직이듯, 뱀처럼 세희의 주위를 맴돌며 대가리를 들이밀 준비를 했다. 그와 동시에 다혜가 손에서 강검을 뽑아 달려들었다.
“아으!”
빈틈을 노리는 두 개의 검.
세희는 온몸에서 초강기를 불태워 올리며 검을 뒤로 당겼다. 날아오는 공을 노리는 타자처럼.
은율과의 경기에서도 그랬듯이, 간격의 싸움.
세희가 공격할 수 있는 간격의 끝과, 다혜가 공격할 수 있는 간격의 끝. 어느 쪽이 상대의 예상보다 더 긴지.
‘지금……!’
세희는 눈을 번득이며 땅을 박찼다.
* * *
“위험해 보이는데…….”
상호는 다혜의 강검을 보고 당황했다.
다혜가 초강기로 강검을 만들 정도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저 둘이 살의를 갖고 강기를 날카롭게 다듬지는 않았겠지만, 자칫 깜빡하고 강검을 만들 때 진짜 날을 세워 베는 순간에는 대참사가 일어날지도 몰랐다.
아무리 민정의 보호 아티팩트와 교사진이 추가로 거는 마법이 있더라도.
상호의 말을 들은 해련이 눈살을 찌푸렸다.
“멈출까요?”
“그러는 게 좋겠는데…….”
상호는 괴렵부에서 파견된 양복쟁이, 종명을 흘끗했다.
종명은 예상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전투에 당황한 듯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니 끝내도 되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였다.
“저 양반은 끝을 보려는 모양인데요.”
“그러게.”
해련은 결정을 내린 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멈추고 날을 다시 잡죠. 민정 양이 올 수 있는 때로.”
“그래요. 그러면 되겠…….”
그때 결계 속에서 폭음이 울렸다.
콰아아앙
초강기와 초강기의 격돌.
피어오른 흙먼지 때문에 속이 보이지 않았다. 상호는 내공으로 안력을 높이려다가 은호의 몸에는 내공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포기했다.
대신에 해련을 올려다보았다.
“끝났어요?”
“아니, 둘 다 서 있는데…….”
해련은 착잡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림자에…… 보여선 안 될 게 보이네.”
“네?”
보여선 안 될 게 보인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
그때 결계 속에 붉은 기운이 해일처럼 차올랐다.
“……아.”
상호의 머릿속이 멍해졌다.
* * *
각기 다른 방향에서 날아드는 두 개의 검.
가만히 기다리는 것은 하수. 한쪽으로 달려드는 것이 상수. 예상대로 세희는 상수를 택해 주었다.
다혜는 강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너는 몰라.’
다혜는 세희의 친구들을 여럿 상대해 왔다.
검을 쓰는 키 큰 아이. 주먹을 쓰는 까무잡잡한 아이. 뿔 달린 마법사 아이와 온통 연회색인 신앙인 아이.
개인의 성격도, 전투 센스도, 전투 방식도 제각각. 하지만 다혜가 상대해온 수많은 몬스터들의 다채로움에는 미치지 못했다.
등 뒤로 파고드는 꼬리의 기습. 인식의 빈틈으로 스며드는 악랄한 살초. 무기가 아니었던 것이 무기로 변하기도 하고, 빈틈이라 생각했던 것이 함정으로 바뀌는 것은 예사.
이 세상의 자연보다 더욱 독한 세상의 존재들.
그중에서 가장 흔한 함정은, 팔이 갑자기 늘어나는 것.
‘네 주변엔 없으니까.’
다혜는 강검을 휘두르며 내공을 불어넣었다.
마치 연검을 다루듯, 칼끝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날아간 칼끝은 이미 세희의 검을 넘고 팔을 넘어 배까지 파고들고 있었다.
검을 그냥 휘두르는 속도보다 최소 두 배 빠른 공격.
적응도, 반응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다혜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
그러나 생각뿐.
세희는 몸을 공중으로 던지며 비틀어서, 강검의 옆면을 허리로, 허벅지로 미끄러트리더니.
다혜의 옆구리에 검을 찔러 들어왔다.
‘……아.’
다혜는 이 감각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렇게 움직이는 몬스터는 없다. 이렇게 부드럽고, 유연하고, 빠르고, 검이 어디로 날아올 줄 알았다는 듯이 행동하는 몬스터는.
검이란 무기를 완벽히 이해한, 검사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몸놀림이었다.
‘……안 돼.’
다혜는 옆구리에 닿으려 하는 칼날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칼날에게 말을 걸듯이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호신강기를 두텁게 둘렀지만, 세희의 검은 무엇이든 찢어버릴 듯이 맹렬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안 돼…….’
저리 가.
이겨야 한다. 반드시 이겨야 했다. 다시 신세를 질 수는 없었다. 3학년은 마지막 학년이니까. 스스로 학비를 번다는 선택지는 오늘 이후로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되었다.
‘저리 가……!’
순간 머리 양옆에서 무언가 터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콰드득……
꼬리뼈에서도.
우드득……
‘어……?’
무언가 잘못되었다.
순진무구한 눈빛과 당황한 표정은, 곧 굶주린 짐승의 모습에 집어삼켜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 * *
하늘을 찌를 듯한 뿔.
스스로 짐승의 왕임을 주장하는 것처럼 드높게 솟아 있다. 갑옷처럼 층이 진 파충류의 꼬리는 몸에 어울리지 않게 훨씬 길었다. 피어오른 흙먼지에 드리운 그림자는 붉은 공기와 대비되어 눅눅한 암녹색으로 보였다.
건흠은 결계 속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게…….’
용혈.
건흠이 용혈의 폭주를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매점에서의 폭주, 평가에서의 폭주, 실습에서의 폭주.
항상 건흠은 다른 곳에 있었고, 그래서 그에겐 생경한 광경이었다.
‘……그게 너를 힘들게 하는구나.’
건흠은 무의식적으로 앞으로 다가갔다.
그때 그의 옆으로 무언가 작은 형체가 스쳐지나갔다. 허리께에 간신히 올 정도로 키가 낮은 그림자.
“세……!”
바람이 한 번 불더니 그림자가 쓱 하고 사라졌다.
분명 가까이에 서 있었던 해련이 어느새 별관 쪽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손에는 검을 뽑아든 채.
“평가는 끝이야.”
그녀의 말에 종명이 고개를 들었다.
“왜 끝입니까? 아직 결판이 나지 않았…….”
“천세희 승. 다혜는 자기 능력으로 못 이겼어. 당신은 그렇게 알고 가도록 해.”
해련이 외투를 벗고 소매를 걷자 팔에 난 흉터들이 드러났다.
“우린 이제 바빠질 테니까. 선생들. 결계 입구만 만들고 유지시켜.”
“잠깐만요. 나라를 지킬 후계자의 자질을 판단하는데 어떻게 대충…….”
종명이 항의해도 교사진은 해련의 말을 따르고 있었다.
해련은 검을 들고 결계 안쪽, 흙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건흠은 그런 해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옆을 돌아보았다.
혁은 학교를 지키기 위해 결계를 강화하는 데 힘을 보태는 중이었고, 종명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허둥지둥. 나머지 교사들은 다른 교사들에게 상황을 알리기 위해 본관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정도인가?’
해련이 제압하지 못할 정도로 용혈이 위험한가.
건흠은 고민에 빠졌다. 저 안에 들어간다고 자신이 뭘 할 수 있을지. 도움이 되긴 할지.
그렇지만 확인을 하고 싶었다. 다혜를 힘들게 만드는 놈이 얼마나 강한지. 또 제자의 유일한 보호자로서, 사고를 책임져야 하기도 했다.
‘……그래.’
그는 결정을 내리고 걸음을 떼었다.
* * *
“눈 뒤집지 말라고 했는데.”
세희는 검을 비스듬히 눕혔다.
“언니는 불리하면 꼭 그 뒤로 도망치네요.”
“크륵…….”
다혜가 주홍색 눈동자를 데그럭거렸다.
아리의 것처럼 노랗던 눈동자는 지난번 실습 때부터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태화의 새빨간 눈동자처럼.
뿔의 모양도 더 사나워지고, 꼬리도 훨씬 길어졌다.
“언니는 말도 못하는데 이제는 듣지도 못하네요.”
“크륵……?”
“그러니까 말 놓을게, X발년아.”
세희는 검을 휘둘러 초강기를 날렸다.
타오르는 불꽃이 다혜를 사선으로 갈라버릴 듯 달려들었다. 다혜는 그 불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크륵.”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고는, 들고 있던 검을 떨어뜨리며 손톱에 기다란 강기를 세웠다.
붉은 강기에 검은색이 묻어나고 있었다.
촤악
세희의 강기가 여섯 갈래로 찢어졌다.
‘……쳇.’
깨문 입술에서 피 맛이 났다.
저 검붉은 강기는 초강기보다 상승의 경지인 게 분명했다. 지난번 실습에서 해련의 호신강기를 뚫었을 때도 그렇고.
세희는 초강기보다 강한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초혼강기라고……?’
하지만 눈앞에 있는 존재는, 간절한 마음과 깨달음을 얻기에는 너무도 아둔하고 미련해 보였다.
‘초혼강기일 리는 없어.’
다른 무언가일 것이다.
그래도 초강기보다 강하다는 것만은 분명하고, 부수려면 초혼강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저번처럼.
그런데 마음이, 너무 시끄러웠다.
‘초혼강기다…….’
어디선가 속삭임이 들렸다.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세희는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렇게 하면 찰흙처럼 마음을 다질 수 있다는 듯이. 하지만 가슴속의 소란은 이제 태풍이 되어 의식의 주변에 휘몰아치고 있었다.
‘따라잡을 수 없어…….’
남자 목소리.
‘이기면 안 돼.’
상호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항상 좋아하는, 나직하고 담담한 목소리.
‘이기는 게 불가능해. 네가 최선을 다하더라도…….’
언젠가 들었던 적이 있는 기억을, 누군가가 끄집어내어서.
‘메꿀 수 없는…… 차이가 있어.’
그 마지막은, 속삭임으로 끝났다.
‘영원히.’
세희는 눈을 부릅떴다.
이건 기억이 아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무언가가 상호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마음에 속삭이고 있었다.
‘꺼져!’
세희는 다시 검을 꽉 움켜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터질 듯이 아프도록.
그러자 이번엔 목소리가 바뀌었다.
‘초혼강기를 만들면 뭐해?’
세희 자신의 목소리로.
‘찌를 거야? 그럴 수 있어? 몬스터도 못 죽이고 도망치는 네가 인간을 벨 수 있어?’
그것이 깔깔 웃었다.
‘넌 못 해. 넌 안 돼. 나약하니까. 어른스러운 척하지만 보고 배울 사람이 없어 어린 채로 남은 애새끼잖니?’
‘꺼지라고……!’
세희는 눈을 부릅뜨고 검을 뻗었다.
하늘색 초강기가 눈부시게 번쩍였다. 세희를 마주하고 있던 다혜는 그 빛을 받고 움찔하며 눈을 감았다.
“크륵……!”
빈틈.
세희는 다혜의 다리를 향해 검강을 날렸다. 정말 베어버릴 요량으로. 하지만 역시 평범한 초강기로는 다혜의 검붉은 호신강기를 뚫을 수 없었다.
‘망할…….’
세희는 자신을 재촉했다.
초혼강기를 만들어서 한 방 때려야 한다. 지난번처럼.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집중해서.
‘너는 안 돼…….’
‘꺼지라고!’
그 순간 붉은 강기가 심장을 향해 날아들었다.
‘……!’
세희는 다급히 호신강기를 끌어올려 양팔을 교차시켰다.
콰아앙
세희의 몸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땅을 구르다가 결계 구석에 처박혔다.
“윽…….”
어디 한 군데가 부러진 것 같았다.
호신강기도 공격을 제대로 막지 못해, 반쯤 잘린 팔에서 피가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씨이…….’
팔을 부여잡고, 숨을 헐떡이며 일어서려는데.
후웅……
바람이 불어 흙먼지를 날렸다.
흙먼지를 둥글게 뚫고 나온 바람의 중심에서, 하얀 양복을 입은 흰 머리의 여인이 다혜를 향해 돌진했다. 주먹에는 바위처럼 무거운 기운을 두르고 있었다.
콰아앙
권풍이 다혜의 몸을 때렸다.
다혜는 뒤로 조금 물러나는가 싶더니, 해련을 보고 웃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눈을 반짝이면서.
“킥…….”
“넌 나랑 싸우고 싶어서 계속 튀어나오는 게냐?”
해련은 혀를 차고 주먹에 강기를 끌어모았다.
벨 수가 없으니 충격을 누적시켜서 기절을 시키려는 모양이었다. 저것도 내공이 많으니까 가능한 방법. 바닥에 쓰러진 세희는 해련이 권풍을 내쏘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런 세희를 향해 누군가가 달려왔다.
“얘야.”
건흠이었다.
피가 흐르는 세희의 팔을 보자 건흠의 눈이 커졌다.
“빨리 치료받아야겠다. 걸을 수 있니?”
“제가 있어야 돼요.”
“응?”
“교장선생님 혼자서는…… 이기기 힘들어요.”
실습에서 다혜가 해련을 다치게 했었다는 것은 건흠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학교에 해련보다 강한 사람, 괴물,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건흠은 일단 세희를 일으켜 세웠다.
“일단 나가서 치료를 받아. 결계 밖에 신앙인 선생님이 있을 거야. 다혜는 교장선생님이랑 내가 해결할게.”
“싸울 수 있어요…….”
갑자기 커다란 폭음이 울렸다.
꽈아아앙……
비산하는 흙 사이에서 해련이 튀어나왔다.
입가에 피가 묻어 있다. 내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건흠은 내공을 운용해 해련을 도우려다가, 세희가 상호의 제자라는 것을 떠올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얘야. 너 다혜랑 많이 싸워봤니?”
“네.”
“저 모습일 때도?”
“네.”
“어떻게 하면 원래대로 돌아오는 거니?”
세희는 고통을 삼키며 간신히 대답했다.
“기절을 시켜야 해요. 그치만 바로 기절시키기는 힘들고…… 한 대 쎄게 때리면 잠깐 정신을 차릴 거예요. 그때 기절시켜야 해요.”
정신을 차리게 해서 빈틈을 만든다. 건흠은 속으로 되뇌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너는 우선 치료를 받고 강 선생한테…….”
“그게…….”
담임은 올 수 없다. 세희는 그 말을 하려 했다. 그때 무언가가 허공을 날아 결계에 툭 부딪혀 떨어졌다.
세희와 건흠은 그 무언가를 내려다보았다.
“…….”
희고 고운 손.
후두둑……
선혈이 한 박자 늦게 떨어져 내렸다.
338. 심혼
해련이 다혜를 상대하는 것은 이번이 세 번째.
다혜는, 그 안의 용혈은 만날 때마다 강해졌다. 이번에도 다혜는 불길하고 흉흉한 기운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해련은 주먹에 두른 내공을 더욱 단단하게 압축했다. 대포에 화약을 채우듯이.
그리고 앞으로 내쏘았다.
콰아앙……
어깨가 뻐근하게 욱신거렸다. 내공을 쏘는 것은 해련 자신인데도. 하지만 이 정도는 되어야 눈앞의 괴물에게 타격을 줄 수 있었다.
“크륵……!”
다행히 효과가 있는 듯싶었다. 일격을 허용한 다혜의 머리가 뒤흔들렸다.
쓰러트리고 두들기면 기절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학생을 때리는 게 거부감이 들긴 했지만.
학생.
문득 세희에게 생각이 미쳤다.
‘세희는 잘 도망쳤나?’
뒤를 돌아보려는데 시야에 검은 것이 스쳤다.
단단하지만 유연하게 움직이는 꼬리. 검처럼 날이 서 있는 꼬리의 끝이 해련의 눈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쳇…….’
해련은 꼬리의 날을 피해 옆면을 손등으로 쳐냈다.
손발과 따로 움직이는 꼬리가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지만, 해련에게는 큰 곤란이 되지 않았다.
너 같은 아이는 수백 마리를 만나 봤다,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벼락같이 손을 뻗었다.
터억
“크르……?”
뿔을 잡힌 다혜의 얼굴 옆으로 해련의 주먹이 날아들고.
콰아앙
주변의 대기가 일시에 터져나갔다.
“……크륵!”
세로로 찢어진 눈동자에서 초점이 풀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뒤로 밀려난 다혜는 곧 고개를 두어 번 흔들고는 비릿한 조소를 지으며 해련을 향해 달려들었다. 손가락 하나하나에 팔뚝만한 길이의 강기를 세우고.
저기에 걸리면 갈기갈기 찢어질 것이다. 해련은 한 번 당했던 것을 떠올리며 다혜의 손톱을 피했다.
짐승이 달려들듯 폭발력이 있었지만, 그렇기에 변화무쌍하지 못했고, 변화가 없다면 설령 해련보다 속도가 빠르더라도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그랬을 터인데.
핏──
오른쪽 손목에 서늘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극한의 집중으로 멈춘 세상 속에서, 해련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리고 이유를 찾았다. 다혜의 팔 바로 옆에서 꿈틀거리는 꼬리가 눈에 띄었다.
‘저건…….’
뒤에 숨긴 꼬리를 활용한 공격. 해련의 눈동자가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 모든 게 찰나. 멈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고.
촤아악
해련의 오른손이 깔끔하게 날아갔다.
* * *
‘젠장…….’
상호는 진땀이 흐르는 손으로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별관의 창문 밖으로 흙먼지가 가득 찬 결계가 보였다.
역시 평가일을 옮겼어야 했을까. 용혈이 폭주하면 막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다혜가 폭주할 때마다 그가 옆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다른 이들끼리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상호는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도현에게 연락을 해 두었지만, 당연히 안심이 되지는 않았다. 오려면 못해도 10분은 걸릴 테고, 10분이면 사달이 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도움을 더 청해야 할까.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언제까지고 도와줄 수는 없어.’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
상호만 할 수 있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세희를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거니까. 마찬가지로, 상호가 도와줘야만 하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되었다.
‘믿는다.’
그는 묵묵히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