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8화 (338/501)

* * *

“세희한테 혼났어?”

이서는 고개를 들었다.

은율이 접시에 음식을 담은 채 다가오고 있었다.

“봤어?”

“글쎄. 선생님이 세희를 데리고 나오는 건 봤지.”

은율은 쓰게 웃었다.

“2등했다며.”

“응.”

“가은이 이겼더라.”

“응.”

“이제 알겠어?”

왜 열심히 하는 건지. 뭐가 재밌다는 건지.

이서는 자신의 이유는 은율과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은율의 이유는 이제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응.”

그 말에 은율은 빙그레 웃고는 이서의 팔을 잡아끌었다.

“가자. 너 이거 먹어 봤어? 맛있어, 이거.”

“아니, 아직. 어디 있는데?”

“저쪽에. 지금 선생님 있는 곳 앞에.”

“……나중에 먹어 볼게.”

“세희 옆에 가기 싫구나?”

“…….”

“가서 세희한테 이거 맛있다고 하고 와.”

“언니…….”

“얼른.”

“……끄응.”

이서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세희를 향해 다가갔다. 머뭇머뭇, 쭈뼛거리는 걸음으로.

은율은 그 모습을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몸을 빙글 돌려 아이들이 있는 식탁으로 향했다.

336. 두 스승과 두 제자

“주 선생님.”

“음?”

건흠이 옆을 돌아보자 상호가 식탁에 식판을 내려놓고 있었다.

“어, 강 선생.”

“누구 올 사람 없죠?”

“응.”

상호가 의자를 꺼내어 앉았다.

둘의 뒤편에서는 학생 수백 명이 왁자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건흠은 아이들을 쓱 둘러보다가 상호를 향해 물었다.

“오늘은 웬일로 아이들이랑 안 먹고?”

“가끔은 애들끼리 먹게 둬야죠.”

상호는 숟가락을 밥에 툭 꽂았다.

“다혜는 아직도 방에만 있어요?”

“그렇지.”

“내일이 시험인 건 알고 있대요?”

“그럴걸. 어제도 말했고.”

건흠은 그렇게 대답하고 밥을 입에 넣었다.

내일 금요일 오전. 교사 몇 명이서 다혜의 평가를 보기로 했다. 상호의 학생인 세희도 그때 평가를 본다는 모양이었다.

참여하는 교사는 담임인 건흠과 상호. 그리고 평가를 볼 무예가 선생 둘과 보호 마법을 걸 마법사 교사들, 참관을 오는 해련과 혁 등등.

“강 선생네는 어때. 잘 되고 있나? 뭐 우리가 준비를 하는 건 아니지만…….”

“예. 세희는 알아서 잘 하죠. 매일 봐주고 있기도 하고……. 다혜는요?”

상호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물었지만, 건흠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입이 열리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잘 되질 않네.”

“하긴 그저께까지만 해도 평가 준비 기간이었으니까요.”

건흠의 반은 상호의 반보다 학생이 두 배 많다. 방에 있을 다혜까지 가르치기는 시간이 여의치 않았을 것이다. 상호는 그의 고충을 십분 헤아려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건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냐.”

“네? 그러면요?”

“내가 뭘 가르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

갑자기 진지한 이야기가 나와 버렸다. 상호는 시선을 한곳에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겼다.

“……코치가 선수보다 잘하면 선수를 하지 왜 코치를 하고 있겠어요.”

“다혜가 갈 길을 내가 보여줄 수가 없어.”

건흠은 담담하게 말하고 컵에 든 물을 홀짝였다.

“백 번 말로 해 봤자 뜬구름 잡는 소리만 될 뿐이고…… 결국 무예고 검법이란 것은 형태를 보여줘야 하잖아. 맞상대를 해주면서. 그런데 그럴 수가 없어.”

전투는 질문과 대답의 연속.

내가 이러면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 그럼 나는 이렇게 하겠다,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 그럼 또 나는 이렇게 할 테니 네 답을 보여봐라. 그런 식.

결국 어느 쪽 답이 맞았는지는 최후에 승리함으로써 증명해야 하는데, 스승이 제자를 이기지 못하게 되면 옳은 답을 가르쳐줄 수가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상호도 코치가 어쩌네 선수가 어쩌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무술에서의 스승은 반드시 제자보다 강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혜가 그렇게 강해요?”

“자네가 더 잘 알 거 아냐. 움직임도 내공도…… 이미 선생 수준을 넘었어.”

평소에도 선생들보다 강하고, 용혈이 폭주하면 해련과 맞먹는.

더 이상 평범한 교사들은 다혜를 가르칠 수 없었다.

“실력만 보면 진작에 졸업했지.”

그러나 졸업시킬 수 없는 이유는, 말도 못 하는 아이를 세상에 내보낼 수가 없어서. 1년이라도 더 상태를 지켜보고 싶어서.

‘……아직은 널 보낼 수가 없구나.’

건흠은 한숨을 삼키고 묵묵히 젓가락을 들었다.

상호도 그런 그의 고충을 알 것 같아서, 밥이라도 편히 먹도록 더 묻지 않고 식사를 시작했다.

* * *

다음 날 아침.

‘끄응…….’

상호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침음했다.

현관 쪽에 놓인 기다란 거울 속. 어린아이가 자신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필 오늘인가.’

세희의 연말평가 날. 더해서 다혜의 연말평가 날.

상호의 역할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래서는 참관하기가 좀 힘들었다. 웬 꼬맹이가 갑자기 쳐들어와서는 참관하겠다며 생떼를 쓰는 꼴로 비칠 게 뻔하니.

‘일단 교장선생님한테…….’

그는 옷을 챙겨 입고 현관을 나섰다.

* * *

“교장선생니…….”

상호는 문을 열고 들어서다가 멈춰 섰다.

방의 중앙. 한쪽 소파엔 해련과 혁이, 탁자를 사이에 둔 맞은편에는 처음 보는 양복쟁이 사내가 앉아 있었다.

셋의 눈이 상호를 향했다.

“……안녕히 계세요~.”

“아이구, 은호 왔구나.”

방에서 나가려는 상호를 해련이 내공으로 붙들었다.

해련은 버둥거리는 상호를 질질 끌고 와 무릎에 앉히고는, 다시 내공을 뻗어 사탕과 차 한 잔을 가져왔다.

“금방 끝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렴.”

“……네.”

아마 상호도 들어야 하는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옆에 앉은 혁의 시선이 상호의 얼굴을 따갑게 찔렀다. 그 역시 은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에.

‘가시방석이 따로 없구만…….’

해련의 허벅지는 부드러웠지만, 자리가 그렇지 못했다.

상호가 가만히 차를 홀짝이자 혁이 맞은편의 양복쟁이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셨다 하셨습니까?”

“아……. 그 얘기를 하기 전에.”

양복쟁이가 손을 비볐다.

“강상호 헌터는 아직 출근을 안 한 건가요?”

“오늘은 안 할 듯싶습니다.”

“아, 좀 제멋대로 출근을 하는……?”

“그런 셈이죠.”

“거 참, 제자가 시험을 보는데도……. 일단 알겠습니다.”

그런 방자한 인간을 데리고 있는 너희가 고생이다, 라는 눈빛. 대화의 당사자인 상호는 끼어들지도 못한 채 차만 홀짝였다.

양복쟁이는 혁보다 좀 더 뺀질한 인상이었다. 혁이 셈에 밝아 보이는 날카로운 얼굴이라면, 이쪽은 처세에 능해 보이는 낯 두꺼운 얼굴. 정치가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은 관상이었다.

“그럼 없이 이야기를 하지요.”

사내가 양복 속에서 공무원증을 꺼냈다.

“괴렵부에서 왔습니다. 이미 연락을 받으셨겠지만…….”

괴렵부 위에 여종명이라는 석 자가 적혀 있었다.

정부 사람이었나. 상호는 말없이 종명을 주시했다. 해련이 까준 과자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먹으면서.

“천세희 학생의 평가를 감독하러 왔습니다.”

사내의 말에 혁은 계속 말해보라는 듯 턱을 괴었지만, 해련은 고개를 살짝 기웃했다.

“이번 평가는 저희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하는 건데요. 연말평가를 대체해서…….”

“그렇지만 강상호 헌터의 유일한 후계를 검증할 자리이기도 하죠.”

종명은 씩 웃었다. 그 웃음이 상호에게는 참으로 재수 없게 느껴졌다.

“세상의 존망이 달린 문제잖습니까. 강 헌터가 단 한 명에게서만 봤다는 가능성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지요.”

상호가 도현과 함께 고위 관리들을 만났을 때 했던 말. 그게 씨앗이었던 모양이었다.

상호가 하고 싶은 말은 해련이 대신해 주었다.

“확인해서. 미달한다면요?”

“강 헌터에게 학생을 추천드리죠. 다른 학교 학생을.”

종명이 천장을 가리켰다. 학생들이 있는 곳.

“강 헌터는 여태 예현여고 학생들밖에 안 보지 않았습니까. 뭐 그동안 봉인 때문에 발이 넓을 수 없었단 사정은 이해해도…… 한 가지 확실한 건, 강 헌터는 남자는 가르쳐 본 적이 없단 겁니다. 남학생들에게도 가능성이 있을지 없을지 확인해 봐야지요. 뭐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여자만 가르치는지는 모르겠지만…….”

상호의 눈썹이 꿈틀했다. 꼭 자신이 일부러 여자만 가르친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해련이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가요.”

‘?’ 상호는 어이가 없어 뒤를 돌아보았다. 해련이 입가에 손을 얹은 채 생각에 잠긴 눈빛을 짓고 있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해련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니 그걸 왜 인정해요!”

“그치만 강 선생, 여자 좋아해서 여자만 가르치는 거 맞잖아…….”

“그런 이유는 아니거든요!”

“그럼 뭔데?”

“…….”

대답이 얼른 나오지 않았다.

사실 제일 큰 이유는 남자가 개기면 뒈지기 직전까지 팰까봐. 하지만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할 수는 없고.

“여자가 좋아요…….”

“그렇지? 역시 강 선생은 어쩔 수 없다니까~.”

해련은 상호의 머리통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

발버둥을 치는 상호와 더 깊이 품으려는 해련을 뒤로하고, 혁은 종명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감독이라 함은…… 평가 방식에도 관여를 하는 겁니까?”

“맞습니다.”

종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여기 2학년 중에 전국평가에서 1등을 한 학생이 있다던데…….”

버둥거리던 상호의 몸이 갑자기 멈췄다.

* * *

“……그렇게 됐어.”

상호는 세희를 올려다보며 설명을 끝냈다.

별관 뒤의 운동장. 평소보다 훨씬 넓은 경기장 옆에서는 평가와 관련된 모든 이들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희는 건흠과 이야기 중인 다혜를 흘끗했다.

“그러니까 저 언니를 이기면 되는 거죠?”

“응.”

그것뿐인 이야기.

세희는 방금 상호가 한 말을 곱씹었다. 자신이 지면 상호는 정부에서 지정한 학생을 가르쳐야 할지도 모른다는 내용.

세희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상호가 덧붙였다.

“물론 네가 진다 해도…… 내가 널 버리는 일은 없을 거야. 학생을 보내면 두들겨 패든 핑계를 대든 쫓아내면 되지. 지들이 뭘 안다고 나한테 강요를 하겠어. 뭐…… 정부 놈들이 귀찮게 하고, 날 뒤에서 씹는 사람들이 생기겠지만…… 그게 널 버릴 이유는 절대 못 되지.”

상호는 세희의 손을 잡았다. 세희보다 작아진 손으로.

“그러니까 전투에만 집중해.”

“……네.”

세희는 그 손에 손을 얹어 감쌌다.

지면 자신도 욕을 듣고, 담임도 욕을 듣게 된다. 그러기는 절대로 싫었다.

“이기고 올게요.”

“응.”

상호는 손을 뻗어 세희의 등을 두드렸다.

* * *

“방심하지 말고.”

건흠은 다혜의 어깨를 토닥였다.

“여러 번 이겨 봤어도…… 조심하고.”

“므앙.”

“열심히 해봐.”

웬만하면 이겨주는 것이 좋다.

연말평가를 대체하는 경기. 이기면 장학금을 받게 된다. 하지만 건흠은 그걸로 다혜를 압박하고 싶지 않았다. 그 압박감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열심히 해보라고만 말할 뿐, 이겨야 한다고는 절대로 말하지 않았다.

“네가 얼만큼 강한지 확인해 보는 거야. 무리하지 말고. 부담 갖지 말고…… 한번 해보자. 알았지?”

“므앙.”

“그래.”

건흠이 살짝 웃자 다혜는 마주 웃어 보이고 경기장을 향해 돌아섰다.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아으.”

절대로 질 수 없다.

다른 모든 평가는 져도 상관없었고, 장난으로 임했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그녀가 호송 임무를 나갔던 이유는 돈 때문. 학비 때문.

결국 이 순간을 위해 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저벅……

작은 발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 * *

온통 하얀 세상에 누른 허허벌판.

평소보다 훨씬 큰 경기장이 익숙지 않았다. 꼭 단둘이 세상에 남겨진 기분이었다. 결계의 끝이 마치 지평선처럼 느껴질 만큼 멀었다.

세희는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아으아으.”

다혜가 검을 겨눴다.

학교의 가검. 시합을 위해 날을 완전히 뭉개버렸다. 세희도 그것과 같은 검을 차고 있었다.

세희는 검을 뽑으며 중얼거렸다.

“이번엔 정신 똑바로 차려요.”

“느아?”

“저번처럼 눈깔 뒤집지 말고.”

“아으…….”

다혜는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걸음을 떼었다.

세희의 모든 신경이 그 걸음에 집중되었다.

‘질 수 없어.’

간을 보듯 가벼운 걸음이었지만, 세희에겐 큰 산과 같은 중압감이 느껴졌다.

저벅……

‘지면 안 돼…….’

세희는 검을 움켜잡았다.

상호는 절대 세희를 버리지 않겠다 했지만, 세희는 항상 의문을 품고 있었다.

자기 자신이, 세상을 지킬 보루에 걸맞은 재능을 갖고 있는지.

더한 재능을 가진 이가 나타나진 않을지.

그리고 만약 나타난다면, 담임은 어쩔 수 없이 그 아이에게 집중하게 되지 않을지.

세상과 반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건 세희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적임자가 나타나면 상호는 그 학생을 가르칠 것이다. 모두에게 좋은 일이니까. 그렇기에 적임자니까.

그러면 그녀는 또 혼자가 될 것이다.

‘……아니야.’

상호가 그녀를 버릴 리 없다. 세희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다혜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런데 자꾸 잡념이 몰려들어 집중을 흩트리려 했다.

‘또야…….’

세희는 이 감각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몸이 무거웠다. 주저앉아서 잠시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싶었다.

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이런 중요한 순간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니.

‘집중해.’

그렇게 스스로에게 속삭여도, 자꾸 마음이 눈을 닫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강요하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것 같았다.

‘집중하라고…….’

세희는 입술을 깨물어 감각을 깨웠다.

저벅……

큰 산이 한층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 둔중한 압박과 적막한 침묵 사이로.

달그락……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소리가, 마음속에 울려 퍼졌다.

337. 심마

“뭐 보니?”

효은은 눈을 끔뻑거리며 침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서는 혜소가 엎드린 채 뭔가를 하고 있었다.

“책 봐요.”

“뭔 책?”

“이거.”

혜소가 들어 올린 책은 대여섯 살이 읽기에는 너무 긴 제목을 갖고 있었다.

“경전의 두 번째 편집자와 뭐시기…… 뭔 내용이야, 이게.”

“악마란 개념이 인간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예요.”

“악마?”

“네.”

혜소는 종이를 팔랑팔랑 넘기며 물었다.

“악마란 게 진짜로 있는 거죠?”

“지금 있는 놈들은 거기 나오는 놈들은 아닐걸.”

“악마는 인간의 가장 깊은 두려움에 기생한대요.”

“그러니?”

“그치만 이 책의 저자는 악마를 인간이 필요에 따라 만든 개념으로 정의하고 있으니까, 결국 인간의 원초적인 공포가 인간의 악마성을 드러낸다는 뜻이죠?”

“넌 진짜 몇 살이냐?”

효은은 혜소에게서 책을 빼앗고 손을 잡아끌었다.

“그런 거 보지 말고 뺑로로나 봐, 걔도 너처럼 대머리더라. 밥 먹으러 가자.”

“네.”

혜소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고모.”

“응?”

“이제는 악마가 진짜로 있잖아요.”

“응.”

“그럼 그놈들도 사람의 마음에 기생할까요?”

“모르지.”

효은은 혜소의 얼굴에 목도리를 빙빙 두르며 대답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기겠냐. 마음을 꺼내서 세탁기에 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쓸데없는 고민 하지 말고 나가자.”

“움우부붑.”

둘은 현관을 나섰다.

* * *

저벅……

다혜는 검을 겨누며 앞으로 걸었다.

검에서는 붉은 기운이 피어올라 세희를 향해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꽤나 길게 뽑아냈는데도 내공의 양이 많아 아무런 부담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세희의 검에서도 하늘색 강기가 타올랐다.

‘절대 못 져.’

세희도 눈을 번득이며 앞으로 다가갔다.

‘절대로…….’

오늘이 아니면 증명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증명해야만 했다. 상호가 그녀를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도록.

그 생각으로 그동안의 혹독한 훈련을 견뎌왔다.

‘……절대로.’

세희의 모습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으아.”

다혜는 딱히 당황하지 않은 표정으로 검을 든 손을 옆으로 뻗었다.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꽈아아앙

땅이 징을 울리듯 뒤흔들렸다.

세희는 다혜의 붉은 강기를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초강기구나.’

오늘은 장난이 아닌 모양이었다.

세희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다혜는 곧바로 세희를 향해 검강을 날렸다. 평소라면 놀리듯 웃었을 타이밍이었다.

‘나는 늘 진심이었는데.’

세희는 강기를 쳐내고 다혜에게 달려들었다.

세희는 다혜의 진짜 실력을 보지 못했지만, 다혜도 세희의 실력을 진지하게 알아본 적이 없을 터였다.

마지막으로 싸웠을 때는 한 방 먹이긴 했었지만.

치익……

세희의 발이 땅을 긁었다.

작은 흙먼지가 세희의 발목을 휘감았다. 그 알갱이 하나하나를 느끼면서도 의식을 빼앗기지는 않은 채, 세희는 다혜의 배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아직은 다혜에게 빈틈이 없었다.

지금부터 만들어야 했다.

“으아──.”

다혜는 얼빠진 소리를 흘리며 세희의 검을 피했다. 허리를 둥글게 구부려서.

머리와 발이 앞으로 튀어나온 모양새.

세희는 한 번 더, 같은 궤적을 반대 방향으로 베었다.

“아으.”

다혜의 몸이 넘어질 듯 말 듯 뒤쪽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다혜는 몸을 옆으로 빙글 돌리더니, 곧 동물적인 균형감각으로 자세를 바로잡고는 세희를 향해 반격을 날렸다. 세희는 날카로운 기운이 뺨을 스치는 것을 느끼고는 급히 고개를 틀었다.

피잇……

검풍이 호신강기를 긁고 지나갔다.

* * *

“누가 유리해 보여요?”

해련은 그렇게 물으며 자신의 앞에 꼭 붙어 서 있는 상호를 내려다보았다.

상호는 초조한 눈으로 세희와 다혜의 공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글쎄요. 교장선생님은요?”

“난 몇 번 싸워본 입장에선…… 다혜 손을 들어주고 싶네.”

“그건 다혜가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잖아요.”

“잠재된 내공의 힘이 있으니까.”

해련의 말대로 다혜에게서는 강기가 넘쳐흘렀다. 줄기줄기 뻗어 나온 강렬한 기운이 공간을 삼킬 듯 넘실거리고 있었다.

“저 나이에 저런 내공을 얻은 건…… 기연이겠지.”

“그렇겠죠.”

“강 선생은 기연을 어떻게 생각해요?”

“기연이요?”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오면 오는 거고 안 오면 안 오는 거죠.”

“내 말은…….”

해련의 시선이 경기장을 향했다.

“저 아이도 노력을 해 왔겠지만 천운이 따라서…… 뭐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하여튼 용혈을 얻었잖아. 그렇게 기연을 얻은 사람과, 기연 없이 노력만으로 올라온 사람이 있다면…… 어느 쪽 손을 들어주고 싶어요?”

그거야 싸워봐야 아는 일이지만, 해련도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터였다. 상호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운명이 어떤 식으로 힘을 발휘하는지 봤다.

무엇이 운명을 바꾸는지도.

기연도 결국 운명의 한 부분일 뿐이라면.

“기연이니, 기회니. 속 편한 대로 부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인생의 한 굴곡일 뿐이고, 세상에겐 하나의 사건일 뿐이죠, 뭐. 저도 수많은 기연을 만났지만…….”

상호의 발끝이 땅을 쓸었다.

예경을 만났던 일. 부대원들을 만났던 일.

“그 당시에 그게 기연인 줄 알았겠어요? 시간이 지나 보니까 기연이었던 거지. 즉 기연의 가치는 본인이 정하는 거고…… 또 그 본인의 평가도 시간이 지나면 변하는 거니까. 결국 기연이란 것은 사실은 없는 거죠.”

“다를 것이 없다? 노력만 한 사람과?”

“물론 여러 사건을 겪은 사람이 더 강하겠죠.”

그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하지만 기연에 연연하는 사람은…… 언젠간 지게 되어 있습니다.”

기연을 만났든 못 만났든. 기연에 얽매인 자는 운명이 정한 대로 패배하게 되어 있다. 운명은 승리만 하도록 놔두지 않으니까.

다혜가 그런 사람이란 것은 아니지만.

상호는 경기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저는 이미 누구한테 걸었는지가 정해져 있잖아요.”

“그래?”

해련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을 본 건 알고 있지만…… 벌써 이길 수 있을 정도인가? 저 아이는 3백여 일 동안 실전을 겪어왔는데.”

“그건 이제 세희 하기 나름이죠.”

상호도 실전에 버금갈 만큼 세희를 굴려 왔다. 1학년 때부터 쭉. 몇 달 전부터는 그 기준을 저승부대원들의 수준으로 올렸고.

“가능성은 충분히 있으니까.”

“몇 대 몇 정도?”

해련의 말에 상호는 잠시 고개를 기웃하다가 답했다.

“한 3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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