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작년에는 절대 못 이길 줄 알았는디.”
지윤은 손을 구부려 앞으로 내밀었다.
손바닥이 아래를 향하게, 투명한 야구공을 쥔 듯이.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 그제?”
“그러게.”
은율이 검을 허공에 가볍게 휘두르고는 자세를 잡았다.
“나도 오늘 여기서 만날 게 세희가 아닐 줄은 몰랐어.”
“느덜은 우째 그래 금슬이 좋노. 가끔은 바람도 피고 그래봐라 마. 내랑 붙어먹음 세희가 화내드나?”
“세희가 살짝 질투하는 끼가 있긴 해.”
지윤은 경기 중이라는 것도 잊고 긴장이 탁 풀릴 정도로 헛웃음을 쳤다.
“느덜도 참…… 대단하다.”
“우리가 좀 대단하긴 하지.”
은율은 검을 겨누고 옆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지윤도 입을 다물고 은율의 검에 집중했다. 은율의 검은 은율의 오른쪽. 걷는 방향은 왼쪽. 즉 지윤을 기준으로는 검이 안쪽.
지윤이 달려들면 검을 한 번 휘저어 막고 뒤로 빠질 것이다.
‘길게 끌고 싶어하는구마.’
지윤에겐 달갑잖은 일이었다.
지윤은 손을 살짝 구부린 채로 한 걸음씩 다가갔다. 검을 잡겠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강기가 강한 지윤의 입장에서는 검을 잡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고, 그런 사실을 은율도 알고 있을 테니, 의도가 드러나도 딱히 상관은 없었다.
‘니가 안 오믄 내가 간다.’
한 걸음. 한 걸음씩.
착실하게 은율을 결계 구석으로 몰고 갔다.
……찰칵
그러자 은율이 검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응……?’
지윤은 잠시 발을 멈춘 채로 생각했다. 저게 무슨 뜻인지.
차라리 거추장스러운 검을 집어넣고 회피에 집중하겠단 뜻인가. 지윤이 절대 자신을 못 잡게 하려는 듯했다.
‘그치만…….’
그렇게 나오면 지윤은 구태여 내공을 끌어올릴 이유가 없다. 권강도, 호신강기도.
장기전으로 끌고 가겠다는 것은 내공을 거덜내겠다는 뜻인데, 정작 내공의 사용을 유도하지 않고 있었다.
‘무신 생각이고?’
지윤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은율은 구석에 몰린 채로 걸음을 멈추더니, 다리를 살짝 벌린 차렷 자세로 지윤을 마주했다.
아무런 뜻도 느껴지지 않는 무형의 자세.
하지만 지윤에게는 느껴졌다.
‘……노리고 있구마.’
은율의 등 뒤로 치솟는 태산 같은 투기가.
아마도 발검술. 방심을 유도하고 그 의식의 틈 사이로 기습을 찔러 넣으려는 계산일 것이다.
지윤의 몸에서 강기가 확 치솟았다.
‘이러믄 우짤 기가.’
지윤은 곧바로 은율을 향해 달려들었다.
은율은 깃털처럼 가볍게 뛰어오르더니 지윤의 어깨를 밟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타악……
공중제비를 돌고 착지하는 은율.
지윤은 은율을 돌아보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빠르네.’
아직도 경공을 따라잡지 못한 모양이었다.
내세울 것은 하나. 초강기뿐. 지윤의 손에 하얀 불꽃이 일렁였다.
“……!”
나빛과의 전투를 본 걸까. 아니면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을까. 은율은 호신강기를 끌어올리고 땅을 박찼다.
지윤은 은율이 달리는 방향의 앞쪽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포격이 은율에게 명중했다.
호신강기를 둘렀지만 충격을 전부 없앨 수는 없었다. 은율의 몸이 휘청이는 것을 확인한 지윤은 그 즉시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지금 잡아야……!’
초강기도 내공 소모가 극심하지만, 그걸 터트리는 것도 엄청난 내공을 필요로 했다. 이미 나빛을 상대로 두 번이나 쓴 데다가, 두 번째 때는 한계 이상으로 내공을 끌어다 썼다.
덕분에 내공이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터억
지윤의 손이 은율의 목을 잡았다.
지윤은 달리던 속도 그대로 은율을 밀어붙였다. 넘어뜨려서 제압할 심산이었다. 하지만 은율은 오히려 지윤을 걷어차려 했다.
‘머여.’
지윤이 호신강기를 올리자 은율은 지윤을 박차고 쏜살같이 거리를 벌렸다.
반탄강기의 특성을 역으로 이용한 것이었다.
‘노린 거였나……!’
지윤은 이를 악물며 기를 쓰고 은율과의 거리를 좁혔다.
시간을 더 끌면 위험하다. 초강기를 쓰는 것도 위험하다. 심지어 은율은 내공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이제는 내공의 소모를 조절하며 효율적으로 싸워야 했다.
그리고 반탄강기를 이용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스릉……
은율이 검을 뽑아 휘둘렀다.
지윤은 검의 경로에 손을 놓았다. 가볍게 놓기만 했다. 굳이 검을 쳐내려고 하지 않아도, 반탄강기는 충분히 공격을 막고 상대의 균형까지 무너뜨릴 수 있었다. 잡을 수 있으면 더 좋고.
하지만 검은 손등을 치지 않았다.
슉
직각으로 경로를 꺾은 검이 땅을 내리쳤다.
콰아앙
“윽……!”
지윤은 충격파에 밀려 뒤로 물러났다.
은율도 그 틈을 타 뒤로 훌쩍 뛰어 물러나려 했다. 다시금 장기전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렇게 놔둘 순 없었다.
‘쳇……!’
지윤은 비산하는 흙을 헤치고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직 은율이 일으킨 폭발이 가라앉기도 전이었다. 폭발 때문에 땅을 밟아도 푹신하게 눌릴 뿐 단단한 디딤판이 되지 못했다.
지윤은 발을 힘주어 눌렀다.
길게 끌면 승산이 없었다.
“크으……!”
발아래에 흙이 다져졌다.
지윤이 달려들자 은율은 그만큼 멀어졌다. 귀신같은 경공, 귀신같은 보법. 지윤에겐 그게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간격을 지배당하고 있었다.
손에 무기가 있었다면, 닿을 수 있었을까.
‘아니야!’
그딴 건 핑계가 되지 못한다.
손에 무기가 있었다면 은율은 그만큼 더 거리를 벌렸을 것이다. 지금 따라잡지 못하는 것은 팔이 검보다 짧아서가 아니라, 순전히 지윤이 느리기 때문이었다.
따라잡으려면 한계를 넘어서야 했다.
지금까지의 자신을.
“흐아아압!”
콰앙
힘껏 박찬 땅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지윤은 그 폭발을 타고 뛰어들어 은율을 향해 힘껏 손을 뻗었다. 한 손을 목을 향해서. 한 손은 발차기를 대비하고 아래로.
은율의 입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하얀 손이 은율의 시야를 덮쳤다.
335. 단체 외식
“큰일 났습니다.”
이츠키가 중얼거렸다.
“이러면 세희랑 도양이 화해 못 하는데…….”
“…….”
세희는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경기장 위. 한 사람은 서 있고, 한 사람은 대자로 뻗어 있고. 결계는 아직 내려가지 않았지만,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 눈동자를 애매하게 내렸다.
곧 결계가 내려가고.
“……쿨럭.”
은율이 기침을 했다.
마지막에 업어치기를 당한 탓에 폐에 공기가 부족했다. 은율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몸을 돌려 땅을 짚었다.
“……후우.”
충격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눈앞의 땅에 그늘이 드리우더니 가무잡잡한 손이 시야에 쑥 들어왔다.
“괘안나?”
“응.”
“삐진 거 아이제?”
“그럼.”
은율은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지윤이 씩 웃으며 은율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니는 태화 나빛이 금마들이랑 다르다 아이가. 꽁해있지 않을 기제?”
“그럼.”
“이미 꽁해 있는디.”
“…….”
“웃으라, 마. 웃어. 치즈~.”
지윤이 계속 치근거리자 은율이 볼을 붉히며 팔꿈치로 지윤의 옆구리를 툭 쳤다.
“안 삐졌다니까.”
“어어, 임마 와 끼부리노. 바람피서 좋은가삐네. 인자 세희한테 돌아가라, 마.”
지윤이 은율을 툭 쳐서 상호와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밀어붙였다.
‘윽…….’
세희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은율을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얼굴은 무표정. 눈빛도 읽기 힘들다. 숨고 싶었지만 탁 트인 곳이라 그러지 못했다. 숨어봤자 이츠키의 등 뒤.
은율이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세희는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세희.”
“……응?”
“나 1등 못해서 기분 나빠.”
은율은 세희를 빙글 돌려서 세희의 뒤통수를 가슴에 품고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세희의 볼을 집었다.
“놀아줘.”
“어어…….”
떡처럼 쫀득쫀득하게 늘어나는 볼 사이로, 세희의 눈동자가 팽팽 돌아갔다.
“그으래…….”
“잘했단 말은 안 해줘?”
“수고했어…….”
“먹는 걸로 풀어야겠어. 저녁에 시간 비워 놔.”
“으응…….”
애초에 은율은 화가 난 게 아니었으리라. 상호는 둘을 지켜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옆으로 지윤이 다가섰다.
“쌤예.”
“응?”
“이제 지랑 매일 밥 묵는 깁니더.”
그 말을 들은 태화가 눈을 부라렸다.
“야! 그건 내 약속이야!”
“니는 뭔 약속까지 니꺼 내꺼가 있노. 결정은 쌤이 하는기라. 쌤예, 우얄랍니꺼.”
“응……?”
상호는 당황해서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지윤과 태화가 그를 부숴버릴 것처럼 위협적으로 몸을 부딪쳐오고 있었다.
대답을 잘 해야 할 것 같았다.
“그건…… 약속은 태화랑 한 게 맞긴 하지…….”
상호의 대답에 태화가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콧대를 높였다.
“아싸! 거봐, 거봐. 어딜 날로 먹을라 그래! 약속은 스스로 따내는 거야!”
“쌤예.”
지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아까는 다 소중헌 학생이라 캤으믄서…… 더 이쁜 학생이 있나 봅니더.”
“아니, 그게…….”
상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뭔 대답을 하든 둘 중 한 명에겐 미움받을 것 같은데.
“그……, 그러면 둘 다 같이 먹자. 응?”
“야는 1등 안 했다 아입니꺼!”
“얘는 약속 안 했잖아!”
“미안…….”
이것도 안 되면 어쩌란 말인가. 상호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그때 태화가 주머니에서 소원권을 꺼냈다.
“아! 그럼 이걸로 내 소원 들어줘! 쌤이랑 매일 밥!”
“야. 이거는 그렇게 큰 건 안…….”
“그라믄 이걸로 야 소원 취소해 주이소.”
“……응?”
지윤도 주머니에서 소원권을 꺼내고 있었다. 지윤은 소원권을 한 장 더 꺼내 상호에게 내밀었다.
“글고 이걸로 야 약속 지한테 옮기는 겁니더.”
그 말에 태화가 발끈했다.
“꺼져! 누군 소원권 없는 줄 알아? 쌤, 나도 얘 소원 취소하고 이걸로! 매일 외식!”
“해보자는 기가?”
“니보단 많아!”
상호의 손에 소원권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대주주 두 명을 털어먹게 생겼다. 상호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숨기고 곤란한 척 우거지상을 지었다.
‘아싸!’
그런데 갑자기 태화가 눈을 끔뻑였다.
“야, 잠깐만. 이럴 게 아니라 이 소원권을 걸고 우리끼리 정하면 되잖아.”
“머라꼬?”
“내가 매일 외식을 하고 니가 이 소원권을 싹 가지든가 하자는 거지.”
“……응?”
상호는 당황해서 소원권을 꽉 움켜쥐었다. 이미 손안에 들어온 소원권들이 다시 날아가려 하고 있었다.
“아, 안 돼. 그런 식으로는 안 돼.”
“외않되?”
“와 안 되는디예.”
“학생 간의 소원권 교환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어…….”
“지들이 법입니더.”
지윤과 태화는 상호의 손을 억지로 펴고 소원권을 회수해 갔다.
결국은 도로아미타불. 오늘도 소원권은 회수하지 못했다. 상호는 속으로 눈물을 철철 흘렸다.
‘망했어…….’
“야. 내가 소원권 줄게. 방해하지 마.”
“웃기지 마래이. 니가 소원권 가지라. 내가 외식한디.”
“남의 약속을 왜 훔치는데, 도둑년아!”
“니는 1등도 아니면서 와 날로 먹을라 드노!”
다시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 불을 어떻게 꺼야 하나. 상호는 둘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뒤에 있는 아이들을 흘끗했다.
‘……그래.’
아이들을 이용하자.
상호는 짐짓 당당한 표정을 지으며 둘에게 말했다. 꼭 명판결을 내려주겠다는 듯한 재판장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해.”
“응?”
“너희 둘 중 한 명만 매일 외식을 하든가, 아니면 우리 반 다 같이 뷔페를 가든가. 정해. 어떤 게 좋아?”
“우와아앗!”
단비가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언니! 언니! 뷔페, 뷔페 가자! 응?”
“안 된디.”
지윤이 눈을 번득였다.
“내 권리인디 와 그카야 하노.”
“가자아! 다 같이 가면 좋잖아! 멍!”
다른 아이들도 입맛이 도는지 군침을 꼴딱꼴딱 삼키고 있었다. 나빛이 태화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태화야, 뷔페 가자. 응?”
“아 됐어! 우리끼리 정할 거야. 다 꺼져!”
“우씨……. 꾸꾸야!”
“뺙.”
나빛의 앞섶에서 튀어나온 혁구가 태화의 머리를 쪼기 시작했다. 태화는 머리를 싸쥐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 씨, 몰라! 꺼져! 오지윤 니가 알아서 해! 야이씨, 치킨련아 꺼지라고!”
“쓰읍…….”
지윤은 맘에 안 든다는 듯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수십 개의 눈을 쓱 돌아보고는.
“X불, 그래. 느덜 알아서 해라 마. 부페를 가든가 말든가…….”
“아싸아아!”
단비의 꼬리가 프로펠러처럼 신나게 돌아갔다.
“쌤! 쌤! 우리 어디로 가요? 언제 가요?”
“오늘 가자. 저녁에 전화하면 모여.”
“멍!”
그때 나빛이 방긋 웃으며 핸드폰을 꺼냈다.
“예약해 둘게요~.”
“응? 어디를?”
“제가 좋은 데 알고 있어요.”
“그래? 그럼 뭐…… 근데 굳이 예약할 것까지 있나?”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예약을 해야죠!”
“그런가?”
상호는 어릴 적에 간 동네 뷔페를 떠올리며 고개를 기웃했다. 굳이 예약까지 해야 하나. 아직 성수기는 아닐 텐데.
그래도 나빛이 그렇다니까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그래. 나빛이가 예약해 줘. 저녁에 연락하면 모이는 거야. 알았지?”
“네~.”
아이들이 잔뜩 신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 * *
“……나빛아.”
“네.”
나빛이 방글방글 웃었다.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눈앞의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좋은 데가…… 호텔 뷔페였어?”
“네?”
나빛의 눈이 동그래졌다.
“호텔이 아닌 뷔페도 있어요?”
“…….”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했다.
상호에 차에서 내린 아이들은 코앞에 펼쳐진 호텔 입구를 맞닥뜨리고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 어디야?”
“신궐호텔 아냐?”
“호텔 뷔페야?!”
“우와아앗!”
태화가 상호의 품에 머리를 들이받았다.
“쌤! 쌤! 믿고있었다고~.”
“…….”
상호는 식은땀을 흘리며 핸드폰으로 검색을 하는 중이었다. 최고급 호텔 뷔페 가격은 얼마나 하는지.
검색 결과가 나오자 상호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14만 원……!’
그럼 15명이면 210만 원.
그렇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무를 수도 없고. 예약까지 이미 잡아 버렸고. 또 좋은 날이기도 해서.
“들어가자…….”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 * *
“쌤예 와 그래 깨작거리십니꺼.”
“…….”
“비싼 데 왔으믄 많이 묵으이소.”
“비싸서 안 넘어가…….”
“에이, 그딴 기 어딨심꺼. 비싼 데 왔으믄 더 잘 무야지예.”
상호는 깨끗이 비운 접시를 포크로 힘없이 긁었다.
지윤의 옆에는 접시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직원이 치운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금세 예닐곱 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순전히 지윤 혼자서 이뤄낸 것이었다.
200만 원의 뽕을 뽑을 수 있는 사람은 지윤밖에 없다. 상호는 지윤의 등을 토닥이며 속삭였다.
“많이 먹어. 탈 나지 않을 정도로만…….”
“걱정 마이소.”
지윤은 볼이 미어터지게 음식을 우물거렸다.
상호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1등해서 기분이 어때?”
“좋네예.”
지윤은 허공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음식을 꿀떡 삼키고 말을 이었다.
“좋긴 좋은디…… 이게 끝도 시작도 아니라는 게, 막막합니더.”
“전투는 걸음이지. 장소가 아니라…….”
상호의 눈이 옆을 향했다.
그곳에는 아이들이 신나게 웃고 떠들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겨서 살아남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네가 어딘가에 다다르는 건 전투가 아니라 인생이어야 한다. 지윤아. 잊지 마.”
“알지예.”
지윤은 상호의 입에 튀김을 쏙 넣고 일어났다.
“같이 받으러 가실래예?”
“응. 그래.”
상호도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음식이 놓인 곳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화장실 쪽 구석에 세희와 이서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뭐지?’
그는 고개를 기웃하며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둘이 알지 못하도록 조용히.
세희가 이서를 혼내고 있는 것 같았다.
“……거야 아니야?”
“맞아.”
“네가 그러면 가은이는 뭐가 돼? 네가 2등을 해버리면 가은이는 2등한테 진 사람이 되어버리잖아. 그런 건 생각 안 했어?”
“힘들어서…… 힘들어서 그랬어.”
“상대는 안 힘들었겠어?”
“미안.”
이서는 피곤에 찌든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희는 이서를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한테 미안할 게 아니라 선생님이랑 가은이한테…….”
“얘들아, 뭐해?”
상호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쓱 끼어들었다. 세희가 그를 발견하고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선생님.”
“왜 더 안 먹고 여기 이러고 있어? 가자. 맛있는 거 많더라.”
“……네.”
세희는 상호를 따랐고, 이서는 자리에 남았다.
세희가 왜 이러는지는 상호도 알고 있었다. 승부욕이 강한 세희이니만큼 경기를 대충 던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세희의 말대로 가은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다만, 선배로서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좋은 날인데 너무 몰아붙일 필요는 없잖아, 세희야. 다음엔 그러지 말자고 격려해주면 되는 거야.”
“네…….”
“세희 너도 곧 평가 있는 거 알지?”
“네.”
“탈 나지 않게 잘 챙겨 먹어.”
세희는 볼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